시애틀의 밤을 찌르는, 우주 바늘

파리의 밤과 낮에 에펠탑이 함께 하듯이, 시애틀을 보여주는 모든 풍경에는 스페이스 니들(Space Needle)이 있어야 한다. 마치 외계의 비행선이 하늘 위에 정차한 채 바늘과 같은 통로로 지구인들을 초대하는 것 같은 이 괴상한 건축물은 1962년 시애틀 세계 박람회 때 처음 문을 열었다. 360도로 돌아가는 전망 레스토랑의 창은 시애틀의 야경을 보기에 가장 좋은 곳인데, 거기에서 내려다보면 왜 이 도시의 시민들이 잠을 잊고 사는지 잘 알 수 있다. 미국의 여러 대도시들은 밤만 되면 시민들이 빠져나가 공동화되고 슬럼화된다. 반면 대표적인 ‘24시간 도시’인 시애틀은 빌딩 사이사이 풍성한 녹지와 쾌적한 시설로 시민들에게 밤낮 그 안에 머무르며 활발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한 것이다.


잠 못 이루는 밤에 둥둥 떠 있는, 보트하우스

시애틀을 세계적인 ‘잠 못 이루는 도시’로 만든 장본인은 역시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이다. 아내를 잃고 외롭게 불면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시애틀의 건축가 톰 행크스. 이를 보다 못한 아들이 라디오 심리 상담 코너에 아버지의 사연을 내보낸다. 볼티모어에서 이 방송을 들은 맥 라이언은 약혼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연에 끌리게 되고, 결국 시애틀까지 날아와 이 외로운 남자와 사랑스러운 아들을 보게 된다.


이때 톰 행크스가 영화 속에서 살고 있던 곳이 호수 위에 떠 있는 보트하우스. 남자는 쓸쓸히 베란다로 나와 호수를 바라보고, 난로 옆의 벤치에서 데이트 상대와 통화하고, 아들은 이 전화를 엿들으며 일일이 코치한다. 시애틀의 선상 가옥은 1890년대 어부와 선원들이 처음 지어 살기 시작했는데, 1930년대 대공황 때 세금을 아끼고 값싼 주택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대거 몰려와 2천 가구까지 늘어났다고 한다. 지금도 5백 개 정도가 남아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영화 속에 등장했던 바로 그 집으로 지금도 유니온 호수(Lake Union) 위에 떠 있다. 보트하우스라는 이름과는 달리 보트처럼 움직이지는 못하고 물 위에 자리잡고 있을 뿐이니 배 멀미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다.




보트하우스에서 살고 있는 외로운 독신남의 시애틀

잠 못 드는 이들의 라디오 상담소, 프레이저

시애틀 사람들이 왜 불면에 빠져 있는지 37개의 에미상을 수상한
[프레이저]에게 물어보라.


우중충한 비가 끊이지 않는 도시, 그 때문인지 시애틀에는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꽤나 있나 보다. 이 도시를 배경으로 한 인기 시트콤 [프레이저]의 주인공인 프레이저 박사는 톰 행크스의 아들이 사연을 보냈을 법한 라디오 심리상담자다. 보스턴에서의 결혼 생활을 정리하고 시애틀에서 편안한 독신 생활을 보내려던 그의 계획은 말 많은 전직 경찰인 아버지 마틴, 소심한 잘난척장이인 동생 나일스와 뒤섞이게 되면서 매우 ‘시애틀’스럽게 된다. 시애틀적인 인생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관계란 언제나 뒤틀리고 비 오는 날처럼 우중충하다. 그렇지만 한 잔의 커피 같은 유머가 있기에 씁쓸하게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이들과 함께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시니컬한 말다툼에 끼어들고 싶다면, 3번가와 파이크(Pike) 스트리트가 만나는 귀퉁이에 있다는 카페 네르보사(Café Nervosa)를 찾아가면 된단다. 안타깝게도 드라마 속에서만 존재하는 카페지만 말이다.




