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램과 타일의 나라, 포르투갈

 

 

모처럼만의 일이었다. 언제나 늘 떠나는 여행이지만, 일상이 바쁘다는 핑계로 포르투갈에 대해 특별한 준비나 기대 없이 여행을 떠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흰 백지의 상태였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포르투갈 빛을 투여해서 내 마음속에 담아올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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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한 첫날 비가 흩뿌렸고, 공항에서 호텔까지 택시로 이동하며 본 차창 밖의 첫 리스본 느낌은, 유럽의 고풍스러움과 남미의 빈티지한 느낌을 섞어놓은 듯했다. 여행의 일정이 하루하루 지나면서 눈에 보이던 수많은 노란 트램은 보이는 족족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느라 즐거운 비명을 질러야 했고, 포르투갈 내에 있는 모든 건물과 창문에 색색이 다른 느낌과 문양으로 꾸며진 포르투갈식 타일은 보는 내내 감탄을 해야 했다. 저마다 다른 양식, 스타일, 컬러감을 뽐내며 가는 곳곳 색다른 타일들의 향연에 취해 길을 걷는 순간마다 즐거웠으니 말이다.  

 

 

그렇게 며칠을 리스본에서 지내면서 포르투갈식 여행에 길들어졌다. 영어가 잘 통하진 않았지만 친절하게 그들만의 표정과 몸짓으로 소통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으며, 배가 고파 출출해질 때 쯤 눈을 돌리면 언제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눈에 보이던 선명한 노란색의 에그타르트(포르투갈은 에그타르트의 원조 나라이다)를 먹었다. 속이 든든해지면서 파삭파삭 쫄깃거리던 그 식감이라니~ 더군다나 가격 또한 1개 1,500여 원! 한국이나 홍콩, 마카오에서 맛보던 것의 반값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감동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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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를 옮겨 새로 도착한 도시는 코임브라! 포르투갈 중부에 위치한 이 도시는 포르투갈 최고의 지성 도시로 유명하다. 1210년 개교한 코임브라 대학이 자리하고 있어 도시를 대변하는 대명사가 되고 있으며, 12세기에 지어진 산타크루즈 수도원, 13세기에 지어진 교회도 압권이다. 특히 도서관에 방문했을 때 오래된 고서에서만 나는 책 특유의 냄새를 맡다 보니 대학의 유구한 역사가 절로 느껴져 숙여 해지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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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이 방문 전부터 극찬을 해 마지 않았던 도시, 포르투! 리스본에서 포르투로 버스가 진입하던 순간, 도오루 강 위로 펼쳐지던 도시의 그림 같은 풍경이란… 실로 유럽의 대발견 중 하나라 호들갑을 떨었을 만큼 아름다웠다. 주황색 지붕들 사이사이 골목마다 노랑과 흰색으로 칠해진 집과 건물들, 물론 이곳 또한 갖가지 타일로 장식이 되어있는 건 리스본과 매 한가지. 강가를 둘러싸고 있는 와이너리 거리를 걸으며 포르투 와인에 취하고, 아름다운 강의 야경에 반해 도시를 걷는 매일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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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내 지나친 감탄사 연발(?)로 인해 신의 질투를 받았던 것인지, 열흘의 여정 내내 비가 와서 슬프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슬프도록 아름다운 포르투갈이었다. 이 덕분에 다시 한번 포르투갈을 가야 할 명확한 이유가 생겼으니, 결과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아니 다른 여행보다 더없이 감사한 여행이었다. 해가 짱짱 뜨는 다음의 포르투갈 여행을 기대하며 지금의 일상을 보내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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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을 바라보다, 리스본 예수상

거대한 남미 대륙에서 오직 브라질만이 포르투갈어를 쓰게 된 것은 서른 두 살 청년의 운, 혹은 비운 때문이었다. 페드로 알바레스 카브랄(1468~1520). 바스코 다 가마의 화려한 귀환 이후 후속 탐험대를 맡게 된 그는 열 세 척의 함선을 이끌고 1500년 3월 8일, 인도로 출발한다. 바스코 다 가마가 밟았던 항로 그대로 아프리카 연안에서 멀리 떨어져 무역풍을 타고 가던 그는 강풍으로 돌변한 바람 때문에 표류하게 되었다. 희망봉을 돌아 위쪽으로 올라가야 할 지점을 놓친 그의 눈앞에 보인 것은 커다란 원뿔 모양의 산이었다. 육지가 있으리라 상상도 하지 못했던 곳에 있었던 대륙. 그가 도착한 곳은 인도가 아니라 브라질이었다.


