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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그리스

그리스 : 전통이 살아있는 그곳.. 그 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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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이 살아있는 그리스 와인

테트라미토스(Tetramythos) 와이너리는 신약성경에 '고린도'로 나오는 그리스 고대 도시 코린토스(Korinthos)와 그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아로아니아산(山) 중턱에 있었다. 그리스 주요 와인 산지 중 하나인 파트라스(Patras)다. 이곳 와인메이커 파나요티스 파파야노풀로스를 따라 지하 와인숙성실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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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를 둘러싼 아티카 지역에서 그리스 토종 사바티아노 포도품종으로 만든 화이트와인. 뒤로 아테네의 수호여신 아테나에게 바쳐진 파르테논 신전이 보인다. /김성윤 기자
◇古代 '송진 와인' 레치나

와인숙성실에는 한국 장독보다 조금 날렵한 모양이지만 크기는 거의 같은 토기(土器) 수십 개가 놓여 있었다. 파파야노풀로스는 "800년 된 암포라(amphora·몸통이 불룩한 항아리)"라며 "여기에다가 레치나(retsina) 와인을 고대 그리스에서 만든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레치나는 그리스어로 송진(松津)을 뜻한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포도주를 암포라에 담아 숙성시키고 이동하는 과정에서 새거나 흐르지 않도록 암포라 안쪽과 뚜껑에 소나무 수액을 발랐다. 맛보다는 보관과 유통을 위해 사용하게 된 송진이지만, 차츰 그리스 사람들은 송진 냄새가 밴 와인을 좋아하게 되었고, 이를 레치나 와인이라고 구분해서 부르게 됐다.

파파야노풀로스가 레치나 와인을 한 잔 따라 줬다. 와인에서 솔잎 음료 냄새가 났다. 천년 전 그리스 사람들이 마시던 와인과 똑같은 와인을 21세기에 마실 수 있다니, 와인의 품질이나 맛과 관계없이 묘한 감동이 입안 가득 퍼졌다.

◇기원전 2000년 그리스에 들어와

그리스는 와인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기묘한 땅이다. 물론 그리스는 세계 최초로 와인을 생산한 곳은 아니다. 포도 재배와 와인이 시작된 건 중동 어디쯤으로 추정된다. 중동에서 이집트를 거쳐 그리스에 소개된 건 기원전 2000년으로 와인역사학자들은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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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휴양지 산토리니에서도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이아(Oia) 마을. 하얗게 회칠한 전통 가옥과 눈이 시리도록 푸른 지중해가 절묘하게 어울린다.
영국의 세계적 와인평론가 잰시스 로빈슨은 "오늘날 우리가 마시는 형태의 와인은 그리스에 기원이 있다"고 말한다. 양조용 포도 재배기술과 와인 생산기술이 그리스에서 개발된 것이 많다는 소리다. 포도밭 단위면적당 포도 수확량을 제한해 포도의 당도를 끌어올린다거나, 어떤 포도품종이 어떤 토양에서 잘 자라는지를 면밀히 관찰해 적용함으로써 와인의 품질을 높이는 기술 등을 고대 그리스인들이 개발하고 체계화시켰다.

그리스 사람들은 포도 재배와 와인 양조 기술을 유럽 전역에 전파했다. 프랑스·스페인·이탈리아 등 지중해와 흑해 연안에 식민지를 건설할 때 반드시 포도나무를 가져다 심었고 자신들의 식생활에 빠질 수 없는 필수품이던 와인을 만들었다.

그리스 와인은 로마를 지나 비잔틴시대까지 최고급으로 유럽 전역에서 비싼 가격에 팔렸고, 그리스 최고의 수출품목이었다. 2011년 해양 고고학자들이 프랑스 남부 해안에서 고대 그리스 선박을 인양했다. 배에는 1만 개나 되는 암포라가 실려 있었다. 암포라는 고대 그리스에서 와인이나 올리브오일 따위 액체를 저장할 때 사용하던 토기를 말한다. 인양된 암포라에는 프랑스로 수출하려던 그리스 와인이 담겨 있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암포라 1개당 용량이 약 30리터니까 배에 실려 있던 와인은 30만 리터. 오늘날로 따지면 40만 병에 해당하는 엄청난 양이다.

