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는 쪽은 가볍게 한 사람만 달랑 타는 경우가 거의 없다. 무게를 달아서 요금을 책정하는 기준 및 시스템 같은 것도 없다. ⓒ 이형수 (※ 사진을 클릭하시면 크게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시티오브조이'라고 하면, 누구나 알 것이라 여겼는데, 요즘 젊은 세대들 중에는 모르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1992년에 영화로 만들어진 작품이라서, 이미 20년이나 가까이 된 영화인걸 생각하면, 모른다고 해도 그리 이상할 일도 아닌 것 같다. 그래도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 알고있을 만한 영화가 바로 '시티오브조이'다. 미션과 킬링필드 등의 수작들로 이미 아카데미상을 탔었던 롤랑조페가 메가폰을 잡았던 영화라고 하면 도움이 될 듯. 나는 이 영화를 한참 후인 30살이 되기 직전에 봤다. 그러나 학창시절, 길에 보았던 인상적인 포스터는 그 전부터 머리 속에 남아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시티오브 조이만큼 내게 인도에 대해서 잘 가르쳐준 영화나 책은 없었다.

하지만 영화가 나왔을 당시엔, 영화 내용은 고사하고, 인도란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중동으로 가는 길목의 거대한 나라, '인더스 문명의 태고지'라고 들어만 봤을 뿐, 얼마나 깊은 역사를 가진 나라인지… 얼마나 많은 사람과 많은 종교, 많은 문화가 공존하는 나라인지 조차 전혀 알지 못했다. 국제화가 급속하게 이루어진 지금도 밸리댄스라든지, 요가 등 수출용으로 상업화된 인도의 문화에서부터 교과서에 나오는 역사,  그리고 관광 책자에 나오는 타지마할의 아름다운 사진을 통해서 사람들은 인도를 피상적으로 접하지 않는가.

테레사 수녀님이 잠드신 Mother house. ⓒ 이형수

어느 나라나 그렇겠지만, 인도는 가보기 전에는 이야기 하기가 특히나 힘든 나라다.
마음과 영혼으로 느껴야 되는 나라라고도 얘기한다. 그런 인도로 가는 이는 누구나, 통상적으로 인도의 3대 메가시티 중 하나에 착륙해서 가게 되는데, 그 메가시티란 델리, 뭄바이, 그리고 꼴까따(구,캘커타)다.

이 씨티오브조이의 배경이 바로 그 사람 많은 메가시티 중에서 제일 지저분하고 가난한 도시로 알려진 꼴까따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 꼴까따는 테레사 수녀가 말기 환자(나병 환자)를 위한 요양소를 비롯한 많은 선행을 한 곳이기도 하다.

영화에서는 바로 이 꼴까따가 절망과 희망이 공존하는 도시로 비춰진다. 가뭄이 흉년을 불러온 비하르(bihar)지방의 평범한 농부 하사리 팔(Hasari Pal)이 가난과 소작농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아내와 아들둘 딸하나를 데리고 무작정 웨스트 벵갈 최대의 도시인 꼴까따로 향한다. 하지만 그 꼴까따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성공의 꿈이 아니라, 그들과 똑같은 처지의 수많은 빈민과 사기꾼, 가진자가 부리는 권력의 횡포 등. 그들이 순박한 시골에서 보지 못했던 인간들의 온갖 추한 모습과 삶의 치열함이었다. 그런 잔인한 현실에 부딪혀 갈 곳을 잃고, 길 바닥에서 한 가족이 여러 밤을 지새는 동안, 하사리가 어렵게 얻은 직업이 바로 릭샤왈라.

※ 릭샤왈라 : 인력거 또는 영화에서 human horse(인간말)이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미국에서 의사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무작정 인도로 온 '닥터 맥스'분의 패트릭스웨이지가 인력거인 릭샤뒤에서 환호하는 모습. 릭샤왈라인 하사리 팔과 닥터 맥스의 우정을 그리는 장면. ⓒ 이형수
하사리는 간신히 얻은 직업에 뛸듯이 기뻐하지만, 모든 종류의 운송 수단이 개미처럼 얽힌 복잡한 시내를 맨발로 달리는 일은. 기술, 지식 아무것도 제시할 것이 없는 사람이 맨몸으로 할 수 있는 가장 힘든 직업 중 하나이다.

언제 사고가 날지 모르는 거리 위를 쉴새 없이 달려야 하는 열악한 환경 속에 살아야 하는 것이다. 영화에서 이 릭샤는 주변 빈민들을 불러모으는 거대한 메기의 입 같은 꼴까따의 치열한 삶, 그리고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꺼지지 않는 에너지 전체를 상징하는 심볼이 된다. 주인공인 하사리는 매일 뼈가 쑤시는 고통과 결핵에 걸리는 와중에서도 릭샤로 버는 푼돈을 모아, 딸인 암리타를 시집 보내겠다는 희망으로 살아간다.

※ 원판 책을 읽어보면, 당시 웨스트벵갈과 비하르 지방에서는 딸을 시집보내기 위해서는 Dowry(결혼 지참금)가 필요한데, 딸을 시집 못 보내는 것만큼 아버지로써 불명예는 없다고 한다.

사실, 이 시티오브조이는 단순히, 릭샤왈라(인력거꾼)과 닥터맥스라는 사람의 드라마 이상의 가치가 있다. 영화에서는 극적인 장면만을 하이라이트 하기 위해, 책 내용중 많은 부분이 생략되어 있지만, 원판인 책은 마치 인도를 소개하는 교과서가 따로 필요 없을만큼 많은 문화가 맛있는 양념처럼 가미되어있다. 저자인 도미닉 라피에르는  십수년동안 꼴까따와 인도에서의 경험과 릭샤꾼들과의 인터뷰로, 이 책을 완성했다. 하사리 팔이나, 그 주변인물들이 소설 속 인물이지만, 그 책의 스토리는 허구가 아니라, 그가 보고, 경험했던 인도인들의 삶 그 자체였다.

영화도 수작이지만, 원판인 책은 영화에서 언급되지 않은 세세하고 가슴 짠한 얘기들이 훨씬 더 많은 수작이므로, 한번씩 다 읽어보길 권유한다.

꼴까따에 와서 처음 찍은 사진, 빈 릭샤를 끄는 릭샤왈라가 보인다. ⓒ 이형수
이 훌륭한 작품의 심볼인 이 릭샤(인력거)를 아직도 꼴까따에서는 만날수 있다.

여행자거리인 Sudder St.와 주변 시장에서 특히나 많이 볼 수 있는데, 현재 관광상품이 아닌 생계형 인력거꾼은 이곳 꼴까따만이 유일하게 남아있다고 한다. 사실 꼴까따에서는 교통체증으로 인력거의 수를 줄이고 있다.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풍경이 될지 모를 일이다.

비오는 날 sudder st의 릭샤, 릭샤는 그들에게 우산이며 집이다. ⓒ 이형수
여행자들 중에는 인력거를 타지 않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 그 이유는 일단 가격흥정을 해야되고, 그 보다 큰 이유는 인력거 꾼이 대개 깡마르고, 늙은 탓에, 죄책감을 느끼고, 불편해 하는 탓이다. 하지만, 인력거꾼에게는 자신의 뒤에 타는 손님이 가벼운 어린 아이든, 뚱뚱하든, 자신의 일에 충실할 뿐이며, 그 일로 내일 아침 밥벌이를 할 수 있다면, 당신이 몇 kg이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깡마른 인력거꾼이 힘든 일을 하는게 안타깝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당신이 그에게 다른 직업을 만들어 줄 능력이 없다면, 인력거를 타는게 그를 도와주는 일이고 그들의 직업을 존중해주는 일이 될 것 이다.

사실 인도에는 그날 벌지 못하면, 말 그대로 내일의 먹을거리를 걱정해야 되는 사람이 많다. 많은 릭샤왈라들도 그런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그마저도 그들이 건강하게 뛸 수 있을때까지라는 것.

꼴까따의 도로는 차와 릭샤,오토바이뿐아니라 소, 염소 등의 통로이기도 하다. ⓒ 이형수
흥정의 경우도, 릭샤왈라들이 관광객 상대로 바가지를 치기도 하지만, 그건 인도 어디서나 있는 일이며, 인도를 편안히 여행하려면 오히려, 흥정에 재미를 느끼고, 익숙해지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 심지어 영화에서도, 순진한 농부였던 하사리마저, 딸의 사리를 살 돈을 모으기 위해 손님의 거스름 돈을 떼먹는 장면이 나온다.

