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탈리아

이탈리아 시칠리아 : 두려움을 훌훌 털어준 아름다운 여행지

반응형

'죽기 전에 꼭 한번 가봐야 할 곳'. 이런 수식어를 가진 장소들은 너무 많습니다. 가보지 않은 입장에선 어디가 정말 좋은 데인지 알기도 어렵고요. 그래서 세계 곳곳을 둘러본 시민기자들에게 '진짜 나만의 최고 여행지'를 물어봤습니다. 믿고 보는 추천 여행지, 앞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보도합니다. <편집자말>

남편과 내가 처음으로 둘만의 해외여행을 한 곳은 이탈리아였고, 장장 50일의 여행이었다. 부부 둘만의 여행에선 서로 숱하게 싸우고 심하면 각자 다른 비행기를 타고 귀국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우리는 이 여행을 티격태격 무사히 넘기면서 평생 함께 여행해도 좋을 사이란 걸 한 번 더 확인하게 됐다.

이탈리아 여행이 한 달 하고 4일째 되던 날, 우리는 밀라노에서 시칠리아행 비행기를 탔다. 벌써 한 달 넘게 여행하면서 산전수전, 우여곡절을 겪고 애정을 넘은 전우애로 똘똘 뭉쳐 있었지만 시칠리아를 앞둔 우리의 비장함은 특별했다.

우린 각자 이탈리아를 이미 여행한 경험이 있었는데 둘 다 시칠리아는 보지 못했었다. 그리고 우린 둘 다 코폴라 감독의 영화 <대부>를 지독히도 좋아했다. 우리에겐 <대부> 2편에 나오는 돈 콜레오네의 고향 시칠리아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 있었고, 동시에 배신자의 아들과 형제 또 그 아들에게까지 복수의 총칼이 겨눠지는 잔인한 마피아 고장이라는 선입견과 두려움도 컸었다.

'전우애'로 똘똘 뭉친 우리 부부, 시칠리아에 떨다

▲ 시칠리아 팔레르모의 골목길 두려움 가득했던 시칠리아의 골목길은 여행을 하면 할수록 정겨운 길이 됐다.
ⓒ 박성경
시칠리아의 주도(州都)인 팔레르모 공항은 푸른 바다와 암벽으로 이뤄진 신비로운 산이 배경을 이루고 있었다. 공항에서 팔레르모역까지 50분 정도 버스로 이동하는 동안에도 멋진 풍경은 이어졌고 기사 아저씨는 운행을 하는 내내 휘파람과 콧노래로 흥을 일깨웠다. 하지만 우린 입으로만 '우와~'를 내뱉을 뿐 머리로는 예약해 놓은 숙소로 향하는 길을 되새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요즘은 셰프들의 요리 방송에도 나오고 연예인의 여행지로도 종종 소개되곤 하지만, 2010년 우리는 시칠리아가 무서웠다. 버스에서 내리자마다 배낭을 메고 앞만 보고 걸었다. 지나는 모든 이들이 마피아의 행동 대원들처럼 보였다.

잔뜩 주눅이 들어 밤늦은 시간까지 배고픈 줄도 몰랐던 우리. 하지만 숙소에 짐을 풀고 어둠 속 시칠리아 거리로 저녁을 먹으러 나서려니 더 긴장이 됐다. 가방과 지갑 따위는 모두 두고 저녁 밥값만 챙긴 뒤 캠코더와 카메라만 가지고 가기로 한다. 그것도 손에 들지 말고 크로스로.

"갈까?"
"가자!"

호텔을 나서려는데 직원이 부른다.

"그렇게 나가려고?"
"응. 지갑도 안 가지고 가는데?"
"아휴... 위험해. 카메라는 눈에 띄지 않게 잘 숨겨서 다녀. 큰 길 이외엔 절대 가지 말고."

단단히 주의를 주고도 우리 머리 뒤 꼭지에 대고 쐐기를 박는다.

"여긴 시칠리아야!"

우리의 시칠리아 여행은 그렇게 위험과 위축과 두려움으로 시작됐다.

그런데 웬걸. 첫 저녁식사는 가족의 역사가 가득 묻어나는 식당에서 정말 친절한 직원의 'Si(네)~ Si(네)~' 긍정의 대답을 들으며 너무도 여유롭게 마쳤다. 이후 팔레르모에 머무는 사흘간 위축된 동양 여행자 둘을 빼면 친절로 넘치는 시칠리아 사람들만이 그저 아름다운 일상을 살고 있다는 걸 느꼈다.

