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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 브레겐츠 : 오스트리아지만 오스트리아라고 부르기 쉽지않은 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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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과 호수, 그리고 오페라와의 만남

독일 알프스 산자락에는 빙하가 녹았던 자리에 큰 호수들이 군데군데 있다.

여름밤에 호수 위에서 펼쳐지는 오페라를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언젠가 누군가가 “밤하늘의 별 밑에서 오페라를 보는 것이 작은 소원”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게다가 그 무대가 깊은 산속의 호수라면, 과연 그날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밤의 하나가 될 것이다.

유럽에서 여름에 열리는 페스티벌 중에는 야외 오페라 공연이 꽤 많으며, 그중에는 호수에서 벌어지는 공연들도 꽤 된다. 그러나 그 모든 조건을 다 갖춘 것들 중에도 단연 최고이자 가장 아름다운 분위기를 갖추었고, 한 번쯤 가 보라고 권하고 싶은 곳은 역시 브레겐츠 페스티벌이다.

독일 알프스 산자락에는 빙하가 녹았던 자리에 큰 호수들이 군데군데 있다. 그 호수들은 고산 지대에 위치해 물이 맑지만, 예부터 사람들의 접근이 쉽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 중부 유럽의 산속에 숨어 있는 보덴 호(Bodensee)인데, 나라에 따라서는 콘스탄츠 호라고 부르기도 한다.

보덴 호는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3국이 만나는 국경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보덴 호에서 배를 타고 나와 호안湖岸을 바라보면, 주변 마을마다 각기 다른 나라의 국기를 걸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독일의 서남쪽 끝과 오스트리아의 서쪽, 스위스의 동쪽 끝이 만나는 곳인데, 호수를 둘러싼 여러 마을들 중에서 그래도 도시다운 모양을 가장 제대로 갖춘 곳이 브레겐츠다.

브레겐츠는 오스트리아 땅이다. 이 도시는 명색이 포어아를베르크 주의 주도(州都)이지만, 동화책에 나옴 직한 시골 마을처럼 조그마하고 귀엽다. 이 작은 곳에서 매년 여름마다 대규모 음악 페스티벌이 열리는 것이다.

보덴 호 가운데에 있는 린다우는 성 하나가 도시를 이루고 있다.

알프스 산속에서 세 나라가 만나다

브레겐츠가 오스트리아라고 해서, 빈과 같은 오스트리아 도시를 통해서 브레겐츠로 들어가려고 한다면 오산이다. 빈은 물론이고 빈보다 더 가까운 잘츠부르크에서도 접근이 쉽지 않은 곳이 브레겐츠다.

브레겐츠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스위스의 취리히나 독일의 뮌헨을 통하는 것이다. 브레겐츠는 뮌헨과 취리히를 잇는 국제 철도의 중간 지점에 있기 때문에, 이 두 도시에서 출발하는 것이 가장 좋다. 취리히 중앙역에서 뮌헨행 열차를 타면 약 2시간, 반대로 뮌헨에서 취리히행 열차를 타면 2~3시간 만에 브레겐츠 역에 닿는다.

열차가 브레겐츠 역에 들어서면 주위 분위기가 달라진다. 명색이 주도라는데, 과연 여기가 도시일까 싶다. 담도 경계도 없는 역에는 고산 지대라서 그런지 여름인데도 낙엽들이 굴러다닌다. 역 건물이나 플랫폼도 거의 비어 있다. 하이킹을 가는 몇몇 학생들과 딸네 집을 다녀온 듯한 할머니 두 분만이 조용하고 깨끗한 플랫폼 벤치를 지키고 있다. 아무리 오스트리아 잡지에서 선정한 순위라고 하지만, 잘츠부르크와 바이로이트에 이어 세계 3위라고 자랑하는 세계적 페스티벌이 열릴 것 같은 곳이 도무지 아니다.