현재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 코르코바두 산 정상에는 거대한 예수상이 자리잡고 있다. 포르투갈에게서 독립한지 100주년 되는 해를 기념하여 세운 이 예수상은 그 거대한 규모로 여러 영화에서 위용을 자랑했다. 높이 38m, 양팔의 길이 28m, 무게 1,145톤. 높이 710미터의 산 정상에 자리잡고 있어, 체감규모는 훨씬 더 크다. 1926년부터 1931년까지 6년간 에이토르 다 실바 코스타(Heitor da Silva Costa)의 설계로 만들어진 이 예수상은 기단 내부에 1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예배당도 갖추고 있다. 2007년에는 신 세계7대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지정되어 격렬한 찬반양론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리스본에도 이와 비슷한 거대 예수상이 세워졌다는 것이다. 테주강을 바라보고 브라질 예수상과 비슷한 포즈로 서 있는 이 예수상은 브라질 예수상 이후에 만들 어졌다. 자신들에게서 독립한 것을 기념해 만든 조각상을, 심지어 본따서 만들다니! 여하튼 기단 75m, 예수상 28m의 적지 않은 크기로 탑 내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테주강과 리스본의 전망을 한 눈에 볼 수 있으니, 나름대로 톡톡한 역할을 하고 있다.



파두가 흐르다, 아말리아 로드리게스 뮤지엄(Casa-Museu Amalia Rodrigues)

파두는 일종의 메아리다. 포르투갈에서 나아간 이들이 포르투갈로 가지고 돌아온 “포르투갈의 목소리”이다. 라틴어 ‘Fatum(숙명)’에서 유래했다는 포르투갈 전통 가요인 파두(Fado)는 주로 숙명과 좌절, 고난과 그리움을 노래한다. 포르투갈 전통의 기타반주에 맞춰 검은 망토를 걸친 여가수, 파디스따가 부르는 애절한 곡조의 파두는 전용 파두 클럽들을 통해 아직도 포르투갈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파두의 기원 중 가장 유력한 것은 18세기에 브라질로 이주해간 포르투갈인들이 즐기던 춤이었다는 것이다. 남미와 흑인 노예들의 음악이 포르투갈인들의 정서 속에 섞여들었다. 그것들을 선원들이 즐겨 부르게 되면서, 파두는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1840년 이후에는 춤은 남지 않았고 오직 노래만이 알파마나 바이루 알뚜 부근에 위치한 수많은 파두 클럽들을 채우게 되었다.


공식적으로 “포르투갈의 목소리”라는 찬사를 받은 이는 자타공인 파두의 여왕인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이다. 오늘날의 파두를 만들고 전세계로 전파시킨 그녀가 1999년 세상을 떠났을 때, 당시 포르투갈의 수상인 안토니우 구테레스는 3일간의 국장을 선포했다.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파두 앨범

빈민촌에서 태어나 부모를 잃고 행상과 재봉사를 전전하다가 밤무대 직업가수로 데뷔한 그녀. 데뷔한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스타가 된 그녀의 목소리가 “포르투갈의 목소리”가 된 이유는, 노래 속에 영혼의 절규를 담았기 때문이다. 드넓은 바다를 건너갔다가 다시 돌아온 노래, 파두는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목소리 안에서 영혼을 얻었다. 그녀가 살던 집은 현재 작은 박물관이 되어, 파두에 흔들린 이들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다.