인어가 가져다 준 새로운 커피, 원조 스타벅스

시애틀을 특징짓는 가장 명료한 단어는 ‘커피’다. 사시사철 안개와 비에 덮여 있는 스산한 날씨, IT 직업군 등 꽤나 지적인 인구 구성, 국경 너머 밴쿠버와의 교류 등이 이 도시의 막대한 커피 소비량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는 스타벅스, 시애틀스 베스트 커피, 툴리스 등을 통해 세계의 커피 문화를 좌지우지하는 도시가 되었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카페 체인 스타벅스는 1971년 시애틀의 웨스턴 애비뉴에 처음 문을 열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새로운 커피 문화를 만들고 있던 피츠 커피(Peet's Coffee )에 영향을 받아, 싸구려 아메리칸 커피의 나라를 뒤집기 위한 첫 발을 내디딘 것이다. 이 원조점은 1977년에 자리를 옮겨 지금은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 (Pike Place Market)에 자리잡고 있다. 전 세계 스타벅스 중에서 오리지널 로고(가슴을 드러낸 갈색의 인어)를 달고 있는 유일한 가게로, 그 앞에선 번쩍이는 은색 더블베이스의 밴드 등 로컬 뮤지션들의 공연이 이어지고 있다.




시애틀에선 스타벅스 본사의 건물과 오리지널 로고의 원조점을 만날 수 있다.

커피 혁명의 폭죽, 캐피톨 힐

캐피톨 힐의 일상을 담은 만화 '캐피톨 힐',바우하우스 등의 카페들도 즐겨
등장한다.


스타벅스는 미시시피 강물처럼 멀겋기만 하던 아메리칸 커피를 뒤집었지만, 너무 성공한 때문인지 이제는 심심하기 그지없는 스탠더드가 되어 버렸다. 시애틀이 진짜 커피의 도시인 이유는, ‘스타벅스 따위 멍멍이나 줘’라고 말하는 커피 마니아들을 위한 독립 카페들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거대 커피 체인의 대칭점에 있는 독립 커피(Independent Coffee)는 국가가 아니라 농장 단위로 원두를 구매하고, 커피 무역의 착취 구조를 근절시키고, 지역 커뮤니티에 밀착해 다양한 개성을 만들어내는 커피 로스터리나 카페를 말한다. 그들이 가장 활발하게 뛰어놀고 있는 동네가 시애틀 반문화의 중심지 캐피톨 힐(Capitol Hill)이다. 이 도시가 펑크 록의 성지인 만큼 뮤지션들과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다는 점도 이들 카페의 또 다른 특징이다.

시애틀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 중의 하나이며 펄 잼이 밴드 명을 만들어낸 장소이기도 한 비앤오 에스프레소(B&O Espresso), 펑크 록에서부터 드랙 쇼까지 각종의 공연을 보기 위한 관객이 길거리까지 흘러넘치는 커피 메시아(Coffee Messiah), 높은 천장을 책으로 가득 채운 바우하우스(Bauhaus) 등 개성 넘치는 카페들이 즐비하다.



24시간 흐르는 책의 강, 아마존닷컴과 센트럴 라이브러리

커피 때문에 잠을 못 이루는지, 잠을 못 이루다보니 커피를 마시게 되었는지. 어쨌든 이 불면의 밤에 함께 할 가장 좋은 친구는 누구일까? ‘책’이다. 1990년대 중반 사업가 베조스는 뉴욕에서 시애틀로 차를 몰고 오던 중 어떤 착상을 하게 된다. 인터넷으로 책을 팔자. 나인 투 파이브의 일과 시간만이 아니라 언제든 책을 고르고 살 수 있게 하는 거지. 이렇게 시작한 ‘아마존 닷컴’은 2년 남짓한 기간에 세계 최대의 서점으로, 160개국 300만 독자들에게 24시간 책을 주문받고 보내는 거대한 책의 강이 되었다.