인도에서는 단 몇 푼의 바가지에 열을 올리기 보단, 그 경험으로 우리 일상에서는 느껴보지 못하는 그들 만의 삶 속에서 볼 수 있는 매순간 치열함을 느껴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외모로 보기엔, 노인정에 있어야 할 분들이 릭샤를 끄시기도 한다. 하지만 고생을 해서 그런지 외모로 보이는 것 보다는 나이가 대부분 적다. ⓒ 이형수
영화에서는 인도에서 가장 가난하다고 하는 Bihar지방의 사람들이 주로 꼴까따에서 릭샤왈라(인력거꾼)을 하고 있지만, 최근에는 이웃 나라인 방글라데시에서도 와서 릭샤를 끈다고 한다. 책에서처럼 아직도, 릭샤를 독점하고 있는 부자 몇몇에게 버는 돈의 절반 이상을 높은 대여료로 지급해야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재도 그들의 힘든 삶이 릭샤를 끌어서 개선될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 이형수

꼴까따에 온 이후, 나는 며칠동안 릭샤에 넋을 잃고 있었다. 저 큰 바퀴 위로 어떤 사연을 짊어지고, 달리고 있을까? 뒤에 탄 승객이나, 짐이 아무리 무거운들, 눈에 보이지 않는 그들의 삶의 굴레와 사연들만큼 무겁지는 않을 것 같았다. 저 사람들은 가족이 있을까? 영화처럼 가족을 홀로 먹여살리고 있을까? 몸에 병은 없을까? 잠은 어디에서 잘까?

(좌) 릭샤는 비를 피하게 해주는 쉘터고, 씨에스타를 위한 침대이기도 하다. (우) 릭샤왈라에게 다리를 다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나쁜 소식이다. 다리를 다쳐, 일을 못하게 된 릭샤왈라와 그를 대신해서 일하는 친구. ⓒ 이형수
사진을 찍으면서, 저 사람들의 깡마르고 단단한 몸,굳은 표정과 터질 것 같은 다리의 핏줄을 내가 나중에라도 다시 보면, 적어도 내일 아침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내 생활에 감사하며, 주위에 힘든 사람들을 다시 한번 돌아보는 계기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얼마나 이 릭샤왈라를 볼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이 가장 기초적이며 원시적인 운송수단이 아직도 굴러다닌다는 것은, 단순히 영화에 나왔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운송수단이 가지지 못하는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근거리를 택시보다 싸고, 빠르게 갈 수 있다는 장점뿐아니라, 거친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이들의 치열한 삶 속에서 묻어나는 인간미, 정감 때문일 것이다.



혼과 철학이 담겨있는 곳으로 떠나다

세계에서 7번째로 넓은 국토 면적을 자랑하는 인도는 여행자들을 무척 고민하게 만드는 나라다. 북인도와 남인도의 개성 강한 도시들을 비롯해 다양한 종교 유적지들, 독특한 인도인 삶이 묻어나는 장소 등 구석구석 둘러볼 곳이 많기 때문이다. 한정된 시간에 인도를 좀 더 알차게 둘러보고 싶다면 몇 가지 테마를 정해 목적지를 정하는 것이 좋다. 현지인들에게 중요한 의미가 되는 가트와 종교 문화 유적지를 둘러보는 일정도 추천할 만하다.

↑ 사르나트

↑ 아그라 타지마할

◆ 다양한 사연 담은 종교 유적지 오랜 역사를 거쳐 왔으며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인도에는 역사적인 문화유산이 무척 많다. 그중에서도 아그라에 위치한 타지마할은 인도의 상징이자 세계적으로 불가사의한 건축물로 꼽힌다.

타지마할은 무굴 제국 5대 황제 샤쟈한의 부인 뭄타즈 마할 무덤으로, 인도 이슬람 예술의 걸작이라고 평가받는다. 순백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궁전 같은 모습이 눈부시다. 공사기간 22년에 2만여 명이 동원되었고 1653년에 완공되었다. 물안개가 낀 새벽녘과 해가 질 무렵 석양과 어우러진 타지마할 모습이 특히 인상적이다.

이번에는 인도가 자랑하는 또 다른 유적지, 아잔타 동굴군을 찾아가보자. BC 2세기부터 AD 7세기에 걸쳐 형성된 것으로 미완굴을 포함해서 30개 석굴이 있다. 아잔타 석굴 사원은 모두 불교 동굴로 이뤄졌고 동굴 안에는 생동감 넘치는 벽화가 가득하다. 흙이나 점토 등으로 그림을 그리고 색칠한 벽화들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인디아게이트'라고 하는 인도문은 인도 역사의 한 부분을 보여주는 건축물로 뭄바이와 델리 두 군데에 세워져 있다. 뉴델리 중심가, 코넛플레이스에서 동남쪽으로 2.5㎞ 지점에 위치한 델리 인도문은 1차 세계대전 때 전사한 인도 병사들을 위한 위령비다. 높이가 42m로 멀리서도 잘 보이며 뒤로는 국회의사당 건물과 정부 청사 건물이 서 있다.

델리에는 또 인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이슬람 사원 '자미 마스지드'가 있다. 타지마할을 완성한 샤자한 황제가 세운 건축물로 1658년에 완공되었다. 인도와 이슬람 양식을 적절하게 혼합했으며 약 2만명이 동시에 무릎을 꿇고 경배를 올릴 수 있을 규모를 자랑한다.

40m 높이로 양쪽에 솟은 뾰족한 탑도 인상적이다. 일반인에게 개방된 남쪽 탑에 올라가면 델리 시내가 한눈에 펼쳐진다. 자미 마스지드 사원 주변으로는 많은 상점이 늘어서 있어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고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인다.

◆ 인도인 삶의 일부, 가트많은 여행자들이 인도 여행에서 기억에 남는 곳으로 꼽는 곳이 바로 '가트(Ghat)'다. 인도 북부를 흐르는 갠지스강가에 위치한 가트는 강 옆에 이어진 돌계단을 말한다. 강을 따라서 100여 개 가트가 조성되어 있는데 화장터와 빨래터, 목욕탕 등 여러 용도로 사용돼 여행자 눈길을 끈다.

바라나시 젖줄이기도 한 갠지스강은 인도인들에게 '어머니의 강'으로 불리며 오래전부터 성스러운 것으로 여겨져 왔다. 또 강 곳곳에 인도인 사상과 삶의 모습이 녹아 있다. 갠지스강 가트에는 화장터가 여러 곳 위치해 하루에도 많은 시신들이 화장된다. 한쪽에는 강물에서 목욕을 하며 수영을 즐기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상반된 모습들이 낯설게 느껴지지만 육체에서 영혼이 해방하는 화장 의식을 성스럽게 생각하는 인도인 사상을 이해하고 본다면 공감이 되는 부분도 있다.

가트 중에는 집단 빨래터로 이용되는 곳도 많은데, 이를 도비가트라고 한다. '도비(Dhobi)'는 빨래하는 것을 직업으로 가진 사람들로 그들의 공동 작업장이자 일종의 대형 세탁소라 할 수 있는 장소들이 가트에 위치해 있다.

'도비가트'는 인도 뭄바이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풍경으로 많은 여행객이 들르는 곳이다. 180년 넘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도 놀랍다. 뭄바이 시내에서 수거된 많은 빨랫감이 이곳에서 사람들 손으로 세탁되는 모습에서 이들 애환과 인도에 아직 남아 있는 신분제도를 엿볼 수 있다.

아프리카 ‘동물의 왕국’에서나 봤을 아득한 풍경이 인도에서 재현된다. 인도 아삼주(아쌈주)의 카지란가(카지랑가) 국립공원은 코뿔소와 코끼리가 유유자적 거니는 야생초원이다. 에코투어를 갈망하는 유럽인들이 때묻지 않은 풍광에 매료돼 찾아드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이다.

코끼리를 타고 외뿔 코뿔소 가까운 곳까지 다가설 수 있다.