해양왕 엔리케의 눈으로 바다를 보다, 발견의 기념비

해양왕 엔리케


포르투갈이 바다를 향해 일찍이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땅은 좁고 바다를 접한 면적은 넓은 지리적 요건 때문이었을 것이다. 바다는 벽이지만, 또한 가능성이기도 했다. 그 바다에 대한 열망을 직접 실천한 해양왕 엔리케 덕분에 유럽은 대항해시대의 막을 열었다.


포르투갈의 왕자 엔리케.(1394~1460). 일찌감치 바다로 나아가야 함을 깨달은 그는 아버지의 밑에서 북아프리카의 세우타를 정복하고 그곳을 중계무역에 활용함으로써 막대한 수입을 올렸다. 포르투갈 남단의 알가르베 총독으로 간 그는 그곳에서 유럽 각국의 항해가, 천문학자, 조선공, 지도제작자를 초빙하여 여러 항해 기기를 개발하고 선박을 개량하며 아프리카를 탐험하고 더 넓은 바다를 탐했다. 마침내 적도를 넘어 세네갈에 도착한 그는 그에 만족하지 않고 카보 베르데, 기니 해안, 시에라리온까지 도달하였다. 이러한 그의 활발한 원정활동은 이후 브라질을 식민지로 만드는데도 징검다리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열다섯번이나 원정대를 꾸려 아프리카 남쪽에 있는 미지의 땅에 보냈던 그. 직접 항해에 나선 적은 없지만, “해양왕”이라는 그의 별칭은 과분한 것은 아니었다.


1960년, 해양왕 엔리케의 사후 500년을 기념하여 [발견의 탑]이 세워졌다. 그 기념비가 세워진 곳은 바스코 다 가마가 항해를 떠났다는 바로 그 자리다.

항해중인 범선 ‘카라벨’의 모양을 한 이 기념비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조각되어 있는데, 뱃머리 맨 앞에 서 있는 이가 바로 해양왕 엔리케이다. 그 뒤를 바스코 다 가마, 서사시인 까몽이스, 그 외에도 많은 모험가와 천문학자, 선교사가 따르고 있다. 높이 53m로 위용을 자랑하는 발견 기념탑을 보느라 바닥을 놓치지는 말 것. 광장 내 대리석 바닥에는 전성기 당시 포르투갈이 지배하던 나라들을 표시한 세계전도가 있다.




바스코 다 가마 다리

애덤 스미스는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항해’와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 항해’를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말한 바 있다. 사실 바스코 다 가마의 행로는 말 그대로의 최초가 아니라 “유럽인으로서 최초”일 뿐이지만, 유럽이 중세를 마감하고 근대로 진입한 시발점으로서 큰 의미를 가진다.


바스코 다 가마가 리스본을 출발한 것은 1497년 6월이었다. 그해 11월에 희망봉을 돌고, 인도 서해안의 캘리컷에 상륙한 것은 이듬해 5월 20일이었다. 항해 자체는 괴롭고 힘들기 그지 없었다. 괴혈병, 폭풍, 그리고 선상반란의 위협이 상존했다. 하지만 항해의 성과는 분명했다. 엄청난 양의 후추를 싣고 1499년 리스본으로 돌아온 그는 상상을 초월한 이익을 남기며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왕실로부터 연금, 재산에 덧붙여 귀족의 지위까지 부여받은 그는 아직도 역사상에 탐험가의 대명사와 같이 굳건한 이름을 남겼다.


하지만 그는 포르투갈의 입장에서만 “영웅”이었을 뿐이다. 1502년 다시 캘리컷에 간 그는 무슬림들을 학살하고 그들의 조각낸 신체들을 캘리컷의 왕 자모린에게 보내며 “카레를 만들라”고 비아냥거렸다. 도시를 파괴하고 무력으로 제압한 그는 포르투갈의 교역에는 톡톡히 이바지했지만, 현지인들에게는 ‘악마’일 수밖에 없었다.


