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마닐라의 인트라무로스(Intramuros)에는 스페인이 필리핀을 지배할 당시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다. 인트라무로스에는 스페인의 요새와 성당도 남아 있지만 스페인 사람들이 자신의 나라에서 지었던 것과 똑같이 지은 집들도 남아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에 스페인 양식의 집들이 많이 사라졌지만 아직 성 어거스틴 성당(San Augustin cathedral) 바로 맞은 편에는 카사 마닐라 박물관(Casa Manila Museum)이라고 이름 붙여진 멋진 스페인 하우스가 남아 있다.

카사 마닐라 박물관은 인트라무로스의 복합 문화단지인 플라자 산 루이스 콤플렉스(Plaza San Luis Complex)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콤플렉스라고 해서 큰 복합건물을 예상했지만 실제 보니 광장은 상당히 아담했다. 이 작은 콤플렉스 안에는 카사 마닐라 박물관과 함께 이국적인 야외카페가 있고 스페인 양식의 호텔, 다양한 수제품을 파는 기념품 가게가 있다.





▲ 카사 마닐라 박물관. 마닐라에 남은 스페인 귀족의 아름다운 저택이다.

ⓒ 노시경

'카사(casa)'는 스페인어로 집이라는 뜻이니 '카사 마닐라'는 마닐라의 집이라는 뜻이다. '박물관'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과거 스페인 양식의 고건축물을 잘 보존하고 내부 장식과 당시 생활용품을 그대로 전시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이 카사 마닐라 박물관은 이곳이 필리핀이라는 사실을 잊게 할 정도로 스페인 양식이 잘 보존되어 있다. 나는 흡사 스페인 중세시대의 어느 한 공간을 여행하다가 멈춰 있는 것만 같았다.

우리나라 같으면 식민지 시대에 지어진 침략자들의 집은 모두 없애버릴 것 같은데 필리핀에서 스페인 귀족의 집을 복원하고 잘 보존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스페인의 지배는 이제 먼 과거의 일이 되어가고 있고 스페인을 통해 그들의 종교인 가톨릭이 전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인문학적인 관광자원이 많지 않은 필리핀에서 옛 내음이 물씬 나는 스페인 양식의 집들은 좋은 관광자원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생활 박물관은 제2차 세계대전의 폭격을 겪은 인트라무로스 내에서 가장 먼저 복원되었다. 16세기~20세기 초의 스페인계 필리핀 귀족들의 생활상이 고스란히 보존된 이 박물관 안에는 필리핀 귀족들이 사용했던 생활용품과 가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나는 이곳에서 사치스러운 생활을 누렸던 당시 상류층의 문화와 생활상을 엿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카사 마닐라 박물관을 들어서다가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건물 밖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좁은 건물의 입구를 들어서자 넓은 마당과 분수가 있는 아름다운 스페인 하우스가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방금 전에 필리핀 마닐라의 허름한 거리를 걷던 나는 고풍스러운 스페인의 한 집에 들어와 있었다. 나는 순간 공간이동을 한 것 같은 묘한 경험을 하였다. 이 집은 스페인 분위기가 나는 정도가 아니라 아시아에 옮겨져 있는 스페인이었다. 혹은 영화에 나오는 멕시코의 스페인 귀족들이 살던 고귀한 저택의 안마당으로 들어온 것만 같았다. 박물관과 분수대, 안마당이 아름다운 조형을 이루고 있었다.

카사 마닐라 박물관은 3층으로 되어 있었다. 안마당이 있는 카사 마닐라 박물관의 1층은 여행자들이 마음대로 구경할 수 있지만 필리핀 상류층 저택을 재현해 놓은 박물관 2층부터는 입장료를 내야 둘러볼 수 있다. 나는 비싼 입장료를 내고 박물관 2층의 계단을 올라갔다.





▲ 박물관의 장식장과 가구. 유럽 스페인의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진다.

ⓒ 노시경

아쉽게도 박물관 내에서의 이동은 그리 자연스럽지 못했다. 박물관에는 층마다 2명의 안내원이 있었다. 이들은 여행자들이 이동경로인 나무 바닥 위의 붉은 카펫을 벗어나는지를 감시하고 있었다. 이 안내원들은 이 건물 안에 들어온 여행자들이 혹시나 값비싼 가구들을 손으로 만지는지도 감시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 멋진 스페인 양식의 집안은 온통 화려한 유럽풍이다. 건물 안의 거실, 침실, 주방, 화장실은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되어 있다. 전시된 가구와 여러 소품들은 스페인 통치시대 당시에 실제로 귀족들이 사용하던 것들이다. 거실을 장식해 놓은 벽화와 장식장, 온갖 가구, 생활용품들은 마치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이 최고 화려함의 연속이다.