외뿔 코뿔소가 뛰노는 세계유산

카지란가에서는 코끼리를 타고 코뿔소를 보러 간다. ‘아삼’하면 끝없는 차밭만을 연상했는데 꼭 그것만은 아니다. 드넓은 녹지대를 벗어나 달리면 차밭보다 광활한 초원이 펼쳐진다. 상상 밖, 마주치는 생경한 장면들은 거대한 땅덩이 인도가 뿜어내는 또 다른 매력이다.

인도 동북부 브라마푸트라강 남쪽에 위치한 카지란가 국립공원의 넓이는 430㎢, 그중 66%가 초원이다. 야생동물 보호구역인 이곳에서 멸종위기의 인도산 외뿔 코뿔소 1,800여 마리가 서식한다. 세계 3분의 2가 여기에 있다. 세계에서 가장 밀도 높은 호랑이 밀집지역 중 하나이고 물소, 사슴, 몽구스, 긴팔원숭이도 같이 뛰논다. 국제자연보전연맹(IUCN)이 멸종위기로 분류한 15종의 동물이 곳곳에 흩어져 산다.

어미 코끼리와 동행하는 새끼 코끼리.

한국인들에게는 생경한 장소지만 유럽인들에게는 남아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야생동물의 서식지로 통한다. 지프차를 타고 오가는 사람들의 국적이 독일, 네덜란드 등 제각각이다. 좋은 숙소는 두세 달 전 마감되고, 입장 수가 제한된 국립공원 역시 서둘러 예약이 동난다.



코끼리 타고 코뿔소를 구경하다

공원 구경은 지프차나 코끼리를 타고 진행된다. 코홀라 마을을 지나 공원 경계를 넘어선 지프차들은 코끼리 앞에 일단 멈춰 선다. 이곳에서의 코끼리 탑승은 뭔가 좀 다르다. 어미 코끼리 곁을 새끼가 쫓는 생경한 풍경이다. 게다가 총을 든 안전요원이 동행을 하고 길이 아닌 초원으로 방향을 잡는다. ‘그 총 뭐냐’고 손짓하면 총잡이가 “타이거!(호랑이), 리노!(코뿔소)” 때문이라고 간결히 답한다.

광활한 공원은 지프차로 달리며 구석구석을 감상할 수 있다.

길목을 가로막은 코뿔소. 코뿔소의 최고속도는 80km에 달한다.

사실 호랑이는 보기 어려워도 코뿔소는 흔하게 마주친다. 굼뜬 코뿔소를 따라 열대초원의 질퍽한 길을 코끼리가 쫓는다. 코뿔소와 야생물소들의 꽁무니에는 새들이 한가롭게 매달려 있다. 느림보처럼 보이지만 코뿔소의 순간 최고속도는 시속 80km에 달한다. 안전요원이 동행하고, 길목에서 코뿔소를 마주친 지프차가 부리나케 내달린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렇게 만나는 코뿔소와 코끼리는 공원 투어의 일부일 뿐이다. 동물 군락은 습지를 따라 일렬로 아득하게 도열한다. 인간이 오가는 길목을 벗어나 브라마푸트라강변을 따라 멀리 목격되는 무리들의 모습은 평화롭다. 감동의 슬라이드가 느리게 넘어가는 잊지 못할 풍경이다. 모두들 말문을 닫은 채 그 풍경에 빠져들게 된다.

카지란가 투어는 4월까지가 적기다. 5월에 접어들면 우기가 시작된다. 2,000mm가 넘는 비가 내리며 브라마푸트라강이 범람해 카지란가 전체가 습지대로 변한다. 카지란가 사파리는 코호라 마을 외에도 서부 나가온(나가옹) 지역에서도 가능하다. 숙소는 코호라 마을 일대에 밀집돼 있다. 4성급의 깔끔한 리조트도 들어서 있으며 숙소에서는 현지인들의 민속쇼도 관람할 수 있다.

아삼주를 대표하는 차밭. 차는 이곳 사람들의 주 수입원이다.

국립공원의 관문인 코호라 마을에서 이곳 현지인들을 만나는 것도 즐겁다. 그들의 생활상은 국립공원에 사는 동물처럼 순박하다. 같은 관광지라도 전하는 미소가 도시와는 다르다. 동네 이발소에서 머리를 손질하는 장면도 정겹고 아침이면 차이(짜이) 한잔을 마시는 모습도 친근하다. 계급적 차이에 상관없이 인도인들은 ‘차이’를 공유하며 일상생활의 평화를 함께 나눈다. 차이 한잔은 4루피(약 100원). 인도식 부침개인 로티(로띠) 한 장까지 곁들이면 인도식 ‘브런치’로 훌륭한 메뉴다.

아삼주로 가는 길에는 인도 뒷골목의 외딴 풍경과 조우하게 된다.

아삼주 경계선을 넘어서 실롱지역으로 들어서면 인도 북부의 희고 훤칠한 아리안계도 아니고, 남부의 짤막하고 검은 피부의 드라비다계도 아닌 다양한 소수민족을 만나게 된다. 눈에 익숙한 동아시아인의 순박한 얼굴은 카지란가에서 조우했던 코뿔소의 눈망울처럼 골목마다 따사롭게 담겨 있다.


가는 길
한국에서 카지란가까지는 델리콜카타 등을 경유하는게 일반적이다. 카지란가까지는 조르하트 공항이나 아삼주의 주도 가우하티(구와하티)를 거쳐 이동한다. 인도 입국에는 비자가 필요하다. 카지란가 지역은 낮에는 더워도 아침, 저녁 기온은 선선한 편이다. 카지란가 현지투어를 위해서는 사전 예약을 해야 한다. 인도관광청을 통해 자세한 현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 인도 자이푸르의 거리모습

경중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사람들은 저마다 중독증에 시달린다.

사랑에, 영화에, 돈에, 알코올에 그리고 사람에. 집 떠나면 고생인 줄 알면서도 틈만 나면 떠나고 싶어 쩔쩔매게 되니, 여행 역시 중독의 기운이 있다. 그리고 여행목적지 가운데 가장 중독성이 강한 곳을 고르라면 하릴없이 인도를 꼽게 된다.

인도를 한 번이라도 다녀온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보면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너무 너무 좋아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와 "고생을 하도해서 생각도 하기 싫다"는 두 부류로 극명하게 갈린다는 점이다. 더 흥미로운 발견은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두 진영의 의견이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는 것.

"인도에 다시 가고 싶다"로, "인도가 자꾸만 부른다"로, 무엇이 인도 중독증을 불러일으키는 것일까. 무엇이 그 수많은 관광지 중에서도 인도를 독특한 자리에 위치 지우는 것일까. 어떤 광휘로 사람들의 마음을 몰아치는 것일까.

그 해답의 단초는 극단의 경험에서 오는 어떤 깨달음에서 찾아야하지 않을까 싶다.

세상의 어느 나라이건 간에 저쪽 끝과 이쪽 끝, 저편과 이편 사이의 간극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겠지만 인도만큼 유별난 곳도 드물다. 최고와 최저, 무한과 유한, 화려함과 초라함 등 양 극단의 모습을 시치미 뚝 떼고 보여 준다.

양쪽 끝을 체험하는 것이 한편으로는 어지럽고 적잖이 당황스럽지만 인도 여행이 끝날 즈음에는 그렇게 느끼는 것조차 사치스럽게 느껴진다. 어느 시점부터라고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그저 보면 느끼고, 느끼면 보인다는 마음가짐이 자연스레 자리 잡게 된다.



↑ 인도 자이푸르의 거리모습

극단의 모습을 오간다는 것은 인도가 그만큼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뜻도 된다.

길거리 여기저기에는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소들과 구걸하는 사람들이 즐비한 반면 과거 지배층의 맥을 잇는 현재 인도 부호들의 여유로움은 상상을 초월한다.

봉건시대에서나 남아 있음직한 신분제도인 카스트 제도가 뉴 밀레니엄의 시대에도 버젓이 남아 있고, 불교와 힌두교의 발상지로서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신들이 존재하기도 한다.

수많은 문화유적과 고단한 삶의 애환은 최첨단 테크놀로지와 어깨를 부딪는다. 어딘가 허전해 보이고 가열찬 희망의 빛이 희박한 듯 하면서도 볼리우드라 불릴 정도로 많은 영화를 생산해내고 있다. 영화가 꿈의 공장임을 떠올릴 때 참 묘한 이중성이란 생각이 든다.

