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끝… 현재와 과거가 함께 흐르는 곳

남극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은 남미 대륙 끝에 있다. 우슈아이아(Ushuaia)다. 남미 대륙을 지탱한 안데스(Andes)산맥의 웅장한 자태가 바다 속으로 사라지는 곳. 아르헨티나 남단 티에라 델 푸에고(Tierra del Fuego·불의 땅)의 작은 항구 도시다. 그래서 우슈아이아는 '세상의 끝(end of the world)'이라 불린다.

140여년 전 영국 선교사들이 찾기 이전까지 원주민 야마나(Yamana·현지에서는 '샤마나'라고 부른다)들의 고향이었던 이곳은 이제 세계 각지에서 온 여행자들이 남극 대륙으로 향하는 출발점이 됐다.

1 순백과 녹색이 공존하는 남미 대륙의 끝 우슈아이아. 2 2층 관광버스는 우슈아이아의 명물이다 3 야마나 원주민들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박물관.
우슈아이아는 그 자체로도 매력 넘치는 여행지다. 병풍처럼 도시를 감싸안은 해발 1000m 안팎 봉우리마다 순백과 짙은 녹색이 공존한다. 거칠게 깎아놓은 산 정상부터 6~7부 능선까지는 눈의 공간. 키 작은 침엽수들이 점령한 산자락은 암록지대를 이룬다. 숲을 지나면 사람의 마을. 그 아래 비글해협(Beagle Channel)이 펼쳐진다.

인구 6만명. 우슈아이아는 도시라 부르기 미안할 정도로 단출했다.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우리로 치면 '명동' 같은 2㎞ 남짓한 산 마르틴(San Martin) 거리에 크고 작은 박물관과 기념품 가게, 음식점 등 볼거리가 바글바글 몰려 있다. 4주째 남미 대륙 각지를 돌아보고 있다는 네덜란드인 부부는 "마지막 여행지로 우슈아이아를 선택했다"면서 "현재와 과거의 시간을 함께 흘러가는 분위기가 매력적"이라고 했다.

해양박물관인 무세오 마리티모(Museo Maritimo)에는 각종 선박 모형과 해도(海圖) 등 해양 관련 자료가 가득했다. 바닷가에 있는 건물 같지 않게 창문이 좁고 굵은 쇠창살이 설치돼 있어 웬일인가 싶었더니 60여년 전까지만 해도 최대 800명을 수용하던 감옥으로 쓰였다고 한다. 박물관 뒤쪽, 한때는 힘차게 달렸을 증기기관차의 모습이 쓸쓸하다.

바다 쪽으로 5분 정도 걸어가면 무세오 야마나(Museo Yamana) 간판이 보인다. 6000여년 동안 이곳의 주인이었던 야마나 원주민들의 일상이 빛바랜 흑백 사진과 미니어처 전시물에 기록돼 있다. '문명'의 물결에 덧없이 스러져간 또 하나의 슬픈 운명이 서럽다.

영국인들 눈요깃거리용으로 이곳에서 끌려갔다는 원주민 소년의 별칭을 딴 기념품 가게 '지미 버튼(Jimmy Button)'에선 앙증맞은 아이들 티셔츠를 팔고 있다. 색이 고운 머그잔과 이국적인 문양의 토기를 판매하는 티에라 데 우모스(Tierra de Humos·연기의 땅)는 기념품보다 이곳에서 세계 주요 도시까지 거리를 표시한 이정표로 더 유명하다. 남위 54도, 서경 68도인 이곳에서 남극(Polo Sur)까지는 3926㎞.

걷다가 지치면 산 마르틴 거리 한가운데 있는 돈 보스코(Don Bosco)성당에 들르자. 두 줄로 늘어선 나무 의자에 앉아 두 손 모아 소원을 비는 세계 각지의 여행자들이 많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배낭여행 전문 여행사인 신발끈여행사(www.shoestring.kr ·02-333-4151)에서 남극을 비롯한 남미 땅끝마을 우슈아이아 상품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걷기 방랑자가 뽑은 내 생애 최고의 길 '남극점'

우연한 기회에 일반인도 남극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요동치는 가슴을 어쩌지 못해 결국 떠났다. 온통 새하얀 얼음 땅을 크로스컨트리 스키를 신고 10여 일을 걸어 도착한 남극점. 간절한 마음을 다해 한 발, 한 발 내딛으며 만난 세상 끝에서 또 다른 세상을 만났다. 평범하지만 가슴 뛰지 않았던 ‘일상 살아내기’에만 삶이 있지 않다는 가르침을 준 걸음들이자, 얼음 위 고독하지만 가장 나에게 가까이 간 여행이었다.

남극 걷기를 위해선 남극 대륙 내 패트리어트 힐 베이스캠프까지 항공기로 이동한 다음 다시 남위 89도까지 경비행기를 타고 가야한다.
레플 걷기 여행의 묘미, 무엇이 당신을 걷게 만들었나요?

김진아 걷기 여행은 세상에서 가장 느린 여행의 방식이다. 한 시간에 시속 4km가 채 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느리게 걸으며 온갖 세상의 사소하면서 소박한 풍경들과 사람들을 만난다. 평소에는 너무 빨라 쉽게 지나쳐 볼 수 없는 것들이 많지 않은가. 그들의 삶의 방식에 잠시나마 나를 들여놓고 소통하는, 걷기 여행은 ‘느리게 소통하는 여행’이다. 생각해 보면 걷기 여행을 시작하게 된 것은 당시 좋아하던 사람이 산에서 걷는 걸 좋아했기 때문이다. ‘계속 걸어야겠다’라고 계기가 된 것은 남극 걷기 여행이다. 걸으면서 만나게 된 풍경들과 투박하지만 섬세한 자신만의 숨소리, 오롯이 느끼게 되는 두 발과 마음의 움직임들 때문에 지금까지 계속 걷고 있다. 

