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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독일

독일 베를린 : 보라, 패배자에게도 품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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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폰 쇤부르크씨의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베를린

'폰 쇤부르크씨의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이란 책 제목은 아무래도 흥미가 일지 않는다. 하지만 우연히 도서관 서가에서 발견한 이 책의 저자 프로필을 읽는 순간 나는 선 채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 유서 깊은 귀족 가문 출신의 언론인으로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의 베를린판 편집자이다. 그는 독일에 불어닥친 언론계 구조 조정으로 한순간에 실업자 신세가 된다. 그 뒤에 이어지는 글. "이런 날벼락 같은 상황 속에서도 18세기부터 영락의 길을 걸어온 가문의 모습을 보고 자란 경험 덕분에 의연하게 이 상황에 대처할 수 있었다"는 말은 매우 흥미로웠다. 망한 귀족 가문 출신의 후손이 걸작을 쓰는 경우는 종종 있다. 추락만큼 드라마틱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실제 '롤리타'를 쓴 러시아 귀족 출신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가난한 망명 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그는 부유한 나비 수집가나 이류 서정 시인으로 인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른다.

저자는 우선 '가난'을 다시 정의한다. 자본주의는 수십년 동안 가난을 수치스러운 것으로 정의했지만, 오늘날 가난해지는 사람은 자신만이 실패자라고 느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대량 해고나 구조 조정, 빠른 실직으로 인한 가난은 이제 자본주의가 낳은 부작용의 일부이며 그것은 역사적인 차원을 가진다. 혼자서 개인적으로 실패하는 것보다는 시대와 함께 자신이 속한 사회계층 모두와 함께 물러나는 경우가 견디기 훨씬 쉽다는 것이다.

독일 베를린 연방의회 의사당
독일 베를린 연방의회 의사당을 찾은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언론계에 불어닥친 구조조정으로 실업자가 된 언론인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의 책을 읽은 백영옥은 “가난은 이제 불안이 삶의 조건이 된 이 시대에 맞게 새롭게 해석돼야 한다”고 했다. /조선일보 DB
이 책의 독창성은 저자의 독특한 이력에서 비롯된다. 죽은 상어를 소재로 한 작품을 800만파운드(약 134억원)에 팔아치운 영국의 '데미안 허스트' 같은 예술가나 세계의 부자들을 취재할 수 있었던 그는 실질적인 '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존재론적으로 분석해낸다. 그는 가진 사람들이 돈을 잃지 않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을 쓰며 전전긍긍하는지 이야기한다. 이 말의 숨겨진 뜻은 가진 게 별로 없는 사람은 잃어버릴 것도 별로 없다는 것이다.

"부유한 사람일수록 '평범한 삶'을 흉내 내는 것을 사치스러운 일로 여긴다. 현재 살고 있는 시골의 성이 클수록, 모든 편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지만 가능한 한 작은 도심의 공동주택을 더 동경한다. (중략) 화보 잡지 독자들이 입 벌리고 부러워하는 부자들의 관습인 요트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는 것도 비슷한 종류이다. 요트에서의 삶은 부자들에게 바로 캠핑이나 다름없다. 부자들은 비좁은 공간에서 함께 북적거리고, 작은 선실에서 두세 사람이 섞여 잠을 자고, 몸을 돌리기 어려울 정도로 좁은 욕실에서 전신 목욕은커녕 물탱크의 물을 절약하기 위해 겨우 고양이 세수나 하는 것을 즐긴다. 온종일 티셔츠를 걸치고 돌아다니는 것, 간단히 말해 '소박한 삶'과 가까이 있는 것을 즐거워한다."