서로 융화화기 어려울 것 같은 다양한 면을 통해 얻는 깨달음이 인도 기행의 가장 큰 매력이자 수확임을 감안하면 인도에 대한 지레짐작, 예단은 당연히 금기사항에 속한다. 다시 말해 인도는 너무 거대하고 복잡다단하여 인간의 조악한 마음과 작은 머리로 가늠하기란 어림없는 일이다.

예를 들어 인도하면 바랜 황토빛만이 너울거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빨강, 노랑, 파랑, 분홍 등의 선명한 원색이 눈길을 잡아끌기도 한다.

어떤 로맨틱한 기운마저 피워 올린다. 그리고 인도의 어느 주보다도 화려하고 강렬함을 전하는 곳이 있으니 바로 인도 북서부의 라자스탄이다. 그리고 라자스탄의 주도가 바로 자이푸르다.

◈극단의 미학이 펼쳐지다

파키스탄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라자스탄은 독특한 느낌으로 중무장한 곳.

역사가 뿜어내는 신비로운 전설과 다양한 이야기 거리들이 발길에 채이고, 광활한 사막을 울타리 삼은 아름다운 궁전과 산과 호수가 신비스런 분위기를 자아낸다. 라자스탄은 인도에서도 대표적인 저개발 지역이다.

인구밀도도 가장 낮고 문자가득률 또한 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 지역 주민들의 자부심은 다른 지역 사람들의 그것보다 훨씬 더 팽팽한데, 면면히 흘러온 역사 그리고 라즈푸트족과 관련이 있다.



↑ 인도 자이푸르의 거리모습

라자스탄이 역사의 한 페이지에 본격적으로 이름을 내민 것은 기원 후 4세기에서 6세기 경. 8세기에서 12세기에는 오늘날 라자스탄의 특색과 전통을 이루는 데 골간이 되는 라즈푸트의 여러 왕조가 흥과 쇠를 거듭했다.

힌두교를 신봉하는 라즈푸트족은 용맹스러운 전사였다. 전쟁에 임하면 죽을지언정 물러서지 않는 불퇴전의 정신으로 유명했다. 이러한 용맹함이 있었기에 인도 전역을 통일하였던무굴제국도 라자스탄만은 무력에 의한 점령 포기하고 혼인을 통한 유화정책으로 화해를 이뤄냈다.

라즈푸트족의 남자들은 전쟁에서 전세가 불리하면 목숨을 초개같이 버렸을 뿐만 아니라 여자와 아이들마저 적을 피해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러한 불굴의 의지가 오늘날의 자부심을 형성했다.

라자스탄의 여행은 자이푸르에서부터 시동을 걸어야 한다.

인도의 수도 델리, 타지마할이 있는 아그라와 더불어 소위 '골든 트라이앵글'로 불린다. 인도의 참모습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코스로 힌두문화와 이슬람문화가 어우러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델리와 아그라에 무굴제국의 흔적인 선연하게 남아 있는 반면에 자이푸르는 힌두문화가 잘 보존되어 있다.

인도 콜카타(Kolkata, 구 캘커타)는 두 얼굴의 도시다. 영국풍의 정제된 건물과 뒷골목의 삶이 한 공간에 뒤엉켜 있다. 영국 식민지 시대 때 수도였던 화려한 경력의 이면에는 서민들의 애환과 생채기도 남아 있다. 갠지스강(갠지즈강)의 지류인 후글리강과 낡은 트램은 도시의 지난한 세월을 묵묵히 가로지른다.

갠지스강의 지류인 후글리강은 콜카타 서민들에게 삶의 버팀목이자 성스러운 존재다.

콜카타는 색의 대비가 강하다. ‘이국적인 인도’에 대한 깊은 인상은 색감이 던져주는 화려함 때문인지도 모른다. 콜카타의 첫인상은 노란색 택시로 채워진다. ‘블랙’이 뒤섞인 델리뭄바이의 택시와는 또 다르다. 뜨거운 태양 아래 번쩍이는 택시의 행렬은 이질감을 더욱 증폭시킨다.




영국풍의 거리에 취하다


런던의 한 골목을 걷고 있다는 착각을 부추기는 것은 영국풍의 단아한 건물들이다. 초우링기(Chowringhee) 거리를 지나치다 보면 영국 식민지 시절의 잔영들과 맞닥뜨린다. 그중 ‘빅토리아 기념관(빅토리아 메모리얼, Victoria Memorial)’은 콜카타 여행의 상징 같은 건축물이다. 빅토리아 여왕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기념관은 도시에 흐르는 면면을 잘 대변한다. 본 건물은 유럽풍으로 지어졌지만 돔은 인도 무굴식이며 내부는 영국 왕실의 역사와 업적을 담아내고 있다. 기념관 앞의 연못과 잔디밭은 젊은 청춘들의 밀애 장소다. 흰색의 뽀얀 건물과 짙은 피부색의 민족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것에서 도시의 지난한 과거가 엿보인다.

빅토리아 여왕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빅토리아 기념관’.


대영제국의 좀 더 깊은 잔영을 만나고 싶다면 ‘비비디 박(B. B. D. Bagh)’으로 향한다. 식민지 시대의 건물들은 그 용도를 달리하며 나란히 늘어서 있다. 분명 콜카타의 중심거리가 맞는데 도시를 가로지르는 트램이나 택시, 이탈리아제 피아트 차량들이 눈을 현혹시킨다. 동인도 회사가 있던 자리에는 주정부 건물이 들어서 있고 고풍스러운 건물 옆 커다란 연못에서는 주민들은 천연덕스럽게 몸을 씻거나 낮잠을 즐긴다.

‘비비디 박’에서는 영국풍의 건물과 도심풍경을 

만날 수 있다.

콜카타의 트램은 1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며 도심을 가로지른다.


사람들이 간신히 지나는 좁은 골목으로는 오래된 트램이 달린다. 인도 내에서 트램이 있는 도시는 콜카타가 유일하다.. 최근 들어 새롭게 단장했다고 하지만 털털거리는 느린 속도에 투박한 외형은 여전하다. 1870년대에 개통된 트램은 그 역사가 100년을 훌쩍 넘어선다. 식민지 시대 때는 트램이 두 칸으로 나뉘어 운행됐다고 한다. 두 칸짜리 트램은 남아 있어도 그때처럼 계급, 남녀의 자리 구분을 두고 있지는 않다.




후글리 강변과 꽃 시장

후글리강을 따라 북쪽으로 향하면 도심의 색채가 변한다. 길은 미로처럼 복잡해지고 정돈되지 않은 서민들의 공간이 속살을 드러낸다. 사람이 직접 끄는 릭샤도 곳곳에서 눈에 띈다. 릭샤 역시 델리, 뭄바이에서는 보기 어렵게 된 교통수단이다.

오랜 콜카타의 거리에는 사람이 직접 끄는 

릭샤가 오간다.

하우라 다리 인근의 꽃시장 ‘믈리끄 가뜨’.


콜카타의 아이콘으로 여겨지는 하우라 다리(Howrah bridge)는 흙빛 후글리강을 외롭게 가로지른다. 길이가 705m에 이르는 다리는 ‘라빈드라 세투’로도 불리는데 2차대전때 지어진 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오가는 빽빽한 다리가 됐다. 교각이 없는 하우라 다리 동쪽 아래로는 꽃시장 ‘물리끄 가뜨’가 들어서 있어 뒷골목 서민들의 삶을 떠받친다. 이곳은 유럽에서 만나는 단아한 꽃시장과는 차원이 다르다. 개미 골목 사이로 꽃을 치장하고 파는 사람과 형형색색의 꽃들이 자욱하게 늘어서 있다.


꽃시장을 벗어나 붉은 담벼락을 지나면 후글리 강둑이다. 콜카타 주민들에게 후글리 강은 신성한 존재다. 해 질 녘 목욕을 하거나 성물을 바치는 행위가 강둑에서 펼쳐진다. 이국적인 도심풍경과 허상의 꽃향기를 털어내고, 가장 신성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만날 수 있는 곳도 하우라 다리가 배경이 된 이 강둑이다. 콜카타에서 숨 깊은 도시의 진면목은 이렇듯 외딴 어느 강변이나 골목에서 드러난다.