남극의 여름 풍경
레플 이제껏 걸어본 코스 중 최고를 꼽는다면?

김진아 남극점, 칠레 토레스 델 파이네, 아르헨티나 아콩카구아, 인도 라닥, 다즐링, 네팔 안나푸르나, 랑탕, 파키스탄 K2, 스페인 카미노 데 산티아고, 말레이시아 키나발루, 중국 공가산, 쓰구냥산, 매리설산, 모로코 엠곤 등등. 최고의 걷기 경험을 한 곳을 묻는다면 당연히 남극이라고 답을 하겠지만, 몇 번을 가도 다시 걷고 싶은 곳이 어디인지 묻는다면 네팔 안나푸르나 라운딩 트레킹이라고 대답하겠다. 

(위에서부터) 1 세상의 끝, 남극점 도달 2 남극 걷기를 위해선 남극 대륙 내 패트리어트 힐 베이스캠프까지 항공기로 이동한 다음 다시 남위 89도까지 경비행기를 타고 가야한다.
레플 남극에서의 걷기 여행이라, 참 생소한데 그 매력을 만끽할 수 있는 최적의 루트 혹은 당신이 걸었던 길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는지요? 

김진아 남위 89도에서 시작해 남위 90도인 남극점까지 10여 일간 걷는 코스다. 우선 남극 대륙으로 가기 위해서는 칠레 최남단 도시 푼타 아레나스까지 항공을 이용해야 하는데 미국을 경유해 가는 것이 보통이다. 그곳에서 남극탐험여행사 ANI(Adventure Network International)가 운행하는 항공기를 타고 남극 대륙 내 패트리어트 힐이라는 베이스캠프에 내리게 된다. 

남극점 걷기 여행을 시작하는 기지라고 할 수 있겠다. 이곳에서 날씨가 좋아지기를 기다렸다가 걷기 여행이 시작되는 남위 89도까지 트윈오터라 불리는 작은 경비행기를 타고 이동한다. 바로 거기서부터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해 ‘세상의 끝’ 남극점에 도착하게 된다. 걷기를 마치고 남극점과 남극점에 위치한 아문젠-스콧 기지를 둘러보고 있으면 경비행기가 데리러 오고, 그것을 타고 지나온 길들을 날아 패트리어트 힐로 돌아온다. 베이스캠프에서 맛있는 음식들과 날마다 스키와 가벼운 걷기를 즐기며 날씨가 좋아지길 기다려 칠레로 향하는 큰 비행기에 몸을 싣게 되고, 칠레의 푼타 아레나스로 돌아오면 비로소 남극 여행의 막이 내린다. 

칠레와 남극을 오가는 항공 이동 시간과 기상 대기로 인한 시간까지 모두 더한다면 여행기간은 20일 정도를 생각하면 된다. 항공의 이동 가능 여부는 기상 환경에 달려 있기 때문. 나는 기상 대기 시간이 길어서 25일 정도가 소요되었다. 

태양 주위로 생기는 둥근 달무리
레플 남극에서 꼭 즐겨야 할 것과 느껴야 할 것, 그리고 가져와야 할 것이 있다면? 당신은 그곳에서 무엇을 즐기고, 느끼고, 가져왔나요?

김진아 걷는 여행은 오롯이 혼자서 스스로 해내야 하는 여행이다. 걷는 동안에 투명한 자기 자신을 꼭 만나길 바란다. 그리고 열심히 걷는 도중 문득 고개 들어 설원의 지평선 위 하늘을 바라봤을 때 태양 주위로 동그랗게 생기는 둥근 무지개, 햇무리를 반드시 보게 될 것이다. 그런 생경한 감동은 처음이다.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빙 돌아도 온통 눈과 얼음뿐인 남극만이 가진 자연환경에도 푹 빠져보길 바란다. 가져올 것이란 그런 벅찬 풍경들과 그 속에서 열심히 걷던 스스로의 용기뿐 인 것 같다.

너무 추워 남극 대륙 안에는 살아 있는 생물체가 없다고 한다. 식물도, 동물도 심지어는 감기바이러스도 살기가 힘들다고. 사람 말고는 생명체가 없지만 순백의 얼음 땅 그것만으로 새하얀 천국이었다. 남극 그 자체를 즐겼다. 그러니 스스로에 대한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잘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서른이라는 막막하고도 두려운 시간을 앞두고 떠난 여행이었다. 특별히 산을 열심히 다닌 것도 아니고, 해외 고산 경험이 거의 없던 터라 주위의 반대도 엄청났다. 그런데도 무모한 용기였는지 이상하게도 남극에 끌렸다. 일반인이 남극을 여행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기 때문이다. 비록 추위와 동상으로 고생을 조금 했지만 평범한 직장인이 아닌 ‘걷는 여행자’로 새로 태어나게 해준 계기가 바로 남극 여행이었다. ‘세상의 끝’이라 생각했던 남극점이 나에게는 또 다른 ‘세상의 시작’이었으니까. 남극에서 ‘진정한 나’를 만났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의미 깊은 걸음들이었다. 

매일 걷기를 끝내고 보금자리용 텐트를 친다.
레플 남극 걷기에서 주의해야 할 유의사항을 귀띔한다면?

