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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는 1만 개가 넘는 섬들로 이루어져 있어 관광지로 알려진 곳 이외에는 미지의 공간으로 남아있다. 그 중 술라웨시 섬도 잘 알려지지 않은 곳 중 하나다. 낯선 이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인 화산을 자신들의 삶 안으로 끌어들여 공존하며 살아가고 있는 또다른 사람들의 이야기.
‘남들이 다 찍는 다큐멘터리는 찍지 말자’ ‘남들이 다 생각하는 다큐멘터리는 만들지 말자’ ‘오르지 못할 나무는 찍으면서 올라가자’ 내가 이 일을 시작하면서 스스로 다짐하고 있는 신조다. 나의 신조를 다짐하며 다시한번 선택한 나라는 바로 1만 개가 넘는 섬들로 이루어진 세계 최대의 도서(島嶼)국가 인도네시아다 .
‘많은 섬들의 나라’란 뜻의 ‘누산타라(Nusantara)'라고도 부르는 그 수많은 섬엔 2억 명이 넘는 인구가 각기 다양한 풍습을 이어가며 살고 있다. 그동안 인도네시아를 4번 방문하고 촬영했으나 수도인 자카르타와 근교일대인지라 항상 아쉬움 속에 돌아와야 했다. 내가 늘 생각하는 신조와 맞지 않았기에 항상 인도네시아는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번 촬영은 좀 달랐다. 천가지 자연이 살아 숨쉰다는 인도네시아 중앙부에 위치한 술라웨시 (Sulawesi)섬. 가는 길이 만만치 않아 더욱 나의 기대감은 컸다. 힘들게 가는 곳은 언제나 최고의 장면을 만들어줬기 때문에.
한국에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까지 7시간, 자카르타에서 술라웨시 북쪽 끝에 위치한 마나도(Manado)까지 7시간, 총 14시간의 거리는 절로 한숨이 나오게 한다. 우리의 목적지인 마나도는 술라웨시의 주도인 유서 깊은 항구도시다. 특히 다이버 마니아들에게 잘 알려진 곳으로, 마나도 앞바다에 위치한 부나켄(Bunaken)은 세계에서 가장 잘 보존된 열대바다라고 한다. 굳이 다이버 장비를 착용하지 않아도 배위에서 수심 20m까지 보일 정도로 정말 물이 맑고 산호초들이 아름답다.
“물이 새” “뭔 물이 새? 어디? 카메라?”
절로 목소리 톤이 높아진다. 휴대하기 편한 비닐로 만들어진 하우징의 윗부분이 미세하게 찢어져 카메라로 물이 스며든 것이다. 민물도 아니고 소금기가 있는 바닷물은 카메라에 쥐약이다. 촬영 첫날부터 카메라가 고장이 나다니 걱정과 짜증이 뒤범벅되지만, 내 얼굴만 바라보고 있는 카메라 감독과 현지인 가이드에게 흔들리는 모습을 절대로 보이면 안되기에 나는 애써 표정을 감춘다.
“이번 다큐 얼마나 대박나려고 첫날부터 카메라가 고장이지? 일단 보조 카메라 돌리고 젖은 카메라는 배터리 빼고 말려봅시다”
‘씨익’ 웃으며 말은 대범하게 했지만 속에선 천불이 난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양은 붉게 타들어가고, 내 마음은 시커멓게 타들어간다. 이리 뒤집었다가 저리 뒤집었다가 밤새 카메라를 괴롭힌 탓일까? 아님 이번에도 좋은 다큐멘터리 만들라는 신의 축복일까? 새벽 6시에 조심스레 배터리를 넣고 전원을 켜자 ‘삐빅’ 거리며 작동되기 시작한다. 이럴 땐 정말 'Alleh'다!