나는 바닥의 붉은 카페트를 따라 그들이 그려 놓은 동선 내로 박물관 안을 이동했다. 천장의 샹들리에는 넘치는 귀족의 여유를 보여주고 있었다. 식탁 위의 마치 커다란 커튼 같이 생긴 부채도 필리핀 귀족들의 생활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커다란 부채의 줄을 당기면 부채가 왔다 갔다 하면서 바람을 일으키는데 이곳의 귀족들이 얼마나 폼을 잡고 살았는지를 놀랍게 보여주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것 같은 침대 위에는 천사를 그린 벽화가 침대의 주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리는 박물관 안을 걷다가 갑자기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는 아주 인상적인 화장실을 만났던 것이다. 큰일을 보는 대변기 2개가 옆을 가리는 칸막이도 없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큰일을 볼 때 심심하지 않게 옆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라는 뜻인가? 그런데 일을 다 보고 난 후 손으로 뒤처리를 할 때는 옆에 앉은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았을까?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문화적 차이가 신기할 따름이다.





▲ 박물관의 주방. 안내원이 한국어로 친절하게 주방용품을 설명해 준다.

ⓒ 노시경

박물관에서 마지막으로 둘러보게 된 곳은 주방이다. 주방용품이 정갈하게 전시된 주방에는 푸른 제복을 입은 덩치 큰 필리핀 안내원이 웃음으로 우리를 맞아주고 있었다. 이 친구는 아주 친절하고 한국 사람들에게 호의적이다. 그는 아마도 이 박물관에서 수많은 한국 관광객들을 상대했을 것이다. 그는 한국어 단어를 다양하게 알고 있었다. 그는 한 주방용품을 가리키며, "주전자, 주전자!"라며 주방 용품을 설명해준다. 우리는 우리 말로 관광객을 맞이하는 안내원의 친절한 설명을 들으며 즐겁게 웃었다.





▲ 박물관 안마당. 스페인 안달루시아 양식의 분위기 있는 마당이다.

ⓒ 노시경

나는 주방을 마지막으로 스페인 저택의 내부 구경을 마쳤다. 나는 박물관의 3층 베란다 위에서 건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잠시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멈춰 서서 박물관 안마당을 감상하고 안마당을 둘러싼 스페인의 아름다운 집을 감상해 보았다. 아래에서 집을 올려다보는 것보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집이 훨씬 더 운치가 있었다. 안내원의 감시 속에 스페인의 고귀한 가구들을 둘러보는 것보다 햇살이 내려 쬐이는 안마당과 분수를 바라보는 마음이 훨씬 시원했다.





▲ 박물관 분수대. 뜨거운 여름의 더위를 날려주는 시원한 분수이다.

ⓒ 노시경

건물 안마당의 작은 분수대에서는 여름 햇살을 받으며 분수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복작거리던 관광객들이 안마당을 떠나자 분수대 주변은 다시 적막함이 찾아왔다. 그러자 나는 마치 신비스러운 정원 안에 들어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러한 안마당은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을 여행할 때 많이 보았던 파티오(patio)라는 안마당을 연상시켰다. 집 안마당은 4면 모두 외부와 구별되고 그늘이 지기 때문에 아주 시원했다.

파티오의 분수 주변에는 화분에 심어진 나무들이 둘러싸고 있고 박물관 입구의 담장에서는 붉은 빛 꽃들이 자라고 있었다. 박물관 내부는 너무 어두웠지만 이곳 파티오 주변은 밝은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안마당을 조금 지나자 기념품 판매점이 나왔다. 그리고 기념품 가게 옆에는 유럽 어느 도시에 들어선 것만 같은 시원스런 야외카페가 나왔다. 미로 같은 길을 지나면 플라자 산 루이스 콤플렉스(Plaza San Luis Complex)의 호텔까지 있다.





▲ 점토인물상. 필리핀의 토속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 노시경

기념품 가게에는 이곳 마닐라에서 처음 보는 독특한 물건들이 많다. 예상 외로 한번쯤 구경해볼만 한 곳이었다. 가게 안에서는 가게 주인이 화려한 색상이 칠해진 대나무 줄기를 짜집기하면서 죽공예품을 만들고 있었다. 손으로 직접 만든 점토 인물상과 목제 여인상, 그리고 인트라무로스를 그린 그림이 가게 안에 가득했다. 이 가게에는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낸 복제품들보다는 가게 주인이 직접 손으로 만든 전통 수제품이 가득했다.





▲ 전통 목조각. 여인의 전통복장이 필리핀을 느끼게 해준다.

ⓒ 노시경

집과 예술작품은 모두 그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닮아야 아름다운 법이다. 스페인의 귀족가옥은 아름답고 멋있지만 이 땅 필리핀의 산하와는 동떨어져 보였다. 박물관 안에 전해지는 유럽 분위기보다 이 기념품 가게의 목각상들은 필리핀의 토속적인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 기념품가게 주인. 가게의 기념품들은 주인이 직접 손수 만든 수제품들이다.

ⓒ 노시경

우리는 필리핀에 남은 스페인의 흔적에서 떠나 조금 더 필리핀다운 여행지를 찾아 떠나기로 했다. 인트라무로스 내의 돌길에는 여전히 뜨거운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강한 햇빛 아래에서 따라 걷기는 너무 힘들었다. 우리는 햇빛을 피해 차를 타고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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