김진아 남극을 걸을 수 있는 시기는 정해져 있다. 남극의 여름에 해당하는 12월부터 1월까지만 걷기가 가능하다. 여름이라고는 하지만 기온이 영하 20도에서 40도까지 내려간다. 하루 종일 해가 떠 있기 때문에 날씨만 맑다면 기온계의 온도와 다르게 따사로움을 느낄 수 있지만 동상은 반드시 조심해야 할 문제다. 나 역시 그랬다. 날마다 걷기를 끝내고 텐트를 치는데 거치적거려 아주 잠시 겉장갑을 벗었다가 손가락이 퉁퉁 붓고 살이 검게 죽는 동상에 걸리고 말았다. 다행히 손가락 첫 번째 마디에서 멈췄고, 여행의 막바지에 걸려 걷는데도 크게 지장을 받지 않았지만 사전에 미리 조심하는 것이 좋다. 추위에 장시간 피부를 노출시키는 일은 반드시 방지해야 한다. 

1,2 남극 대륙을 함께 걸었던 동료들 3 제자리에서 빙 둘아도 온통 눈과 얼음뿐인 남극. 그런 벅찬 풍경 속을 크로스컨트리를 타고 걸었다.
김진아
세상에서 가장 느린 마음 여행자. 성균관대 공대를 졸업하고 삼성전자 연구원으로 일했다. 서른 살이 되던 해 특별한 서른을 위해 ‘세상 끝’ 남극점으로 훌쩍 떠나며 인생의 쉼표를 찍었다. 그리고 주로 두 발로 걷는 여행을 하며, 길 위의 풍경과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들여놓아 소통하는 여행자로 변신했다. 그리고 낮선 땅 위에 집을 지은 지 어느덧 3년. 단행본 <바람이 되어도 좋아> <시간멈춤> 공저 <여행자의 유혹>을 썼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바람이 되어도 좋아
국내도서
저자 : 김진아
출판 : 랜덤하우스 2009.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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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의 베르나드스키(Vernadsky) 기지. 남극 관광객들이 찾을 수 있는 최남단 기지로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초대 회장을 지낸 블라디미르 베르나드스키(1863~1945)의 이름을 딴 곳이다. 눈보라를 뚫고 기지에 도착하니 사람 키만한 엄지손가락 모양의 노란 간판이 보인다. '안녕' 인사말이 영어·스페인어·러시아어 등 7개 국어로 새겨져 있다.

기지 안은 포근했다. 기압측정기와 오존탐지기, 지진관측계 등 갖가지 과학 측정장비를 소개하는 연구원들의 표정이 한없이 밝았다. 오랜만에 맞은 손님들이 반가워서였을까. 주방과 식당은 깔끔했다. 체력단련실에는 축구공이 보였다. 눈밭 천지인데 어디서 공을 찰 수 있을까.

2층으로 오르는 계단, 빛바랜 사진마다 묵묵히 기지를 지켜온 선배 과학자들의 모습이 오롯했다. 기지를 배경으로 찍은 흑백 기념사진엔 추위만큼이나 지독했던 외로움과 싸워 이겨낸 극지 과학자들의 자랑스러움이 넘쳐났다.

7개 국어로 된 '안녕' 인사말이 기지를 찾은 여행객을 맞는다.
베르나드스키 기지 앞에 서 있는 거리 표지맢.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에프까지 직선거리는 1만5168km이다.

연구원들이 '패러데이 바'로 불리는 휴게실로 이끌었다. 우크라이나산 보드카를 맛볼 수 있는 곳. 주당들의 얼굴이 슬슬 발개지기 시작했다. 팬티 차림으로 촬영한 각국 연구원들 사진을 모아놓은 그림판 앞에선 웃음꽃이 터졌다. '지구상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기념품 가게'(Southernmost Souvenir Shop on the Earth)'란 간판을 붙인 작은 매장에서 '남위 65도 15분, 서경 64도 16분'이 적힌 머그잔, 벽걸이 장식품 등을 1만원 안팎에 살 수 있다.

기지에서 운영하는 간이 우체국도 북적였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와 엽서가 여행자들의 품 속에서 하나 둘 나왔다. 베르나드스키 기지의 소인을 찍은 사연들이 전 세계로 출발했다. 다정한 펭귄 두 마리가 새겨진 스탬프를 여권에 찍고 활짝 웃는 연인들도 있었다.

기지 밖, 사람 키만큼 쌓인 눈 속에 방향 표지판이 우뚝 서 있었다. "'우크라이나의 심장'인 키예프(KYIV)까지 1만5168㎞." 표지판을 가리키는 연구원에 눈물이 언뜻 비쳤다.

남위 64도 49분, 서경 63도 30분. 한때 '베이스(Base) A'로 불리며 영국의 과학기지로 쓰였던 윈키(Wiencke)섬의 포트 로크로이(Port Lockroy)는 남극 박물관이 됐다. 시간이 정지한 듯 수십년 전 남극 기지의 어느 하루가 이곳에 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녹슨 과학장비들, 바스러질 듯 놓여 있는 1958년 10월 28일자 데일리메일 신문, 1959년 11월 달력, 연구원들의 밤을 지켜주었을 낡은 소설책…. 벽에 그려놓은 메릴린 먼로의 그림은 군데군데 칠이 벗겨져 있었다. 거친 남극 바람에 찢겨진 빛 바랜 유니언 잭(Union Jack)을 벽에 걸어놓은 것이 무척 인상적이다. 방명록에 소감 한 줄 남기는 것도 잊지 마시길.



펭귄들의 낙원이 따로 없었다. 남위 62도 20분, 바리엔토스(Barrientos)섬. 남극 반도 서쪽 남셔틀랜드군도(South Shetland Islands) 복판의 작은 섬에 수천 마리 펭귄들이 바글거렸다. 부리에 주홍빛이 선명한 녀석은 '남극의 신사' 젠투(gentoo) 펭귄. 머리와 등의 검정털에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따사로운 초여름 햇살에 배와 눈 주변의 새하얀 털이 눈부시게 빛났다.