또 비잔틴의 황금빛으로 빛나는 몬레알레와 <시네마 천국>의 촬영지 체팔루, 그리스 신전들이 고스란히 보존된 아그리젠토를 다녀오고, 대지진을 딛고 일어선 메시나에 발을 딛으면서 우린 서로에게 질문했다.

"왜 '두려움'이란 선입견에 눈이 씌어있었던 걸까?"

▲ 시칠리아 체팔루의 한 골목 풍경 시칠리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발을 딛으면 딛을수록 사라져갔다.
ⓒ 박성경
그리고 메시나에서 시칠리아의 마지막 여행지 타오르미나(Taormina)를 다녀온 날, 우린 마음속 자리 잡고 있었던 막연한 두려움을 훌훌 털어낼 수 있었다.

타오르미나는 메시나에서 완행열차로 45분에서 1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다(얼마나 많은 역에서 서는 열차를 타느냐에 따라 조금 다르다). 철로가 이오니아(Ionia) 해안을 따라 이어져 있어 타오르미나로 가는 내내 원 없이 바다를 보고 달리던 우리는 이것만으로도 좋다, 싶었다.

그런데 타오르미나에 내리니 역도 바다 옆이다. 역에서 본 풍경이 이 정도면 해발 200m에 3000년 역사를 안고 있는 도심에서 보는 풍경은 어떨지에 더 관심을 가졌어야 했지만, 우리는 그만 바다 옆 역 풍경에 한참 동안 마음을 뺏겨 도심으로 가는 버스를 놓치고 말았다. 결국 우리는 호객에 나선 어느 영감님의 하얗고 멋진 벤츠 택시를 타고 타오르미나의 중심을 향해 올랐다.

▲ 우리 부부가 탔던 타오르미나의 택시와 멋진 기사 영감님 역에서 중심지까지 택시비는 15유로. 가격 흥정을 하려 했으나 정해진 요금표를 보여줬다.
ⓒ 박성경
▲ 움베르토 거리(Corso Umberto) 타오르미나의 중심 거리로 골동품 가게와 소품점, 레스토랑이 즐비하다.
ⓒ 박성경
우리는 서쪽의 카타니아문을 통해 움베르토 거리(Corso Umberto)로 들어섰다. 타오르미나를 관통하는 이 중심 거리 양 옆으로는 멋진 골동품 가게와 소품 가게들이 즐비하다. 그리고 사이사이로 뻗는 작은 골목길에도 깔끔하고 예쁜 가게들이 곳곳에 숨어있다. 우리는 화려한 무늬의 도자기들이 즐비한 가게에서 시칠리아의 상징인 세발 달린 메두사 '트리나크리아(Trinacria)' 장식품을 샀다.

콧잔등에서 돋보기가 떨어질 정도로 내려 쓴 할머니의 기념품 가게에서는 <대부> 티셔츠도 하나씩 사고, 고풍스런 레코드 가게에서 <대부> CD도 구입했다. 달랑 40리터짜리 배낭 하나씩을 메고 50일을 여행하고 있어 뭔가를 살 때는 늘 심사숙고했었는데, 타오르미나에선 금기의 봉인이 해제된 느낌이었다 할까. 이날 밤 숙소로 돌아와 CD를 들어보니 원곡이 아닌 포르투갈 연주자들의 녹음 CD였다는 슬픈 사연이 있으나, 그것 또한 추억으로 남았다.

가난한 여행자의 걸음에도 여유가 묻어나는 곳

▲ 움베르토 거리(Corso Umberto) 옆 골목 움베르토 거리 옆 작은 골목길에도 깔끔하고 예쁜 가게들이 곳곳에 숨어있다.
ⓒ 박성경
▲ 세발 달린 메두사 '트리나크리아(Trinacria)' 장식품 삼각형 모양의 섬 시칠리아를 상징한다고 하며 행운을 불러온다고 믿는다.
ⓒ 박성경
앙증맞은 분수 뒤 소박한 모습으로 자리한 산 니콜로 대성당(Duomo di San Nicolo) 안에서 10여 분을 쉬고 나왔더니 걸음이 한결 느려졌다. 서쪽 문과 동쪽 문의 중간에 있는 메조문을 나서니 4월 9일 광장(Piazza 9 Aprile).

지중해 도시들을 여행하다 보면 수많은 '지중해의 발코니'를 만나는데, 이곳은 '이오니아 해의 발코니'라 이름 붙여도 좋을 듯하다. 눈앞에 펼쳐진 이오니아(Ionia)의 해안 절경이 여름이면 수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은다고 하는데, 우리가 찾은 때는 2월 비수기였던 터라 마을 어르신들만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겨울임에도 햇살은 너무도 따스한 봄 같았고, 사람들 표정은 너무도 밝은 여름 같았다.