콜카타의 뒷골목으로 접어들면 

친근한 서민들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자인 페스티벌은 1년에 한 차례 열리는 자인교의 대축제다.


유럽풍이든 서민적 삶이든, 단절된 것들을 담아내는 게 종교다. 콜카타에 흩어져 있는 인도 사원들 중 쉬딸나뜨지 자인교 사원(Sheetalnathji Jain Temple)이나 깔리 힌두교 사원은 도시를 채색하는 화려한 건축물들이다. 인도 동부 사원 중 최고라는 평을 듣는 쉬딸나뜨지는 오밀조밀한 색으로 단장된 섬세한 장식들이 시선을 끈다. 1년마다 한번 보름에 펼쳐진다는 자인 페스티벌 때는 사원 일대가 흥청거린다. 깔리 사원은 동부 벵골(벵갈) 양식의 독특한 외관이 돋보인다.

화려한 장식이 돋보이는 쉬딸나뜨지 사원.

빈민들의 어머니로 노벨 평화상을 받은 마더 테레사의 집.


콜카타는 노벨상을 받은 위인들의 흔적을 만날 수 있어 더욱 의미 깊다. 빈민을 위해 생애를 바쳤던 마더 테레사의 집과 시인 타고르의 생가도 시내에 남아 있다. 수도가 델리로 옮겨진 이후에도 콜카타를 지성과 문화의 수도로 칭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가는길
한국에서 직항 편은 없다. 제트 에어웨이즈(Jet Airways) 등을 이용해 방콕을 경유하는 게 편리하다. 델리, 뭄바이 등 인도 각지에서도 연결편이 다수 있다. 인도 입국 때는 비자가 필요한데 비자 받는 과정은 많이 까다로워졌다. 콜카타는 환전소에 따라 환율에 차이가 있는 편이다. 인도관광청(www.incredibleindia.co.kr )을 통해 다양한 현지정보를 얻을 수 있다. 콜카타의 트램은 고풍스런 여행을 위해서라도 한번 타보면 좋다.

내가 이곳에서 살지 않을까? 황홀함에 점점 빠져든다. ⓒ이형수 (※사진을 클릭하시면, 큰 이미지로 화보를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내 삶에서 실제로 유령을 본적은 없다. 유령은 고사하고, 가위에 눌려본 적도 없다. 하지만 꼭 유령을 만나보고 싶었고, 마치 만날 것만 같았던 장소가 있었다. 사람을 놀래키는 '한(悍)' 많은 유령이 아니라, 미래에서 온 여행객에게 과거의 이야기를 조용하게 들려줄 것만 같은 그런 유령.

내가 묵었던 숙소는 'Shiva guesthouse' 바로 옆이었다. 밤마다 옥상에 올라가 의자에 앉아있으면 저 장엄한 짜투르부즈(Chaturbhuj)이 음산하면서도, 고요함을 가져다 주었다. 밤마다 저 안에서는 무슨일이 일어날까 궁금해하면서… ⓒ이형수
인도 북중부를 여행하다 우연히 들른곳, Orchaa에서 나는 그런 유령을 만나고 싶었다.

오르차는 8~90년대 히피여행자들의 주 서식지(?)였지만, 이제는 꽤나 알려진 탓에, 한국여행자도 곧잘 들르는 곳이다. 그런 얘기를 듣고 방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처음에는 이곳의 매력에 대해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은 하루가 지날수록 내게는 알수 없는 매력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인도 특유의 향 냄새도,여기저기 널려있는 소똥들도, 형형색색의 사리도, 털복숭이 사두들도 아니었다.

내게 신비스러운 매력으로 다가온건 해질녘 이곳 오르차의 고성에서 느낄수 있는 신비스러운 기운이었다. 마치 이 고성에서 밤을 지새면, 17세기의 유령들이 나와, 만찬을 즐기고, 또 내게 말을 걸 것만 같았다.

Orchaa palace에는 왕과 관련된 이야기나 그당시 풍습들이 벽화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 언어는 모르지만 벽화를 통하여 이야기를 볼 수 있었다. ⓒ이형수
오르차라는 주변을 합쳐 전체 만명 밖에 안되는 이 조그만 마을에는 1501년  이후 오르차의 왕이 된 분델라라는 지도자가 세운 고성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Orchaa의 뜻은 이곳 분위기와 아주 걸맞게 숨겨진 장소(hidden place)라고 한다.

오르차에 있는 동안에도 나는 혼자였다. 덕분에 남눈치 볼 필요없이 낮동안에 부지런히 혼자 고성들을 돌아보았고, 어떨때는 닫힌 문의 깨진 틈사이로, 올라가지 말아야 되는 좁은 계단 통로를 통해 탑의 꼭대기에 올라가보기도 했다. 오르차의 고성들은 특별히 관리자가 없었지만 아름답게 보존되어 있었다.

베트와 강(Betwa)에 비친 사원들은 마치 한폭의 그림과 같다. ⓒ이형수

낮동안에는 마을 사람들도 저마다 분주하게 지나다니고, 별다른 감흥이 없을지도… 그러나 해질녘이 되면,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듯 당시 왕국의 흥망성쇠, 전쟁과 암투, 사랑, 충성, 평화, 탄압 등 모든 사건들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듯한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곤 했다.

내가 제일 좋아했던 둥근사원. 해질녘에 사원에 홀로 문틈 사이로 저 베트와(betwa)강을 바라보았다. 뒤에서 누군가와 함께 내려다 보는 착각이 들었다. ⓒ이형수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세계 최초로 죽음의 사막, 타클라마칸을 도보로 건넜던 카메라를 든 탐험가 남영호. 모래폭풍 속에서 만난 혜초의 그림자를 찾아 이번엔 인도 갠지스로 떠났다. <왕오천축국전>을 쓴 우리나라 최초의 탐험가이자 승려인 혜초는 그곳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삶과 죽음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영혼의 강’을 오직 카약에 의지해 떠돈 77일 간의 사진 기록은 지독히 아름다웠다.

<남영호 탐험사진가>

“강은 신성했으나 때론 추악했으며, 두려울 정도로 거대했다”

나는 인도에 있었다. 히말라야의 여신은 인류를 위해 인간 세상에서 강이 되어 대지를 적셨다. 사람들은 그 강을 ‘강가(힌디어·Gaⁿga)’라 부르며 세상에서 가장 신성한 곳으로 여긴다.

인도인들에게 갠지스는 어머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그리운 곳이고, 포근한 곳이고, 따뜻한 곳이다. 강물은 또한 신이 내린 선물이고 축복이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태어나고 다시 그곳으로 돌아간다.

강을 따라 많은 성스러운 도시와 신을 찬양하는 ‘만디르’(사원)가 생겨났다. 강물이 흘러온 시간보다, 흐르는 물의 양보다 많은 신과 인간들의 이야기로 차고 넘치는 갠지스.

차가운 히말의 바람과 강물은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의 땅으로 내려갈수록 그 기운은 약해졌다. 바람은 뜨거웠고 강물은 힘없이 흘러갔다. 시체가 썩어가는 냄새와 신에게 바쳐진 향 내가 섞여 강물 위를 떠다니고 ‘시바야 시바야’를 주문처럼 외는 찬송이 적막한 ‘강가’를 깨웠다. 나는 그 강물에 몸을 적신 채 긴 순례 길에 올랐다. 영혼의 강, 갠지스의 이야기, 신과 인간의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서.