살아 있는 자연 생태관이 따로 없었다. 구애(求愛)하고 영역을 주장하는 펭귄들의 외침이 해변에 가득했다. 한 마리가 하늘을 향해 목을 길게 세워 "꾸루루루" 선창하면 주변의 펭귄 수백 마리가 덩달아 울어댔다. 눈이 녹아 푸르스름한 이끼가 낀 해변부터 두꺼운 눈에 덮인 산꼭대기까지 펭귄 수백 마리가 옹기종기 모여 둥지를 틀고 있었다. 수산시장을 찾은 듯 펭귄들의 비릿한 배설물 냄새가 주변에 가득했다. 펭귄들의 먹이는 바다에 지천인 크릴새우. 배설물 색깔도 진한 분홍빛이었다.

조류 전문가 수잔(Susan)을 따라 본격적인 생태 탐험이 시작됐다. 원칙은 단 하나, '펭귄 퍼스트'였다. 이곳의 주인은 펭귄인 만큼 그들의 움직임을 존중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동은 반드시 단 한 줄(in a row)로 해 주세요. 펭귄들과 거리는 최소한 5m를 유지해야 합니다. 펭귄이 다가오면 조용히 뒤로 물러나면 됩니다. 사진 촬영은 괜찮지만 플래시 사용은 절대 불가! 펭귄들에겐 엄청난 스트레스가 되거든요."

한 줄로 이어진 행렬은 걷다 서다를 반복했다. 날개를 바짝 뒤로 젖히고 뒤뚱거리며 나타난 펭귄들이 저만치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생전 처음 보는 이방인들의 출현에 깜짝 놀랐는지 썰매 타듯 정신없이 눈 위를 내달리는 녀석도 있었다.

“이크, 어서 가자고.”낯선 이방인의 출현에 화들짝 놀란 펭귄 두 마리가 종종걸음으로 눈길을 달리고 있다.
바리엔토스섬 해변은 번식기를 맞아 수컷 펭귄들이 목청껏 내지르는 구애의 울음소리로 떠들썩했다.
바다 위를 멋지게 활공하는 완더링 알바트로스.
섬 뒤쪽 해변으로 이동했다. "저쪽!" 수잔이 가리킨 곳에 1t은 가뿐히 넘어 보이는 수컷 코끼리물범(elephant seal)이 따사로운 햇살 아래 한가로이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한없이 평화로워 보이는 이곳에도 냉혹한 생존 법칙은 존재했다. 바위 틈 곳곳에는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완더링 앨버트로스(Wandering Albatross)의 먹잇감이 된 펭귄들의 뼈대가 보였다. 해변에는 직경 1m가 넘는 고래의 허리뼈가 버려져 있었다.

또 다른 펭귄을 찾아 남위 65도 10분, 페터만(Petermann)섬까지 내려갔다. 1873년 독일 포경선원들이 발견해 자국(自國) 지리학자인 아우구스트 페터만의 이름을 붙인 곳. 고무보트 조디악을 집어삼킬 듯 넘실거리는 파도를 뚫고 해변에 도착했다. 바늘 끝같이 날카로운 진눈깨비가 얼굴을 찔렀다. 턱에 검은색 줄이 선명한 친스트랩(Chinstrap) 펭귄들이 파도가 몰아치는 해변부터 거칠게 깎인 해발 135m 산 정상까지 깨알같이 박혀 있었다. 거센 눈발도 아랑곳하지 않고 해변에서 작은 돌멩이를 물어와 산 정상에 둥지를 쌓는 수컷의 부성애가 눈물겹다.

남극 대륙 서안(西岸) 겔라체(Gelache) 해협을 지날 때는 갑판에 나와야 한다. 운이 좋으면 오르카(Orca)라 불리는 범고래(Killer Whale)의 유영(游泳)을 관찰할 수 있다. '우웅~'하는 낮은 진동음에 이어 수면 위로 뿜어내는 하얀 물기둥. 탄성이 절로 터진다. 수백 마리 펭귄들이 수면 위아래를 넘나들며 무리지어 헤엄치는 모습도 놓칠 수 없는 장관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드레이크 해협(Drake Passage)을 오가는 동안 우슈아이아호(號)에서는 생태 강의가 계속됐다. 가슴팍이 붉은 황제펭귄, 머리에 붉은 왕관을 두른 마카로니펭귄, 머리가 온통 까만 아델리(Adelie)펭귄 등 갖가지 다른 펭귄의 모양과 특성을 쉽게 배울 수 있다. 바닷새의 생태, 남극의 지질, 남극 대륙을 횡단한 어니스트 섀클턴(Shackleton)의 모험 등에 대해서도 실감 나는 강의가 이어진다.

수십 차례 남극을 다녀왔다는 조류 전문가 수잔의 당부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무엇 하나 가져가지 않기로 약속해요. 돌멩이나 새의 깃털, 동물의 작은 뼛조각 하나도 손대지 않기로. 참, 아름다운 추억과 멋진 사진은 괜찮아요."


남극만 보고 오기 아쉽다면? '파타고니아' 트레킹 코스 추천

남극. 어렵게 간 여행길이다. 한국에서 하늘길, 바닷길로 오가는 여정을 감안하면 남극만 둘러보고 돌아오기엔 뭔가 아쉽다. 시간, 경제적 여유가 있다면 남극 크루즈에 남미 대륙 최남단의 파타고니아(Patagonia) 트레킹을 결합한 23박24일 일정이 있다. 눈이 시릴 듯 빛나는 남극의 빙산, 거기에 '남미 대륙의 숨겨진 보석'으로 불리는 파타고니아의 자연과 산군(山群)을 체험하는 코스다.

