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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아니아/오스트레일리아

호주 : 신기루가 출렁이는 붉은 호수를 달리다… 서호주 골든 아웃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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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 신기루야."

도무지 끝을 알 수 없는 호수가 지평선과 만나는 데를 가리키며 가이드 맷이 말했다.

발라드 호수(Lake Ballard). 호수이되 물이 없다. 죽은 호수다. 붉은 땅은 군데군데 소금으로 하얗다. 선사시대 바다였던 흔적이자 수십만 년 엉기고 녹기를 반복한 소금이다. 그 호수의 지평선에서 아지랑이 품은 땅이 아른거렸다. 영락없이 물의 반영인데, 맷은 아니라고 자꾸만 고개를 저었다.

그를 설득해 호수를 가로질렀다. 날카로운 햇빛 아래 땅은 힘없이 갈라져 속살을 내보였다. 가까이 혹은 멀리 영국 조각가 안토니 곰리가 세운 동상이 까맣게 빛을 흡수했다. 옆에서 맷이 투덜거렸다. "신기루는 다가갈수록 멀어진다고. 그렇게 물을 쫓다가 옛날엔 많은 사람이 죽어나갔다니까."

호수는 크다. 49㎢. 여의도 6배에 가까운 크기다. 곰리가 이곳 원주민을 본떠 조각했다는 동상 51개는 이중 딱 여의도만한 크기를 차지하고 서로를 바라보거나 호수를 응시했다. 단지 일부를 차지했어도 그 정도 크기면 지상 최대의 야외 갤러리라 불릴 만했다. 호수 끝까지는 됐으니 다만 황량한 정적을 견디고 선 최전방 동상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20분쯤 걷자 환영(幻影) 아닌 물이 호수를 채웠다. 맷이 틀렸다. 동상은 물에 비친 자기 반영과 발을 맞대고 서 있었다.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한 그가 중얼거렸다. "이건 신기루(mirage)가 아니라 기적(miracle)이야."

붉다. 1890년대 엘도라도를 찾아 수만 명이 탐험했던 길이다. 그 중 많은 사람들이 물의 신기루에 속아 길 위에서 쓰러졌다.
드넓은 유채밭과 목초지가 땅을 수놓은 서호주 에스페란스.
금을 찾아 떠난 길

발라드 호수로 달리는 세 시간쯤의 길 위에서도 자꾸만 눈을 비볐다. 길의 굴곡 위로 분명 물이 고였다가, 다가가면 환영처럼 증발해 버렸다. 이 신기루의 길을 품은 거대한 불모의 땅을 호주 사람들은 '골든 아웃백(Golden Outback)'이라 불렀다.

신기루는 이 늙은 땅이 까마득히 어린 인간을 꾀는 유혹이다. 호주는 늙었다. 다른 젊은 대륙이 활발하게 화산 활동과 조산 활동을 반복하는 동안 골든 아웃백을 품은 대륙은 그 자리에서 고요했다. 물을 오래 품어내지 못하는 늙은 땅은 대신 신기루를 품었다. 그 신기루에 현혹된 이들이 수없이 이곳에 발을 디뎠다 돌아가지 못했다. 신기루 대신 물이 고인 건 불과 100년 전 일이다. 1903년에서야 서호주 연안 도시 퍼스(Perth)에서 골든 아웃백 한가운데 있는 도시 캘굴리(Kalgoorlie)로 물을 끌어오는 송수관(送水管)이 개설됐다. 길이 560㎞. 당대 최장 길이의 송수관이었다.

그때까지 골든 아웃백의 주인은 유칼립투스 나무였다. 오랜 세월 버텨 낸 유칼립투스의 자태는 매력적이다. 그 나무는 자작나무의 하얀 색깔을 지녔고, 서걱대는 댓잎 소리를 내며 소나무의 유려한 몸매를 뽐낸다. 붉은 흙과 하얀 유칼립투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은 골든 아웃백의 주조를 이룬다. 이 원색은 선명함으로 신기루의 환영을 지워낸다. 해가 뜨고 질 때면 다 같이 붉게 물들어 신기루의 일부가 된다.

불모지라니, 쓸데없는 땅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1930년대 전 세계를 휩쓴 대공황을 버틸 수 있었던 힘이 여기 있다. 바로 금(金)이다. 1892년부터 1911년까지 골든 아웃백에서 생산된 금의 가치가 현재 기준으로 대략 180억 호주달러(약 19조7816억원)다.