인도 문게르. 사막화가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는 갠지스의 중류에는 사막의 모래바람이 불고 있다. <남영호 탐험사진가>

“신라의 순례자 혜초를 만나기 위해 또 짐을 꾸렸다. 1,300년 전, 천축국으로 길을 떠났다. 혜초의 길을 탐험하는 나는 매일같이 그에게 보내는 마지막 탐험일지를 썼다. 그 길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마지막 길, 마지막 날이라도 나는 행복했다. 타클라마칸을 건너 저 거대한 갠지스에 이르렀다. 혜초가 보았고 만났을 그 숱한 풍경과 사람들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지만 강물은 지나온 모든 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다르마의 물살에 몸을 담근 이 탐험은 아직 끝을 모른다. 갠지스의 태풍은 모든 걸 날려버렸고 나는 오랫동안 깨어나질 못했다.”- 탐험일기, 77일 중 마지막 날

인도 우타르카시. 보이는 것은 신상의 발 부분. 그곳 사람들은 가장 낮은 곳에 꽃을 바침으로써 신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남영호 탐험사진가>
인도 하리드와르. 힌두교 최대 축제인 쿰부멜라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강가엔 작은 마을이 생겨난다. <남영호 탐험사진가>
인도 바라나시. 매일 저녁 사람들은 강가에 모여 꽃과 불로 신을 찬양한다. <남영호 탐험사진가>
방글라데시 찬드푸르. 외국인의 방문이 없는 외딴 곳에서 만난 아이들은 낯선 이의 출현에 놀라 줄행랑을 쳤다. <남영호 탐험사진가>
<남영호 탐험사진가>
인도 다랄리. 텅 빈 산골마을에서 만난 아이는 적막한 마을의 풍경처럼 어떤 표정도 짓지 않았다. <남영호 탐험사진가>
히말라야에서 발원한 강물을 따라 나는 저 끝 인도양까지 먼 여행을 떠났다. 그 길은 무척 고단했지만 때론 나를 위로하고 보듬어주었다. 히말라야 산자락에서 만난 여인은 따뜻한 미소로 반겨주었고 모래바람이 불어대는 평원에선 수박농 농부가 내 갈증을 해소해주었다.

사두(힌두수행 했고 아이들은 환호와 웃음소리로 나를 즐겁게 해주었다. 시커먼 급류는 보트를 뒤집고 헤어 나오지 못하게 나를 마구 흔들어댔다. 거대한 강은 온갖 썩은 것들로 넘쳐났고 나는 그 물에서 허우적거렸다. 수많은 죽은 자들과 함께 강물을 떠다녔고, 밤마다 강가를 떠다니는 혼령들은 내 주변을 맴돌았다. 바람은 내 몸뚱이를 날려버릴 듯 거세게 불어댔고 한낮의 뜨거운 바람은 강물을, 땅을, 바람을 끓게 만들었다.

인도 바라나시. 아름다운 것 같으나 가까이 들여다보면 수많은 사연이 있는 곳이 갠지스다. <남영호 탐험사진가>


인도 리시케시.인도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었지만 결코 같지 않은 순례자. <남영호 탐험사진가>
인도 강고트리. 사두의 입에서 뿜어진 담배연기가 허공을 맴돌다 불빛을 따라 하늘로 올라갔다. 마치 수행자와 신의 교감을 지켜보는 듯했다. <남영호 탐험사진가>
방글라데시. 우리는 물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갠지스에서 나를 맞이한 것도 사람이었고, 마지막 순간을 배웅하는 것도 바로 사람들이었다. <남영호 탐험사진가>
사진을 찍고, 글을 쓴 남영호는 사진학과를 졸업하고 몇 년간 산악전문지 기자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신라의 고승 혜초의 길을 탐험과 사진이란 방식으로 재조명하고 있다. 2009년 세계에서 처음으로 타클라마칸을 도보 종단에 성공했고 올해 갠지스강 전 구간을 도보와 카약으로 탐험하며 사진으로 기록했다. 그 경험을 방송, 기고, 강연 등의 다양한 형태로 공유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앞으로도 역사 속 우리의 길을 찾아 나서는 탐험과 사진작업을 지속할 계획이다.


부처님의 땅에서 만난 인도인 동생 Anup

수자타 마을에서 보이는 전정각산의 모습. ⓒ 이형수 ※사진을 클릭하시면 큰 이미지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보드가야에 도착했을때는 10월 초순, 2개월간 내 몸이 이미 인도의 무더위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보드가야에서 만난 더위는 인도 여행의 어느때보다 참을 수 없을만큼 힘들었다. 10분마다 물을 계속 마셔주지 않으면 갈증을 느낄 정도였다.

보드가야 옆을 흐르는 큰 강은 무릎에도 차지 않을만큼 차츰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보드가야 (또는 부다가야라고도 한다)는 전 세계 불자들의 최고의 성지이다. 후에 부처가 된 싯다르타왕자가, 보리수 나무 아래서 마침내 해탈(Nirvana)에 이르렀던 바로 그 장소이기 때문이다.

마하보디 사원이라고 불리는 이 성지에 가면 아주 커다란 보리수(Bodhi tree)가 있다. 부처가 열반을 할 당시 보리수나무는 불교를 반대하던 왕에 의해 잘려져 나갔었다. 지금 성지에 자리잡은 보리수는 스리랑카의 한 공주가 원래 보리수를 스리랑카에 일부 옮겨다 키웠다가 그 후손을 다시 가져다 놓은 것이라고 한다. 매일 전세계의 수많은 승려와 불자들이 이 곳을 찾아, 절을 하고, 경전을 읽고, 명상을 한다.

(왼쪽부터) 마하보디 사원의 마하보디 대탑의 모습. 경전을 외고 있는 태국에서 온 비구니. 보디 사원 안에서 수련을 하고 있는 승려. ⓒ 이형수
우리나라에도 깊은 뿌리를 두고 있는 불교의 최초 발원지인 인도에서, 가장 성스러운 성지인 보드가야를 지나칠 수는 없었다. 당초에 보드가야에서 부처의 고뇌와 가르침을 조금이라도 느껴보려 했지만, 나는 불자도 아니었을 뿐더러, 10월 건기의 보드가야는 도착한 직후부터 나의 체력과 인내심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나는 당시 미얀마 스님들이 머무르는 수도원인 Vihara라고 하는 곳에 머물렀는데, 아침 겸 점심은 주로 Vihara앞에 있는 너저분한 식당에서 해결하곤 했다. 다시 생각해도 보드가야의 주변식당은 다른 인도지방에 비해 형편없는 수준으로 기억되지만, 그 더위에 어떤 음식이 맛있었으랴?

한 날은, 맛없는 고무 같은 오믈렛을 질겅질겅 씹고 있는데, 옆 테이블의 한 인도청년이 일본말로 인사를 해왔다. 일본인처럼 보이나 보지? 그때까지 방문했던 여느 다른 인도지방의 젊은 애들처럼, ‘뭐 한건 해먹을건 없나’ 찔러볼 수도 있고, 그냥 심심하니 말장난이나 하자는 식 일수도 있었다.

보드가야 마을 풍경. ⓒ 이형수
어떤 쪽이든, 덥고 짜증나기는 마찬가지라 퉁명스럽게, 일본인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니 이젠 한국말로 인사를 한다. 실실 웃으며, 한국말까지 하니, 왠지 더 사기꾼 같아 보였다.

몇번 말을 안 받아주다가, 계속 옆에서 웃으며 말을 거는데, 무시할 수는 없어, 한 두번 못내 말을 받아주었다. 이름은 Anup, 나이는 한 20대 초반으로 보이고, 하는일은 현재는 무직, 이전에는 어떤 불교방송의 리포터를 맡았다고 한다. 몇 마디 주고받더니, 대뜸 자기 마을을 보여줄 테니 따라 가자고 한다. 더위 때문에 어떤 것도 흥미가 동하지 않는 시기라, 이런들 어떠랴 하는 마음으로 그를 따라 나섰다.

Anup의 집은 수자타(Sujata)라는 마을 안에 있었다. 그는 마을과 주변 사원들을 두루 보여주며, 자신이 아는 흥미로운 부처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었다.

동굴 안에서 먹지 않고, 6년간의 고행을 마친 피골이 상접한 싯다르타에게 맨 처음 우유죽을 대접한 여인인 수자타 이야기부터 재미로 사람의 손가락을 잘라서 목에 걸고 다니던 악인에게 부처가 풀잎을 땐 후, 다시 붙여보라는 얘기를 들려준 후(때어진 풀잎도 다시 붙이지 못하면서, 하물며 사람의 손가락을 어떻게 뗄 수 있냐는 의미) 그 악인이 부처의 제자가 되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풀잎을 흐르는 강에 놓으니, 풀잎이 강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갔던 이야기까지 이전에는 모르고 있었던 이야기들을 하나 둘씩 해주었다.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그 이야기의 현장에 두발로 서있다고 생각하니, 옛날 속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가는듯한 착각도 들었다.