1998년은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의 캘리컷 해안에 상륙한, 5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인도와 포르투갈에서는 각각 기념행사가 있었으나, 그 행사의 성격은 판이했다. 리스본에서는 대대적인 축하행사가 벌어졌으나 인토에서는 바스코 다 가마의 인형을 만들어 불태우고 검은 깃발을 올리며 항의행진을 했다.


바스코 다 가마 다리가 세워진 것도 1998년이다. 떼주 강 위를 가로지르는 이 다리는 총 길이 17.2km로 유럽에서 가장 긴 다리 1, 2위를 다툰다. 걸어서 건널 수는 없지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장관이다. 이토록 긴 다리에 바스코 다 가마의 이름을 붙여주면서 포르투갈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가장 먼 곳으로 나아가고 싶다는 열망이, 그의 이름을 다시 불러온 것이 아닐까?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상륙 장면




[우스 루지아다스]의 아버지가 묻히다 -제로니모스 수도원 (Mosteiro dos Jerónimos)

루이스 바스 드 카몽이스(Luís Vaz de Camões 1524년~1580)는 낯익은 이름은 아니다. 그의 책은 국내에 한권, 루지아다스가 번역되었으나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포르투갈에서 그의 이름은 드높다. 1572년에 발표된 그의 대표작 [우스 루지아다스]는 “포르투갈 국민의 정신적인 성서”로 불린다.

수도원 건설의 스폰서였던 마누엘 1세


이 책의 제목이 뜻하는 바는 “이베리아 반도의 서쪽에 살았던 주신 바쿠스의 아들이라고 하는 루조의 자손인 루지다니아인, 즉 포르투갈인”이다. 이 애국적인 대서사시가 찬양하고 있는 것은 인도항로의 발견, 즉 바스쿠 다 가마의 첫 번째 원정이다. 이 역사적 사건은 포르투갈의 역사와 신화와 얽혀 웅장한 위대함을 갖게 되었다. 11음절의 8연시(聯詩) 10편, 전부 1,102절(節)로 되어 있는 이 대작은 작가 자신이 아프리카와 인도에서 겪은 경험과 더불어 풍부한 상상력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가히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와 비견될만 하다.


현재 카몽이스는 제로니무스 수도원에 안치되어 있다. 대항해시대의 고유한 건축양식인 마누엘양식으로 지어진 이 아름다운 건물은 1498년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항로 발견을 기념하기 위해 약 1세기에 걸쳐 건축된 수도원이다. 원래는 해양왕 엔리케가 세운 예배당이었으나, 미누엘 1세가 제로니모스 파 수도사들을 위한 수도원으로 증축했다. 이곳에서 리스본 항구를 출발하는 항해단을 위한 미사가 진행되었다고 한다.




강에서 바다로, 벨렘 탑

리스본이 자리하고 있는 테주 강 하구는 바다와 상당히 가깝다. 테주 강이 대서양으로 흘러드는 지점. 그곳에 도시가 자리잡고 있다. 강물은 밀물과 썰물의 영향을 받아 물 높이의 차이를 보인다.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 벨렘 탑이 애초에 물속에 세워진 건, 그 때문 아니었을까.


현재의 벨렘탑은 물 속에 있지 않다. 테주강의 흐름이 바뀌면서 육지로 걸어나왔다. 처음 지어졌던 당시, 물이 차올랐다 빠지곤 했던 1층은 정치범 감옥이었다. 스페인이 지배하던 시절부터 19세기 초까지 감옥으로 사용되던 그 1층은, 때마다 차올랐다 빠지는 물로 죄인들을 고문했다. 스페인의 지배에 저항하던 독립운동가, 나폴레옹 군에 반항하던 애국자 등 시대에 따라 사상은 달랐지만 그들은 똑같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한 특징 때문에 “테주강의 귀부인”이라는 애칭까지 가지고 있는 이 아름다운 건물을 싸잡아 폄하하면 곤란하다.