아르헨티나 우슈아이아를 출발해 남극 반도와 남극 대륙을 돌아본 뒤 한국으로 떠나는 대신 칠레 푼타 아레나스(Punta Arenas)로 발길을 돌린다. 트레킹의 시작은 토레스 델 파이네(Torres del Paine) 국립공원. 빙하 침식을 받아 이뤄진 거대한 화강암 봉우리를 바라보며 걷는 코스다. 표면이 거친 빙퇴석을 밟는 맛이 일품이다. 시시각각 색깔이 달라지는 프렌치 계곡, 터키석 빛깔의 물빛으로 유명한 페호 호수도 놓쳐선 안 된다. 독특한 전통 음식을 제공하는 산장의 식사도 잊지 못할 경험이다.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의 명물인 페리토 모레노(Perito Moreno) 빙하를 찾아 떠나는 데이 투어도 있다. 알싸한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며 눈이 시릴 듯 아름다운 대자연 속을 두 발로 걷는 느낌을 어디서 비길 수 있을까. 배낭여행 및 오지 전문 여행사인 신발끈여행사(www.shoestring.kr ·02-333-4151)에서 항공권과 크루즈+트레킹 예약을 한 번에 끝낼 수 있다. 23박24일 상품가격이 1349만원. 비싸다.


걷기 방랑자가 뽑은 내 생애 최고의 길 '남극점'

우연한 기회에 일반인도 남극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요동치는 가슴을 어쩌지 못해 결국 떠났다. 온통 새하얀 얼음 땅을 크로스컨트리 스키를 신고 10여 일을 걸어 도착한 남극점. 간절한 마음을 다해 한 발, 한 발 내딛으며 만난 세상 끝에서 또 다른 세상을 만났다. 평범하지만 가슴 뛰지 않았던 ‘일상 살아내기’에만 삶이 있지 않다는 가르침을 준 걸음들이자, 얼음 위 고독하지만 가장 나에게 가까이 간 여행이었다.

남극 걷기를 위해선 남극 대륙 내 패트리어트 힐 베이스캠프까지 항공기로 이동한 다음 다시 남위 89도까지 경비행기를 타고 가야한다.
레플 걷기 여행의 묘미, 무엇이 당신을 걷게 만들었나요?

김진아 걷기 여행은 세상에서 가장 느린 여행의 방식이다. 한 시간에 시속 4km가 채 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느리게 걸으며 온갖 세상의 사소하면서 소박한 풍경들과 사람들을 만난다. 평소에는 너무 빨라 쉽게 지나쳐 볼 수 없는 것들이 많지 않은가. 그들의 삶의 방식에 잠시나마 나를 들여놓고 소통하는, 걷기 여행은 ‘느리게 소통하는 여행’이다. 생각해 보면 걷기 여행을 시작하게 된 것은 당시 좋아하던 사람이 산에서 걷는 걸 좋아했기 때문이다. ‘계속 걸어야겠다’라고 계기가 된 것은 남극 걷기 여행이다. 걸으면서 만나게 된 풍경들과 투박하지만 섬세한 자신만의 숨소리, 오롯이 느끼게 되는 두 발과 마음의 움직임들 때문에 지금까지 계속 걷고 있다.

남극의 여름 풍경
레플 이제껏 걸어본 코스 중 최고를 꼽는다면?

김진아 남극점, 칠레 토레스 델 파이네, 아르헨티나 아콩카구아, 인도 라닥, 다즐링, 네팔 안나푸르나, 랑탕, 파키스탄 K2, 스페인 카미노 데 산티아고, 말레이시아 키나발루, 중국 공가산, 쓰구냥산, 매리설산, 모로코 엠곤 등등. 최고의 걷기 경험을 한 곳을 묻는다면 당연히 남극이라고 답을 하겠지만, 몇 번을 가도 다시 걷고 싶은 곳이 어디인지 묻는다면 네팔 안나푸르나 라운딩 트레킹이라고 대답하겠다.

(위에서부터) 1 세상의 끝, 남극점 도달 2 남극 걷기를 위해선 남극 대륙 내 패트리어트 힐 베이스캠프까지 항공기로 이동한 다음 다시 남위 89도까지 경비행기를 타고 가야한다.
레플 남극에서의 걷기 여행이라, 참 생소한데 그 매력을 만끽할 수 있는 최적의 루트 혹은 당신이 걸었던 길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는지요?

김진아 남위 89도에서 시작해 남위 90도인 남극점까지 10여 일간 걷는 코스다. 우선 남극 대륙으로 가기 위해서는 칠레 최남단 도시 푼타 아레나스까지 항공을 이용해야 하는데 미국을 경유해 가는 것이 보통이다. 그곳에서 남극탐험여행사 ANI(Adventure Network International)가 운행하는 항공기를 타고 남극 대륙 내 패트리어트 힐이라는 베이스캠프에 내리게 된다.

남극점 걷기 여행을 시작하는 기지라고 할 수 있겠다. 이곳에서 날씨가 좋아지기를 기다렸다가 걷기 여행이 시작되는 남위 89도까지 트윈오터라 불리는 작은 경비행기를 타고 이동한다. 바로 거기서부터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해 ‘세상의 끝’ 남극점에 도착하게 된다. 걷기를 마치고 남극점과 남극점에 위치한 아문젠-스콧 기지를 둘러보고 있으면 경비행기가 데리러 오고, 그것을 타고 지나온 길들을 날아 패트리어트 힐로 돌아온다. 베이스캠프에서 맛있는 음식들과 날마다 스키와 가벼운 걷기를 즐기며 날씨가 좋아지길 기다려 칠레로 향하는 큰 비행기에 몸을 싣게 되고, 칠레의 푼타 아레나스로 돌아오면 비로소 남극 여행의 막이 내린다.