전정각산 주변 풍경, 아이들은 학교에 가야할 나이지만, 전정각산의 고행동굴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고 있었다. ⓒ 이형수
나에게 조금은 과도한 친절을 베풀어주던 Anup과는 금새 친해지게 되었고, 그와 대화를 하면서, 정직한 사람을 의심했던 내가 부끄럽게 느껴졌다. 다음 날도 나는 Anup의 오토바이로, 부처의 고행 경로 한군데를 방문했다. 바로 유명한 전정각산 싯다르타의 고행동굴이었다.

Anup이 이곳 저곳 보여주긴 했지만, Anup과 더 친해지게 된 계기는 따로 있었다. Anup은 나와 지낸 3일째, 그가 추진하고 있는 조그만 사업을 조심스레 보여주었다. 그것은 고아와 가난한 마을아이들을 위한 학교.

연령대가 다른 아이들이 시멘트 바닥에 앉아서 열심히 수업을 듣는 모습. ⓒ 이형수
손수 벽돌과 시멘트를 사와서 논 한가운데, 조그만 건물을 지었고, 그 안에 두 칸을 만들어 선생님의 사무실과 교실을 만들었다. 학교라고 할 수조차 없을 만큼, 허름한, 창문도 없고, 비나 겨우 피할 수 있는 공간이었지만, 내가 그 교실을 방문한 그날 아침, 그 아이들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는 이게 학교라는 사실을 증명하는데 충분했다. 아침에 건물에 들어가니, Anup이 개인적으로 돈을 겨우 모아 고용한 과외 선생님 한분이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나와 Anup이 들어서니 아이들이 일제히 일어나, “Good morning Sir!”라고 외쳤다. 당황한 마음에 급히 애들을 앉히고 보니, 그 조그만 공간 안에 20명이 넘는 아이들이 옹기종기 앉아 있었다. 나이가 4살 남짓한 아이부터, 16살쯤 되는 아이까지 한 교실에서 같이 배우고 있었다. 선생님이 4살 또래 애들을 가르칠때 그 나머지 연령대 아이들은 숙제를 혼자 푸는 식이었다.

(좌) Anup이 싼 월급을 주고 고용한 비정규 선생님, 전과목을 가르친다. 영어만 봤을때 문법을 많이 틀리게 가르쳐주고 있었다. (우) 숙제를 안해온 죄로 벌을 서는 모습. 쪼그려서 고개를 숙인 자세로 벌을 받는다. 벌을 서는 모습이 이채롭다. ⓒ 이형수
이상하게도 ‘이런 수업이 과연 돌아갈까?’ 하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만약 그런 생각이 들었었다면, ‘이런 건물에 아이들이 공부하러 올까?’라는 생각부터 먼저 들었어야 했을 것이다.

그렇게 교실을 방문한 첫날, 나는 일일교사가 되었다. 눈에 넣어도 아플 것 같지 않은 아이들이 알파벳이나 산수 숙제를 가지고 와서 힌디도 못하는 내게 검사를 맡으면, 틀린 것이 있는지 체크하고 사인을 해주는 역할을 했다.

학교도 가지않고, 주변 웅덩이에서 고기를 잡는 마을 아이들 모습. ⓒ 이형수
부처의 역사속 마을인 수자타 마을에는 불행히도,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이 반을 넘어선다. 인도에서 가장 못사는 주(州)인 비하르주의 어떤 마을이나 마찬가지다.
우리처럼 초등교육이 의무교육이 아닌 인도에는 글 한자라도 배우려면 돈을 내고 학교를 가야한다. 불교의 최고 성지이며, 매년 수많은 불교 순례자가 오는 그 유명한 보드가야의 바로 옆 마을은 이렇게 가난 때문에 교육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수없이 많다. 여담이지만, 부처가 태어난 불교 성지인 네팔의 룸비니도 주변 마을이 가난하며, 교육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다.

아이들의 해맑은 모습과 작은 칠판. 닳아 거의 없어진 분필로 알파벳을 적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 이형수
누군가는 이런 불쌍한 아이들을 도와야 했지만 그렇게 많은 순례자와 지역 유지들,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고 한다. 농사꾼 출신이었던 Anup라는 20대 청년이 그가 불교방송 리포터로 모은 돈과, 여기저기 관광객들이 돌아가면서 후원해주던 자투리 돈을 모아 학교를 어렵게 꾸려나가고 있던 것이다. Anup은 또 부모가 아프거나, 내버리듯 한 아이들을 주변 마을에서 데려와, 가족처럼 키우고 있었다. 결혼도 안한 청년이 돌봐주는 아이가 6명이나 되었다. 하지만 그의 큰 대의와는 달리, 사정은 좋지 않았다. 내가 방문한 날도 개인적으로 고용한 선생님이 따로 Anup을 불러 무언가를 심각하게 이야기 하였다. 나중에 Anup에게 무슨 일인지 물어보니, 선생님에게 줄 월급이 3달치가 밀려있다고 했다.

또, 어렵게 건물 옆에 아이들의 식수를 위해 설치한 수도도 어느 누군가가 밤에 뜯어갔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보드가야에서 나와 Anup이 같이 밥을 먹고 어울려 다닐때는, 주변 청년들이 질투심에 그를 사기꾼으로 모함하기도 했다. 이런 환경 속에서도 그는 그만의 학교를 힘들게 꾸려나가고 있을 것이다.

두르가푸자때는 저렇게 조금 촌스러운 인형극을 곳곳에서 한다. 내용은 두르가 여신이 악마를 처치하는 내용. 인도인 조차도 매년 보는 내용이라 흥미는 없지만, 신이 자신들을 악마로부터 보호해준다는 믿음으로 본다고 한다. ⓒ 이형수
한편, 내가 있을 무렵에는 두르가푸자(Durga Puja)라는 축제가 한창이었다. Anup과 큰 도시인 Patna까지 가서, 인도 영화도 보고, 두르가푸자의 축제 인파 속에서 즐기기도 했다. 두르가푸자는 두르가라는 여신이 악마를 처치한걸 기리는 날인데, 두르가푸자 축제 때는 학교도 휴강이라, Anup과 함께 Patna에 다녀온 다음 날에는, Anup이 돌보고 있는 아이들을 데리고, 마을 축제를 다니며, 구경도 시켜주고, 맛난 것도 사주었다.

축제일이라, 때때옷으로 한껏 멋을 낸 Anup의 아이들. ⓒ 이형수
애들과 즐겁게 놀아준 그 뒷날, 나는 내 여행을 통틀어 가장 지독한 장염에 걸렸다. 처음에는 그냥 설사이려니 했지만, 하루에도 20번이 넘게 화장실을 들락날락 거렸다. 아마도 축제때 먹었던 가내제조 아이스크림이 문제였던 것 같다.(인도사람들은 인도 물에 내성이 있지만, 나 같은 여행객들은 토종 바이러스나 균에 대한 항체가 없다) 3일간 그렇게 시름시름 앓다가, Anup의 권유로 병원에 가게 되었다.

병원에서 독한 항생제를 맞는 몇 시간 동안, Anup이 나를 지켜주었다. 치료가 끝난 후 의사가 나에게 현지인의 몇배가 넘는 바가지 요금을 매겼다. 다행이도 Anup이 의사에 항의하여 바가지 요금을 받아낼 수 있게 도와주었다. (삐걱거리는 녹슨 철제 간이 침대에 누워 링거를 맞는데, 침대 비용을 숙소 비용보다 비싸게 받았다. 링거만 꼽아줬는데도 간호 비용이라는 명목으로 몇 만원을 청구하였다.)

떠나기 전날, Anup과 아이들과 함께. ⓒ 이형수
당초 보드가야에 올때는 약 3~4일정도 머물 생각이었었지만, Anup과 그의 가족이 된 고아들과 잊지 못할 추억을 쌓으며 10일정도 머물렀다. Anup과는 아직도 brother라고 부르며 서로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 인도를 여행하며 친구가 될만한 인도인은 심심치않게 만나곤 했지만, 친구이상 마치 가족처럼 서로에게 애틋한 정이 있었던 사람은 Anup이 유일하다.

다시 인도를 돌아갈 수 있는 날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인도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가게될 곳이 Anup의 집이라는 사실은 언제가 되었든 변함 없을 것이다. 그때까지 나의 인도인 동생 Anup의 사랑의 학교가 번창하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칠까한다.