이 뜨거운 산위에 사람의 얼굴을 한 거대한 석상이 두 개 있다. 1991년 한 석공이 바위를 그대로 깎아 조각한 것이라는데, 마나도 지역의 조상신이란다. 우리로 치면 ‘환웅과 웅녀’랄까. 이렇게 산 중턱에 조상의 얼굴을 새겨 놓은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화산폭발의 재앙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해달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은 것이다. 진짜로 조상신의 가호가 있었는지 5년 전 한 차례 폭발이 있었는데 다행히 마을 사람들은 단 한사람도 다친 사람이 없었단다.
뜨거운 땅에 터를 잡고 사는 이곳 사람들은 뜨거운 환경을 알차게 활용하며 살고 있다. 건너편 숲 한가운데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이 보인다. 시멘트로 벽을 만들어 놓은 것이 마치 온천 같다. 카메라 감독이 다가갈려고 하니 현지 가이드가 놀라서 뛰어온다.
“노노 미스터 Lee 노노. only 마담 마담”
이곳은 여자들만의 공간이라고 한다. 빨래터 겸 목욕탕. 이곳 온천은 마을 여자들의 공동 빨래터 겸 공짜 목욕탕인 것이다. 이럴 땐 여자 피디인 것이 큰 장점이다. 카메라를 든 내가 민망 할 정도로 마을 여자들은 ‘훌러덩 훌러덩’ 옷을 벗고 온천으로 들어가 그동안 쌓인 빨래를 한다. 옷을 입고 있는 나를 보더니, 나에게도 옷 벗고 들어오란다. 동네 아줌마들이 모인 빨래터 겸 목욕탕이니 그 소란함과 수다가 거의 귀가 따가울 지경이다. 영어 한마디 통하지 않지만 몇 마디 배운 인도네시아 말로 즐거운 목욕탕 수다촬영을 끝마칠 수 있었다.
이곳 사람들에게 화산은 단순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화산을 직접적으로 느껴본 적이 없어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화산재 덕분에 토양이 비옥해 다른 지역에 비해 농사가 잘된다고 한다. 또 하나 화산지역엔 금광이 많단다. 마나도 또한 인도네시아에서 알아주는 황금의 땅이라고.
금광 촬영이야 세계를 돌아다니며 많이 했었고 별 관심이 없었는데, 여기 금 채취 방식이 다르다며 한번 가보자고 가이드가 설득한다. ‘다르다’ 이 한마디에 귀가 얇아진 나는 황금이 묻혀있는 노다지 땅 금광을 찾아갔다.
사금(砂金)이나 토금(土金)이 아닌 석금(石金)을 채취하는 광산은 어떻게 생겼을까? 얼마나 올랐을까, 길도 제대로 나있지 않은 산길을 1시간 반쯤 걸었을까, 산중턱, 야자수 사이사이로 색색의 천막들이 들어앉아있는 것이 보인다. 금맥 있는 곳에 각각 땅굴을 파놓은 ‘루방’이라는 소규모 금광이다. 작은 산 하나에 루방이라는 작은 금광은 300개가 넘는다. 제법 규모가 큰 루방(금광)에 인사를 하고 얘기가 잘되어 촬영허가가 떨어졌다. 사실 이런 경우는 정말 운이 좋은 것이다. 전화나 이메일이 없으니 사전섭외도 할 수 없고, 현장에서 들은 정보로 찾아온 아이템을 촬영하게 해주다니…. 바로 10년 촬영을 같이 다닌 이용택 감독이 한마디 한다.
“복도 많은 피디” 정말 난 복이 많은 피디다.
“여기 보이죠? 이게 금이에요.”
손으로 금이 있다는 부위를 짚어주어도 어디가 금이 있다는 건지 당최 보이지가 않는다. 역시 어떤 일이든 전문가와 일반인의 눈은 다르다. 갑자기 천막 한쪽이 소란해진다. 급하게 다가가 보니 땅에 웬 구멍하나가 뚫어져 있다. 정말 땅굴이다.
“줄에 묶어!” “줄이 밑바닥까지 닿게 해!”