물 위에 앉은 나비와 같다는 벨렘 탑

1515년부터 21년까지 7년간 지어진 이 마누엘 양식의 3층탑은 현재 리스본을 상징하는 건축물로 여겨지고 있다. 옛날 왕족의 거실로 이용되었던 3층의 테라스는 아름답고, 2층에는 항해의 안전을 수호하는 ‘벨렘의 마리아상’이 자리하고 있어 모든 떠나는 이들을 따뜻하게 품는다.


벨렘 탑은 여러 가지 얼굴을 가진다. 선박출입을 감시하는 요새이기도 했고, 모든 탐험대의 전진기지이기도 했다. 탐험가들은 오랜 항해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벨렘 탑을 보았고, 돌아와 지친 눈으로 처음으로 벨렘탑을 보았다. 바다를 통해 오는 이들에게, 벨렘탑은 리스본의 얼굴이었다.




축구를 통해 세계로 나가다, 알쿠셋(Alcochete) 스타디움.

포르투갈어를 사용한다는 것과 축구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당연히 우연이겠지만, 남미 대륙에서 유일하게 포르투갈어를 쓰는 브라질과 포르투갈은 둘다 축구에서 강한 모습을 보여준다.

축구장 전경


축구에 대한 포르투갈의 집념은 열광에 가깝다. 포르투갈에서 축구는 인생역전의 유력한 프로그램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정부에서도 축구를 권장하며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포르투갈이 배출한 세계적인 선수들의 목록을 보라. 에우제비오, 피구, 호날두 등.


대항해 시절 이후 축소되고 위축된 포르투갈에게 축구는 세계로 나아가는 중요한 통로가 된 것이 아닐까? 늘 넓은 땅을 동경해온 이들에게 축구 경기장은 또 다른 ‘영토’인 것은 아닐까?


알쿠셋(Alcochete) 스타디움은 리스본을 대표하는 스포르팅 팀의 축구장이다. 2003년 개장을 기념하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친선경기를 가졌을 때, 스포르팅은 3-1로 승리를 거두는 기염을 토했다. “축구선수공장”으로도 불리는 이 팀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등 수많은 훌륭한 선수들을 배출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포르투의 오전 어느 때, 거리엔 비가 흩날리고 있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잿빛 하늘이 조금은 공허한 느낌이다. 하지만 상벤투역에서 보게 된 파란색 타일(Azulejo)이 흐리던 포르투의 첫인상에 선명한 색깔을 어느 정도 되찾아 준다. 한적한 역 안의 사람들, 벽면을 가득 장식한 우아한 고전 그림들 모두가 시간과 날씨 감각을 조금씩 무뎌지게 한다.

포르투 도시 전경-주황색의 아기자기한 건물들이 이색적이다.

비가 그치고 되찾은 포르투의 색깔

역 밖의 날씨는 조금 쌀쌀하지만, 아기자기한 색채가 가득한 고풍스러운 거리는 오히려 아늑함을 선사한다. 역 맞은편으로 나와 구시가 지역을 거닐다 언덕을 오르는 사람들을 따라간다. 언덕 위에 올라 거칠어진 숨을 잠시 고르고 나면, 포르투 대성당을 만난다. 이곳의 정식명칭은 클라라성당(Igreja de Santa Clara)이지만, 포르투에서 가장 큰 성당이기 때문에 대성당(Se do Porto)이라고 부른다.

12세기에 건축된 대성당의 정면은 마치 요새처럼 튼튼해 보인다. 입구 앞 엔히크 왕자의 청동 기마상은 곧게 올린 창만큼이나 기세 좋게 이곳을 지키고 있는 느낌이다. 우뚝 솟은 두 개의 탑은 언덕 위에서 도시 전체를 수호하는 듯하며, 곳곳에 있는 성인(聖人)상들과 오랜 전통의 문양들은 그러한 대성당의 역할을 더욱 공고히 해주는 것 같다. 엄숙함이 깃든 바로크 양식의 대성당 내부에 들어서면, 비단 종교인이 아닐지라도 사뭇 진지함이 감돌게 된다.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형형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 오래된 촛대들, 기도를 드리는 곳곳의 사람들을 뒤로 하고 서둘러 성당을 나온다.