칠레와 남극을 오가는 항공 이동 시간과 기상 대기로 인한 시간까지 모두 더한다면 여행기간은 20일 정도를 생각하면 된다. 항공의 이동 가능 여부는 기상 환경에 달려 있기 때문. 나는 기상 대기 시간이 길어서 25일 정도가 소요되었다.

태양 주위로 생기는 둥근 달무리
레플 남극에서 꼭 즐겨야 할 것과 느껴야 할 것, 그리고 가져와야 할 것이 있다면? 당신은 그곳에서 무엇을 즐기고, 느끼고, 가져왔나요?

김진아 걷는 여행은 오롯이 혼자서 스스로 해내야 하는 여행이다. 걷는 동안에 투명한 자기 자신을 꼭 만나길 바란다. 그리고 열심히 걷는 도중 문득 고개 들어 설원의 지평선 위 하늘을 바라봤을 때 태양 주위로 동그랗게 생기는 둥근 무지개, 햇무리를 반드시 보게 될 것이다. 그런 생경한 감동은 처음이다.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빙 돌아도 온통 눈과 얼음뿐인 남극만이 가진 자연환경에도 푹 빠져보길 바란다. 가져올 것이란 그런 벅찬 풍경들과 그 속에서 열심히 걷던 스스로의 용기뿐 인 것 같다.

너무 추워 남극 대륙 안에는 살아 있는 생물체가 없다고 한다. 식물도, 동물도 심지어는 감기바이러스도 살기가 힘들다고. 사람 말고는 생명체가 없지만 순백의 얼음 땅 그것만으로 새하얀 천국이었다. 남극 그 자체를 즐겼다. 그러니 스스로에 대한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잘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서른이라는 막막하고도 두려운 시간을 앞두고 떠난 여행이었다. 특별히 산을 열심히 다닌 것도 아니고, 해외 고산 경험이 거의 없던 터라 주위의 반대도 엄청났다. 그런데도 무모한 용기였는지 이상하게도 남극에 끌렸다. 일반인이 남극을 여행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기 때문이다. 비록 추위와 동상으로 고생을 조금 했지만 평범한 직장인이 아닌 ‘걷는 여행자’로 새로 태어나게 해준 계기가 바로 남극 여행이었다. ‘세상의 끝’이라 생각했던 남극점이 나에게는 또 다른 ‘세상의 시작’이었으니까. 남극에서 ‘진정한 나’를 만났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의미 깊은 걸음들이었다.

매일 걷기를 끝내고 보금자리용 텐트를 친다.
레플 남극 걷기에서 주의해야 할 유의사항을 귀띔한다면?

김진아 남극을 걸을 수 있는 시기는 정해져 있다. 남극의 여름에 해당하는 12월부터 1월까지만 걷기가 가능하다. 여름이라고는 하지만 기온이 영하 20도에서 40도까지 내려간다. 하루 종일 해가 떠 있기 때문에 날씨만 맑다면 기온계의 온도와 다르게 따사로움을 느낄 수 있지만 동상은 반드시 조심해야 할 문제다. 나 역시 그랬다. 날마다 걷기를 끝내고 텐트를 치는데 거치적거려 아주 잠시 겉장갑을 벗었다가 손가락이 퉁퉁 붓고 살이 검게 죽는 동상에 걸리고 말았다. 다행히 손가락 첫 번째 마디에서 멈췄고, 여행의 막바지에 걸려 걷는데도 크게 지장을 받지 않았지만 사전에 미리 조심하는 것이 좋다. 추위에 장시간 피부를 노출시키는 일은 반드시 방지해야 한다.

1,2 남극 대륙을 함께 걸었던 동료들 3 제자리에서 빙 둘아도 온통 눈과 얼음뿐인 남극. 그런 벅찬 풍경 속을 크로스컨트리를 타고 걸었다.

남극 여행①

남극. 탐험가 혹은 과학자가 아니면 범접을 허용치 않는 대륙이다. 하지만 어디 지구촌 여행자들이 그런 허락을 받고 다니는 종족들인가. 극점까지는 아니더라도 남극 대륙에 발자국을 남기는 여행객들이 늘고 있다. 한 해에 4만 명에 육박하는 '관광객'이 이 대륙을 찾아간다. 남극해를 뚫고 가는 길은 대개 비싸면서 험악하지만 "별 다섯 개짜리 여행"이라는 여행자들의 소감은 하나 같다. 조선일보 주말매거진이 그 남극의 한쪽 구석을 다녀왔다.

남극 대륙을 감싼 거대한 수직 설벽은 시시각각 빛깔을 달리했다. 시선의 소실점까지 끝없이 이어진 눈의 지층. 눈의 호사가 따로 없었다

"오, 앤탁티카(Antarctica)!"

영겁(永劫)의 세월이 걸렸을 것이다. 내린 눈이 쌓이고 쌓여 거대한 순백(純白)의 대륙이 되기까지는. 수백m 높이의 수직 설벽(雪壁) 앞에 선 여행자들은 말을 잃었다. 퇴적암 지층처럼 켜켜이 누적된 단면을 드러낸 것, 파도가 쓸고 지나간 듯 출렁이는 것, 도끼로 찍은 듯 주상절리처럼 세로로 쩍쩍 갈라진 것, 제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안으로 무너져 내린 것…. 모양과 결이 다른 하얀 벽이 시선의 소실점까지 끝없이 이어졌다. 눈이 시린 '스노 화이트(snow white)' 위에 햇살이 산산이 부서졌다.

남미 대륙의 끝, 아르헨티나 우슈아이아(Ushuaia)를 떠난 우슈아이아호는 사흘 동안 1200여㎞ 바닷길을 지나 남극 반도 서안(西岸)의 엔터프라이즈(Enterprise) 섬에 도착했다.