'부'에 대해 우리가 가진 게으른 편견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 가령 식료품 없이 고급 샴페인 한 병만 달랑 들어 있는 냉장고를 '멋지다'고 생각하는 태도는 완전히 시대에 뒤처진 것이라고 말한다. 샴페인은 포도주를 만들기에 적절하지 못한 포도로 빚은 저품질의 알코올 음료이며, 유럽의 뛰어난 포도주 전문가가 수십년의 경험을 토대로 이제 자신은 맥주만 마신다고 고백했다는 것이다. 사실 외식만큼 소시민적인 일도 별로 없는데, 이제 진정한 사치는 직접 시장에 가서 좋은 식품을 사고, 냄새와 식감을 음미하며 요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집의 인테리어에 들이는 돈이나 집이 위치한 동네가 아니라, 손님들을 맞아들이는 자연스러움을 통해서 집은 아름다워질 수 있으며, 친구들이 모여드는 집을 가진 사람만이 진정으로 부유하다는 것이다. 뱅앤올룹슨의 고성능 음향 기기나 콘런의 디자이너 가구 자체가 사람들이 즐겨 찾는 장소를 만들어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단두대로 가는 길에도 책을 읽으며, 읽다가 만 곳에 표시했던 샤로스트 공작을 얘기하다가, 만약 유머를 수입하거나 수출할 수 있다면 헝가리는 엄청난 흑자를 기록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가난해지는 기술에 대해 말하면서 헝가리와 영국을 예로 든다. 나라든 개인이든 그 사람의 진면목은 패배를 인정하는 과정에서 드러나게 마련이다. 자신의 실패를 침착하고 당당하게, 약간의 유머를 곁들이며 받아들이는 훌륭한 패배자가 보기 드문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기로는 헝가리와 영국이 독보적이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가난해진 사람들이 살기 좋은 독일어권 도시를 추천하기도 하는데 그가 추천하는 곳은 베를린과 빈이다. 베를린은 가난해지는 사람들에게 전통적으로 매우 관대한데 오랫동안 섬처럼 고립되어 있던 상황이 함께 뭉쳐야 한다는 심성을 만들어냈다는 분석이다.

많은 돈이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굳게 믿는 세상에 돈이 행복의 걸림돌이라고 말하는 책은 언뜻 기이하다. 가령 광고를 보며 사람들은 필요한 물건이 아니라 자신의 희망과 욕망을 산다. 그러나 기대감이 높아질수록 행복해지기는 그만큼 더 어렵고, 기대했던 것을 막상 누리더라도 행복감은 상승하지 않는다는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은 이미 많은 학자가 얘기한 바 있다. 오로지 성취에 대한 기대감만이 행복을 높여줄 수 있다고 말이다. 이제 몰아치는 현실의 변화에 대응해 스스로 삶의 주인으로 살기 위해서 다른 관점이 필요하다.

도서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
"로빈슨 크루소가 섬에 표류했을 때, 한 가지 요령이 그의 목숨을 구해준다. 크루소는 침몰한 배에서 찾아낸 연필과 종이를 들고 목록을 두 개 만든다. 목록 하나에는 현지 상황의 불리한 점을, 다른 목록에는 요행이라 여길 수 있는 점을 적는다. 불리한 점, 나는 무인도에 있으며 구조받을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좋은 점, 나는 아직 살아 있으며 다른 동료들처럼 물에 빠져 죽지 않았다. 불리한 점, 몸을 가릴 만한 옷이 없다. 옷이 있다 해도 거의 걸치기 어려운 더운 지방에 있다. 로빈슨 크루소는 이런 식으로 계속 적어나간다. 그런 다음 달리 어쩔 도리가 없는 부정적인 면들을 기억에서 지우고 긍정적인 면에 집중하기로 결심하면서, 놀랍게도 이런 결론을 이끌어낸다. '그때부터 나는 내 쓸쓸한 처지에서 다른 어떤 상태에서보다 더 행복함을 느낄 수 있다고 추론하기 시작했다.'"

로빈슨 크루소의 원칙을 매혹적이게 하는 것은 진부하기 짝이 없는 긍정적인 사고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삶의 우여곡절을 받아들이고, 희생자의 역할에 파묻히는 대신 끝까지 행위하는 사람으로 남아 있는 능력이다. 가난은 이제 게으른 자들의 비참함이 아니라 불안이 삶의 조건이 된 이 시대에 맞게 해석되어야 한다. 가난은 온갖 장식적인 것들에서 우리를 곧장 삶의 본질로 향하게 한다. 가장 큰 쾌락이 금욕에서 출발한다는 걸 역설했던 쾌락주의자들처럼. 잘나가던 시절에 기록된 전화번호 2000개가 진실한 친구들의 번호 50개로 정리되는 순간처럼 말이다.

●폰 쇤부르크씨의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독일에 불어닥친 언론계 구조 조정으로 한순간에 실업자가 된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가 쓴 에세이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방법
국내도서
저자 : 알렉산더폰쇤부르크 / 김인순역
출판 : 열린책들 200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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