대성당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비는 그쳐 있다. 언덕 아래로 길게 펼쳐져 있는 도루강(Rio Duoro)과 도시를 이루고 있는 주황색과 파스텔 톤이 어우러진 건물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제야 항구도시 포르투가 온전한 색깔을 되찾은 듯하다. 포르투갈 제2의 도시로 알려진 포르투는 낯설지만 따뜻한 색깔이 어울리는 작지만, 아름다운 도시이다. 은은한 색감과 더불어 차츰 파랗게 되어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다시 구 시가지를 따라 내려간다.

포르투 대성당에 오르는 길 - 포르투에는 평지가 많지 않으며, 언덕길이 많다.

대성당 두개의 탑 - 탑 앞으로 나오면, 포르투 거리를 한 눈에 알 수 있다.

투박하지만 서민적인 소소함이 매력

포르투라는 도시를 규정하는 말에 ‘화려함’이라는 말이 있을까.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이 행정수도라면, 포르투는 경제수도의 역할을 해왔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현재의 포르투는 화려함 보다는 소소한 매력을 느낄 수 있으며 조금은 투박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이 붐비지 않는 거리와 건물들이 오히려 특별하게 다가온다. 조그마한 골목길을 걷고, 사람들의 소박한 일상들을 바라보는 시간들이 전혀 아깝지가 않다.

포르투는 여느 도시를 여행할 때와는 달리, 여행지를 봐야한다는 강박관념(?)에서 조금은 비껴난 도시라는 생각이 든다. 주황색 지붕들과 흰 벽의 조화가 만들어낸 거리들은 마치 동화 속 마을에 서 있는 것처럼 비현실적인 느낌이다. 파스텔 톤으로 그려진 거리의 풍경은 포르투갈이 가지는 서민적이고도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대도시에서만 살아왔다면, 그립기까지 할 소박한 도시의 소소한 풍경들….

다른 대도시에 비해 비교적 크지 않은 포르투를 다 돌아보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엔히크 왕자의 마을(Vila do infante), 성(聖) 프란시스쿠 성당(Igreja de Sao Francisco), 볼사 궁전 등 포르투 내에도 봐야할 명소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지만, 조급한 마음을 억누르고, 언덕길을 내려가 강변에 있는 의자에 앉아 포르투의 가장 큰 명소 도루강을 바라본다.

카이스 다 리베이라(Cais da Ribeira)라고 부르는 이 지역에는 하늘을 기세 좋게 날아다니는 갈매기들과 조용한 카페와 레스토랑, 그리고 다정해 보이는 연인들 몇몇만이 보일 뿐 비교적 한적하다. 항구에 메어있는 작은 유람선들과 유유히 강가를 흐르고 있는 멋스러운 곤돌라를 보면, 항구도시의 면면이 여실히 드러난다.

루이스 다리를 건너 향긋함을 머금다

노천카페에 들어가 시원한 맥주를 한 잔 하고 나서, 이동한 곳은 바로 루이스 다리(Ponte Luiz I). 포르투에는 총 5개의 다리가 있는데, 철골로 이루어진 아치형의 이 다리는 포르투를 상징하는 심벌이기도 하다. 2개의 복층으로 이뤄진 다리 중 아래에는 자동차가 다니고, 위쪽에는 트램이 다니고 있다. 트램을 타고 다리를 건널까 생각해보지만, 소화도 시킬 겸 천천히 다리 위를 건넌다. 온전히 철골로만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트램이 옆으로 지나갈 때면 다리가 흔들거리는 것이 느껴져 오싹한(?) 느낌이 더해진다.

루이스 다리-2층으로 된 다리로 밑에는 자동차, 위에는 트램이 다닌다.

구시가지 지역을 뒤로 하고, 루이스 다리를 걸어 도루강을 건너면 포트와인 생산의 중심지역인 빌라 노바 데 가이아(Vila Nova de Gaia) 지역을 만나게 된다. Port 혹은 Porto라 불리는 포르투 지역의 와인은 프랑스의 샴페인처럼 상표가 보호되고 있을 정도로 전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도루강변에서 보았던 작은 돛을 매단 배들은 와인 통을 운반하기 위한 용도로 쓰인다고 한다.