비콘 힐(Beacon Hill)에 있는 아마존 본사를 어렵게 찾아가보았자 특별히 볼 것은 없다. 시애틀 시민의 24시간 독서생활을 엿보려면 센트럴 라이브러리(Seattle Central Library )로 가자.


건축가 렘 쿨하스(Rem Koolhaas)를 중심으로 만들어져 2004년에 문을 연 이 도서관은 이제 스페이스 니들과 더불어 시애틀을 대표하는 건축물이 되었다. 도서관 건물로는 이례적이다 싶을 정도로 모던한 디자인인데, 바깥에서는 번쩍이는 은빛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안에서는 부드럽고 따뜻한 자연 채광이 새로운 독서환경을 제공해준다. 듀이 시스템에 따라 같은 분류의 책이 여러 층의 서가로 나뉘는 것을 막기 위해 디자인된 나선형의 논픽션 서가(Books Spiral)도 시선을 잡는다. 145만 권의 다채로운 장서를 갖추고 있는데, 인터넷으로 책을 요청해 읽은 뒤에 24시간 개방된 반납함에 책을 넣으면 자동 컨베이어가 서고로 책을 보내는 시스템 역시 밤을 잊은 도시답다.




현대적인 디자인 속에서의 24시간 독서 생활,센트럴 라이브러리

이제는 평화롭게 잠들 수 있기를, 커트 코베인

영원히 이 도시안에 안겨 잠든 커트 코베인,그에 관한 책과 영화들


이토록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시민들이 많으니 그로 인한 병도 적지 않으리라. 내가 만약 이 도시에서 불면증에 시달리게 되면 이 병원을 찾아가게 될 것 같다. 드라마 [그레이스 아나토미]의 매력적인 의사들이 기다리는 시애틀 그레이스 병원(Seattle Grace Hospital). 많은 드라마들이 그렇듯이 극중 대부분의 장면은 세트 촬영이지만, 응급 헬기 이착륙 등을 찍기 위해 병원의 외관은 피셔 플라자(Fisher Plaza)로 설정되어 있다. 때문에 스페이스 니들, 모노레일 등 도시의 여러 명소들이 심심찮게 화면에 등장한다.


시애틀의 심리학자도 커피도 의사도 치료해주지 못한 슬픈 마음이 있다. 매년 4월 워싱턴 호수 근처의 비레타 파크(Viretta Park)에 많은 사람들이 꽃을 들고 모이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1994년 4월 8일 시애틀 펑크 록의 아이콘이었던 커트 코베인이 그 근처 자택에서 자살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시신은 가루가 되어 위스카 강(Wishkah River)에 뿌려졌고 묘지는 없다. 때문에 팬들은 그의 집과 가까운 이 공원의 표지판을 지우고 ‘커트의 공원(Kurt's Park)’이라 이름 짓고 영원히 잠든 그를 추도하고 있다.

시애틀은 음악의 도시다. 전설적인 록 기타리스트 지미 헨드릭스가 여기에서 태어났고, 너바나, 앨리스 인 체인즈, 펄잼, 사운드가든 등 쟁쟁한 그런지 사운드 밴드들의 흔적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소룡이 젊은 시절을 보내며 풋풋한 연애를 했던 곳도 이 도시. 그의 시신이 레이크뷰 묘지(Lakeview cemetery)에 안장되어 있기도 하다.


시애틀은 크지 않은 도시라 많은 명소들이 가까운 곳에 모여 있다. 가벼운 차림으로 걸어다니거나 모노레일을 타면서 현대적이고 쾌적한 도시의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다. 그러나 조금만 바깥으로 가면 안개 속의 울창한 산림이 만들어내는 몽환의 세계를 만날 수 있다. [트와일라잇], [트윈픽스], [씬 시티], [다크 엔젤] 등 쟁쟁한 초현실 판타지들이 모두 이 도시와 캐나다 국경 사이의 어두컴컴한 지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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