고무보트 조디악(Zodiac)에 올라탄 여행자들은 둥둥 떠다니는 유빙(流氷) 무리를 따라 눈과 얼음의 세계로 시간여행을 떠났다. 거센 바람에 깎이고 파도가 다듬은 자연의 조각품들이 검푸른 바다 위에 만물상을 이뤘다. 포효하는 사자, 비상하는 독수리, 유유히 헤엄치는 고래의 형상이 그곳에 있었다.

코발트블루 잉크를 몇 방울 떨어뜨린 듯 영롱한 하늘빛 빙산을 마주칠 땐 절로 탄성이 터졌다. 수면 아래 잠긴 얼음덩이에서 은은하게 번져 나오던 푸르스름한 기운은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출신 탐험대장 아구스틴 울만(Ullmann)이 "거친 눈 입자에 부딪힌 빛 알갱이가 이리저리 흩어지는 난반사 현상 때문"이라고 설명했지만, 우리들은 원래 그런 빛깔을 품고 태어난 빙산이 분명하다고 결론을 내려버렸다.

대륙을 감싼 설벽의 자태와 빛깔은 보는 각도에 따라 수시로 변했다. 멀리서 볼 때는 똑같이 하얀 빛깔이더니 다가서자 어느 하나 같은 것이 없었다. 눈의 호사가 따로 없었다. 방금 비질을 마친 듯 깔끔하게 쓸어놓은 것, 동글동글 구슬을 깔아놓은 것처럼 돋을새김 돼 있는 것, 수천만 개 숨구멍이 나 있는 것 위에 빛의 스펙트럼이 찬란하게 펼쳐졌다.

깎아지른 벽에선 집채만 한 눈덩이들이 시도때도없이 굉음을 내며 바다로 추락했다. 예고 없이 나타난 인간의 접근을 막기 위해 대륙이 자신의 일부를 스스로 부숴가며 나타내는 거부의 뜻이 아닐까.

"극한의 고요(extreme silence)를 느껴봅시다." 울만이 조디악의 엔진을 껐다. 순간, 세상이 정지됐다. 출렁이는 파도소리, 바닷새의 울음소리를 빼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청명한 적막이 찾아왔다.

고무보트 조디악을 타고 남극해를 누비는 여행자들
조디악은 엔터프라이즈섬 서쪽의 포인(Foyn) 항을 향했다. 90여년 전 노르웨이 수송선 거버노렌호가 침몰해 잠들어 있는 곳이다. 검붉게 녹슨 전장 60m 철제 선박의 잔해가 처연하다. 물 위에 모습을 드러낸 선실 부분은 도둑갈매기들이 알을 낳고 번식하는 안식처가 된 지 오래다.

"상륙!"

드디어 대륙에 상륙할 시간이 왔다. 레이더는 남위 64도 53분, 동경 62도 52분을 가리켰다. 눈 덮인 봉우리들이 삼면을 감싼 파라다이스만(Paradise Bay). 광활한 남극 대륙에서 몇 안 되는 접안(接岸) 포인트다. 아르헨티나의 브라운(Brown) 기지가 자리 잡은 천혜의 피항지(避港地)다. 그렇게도 요동치던 파도가 거짓말처럼 잔잔해졌다. 고래를 찾아 험한 바닷길을 지나온 그 옛날 포경선원들이 왜 이곳을 '낙원'이라 불렀는지 짐작이 갔다.

18개 나라에서 온 64명의 여행자들은 '제7대륙' 입성을 앞두고 적잖이 상기된 표정이었다.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일반인들은 범접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였다. 국가와 개인의 명예를 위해 목숨을 걸고 극지 정복에 나섰다가 끝내 돌아오지 못한 탐험가들의 전설이 서린 곳.

조디악에서 내려 첫발을 내디디며 가슴에 차오르는 벅찬 감격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었다. 허리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헤치고 기지 옆 봉우리에 오른 여행자들은 자신만의 '세리머니'를 펼쳤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온 롭 호게넬스트(Hogenelst)는 "꿈이 현실이 된 순간"이라며 부인과 뜨겁게 포옹했다. "고맙소. 당신과 함께 지낸 'BA(Before Antarctica·남극 이전)' 40여년 동안 참 행복했소, 'AA(After Antarctica·남극 이후)'에는 더 뜨겁게 사랑하리다." 알제리에서 온 하우다 베라(Berra)는 연인의 입술에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 미국 콜로라도에서 온 일흔셋 래리(Larry) 할아버지는 올해 초 먼저 저세상으로 떠난 아내의 이름을 나직이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

런던 총각 오스틴(Austin)과 파라과이 아순시온에서 온 로드리게스(Rodriguez)는 펄쩍펄쩍 뛰어다녔고, 일본 나가노 출신의 생물학도 다카노 료스케(高野亮介)는 "반자이(만세)!"를 외치며 설원(雪原)에 몸을 던졌다. 이스라엘 청년 모데하이(Mordehai)는 웃통을 벗고 하늘색 별이 새겨진 국기를 흔들었다. 바람 소리만 쓸쓸하던 남극 대륙에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붉은 부리의 젠투(Gentoo) 펭귄, 검은 눈썹 앨버트로스 수천 마리가 서식해 남극 생태계의 보고(寶庫)로 꼽히는 바리엔토스(Barrientos)섬, 기막히게 아름다운 양안(兩岸) 경치를 촬영하다 보면 필름을 모두 써버리게 돼 '코닥 갭(Kodak Gap)'이란 별명이 붙은 르메이어(Lemaire) 해협, 눈 속에 파묻혀 외로이 극지를 지키던 우크라이나 베르나드스키(Vernadsky) 기지…. 마음속 '남극 폴더'의 저장 용량이 차고 넘칠 만한 명소를 하나 둘 둘러보면서 나흘이 훌쩍 지나갔다.