이곳에는 저가 와이너리 투어와 와인 시음 프로그램이 가득해 와인 애호가들의 환심을 살만 하다. 포르투에서 유래한 포트와인의 오랜 역사와 와인박물관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와인에 대한 그들의 열정과 자부심이 느껴진다. 와인을 잘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이곳의 와인을 한 번 맛보면, 쉽게 그 향과 달콤함을 잊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경제위기를 겪고도, 묵묵하게 살아가고 있는 포르투갈, 그리고 포르투 사람들의 소박하고도 서민적인 삶은 생각해 볼 여지가 많다. 모두가 최신식 물건과 첨단시설에만 열광하고 있는 요즘, 과거로 회귀한 듯한 포르투의 투박함이 좀 더 친근하게 다가오는 것은 비단 나만의 생각일까.


전세계의 수많은 여행명소들도 물론 소중하지만, 이곳에서 느끼는 과거의 향수는 애틋함을 넘어 아련한 추억을 되살려 주는 것 같다. 더 늦기 전에 다시 한 번 언덕에 올라 포르투의 전경을 마음 속 한가운데에 깊숙이 담아두어야 할지 모른다. 어쩌면 다시는 경험하지 못할 소중한 과거의 추억이 될지도 모를 테니까….

가는 길
현재 포르투를 포함해 우리나라-포르투갈 직항편은 없기 때문에 보통 프랑스나 독일, 스페인 등 주변 유럽 국가를 경유해서 간다. 포르투 공항에서 메트로를 타면 상벤투역에 닿는다.

 [Why] [채승우의 세계 일주]
사진가
포르투갈 리스본의 옛 광장에서 대학생들이 노래를 하고 있다.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전통 음악 '파두'에는 두 가지 이미지가 있다. 하나는 남학생들이 대학교의 검정 가운을 두르고 노래하는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항구 골목의 허름한 술집에서 노래하는 중년 여성의 모습이다. 관광객들은 후자를 좋아하는 듯하다. 항구의 파두가 리스본에서 태어났다면, 대학생들의 파두는 '코임브라'라는 오래된 대학도시가 중심이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파두에 흐르는 정서를 '사우다드'라고 말한다. 한국 음악을 말할 때 '한(恨)'이란 말로 설명하는 것과 비슷하다.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절을 지나면서 만들어진 정서라는 것도 비슷하고, 다른 언어로는 쉽게 번역할 수 없는 자기 나라 고유의 심성이라고 설명하는 것도 비슷하다. 그 심성을 완전히 이해하진 못했지만 여행객에게도 파두는 매력적인 음악이었다. 특히 음식을 나르다가 갑자기 가수로 돌변한 식당 아저씨의 멋진 목소리를 잊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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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수도 리스본

28번 트램이 지나가는 포르투갈 리스본의 작은 마을.
28번 트램이 지나가는 포르투갈 리스본의 작은 마을. / 케이채 제공
유럽의 서쪽 끝에 위치해 대서양을 바라보는 나라, 포르투갈. 한때 유럽은 물론 신대륙으로 뻗어나가며 세계를 호령했던 이 작지만 거대한 제국은 이제 이웃 스페인이나 북쪽의 영국 등과 달리 세계 역사의 중심축에서 제법 밀려나버린 상태다. 하지만 아름다운 테쥬강을 끼고 펼쳐진 수도 리스본의 아름다운 모습은 과거의 영광을 짐작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 시작으로, 오래되고 낡았지만 그렇기에 더 아름답고 매력적인 트램에 몸을 싣는 건 어떨까.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28번 트램에서 말이다.