▲ 산 니콜로 대성당(Duomo di San Nicolo) 분수와 대성당 모두 앙증맞은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 박성경
▲ 4월 9일 광장(Piazza 9 Aprile)에서 햇볕을 즐기는 사람들 이오니아 해안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 박성경
▲ 고대 그리스 극장 (Teatro Antico) 지름 109m, 28개의 계단으로 BC 3세기경 지어졌다는데 원형에 가깝게 보존돼 보는 이들에게 놀라움을 준다.
ⓒ 박성경
타오르미나를 지배하던 아랍 귀족 코르바자 가문이 10세기경에 지은 코르바자 궁전(Palazzo Corvaja)도 '어슬렁어슬렁' 둘러본다. 유럽의 최고급 휴양지란 이름 덕분인지 타오르미나에 휴양을 온 것도 아닌데 가난한 여행자의 걸음에도 표정에도 왠지 여유가 뚝뚝 묻어나는 느낌이다.

느린 걸음으로 도착한 곳은 고대 그리스 극장 (Teatro Antico). 지름 109m, 28개의 계단으로 BC 3세기경 지어졌다는데 원형에 가깝게 보존돼 보는 이들에게 놀라움을 준다. 세월에 낡고 깎인 무대와 좌석이 오히려 더 멋진 공연장이 돼 해마다 여름이면 영화제가 열리고 각종 문화 공연이 펼쳐진다고 한다.

우린 공연도 없고 관객도 없는 그저 조용한 고대 극장을 걸었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우리 눈앞엔 극장이 지어진 이래 수천 년 변함없이 펼쳐졌을 공연이 열리고 있었다.

'불칸의 대장간'으로 불리는 해발 3323m의 에트나 화산은 하얗게 눈을 뒤집어쓰고 구름인지 산인지 찾아내 보라며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하늘과 바다가 서로의 경계 없이 뿜어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푸른빛을 뿜어내고, 그 속에 '이오니아 해의 진주'로 불리는 이솔라 벨라(Isola Bella)는 영화 <그랑 블루>를 촬영했던 그 모습 그대로라며 자태를 뽐낸다.

"어떻게 이 바다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바다 냄새를 품은 바람이 이런 대사를 속삭이는 듯도 하다.

▲ 고대 극장에서 본 해발 3323m의 에트나 화산 눈이 쌓여 구름인지 산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다. 바다와 마을과 어우러져 멋진 자연의 공연을 펼치고 있다.
ⓒ 박성경
▲ 이솔라 벨라(Isola Bella) '이오니아 해의 진주'로 불리며 영화 <그랑 블루>를 촬영했던 곳이다.
ⓒ 박성경
택시로 빠르게 돌아 오른 그 곳을 우린 2시간여를 걸어 빙글빙글 느리게 돌아 내려왔다. 천사도 쉬어갈 듯 아름다운 공공 정원에서 우리도 쉬었고, 전망 좋은 곳에 자리해 여름이면 방 잡기가 하늘의 별따기라는 최고급 호텔을 지나면서는 살짝 한숨도 쉬었고, 바다 옆으로 길게 뻗은 철길을 보면서 '아... 다시 여행이구나' 싶었다. 또 다른 두려움 속 설렘이 깃들었다.

다음날 우린 메시나를 떠나 나폴리로 향했다. 메시나에서 탄 기차는 두 량이 그대로 배에 실려 나폴리에 도착했다. 6시간을 마주보고 앉아 웃음을 주고받았던 시칠리아 아저씨는 배낭을 짊어지고 기차에서 내리는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조심해! 여긴 나폴리야~!"

▲ 역으로 가는 길 2시간 여를 걸어 타오르미나역으로 내려가는 길은 여유롭고 즐거웠다.
ⓒ 박성경
수많은 여행지 중에서 하나를 꼽으라면 어디를 꼽겠냐는 질문을 많이 듣는다. 난 똑같이 답한다. 모두 다. 모두 다른 이유로 내가 여행한 모든 여행지는 다 소중하고 특별하다. 하지만 이번엔 하나를 꼽았다. 두렵기만 했던 시칠리아에서 그저 아름답기만 했던 타오르미나. 여행은 늘 크고 작은 두려움을 하나씩 떨쳐내는 과정이란 걸 너무도 평범하게 알려준 곳.

* 타오르미나의 아름다운 풍경을 영상에 담았습니다. 감상해보세요.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