 현세의 끝에서 - 모순적인 매력이 있는 '인도 바라나시'사진으로 보는 Varanasi는 매력적인 장소지만, 이상하게도 Varanasi에서 며칠 되지 않아 지쳐버렸다. 매일같이 들어와서, 아침저녁마다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는 관광객들과 마리화나를 팔려고 끈질기게 붙는 젊은 인도 애들, 인도의 여느 도시나 마찬가지로 인파로 북적대는 바라나시에서 잠시 방향성을 잃었다고나 할까?

매일 같은 광경 속에서 특별히 할 일을 찾지 못한 나는 3일째부터는 강가에서 멍하니 강을 바라다보는 일이 잦아졌다. 때로는 시체가 떠내려오는 것도 보고, 때로는 배를 빌려 저 멀리 강 건너편에 혼자 노를 저어 가볼까 생각도 해봤다. 여행하다가 한 곳에 며칠 있게 되면, 그래도 마음에 드는 장소가 생기게 되고, 다른 곳보다 그곳에 자주 가게 되곤 하는데. Varanasi에도 그런 곳이 있었다. 지금은 그 Ghat이름이 생각이 나지 않지만, 사람들의 인적이 뜸했던 곳이었던 것만은 기억한다.

며칠 그 Ghat에서 앉아서 강을 쳐다보니, 아는 사람이 한 명 생겼다.

처음 만난을 때 Babu, 연주해달라는 부탁을 하지도 않았지만, 연주를 선보여 주었다. ⓒ 이형수

 

빠뿌의 딸 무갈 ⓒ 이형수
그 사람도 나만큼 외로이 앉아서 강가를 멍하니 쳐다보곤 했다. 그 사람 앞에서는 아들로 보이는 4~5살 된 아이가 여기저기 혼자서 뛰놀곤 했다. 이 남자의 이름은 빠뿌(Babu), 멋들어지게 기른 콧수염에, 여태껏 내가 보지 못한 악기를 하나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아쟁처럼 키는 현악기인데, 빠뿌 말로는 라자스탄 악기인 ‘라븐카’라 했다.
라자스탄이라면, 인도의 서쪽인데, 혹시 거기서 왔느냐고 하니, 라자스탄州 자이푸르 변두리 시골에 자기네 집이 있다며, 가족사진을 꺼내 보여준다.

빠뿌와 빠뿌의 딸 무갈, 그리고 동네꼬마 ⓒ 이형수
사진 속에는 무슨 동화처럼 흐릿한 초점에 아리따운 아내 옆에, 전통복장을 말끔히 차려입은 빠뿌가 라븐카를 들고, 호수를 배경으로 앉아 있다. 아이들 사진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사랑스러운 가족을 두고 라자스탄을 왜 떠났느냐고 물어봤다.

그의 얘기인즉, 라자스탄에서 만난 서양 여행객이 있었는데, 자신에게 음악을 배우다, 라자스탄 다음에는 바라나시로 갈 계획이니, 바라나시에서 다시 음악을 가르쳐달라고 했단다. 물론 교습비를 내고 말이다. 빠뿌에게는 그 교습비가 꽤 괜찮은 수입이었던 것 같다. 황당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그 말을 믿고, 빠뿌는 바라나시로 왔고, 하지만 바라나시로 온지 2주가 지났는데도 아직 그를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전화도 없이 어떤 식으로 그를 만나려고 했는지 몰라도, 그 여행객에 대한 믿음이 컸던 만큼 실망도 커 보였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한 주 전부터 시름시름 아파서, 돈벌이도 못하고, 낮 동안에 거의 Ghat에서 누워 지내는 일이 많았다. 그나마, 근처 외국에서 운영하는 무료 진료소가 있어서, 진통제류라도 조금 받아와서 먹고 있었다.

말이 통하지 않아 늘 혼자 놀아야 했던 무갈. ⓒ 이형수
하루는 지나가는 관광객 중에 독일에서 온 간호사가 있어서, 빠뿌를 좀 도와달라고 했더니, “의사를 만나보라”는 뻔한 이야기만 하고 횅하니 가버린다.
의사에게 가볼 만한 처지로 보이는지? 괜히 내가 화가 났었다.

빠뿌와 나는 거의 매일 만났고, 빠뿌의 딸(처음에는 아들인 줄만 알았다)인 무갈과도 금세 친해져, 무갈을 데리고 여기저기 구경도 다니고, 배도 태워주곤 했다.

아픈 모습의 Babu ⓒ 이형수
아버지인 빠뿌가 아프니, 무갈은 늘 혼자 놀아야 했고, 그것도 라자스탄 말이 바라나시에서 쓰는 말과 달라, 친구도 만들기 어려웠다. 매일 같은 옷에다, 아직 뒷 처리도 아버지가 주로 해주는데, 며칠이 지나니 옷에서 냄새도 나고, 씻겨주고 싶은 맘이 한결같았으나, 남의 딸을 내가 씻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버지가 아픈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래도 무갈은 해맑게 까르르 웃으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빠뿌와 내가 짜이를 마시면, 어느새 금세 나타나서 자기 것도 시켜서 배달해온다.

빠뿌와 만나는 동안 만 31번째 생일을 맞았는데, 빠뿌가 내 생일 축하곡을 직접 연주해주었다.

내 생일날 곡을 연주해준 Babu. ⓒ이형수

 

매일 몇 잔이고 마시던 설탕과 같던 짜이. ⓒ 이형수
빠뿌, 무갈과 며칠간 계속 지냈지만, 내가 바라나시를 떠나야 하는 날이 하루하루 다가왔다. 마음 같아서는 더 있고 싶었지만, 여행이 1년도 넘어간 시점에 이별과 만남은 싫어도 받아들여야 하는 운명의 고리같이 느껴졌다.

떠나기 전, 빠뿌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래도 뭐라도 한줌 쥐어주는 것 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늘 설탕이 반인 짜이로 배를 채우는 무갈이 안쓰러워 저녁이라도 같이 한끼 사서 먹이라고, 돈을 좀 쥐어줬다. 다음 날 아침에 물어보니, 그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던 협잡꾼한테 사모사(인도식 튀김만두)를 좀 사오라고 시켰는데, 그 길로 날라버렸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그 인간을 같이 보곤 했는데 그날 이후로 볼 수 없었다.

잘 못 먹는 무갈이 안타까워 무갈을 데리고, 근처 한국식당에 가서, 애들이 좋아하는 치킨가스를 사서 먹였더니, 너무 잘 먹었다. 한번은 돈 없는 빠뿌에게 비싼 치킨가스를 사달라고 할까봐, 그 집을 지나쳤더니, 온 동네가 떠나가라고 울어 재꼈다. 할 수 없이 또 사줘야만 했다.

떠나는 날 밤, 내 손에 장난감 헤나로 문양을 그리는 귀여운 무갈. ⓒ 이형수
마지막 떠나는 날 밤, 아쉬움을 달래며 밤늦게까지 이 부녀와 같이 있었다. 빠뿌의 몸도 그렇고, 그 서양여행객이 나타날 일도 없고, 홀로 노는 무갈을 위해서도 최선의 방법은 라자스탄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판단되었다. 라자스탄으로 돌아갈 수 없는 또 다른 어떤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라자스탄으로 가는 것이 나을 것 같다고, 빠뿌를 설득하였다. 그도 그러고 싶다고 동의를 한다. 이미 빠뿌가 돌아갈 차비가 없는 걸 알았기에, 빠뿌와 무갈이 서쪽 자이푸르까지 갈 수 있는 차비를 쥐어주며, 꼭 고향으로 가라고 한번 더 얘기해본다. 빠뿌는 고개만 끄덕일 뿐이다. (사실 후에 자이푸르에서 다시 만나자고, 빠뿌의 조카 핸드폰 번호를 받았었는데, 2주 후 자이푸르에 갔을 때 빠뿌조카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삼촌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바라나시의 밤, 가로등 불 아래 수많은 곤충과 모기떼가 날아다니고, 그 딱딱한 콘크리트 바닥에 잠자리를 피는 그부녀를 두고 나는 그렇게 돌아서야 했다. 죄책감과 아쉬움, 무력함을 같이 느끼며. 언젠가는 빠뿌가 그의 고향 라자스탄으로 돌아가 그의 아내와 아이들과 사진 속 호숫가에 모여 앉아 라븐카를 키고 있을 것을 상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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