광산 따라 흥하고 망한 도시의 흔적은 발라드 호수의 곰리 조각상을 닮았다. 캘굴리를 기점으로 '브로드 애로(Broad Arrow)'와 '멘지스(Menzies)' 등이 불모지 위에 띄엄띄엄 서 있다. 술집과 여관, 주유소 등 도시를 구성하는 최소 요소로 지금껏 버티고 선 이 마을들은 발라드 호수 찾는 길의 오아시스다.

호주에서 가장 하얀 모래 해변

늙음으로 금을 품은 서호주의 땅은 같은 힘으로 눈부시게 하얀 모래를 품었다. 캥거루가 물을 마시고 쉬러 오는 곳, '럭키 베이(Lucky Bay)' 얘기다. 단순한 수식이 아니다. 이곳 해변은 과학적으로 호주에서 가장 하얀 모래라 입증됐다. 이 색을 구성하는 건 석영(quartz). 북쪽에서는 석영을 정제해 금을 내놓았으나 여기에서 석영은 잘게 부서지며 해변을 하얗게 수놓았다. 럭키 베이를 품은 지역은 호주 남부 해안도시 에스페란스 인근 '케이프 르 그랜드(Cape Le Grand) 국립공원'이다. 캘굴리에서 남쪽으로 400㎞ 거리다.

캘굴리를 기점으로 발라드 호수로 가는 길이 할리우드 서부 영화의 풍경을 닮았다면, 남쪽으로 뻗은 이 길은 고전 로맨스 영화의 목가적인 풍경을 닮았다. 에스페란스에 근접할수록 붉은 땅은 초록을 담은 땅에 자리를 내준다. 그 땅 위로 때로 양이나 소, 말이 풀을 뜯고 때로 유채가 출렁인다. 출렁이는 유채밭은 지평선 끝까지 노랗게 물들인다. 바닷바람으로 연안까지 달려온 구름은 파란 하늘을 점점이 수놓아 북부와는 다른 광활함을 완성한다.

그 길 끝 케이프 르 그랜드 국립공원은 놀라운 풍경으로 가득하다. 사륜구동차로 20㎞ 넘는 해변을 가로지르면 여유로운 수평선과 다급한 지평선을 동시에 만나고, 그 끝엔 하얀 해변 위에 몸을 누인 캥거루가 기다린다.


>> 여행수첩

▲환율 1호주달러=약 1100원

▲항공편 캐세이퍼시픽이 홍콩을 경유해 퍼스공항까지 하루 1회 운항한다. 11월부터 주 10회로 증편될 예정이다.

▲교통 사륜구동차를 빌리는 것이 서호주를 느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대체로 빌리는 데 하루 100호주달러 이상.

①운전을 좋아한다면 퍼스 공항에서 차를 빌려 캘굴리까지 이동, 캘굴리를 기점으로 북쪽 발라드 호수와 남쪽 에스페란스를 돌고 퍼스로 돌아올 수 있다.

②운전하는 시간을 줄이고 싶다면 퍼스∼캘굴리, 에스페란스∼퍼스 간을 비행기로 이동한다. 구간마다 콴타스(Qant as) 항공이나 스카이웨스트가 매일 운항한다. 캘굴리 공항에서 차를 빌려 북쪽 발라드 호수를 다녀오고 에스페란스에선 투어 프로그램을 이용한다. 캘굴리에서 에스페란스까지는 주 3회 버스가 운행된다.

▲안내소·여행상품 이 여정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도시가 캘굴리와 에스페란스다.

①캘굴리 시내 한가운데 방문자 센터(Visitor Centre)가 있다. 지도와 여행책자를 무료로 구할 수 있다. (08)9021-1966, www.kalgoorlietourism.com

②에스페란스 '에스페란스 에코 디스커버리 투어(www.esperancetours.com.au)', '케파 쿨 에코 컬처럴 디스커버리 투어(www.kepakurl.com.au)'에서 반나절~2일 등 투어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80호주달러부터. 공식 안내소 홈페이지는 www.visitesperance.com

▲숙박 캘굴리·에스페란스에 큰 호텔은 없다. 캘굴리에선 '뷰 온 하난스(www.theviewonhannans.com.au)'가, 에스페란스에선 '제티 리조트(www.thejettyresort.com.au)'와 '베스트 웨스턴 호스피탈리티 인 에스페란스(www.esperance.wa.hospitalityinns.com.au)'가 깨끗하다. 100~300호주달러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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