리스본에는 5개 구간을 60여대의 트램이 꾸준히 돌며 도시 구석구석으로 사람들을 나른다. 그 중28번 트램을 타지 않고는 리스본을 여행했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리스본을 대표하는 많은 관광지를 모두 지나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선 이 트램은 무척이나 아름답다. 1930년대에 처음 만들어졌다는 실내는 모두 나무. 낡고 아스라한 기분이 이어진다. 여전히 과거의 방식으로 덜컹인다. 때로는 정말 너무 좁은 골목을 지나 어떤 집들은 대문과 트램이 거의 맞닿을 지경인데 이 또한 매력 중 하나다.

리스본
시내에서 28번 트램을 타고 출발하면 리스본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바이샤(Baixa)부터 시작한다. 이곳에서 하루를 보낼 수 있을 만큼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다양하다. 코메르시우 광장(PraÇa Do Comercio)은 리스본에서 가장 거대하고 아름다운 광장으로, 과거 포르투갈이 가졌던 부와 영광을 가늠해볼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눈길을 사로잡는 크고 작은 가게를 지나다 보면 역시나 포르투갈의 역사를 오롯이 담은 카페, 브라질리아(Cafe Brasileira)에 닿게 되는데, 한때 포르투갈의 뛰어난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커피를 즐기려 찾았다. 리스본의 상징 같은 작가 페르난두 페소아의 동상이 입구에 자리하고 있다. 아주 진한 에스프레소인 비카(bica) 커피가 처음 만들어진 곳이기도 하다.

커피 한잔을 즐긴 후에는 산타 후스타 엘리베이터(Elevador de Santa Justa)를 타고 올라가 리스본의 시내 풍경을 한번에 내려다 봐도 좋을 것이다. 이 엘리베이터의 출구는 카르모 광장을 거쳐 카르모 교회(Igreja Do Carmo) 유적지로 연결된다. 1755년의 지진으로 앙상한 뼈대만 남아 당시 지진의 참혹함을 현재까지 전해주고 있다.

드디어 도착한 거대한 성당. 요새 같은 모습의 역사적인 세 성당(Se Cathedral)이다. 리스본 사람들이 결혼식을 올리고픈 1순위 장소이기도 하다. 높은 곳으로 점점 더 올라가다보면 어느 순간 탁 트인 풍광이 눈앞에 펼쳐지는데 바로 태양으로 가는 문이라 불리는 포르타스 두 솔(Portas Do Sol)이다. 멀리로는 테쥬강이, 가까이로는 알파마(Alfama) 지구의 로맨틱한 작은 집들이 보이는데, 벤치에 앉아 햇살을 즐기며 도시의 아름다운 풍광을 만끽하기에 최적. 좀 더 걷다보면 6세기에 지어진 상 호르헤 성(São Jorge Castle)에 닿게 되는데, 이베리아 대륙에 자리했던 무어인들의 성으로 사용됐다고 한다. 물론 리스본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다.

당신이 화요일이나 토요일에 트램을 탄다면 28번 트램에 또 한번 몸을 맡겨라. 리스본을 대표하는 벼룩시장인 페이라 다 라드라(Feira Da Ladra)가 열리기 때문이다. 캄포 데 산타 클라라 거리(Campo De Santa Clara)에서 12세기부터 열린 것으로 알려졌는데, 리스본인들은 물론 집시들까지 저마다 독특하고 오래된 물건들을 가져와 판매한다. 이곳에서 흥정을 통해 구입한 사연있는 빈티지 제품이 그 어떤 천편일률적인 기념품보다도 당신에게 리스본을 추억하게 할 가장 완벽한 물건이 될지도 모른다.

여행정보
여행정보

28번 트램의 30개가 넘는 어느 정차역에서도 탑승할 수 있고 바로 티켓을 살 수도 있지만, 가능하면 트램의 시작점인 마팀 모니츠 광장(Martim Moniz Square)의 티켓 발권기에서 1일 이용권 구입을 추천한다. 원하는 곳에 내려 사진도 찍고 구경을 한 후 다시 트램에 올라 꾸준히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유있게 이용하고 싶다면 이른 아침이나 조금 늦은 저녁 시간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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