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미술여행

피게레스‘달리 극장식 미술관’의 1층 모습. 정면으로 보이는 벽엔 마치 사람이 그림에서 흘러내린 페인트를 닦는 것처럼 보이는 조형물이 붙어 있다. 오른쪽에 보이는 그림의 이름은‘미로’ / 송혜진 기자 enavel@chosun.com

"나와 미친 사람 사이의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내가 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1904~1989)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두 시간을 기차로 달리면 도착하는 작은 도시 피게레스(Figueres). 바닷가와 맞물린 이 소박하고 조용한 마을에서 달리는 태어났고 또 생의 대부분을 살았다. 때론 편집증 환자, 강박주의자로 불렸고 실제로도 지나친 자기 확신과 과도한 소심함을 오가며 살았다는 예술가. 하지만 달리는 뜻밖에도 평생 한 여자만을 사랑했고, 그 누구보다 그 품에서 안식과 위안을 갈구했던 나약한 사람이기도 했다.

'세상의 배꼽' 간직한 달리의 마을

토요일 아침 8시. 바르셀로나 산츠역에서 2등석 기차표(36유로, 1유로=약 1500원)를 끊었다. 스페인식 밀크 커피, 카페 콘 레체와 하몽 샌드위치를 사들고 열차에 올랐다. 두 시간을 달려서 도착한 곳은 피게레스. 달리가 태어난 곳이자 그가 평생 꿈꿨던 미술관을 세운 도시다.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콧수염을 기상천외하게 구부리고 웃는 달리의 초상화가 여행객을 반겼다.

마을 중심에 있는 피게레스 광장으로 향했다. 광장 오른쪽 골목으로 향하자 난데없이 지붕에 달걀을 얹은 희한한 모양의 붉은 건물이 튀어나온다. 1974년 달리가 직접 세운 '달리 극장식 미술관(The Dali Theatre Museum in Figueres)'이다. 입장료는 24유로.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커다란 캐딜락 자동차 위에 나신의 조각 '후에고 비너스'가 우뚝 서있는 정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독일 출신 초현실주의 조각가 막스 에른스트가 보내준 조각품을 달리가 자동차 위에 세워버렸다고. 과연 달리가 만든 미술관답다.

미술관 벽면은 마치 청색 페인트가 흘러내리는 모양으로 칠해져 있다. 그 위엔 흘러내리는 페인트를 천으로 열심히 닦아 내는 사람 모습의 거대한 종이 인형이 위에 붙어 있다. 액자 속 그림과 실재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 피식, 웃음이 나왔다.

① 살바도르 달리 생전 모습. ② '루비 입술 핀'(1949) ③ 카다케스 언덕에 있는 달리의 집 옥상. 지붕 꼭대기에 있는 달걀 너머 바다가 내려다 보인다. ④ 피게레스 미술관에 있는‘매 웨스트의 방’. 작품이 걸려 있는 방은 볼록 거울로 보면 여배우의 얼굴처럼 보인다.

미술관 계단에 올라서면 '갈라의 방', '매 웨스트의 방' 등이 있다. '갈라의 방'은 달리가 평생을 다해 사랑했다는 아내 갈라 엘뤼아르(Gala Eluard·1894~1982)를 기념해 만든 것이다. 갈라는 본래 유명한 시인 폴 엘뤼아르의 아내였다. 달리는 폴 엘뤼아르를 집으로 초대했고, 처음 갈라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다고 전해진다. 기행(奇行)으로 워낙 유명했던 달리는 양 겨드랑이에 썩은 양파를 끼고 알몸으로 무릎을 꿇은 채 청혼을 했고, 갈라는 그런 달리를 위해 이혼을 했다. 평생 여성을 두려워하고 살았던 달리는 그렇게 처음으로 자신의 모든 걸 이해하고 포용하는 여성을 만나 기쁨에 젖었다고 한다.

'갈라의 방'은 그런 달리의 열정과 애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곳. 방은 온통 하얀색이다. 그림의 주인공은 대부분이 갈라 그녀다. 달리는 갈라를 모델 삼아 여신을 그리고 때론 신화 속 이야기를 패러디했다.

'매 웨스트의 방'은 유명한 영화배우 매 웨스트(Mae West·1893~1980)에게서 영감을 받은 작품으로 채워졌다. 방엔 그 유명한 입술 의자와 눈 모양 액자가 걸려 있다. 작은 계단을 올라가 볼록 거울로 방을 내려다보면 방 전체가 우스꽝스러운 금발머리 여인의 얼굴처럼 보인다.

또 다른 방엔 그 유명한 흘러내리는 시계 그림, '기억의 영속성'이 양탄자 위에 인쇄돼 벽 한쪽에 걸려 있다. 저 멀리 달리가 태어난 바다 마을이 보이는 그림. 그 고요하고 또 황량한 풍경 속에 시계는 녹아내린 치즈처럼 늘어져 있고, 개미들은 회중시계 속에서 버둥거린다. 큐레이터는 "달리의 꿈속 세계를 반영한 작품"이라고 했다.

달리의 집 거실.

달리의 집, 카다케스 마을로 가다

해변마을 카다케스(Cadaques)는 달리의 생가(生家)가 있는 곳이다. 피게레스 광장에서 하루 4번 오가는 버스를 타고 30분 정도 달리면 도착한다. 차를 타고 구불구불한 길을 멀미가 나도록 달렸다. 카다케스 해변에 자리잡은 '포르트 리가트'라는 어촌 마을이 보인다. 꼭대기까지 올라가니 달리의 생가(Casa Museu Dali)가 나왔다. 지붕엔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달걀이 붙어 있다. 입장료 12유로를 내면서 큐레이터인 에바(Eva)에게 "달리는 대체 왜 그렇게 달걀을 좋아한 거냐"고 물었다. "달리는 여성의 자궁을 늘 그리워했대요. 달걀은 바로 그 엄마의 뱃속, 태초의 자궁을 닮은 존재에요. 달걀을 통해 영원한 삶을 꿈꾼 거죠."

달리의 집은 거실과 안방, 침실과 욕조, 사랑방, 그리고 야외 풀장과 정원으로 꾸며져 있다. 안방 한가운데엔 아내 갈라의 초상화가 한쪽에 걸렸고, 그 곁엔 커다란 백조 박제가 있다. 그러고 보니 이 집엔 백조 박제만 4개였다. 큐레이터는 "달리가 평소에 키우던 애완동물이었다. 너무 사랑한 나머지 백조가 죽자 이렇게 박제로 만들어 넣어둔 것"이라고 했다.

1982년 아내 갈라가 숨지자 달리는 인근 마을로 집을 옮겨 그곳에서 생을 마친다. 평생을 오만과 광기, 때론 광대 짓으로 보냈던 예술가는 뜻밖에도 이곳에서 영원한 안식(安息)을 꿈꿨던 모양이다. 달리의 집에서 내려와 카다케스 해변을 걸었다. 어촌 마을은 노을에 잠겨 점점 주홍빛에서 진분홍빛으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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