영물(靈物) 범고래가 힘차게 뿜어내던 물기둥, 앨버트로스의 멋진 활공을 보며 터지던 탄성이 귀에 쟁쟁하다. 얼음 위에서 낮잠을 즐기던 웨델 바다표범(Weddell Seal)을 발견하고 숨죽여 조심조심 다가가던 순간의 가슴 졸임은 또 어떤가. 부스 아일랜드(Booth Island) 앞바다에 가득한 유빙 사이를 누비며 벌인 '남극 눈싸움'도 평생을 간직할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20여개국을 돌아본 6개월의 긴 여정을 남극 대륙에서 마무리하고 아르헨티나로 돌아간다는 카롤리나(Carolina)의 얼굴이 낙조(落照)에 발갛게 물들었다. "영원한 나의 대륙 앤탁티카여,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남극 빙산 위에서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고 있는 바다표범. 갑작스러운 이방인의 방문에 놀란 표정이다.

남극에서도 수영할 수 있다

디셉션(Deception)섬의 포스터(Foster)항. 1911년 노르웨이 고래잡이 선원들이 정착해 웨일러즈 베이(Whaler's Bay)라 불리는 이곳은 그때 20여년 동안 남극 고래잡이 전초기지로 전성기를 구가했다. 지금은 쓸쓸한 잔영(殘影)을 만난다.

섬 전체는 한쪽 끝이 뚫린 동그란 반지 모양이다. 거친 남극 바다도 이곳에선 숨을 죽인다. 하지만 수면 바로 아래 암초에 좌초하는 배가 많아 '지옥문(Hell's Gate)'으로 불리기도 했다. 해변 모래톱에는 어른 키의 열 배는 넘어 보이는 원통 모양의 대형 탱크들이 비스듬히 기울어진 채 녹슬어 가고 있었다. 바다의 노다지라 불리던 고래 기름을 보관하던 곳이다.

독주 한 잔에 취한 고래잡이 선원들이 떠들고 노래하며 외로움을 달랬을 건물은 나무 뼈대만 앙상히 남았다. 해군 선원들이 숙소로 사용했다는 건물은 지붕이 주저앉아 있었다. 포경선으로 물자를 실어나르던 작은 목선들은 쓸모를 잃은 채 모래톱에 파묻혀 해풍에 삭아갔다. 나뭇조각 하나도 원형 그대로 보존한 섬세함이 인상적이다.

해변에서 좀 떨어진 둔덕에는 선원들의 돌무덤이 있다. 바다를 보고 서 있는 나무 십자가에 쿨릭센(Culliksen)이라는 노르웨이 선원 이름이 새겨져 있다. 1871년 태어나 1928년 이역만리 외딴 섬에서 50여년 인생을 마감했다.

해변 곳곳에서 유황 냄새를 품은 안개가 자욱이 피어올랐다. 용암이 굳어 생긴 현무암이 수만 년 파도에 쓸려 만들어진 짙은 흑갈색 모래가 서걱거렸다. 화산 활동에 따른 지열 때문에 바닷물이 따뜻했다. 검정 모래 속에 손을 넣어보니 후끈한 기운이 그대로 전해진다. 보글보글 물방울도 솟아올랐다. "남극 대륙에서 수영을 즐길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는 탐험대원들의 설명에 두꺼운 방한복을 벗어던진 남녀들이 바닷물로 뛰어들었다.

'넵튠의 창문(Neptune's Window)'이라 불리는 작은 언덕에 오르니 끝없이 펼쳐진 남극의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흑갈색 절벽 아래 파도가 철썩였다. 인간의 몸을 날려버리겠다는 듯 대양에서 불어온 바람이 거세게 몰아쳤다.

여행수첩

①남극 대륙은 11월 중순부터 3월 중순까지 날씨가 풀린다. 기온이 영하 7도에서 영상 5도를 오르내리는 12월 초부터 2월 말까지가 남극 여행의 적기다. ②한국과 시차(時差)는 정확히 12시간. ③작년 한 해 동안 3만500여명의 여행객이 남극 대륙을 찾았다. 40~50대 중·장년층이 절반 가까이 되고 백발이 성성한 70대 노인도 많다. 순백의 자연과 야생동물을 체험하는 생태관광을 즐기려는 방문객이 최근 부쩍 늘었다.

한국에서 아르헨티나까지: 인천공항~카타르 도하(10시간)~브라질 상파울루를 경유해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16시간)~1박~우슈아이아(4시간). 겁나게 긴 하늘길이다.

우슈아이아~남극: 남극행 우슈아이아호는 2900t급 크루즈선. 승객 84명과 승무원 38명 등 122명까지 태울 수 있다. 거칠기로 악명 높은 드레이크 수로를 지나 남셔틀랜드 군도(South Shetland Islands)에 도착하는 이틀 동안 적잖은 흔들림을 각오해야 한다.

남극 투어: 대륙 트레킹, 빙산 크루즈, 펭귄·물범·범고래 생태 관찰, 각국 과학기지 탐방 등 4일 일정으로 진행된다.

준비물: 방한·방수복과 방한모, 장갑과 선글라스, 자외선 차단 로션은 필수품. 하선할 때 꼭 신어야 하는 무릎까지 오는 장화는 준비돼 있다.

우슈아이아호 생활 ①영어와 스페인어가 공용어로 사용된다. ②위성전화는 1분 통화에 3달러. 이메일을 보낼 수 있지만 인터넷 사용은 불가능. ③전압은 110볼트. 납작한 핀이 달린 전용 어댑터 필요. ④식사는 100% 양식. 남극 대륙을 떠나는 날에는 바비큐 만찬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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