정말 허술하게 보이는, 직접 깍은 것이 분명해 보이는 도르래로 짐작되는 물체를 돌리자 줄이 조금씩 감기면서 시커먼 땅굴에서 자루하나가 딸려 올라온다. 자루 안에 가득 든 것은 땅속에서 방금 캐낸 원석이다. 그렇다면 금광은 이 땅굴 밑에 있다는 것인가? 가이드를 통해 궁금한 것을 물어본다.
“몇 미터나 되죠?” “지금 뚫려 있는 곳은 한 50m정도일거에요. 별로 깊지 않죠. 깊으면 800m 까지 가거든요”
50m라… 언뜻 보기에도 아주 좁아 보이고, 어두워서 과연 저기에서 어떻게 작업하는지 순간 궁금해졌다. 땅굴로 들어가는 통로는 아주 좁다. 보아하니 광산에서도 체구가 작은 사람이 굴속에 들어가는 일을 맡고 있다. 계속 내 눈을 피해 다른 것만 촬영하던 카메라 감독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무언의 압력을 보낸다. 결국 카메라 감독은 내려갈 준비를 한다. 처음 내려가는 우리에겐 특별히 줄 끝에 앉을 수 있는 나무토막까지 마련해줬다. 카메라 감독이 체구가 큰 편인데다 카메라에 조명까지 달고 있어서 굴을 통과하는게 쉽지가 않았다.
“아아아… 아파 아파”
나무토막을 다리사이에 끼우고 내려가다 보니 남자로서 느끼는 고통이 심한가 보다. 괜히 더 미안해진다. 어쨌든 무사히 내려간 것 같다.
“ 잘 내려갔어요?” “응, 근데 여기 서있을 곳이 없어”
뭔 소리야 이건. 서 있을 곳이 없다니?
“나 내려간다”
내가 내려간다고 하니 지켜보고 있던 광부들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여자잖아. 위험해요” “노 프라블럼. 오케이 오케이. 마이 바디 스몰 오케이 오케이”
말리는 광부아저씨들을 뒤로 하고 줄에 매달려 내려가는데 이건 결코 만만치가 않다. 줄은 내 몸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끊어질 것 같고, 바닥은 컴컴해 보이지 않고, 울퉁불퉁한 흙벽에 양쪽어깨는 계속 부딪치고…. 저 아래 카메라에 단 조명 불빛 하나가 보인다. 이제 다 내려 온건가 싶었는데, 이제 시작이다.
“저는 남자니까 일을 해야죠. 먹고 살기 위해 이 일을 시작했어요”
자루를 한번 올려 보낼 때마다 샬디도 지상으로 올라가 잠깐 휴식을 취하고 내려온다. 샬디가 맨발로 척척 오르던 길을 나는 자루처럼 도르래에 매달려 힘겹게 올라왔다. 땅굴 금광 속에 있었던 시간은 고작 1시간도 안되었지만 극과 극의 세상을 경험한 기분이다. 나의 뒤를 이어 카메라 감독이 무사히 올라왔다.
“세상에서 촬영이 제일 쉬워요. 여기 일 너무 힘들어요”라는 말을 하며.
“돈 벌어서 집도 사고 좋은 여자 만나서 결혼도 하고 싶어요”
아주 소박한 샬디의 소원이 하루빨리 이루어지길 기도해본다.
굴속 깊이 들어가는 광부들이나 밖에서 하루종일 돌을 깨부수면서 날카로운 돌에 피를 보는 광부들이나 만만한 노동이 없다. 금광 한번 촬영하느라 바닷물을 마시고 간신히 부활한 카메라는 또다시 만신창이가 되고 온몸이 진흙범벅이 되었지만 나의 심장은 미친듯이 뛰고 있다. 누구나 황금빛 인생을 꿈꾼다. 나 역시 도심의 기준으로 좀 더 많은 재물과 좀 더 많은 명예를 꿈꾸고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온몸으로 치열하게 사는 법을 가르쳐 준 이들과의 촬영을 통해 진정한 ‘황금빛 인생’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남보다 더 열심히, 내 땀 흘려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야말로 ‘황금빛 인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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