◇토종 포도품종만 350종

그리스 와인의 몰락은 비잔틴제국의 멸망과 함께 찾아왔다. 비잔틴에 이어 그리스를 통치한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종교는 술을 금하는 이슬람이었다. 오스만투르크 지배자들은 와인에 극심한 규제와 세금을 부과했다. 그리스 와인산업은 400년 동안 발전을 멈췄다. 1800년대 후반 다른 유럽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필록세라 전염병으로 포도나무가 모두 죽고 포도원이 파괴됐다. 이어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과 내전(內戰)으로 그리스 와인산업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스 와인이 잠에서 깨어난 건 1980년대 중반이다. 와인 컨설턴트 그레고리 미카일로스(Michailos)는 "프랑스, 독일, 미국 등 와인 선진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젊고 야심 찬 와인생산자들이 그리스 와인에 활기를 불어넣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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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양한 그리스 전채 요리. 그리스 사람들은 각종 재료로 만든 전채를 나눠 먹은 다음 본 요리를 즐긴다. 2 페타 치즈가 올라간 그리스식 샐러드와 산토리니에서 생산된 화이트와인.그리스 사람들은 와인만 마시는 경우가 드물고 항상 음식을 곁들인다. 3 숯불에 구운 문어 요리. 별다른 양념 없이 올리브오일과 레몬즙을 듬뿍 뿌려 먹는다. 4 파바콩(fava bean)으로 만든 딥 소스. 빵에 발라 먹거나 고기·생선 요리에 곁들인다. 5 산토리니 전통 포도 재배방식 ‘쿨루라’. 강한 바람과 태양으로부터 포도송이를 보호하기 위해 포도나무 가지를 땅바닥에 눕혀 바구니처럼 둥글게 말았다. 6 빵을 찍어 먹거나 요리에 곁들이는 가지 딥 소스. 가지를 구워 껍질을 벗기고 올리브오일을 섞어 가면서 곱게 갈아 만든다.
 오랜 침체는 독(毒)에서 약(藥)으로 바뀌었다. 현대 와인의 종주국인 프랑스를 중심으로 카베르네 소비뇽, 샤르도네 등 맛 좋고 생산량 많은 포도품종이 전 세계 포도밭을 석권했다. 세계 와인 수준이 상향 평준화된 건 장점이지만, 개성이 약해지고 비슷한 와인이 돼버린 단점도 있었다. 그리스는 소위 '국제 포도품종'이 많이 들어오지 않았고, 덕분에 토종 품종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미카일로스는 "현재 그리스에는 포도품종이 약 350종 있는 것으로 알려졌고, 최대 400 품종까지도 존재하는 것으로 추측된다"며 "시골 구석구석으로 들어가면 아직도 여태 알려지지 않았던 품종이 발견되고 있다"고 말했다. 덕분에 세계 어디서도 생산하지 못하는 개성 있는 와인이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다.

◇바람 피하는 '바구니' 재배방식도

현대 그리스 와인생산자들은 첨단 테크닉을 도입하되 전통 역시 놓지 않고 지킨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휴양지 산토리니 섬의 양조업자들은 '쿨루라(kouloura)'라는 전통 방식대로 포도를 재배한다. 쿨루라는 그리스어로 바구니를 뜻한다. 포도나무가 하늘을 향해 자라는 대신 땅바닥에 납작 누웠다. 줄기와 가지는 바구니 모양으로 둥그렇게 말려 있다. 포도잎과 줄기가 포도송이를 감싸 안는다. 도멘 시갈라스(Domaine Sigalas) 와인메이커 파나요타 칼로게로풀루(Kalogerpoulou)는 "바람과 햇빛이 가혹하달 만큼 강렬한 산토리니에서 포도를 보호하기 위해 수천 년 전 개발된 재배방식"이라고 설명했다.

전통뿐 아니라 자연에 순응하는 와인 생산방식도 현대 그리스 와인의 특징이다. 그리스 주요 레드와인 산지인 네메아(Nemea)에 있는 양조장 크티마 첼레포스(Ktima Tselepos) 주인 겸 와인메이커로 현대 그리스 와인업계 리더 중 하나로 꼽히는 야니스 첼레포스(62)는 "내가 원하는 대로 와인을 만드는 게 아니라 포도밭과 포도가 내게 말하는 대로 와인을 만든다"고 했다.

그리스의 흙과 바람과 포도가 앞으로 어떤 와인을 만들라고 그리스 와인생산자들에게 말해줄지 기대됐다. 마침 와인처럼 붉은 석양이 포도밭 너머로 지고 있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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