산속의 도시 풍경은 차분하기만 하다. 시민들의 표정에는 베로나에서 볼 수 있는 활기찬 모습도, 잘츠부르크에서 볼 수 있는 돈 욕심도 보이지 않는다. 그냥 조용하다. 페스티벌을 알리는 얌전한 깃발들을 제외하고는, 손님들을 위해 새 옷을 갈아입지도 않았고 화장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풍경이 마치 우리 시골의 어느 역에 내린 것처럼 나그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그러나 은은한 초록색의 역 건물은 세련되면서도 기능적인 현대식 건축으로 처음 오는 이의 눈을 사로잡는다. 유명한 오스트리아의 건축가가 설계했다는데, 느낌이 좋다. 철도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수에 비해서 지나치게 커 보이는 역 건물은 에스컬레이터 등의 현대식 시설을 일찍 도입한 입체적인 건물이기도 하다. 역 건물에서 나와 길을 건너면 시내로 이어지지만, 페스티벌을 찾아 온 이상 호수 위에 서 있다는 거대한 무대를 빨리 보고 싶지 않은 이가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면 역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다. 트렁크를 든 채 역의 2층으로 올라가서, 뒤편으로 이어지는 육교를 건너가면 된다. 역 뒤편으로 내려오면 어린이 놀이터가 나타난다. 그곳에서 왼쪽으로 조금 걸어가면 카지노와 호텔이 보이고, 그 건물들 뒤로 돌아가면 멋진 축제극장(Festspielhaus)이 바로 눈앞에 나타난다.

호수를 무대 삼아, 황혼을 조명 삼아

이곳에 오기 전에는 황량한 호숫가에 큰 무대만 달랑 있는 장면을 상상했지만, 실상은 호숫가에 초현대식 건물인 축제극장이 버티고 서 있다. 원래 1980년에 세워졌지만, 2006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대대적인 변신을 했다.

이 건물 역시 조형미가 돋보이는 현대식 건물로, 페스티벌의 역사와 함께 이곳의 예술적 안목이 만만치 않음을 느끼게 해 준다. 이 축제극장은 오페라, 콘서트, 전시, 회의 등이 열리는 상설 공연장이자 페스티벌 본부가 있는 곳으로서, 현대식 복합 문화 공간이다. 이 건물의 뒤쪽인 호숫가에 호수를 바라보는 큰 계단식 좌석을 만들어서, 여기서 오페라 공연을 관람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무대는 듣던 대로 호수 가운데에 떠 있다. 주최 측에서 ‘떠 있는 무대(floating stage)’라고 홍보하는 초대형 무대는 객석과 약간 떨어져서 호수 위에 있는데, 왼편의 긴 다리를 통해서 제작진이나 출연자들이 통행한다. 이 무대는 사실 떠 있는 것이 아니고, 물속에 단단한 지지대를 두고 있다.

그레이엄 비크가 연출한 <아이다>가 호상 무대에서 막이 오르기를 기다리고 있다.

브레겐츠 페스티벌의 호상(湖上) 무대는 다른 페스티벌처럼 무대를 매일 바꾸거나 이동하는 조립식이 아니고, 시즌이 끝날 때까지 부술 수 없는 콘크리트와 철골로 된 견고한 고정 무대다. 그러므로 호상 무대에서는 매년 한 작품의 오페라만 공연한다. 그리고 한 작품은 보통 2년의 수명을 가진다. 즉 두 시즌 동안 같은 작품을 공연하고 2년 후에 다른 작품으로 바꾼다. 그래서 시즌이 아닐 때도 호숫가에 서 있는 거대한 세트들은 멀리서 보면 장관이다. 이 무대는 특히 석양에 두드러지는, 보덴 호의 랜드 마크인 것이다.

공연은 저녁에 이루어진다. 어스름 황혼이 깔리면 사람들은 정장 차림에 담요를 하나씩 들고 스탠드에 앉는다. 비록 야외이기는 하지만 스탠드는 현대식 공법이어서, 4,400석에 달하는 좌석이 모두 편안하고 어느 자리에서나 시야가 아주 좋다.

좌석이 거의 차면 공연의 첫 행사로, 큰 배가 무대 왼편의 선착장으로 들어온다. 그것은 호수 건너편의 독일에서 오는 여객선으로, 독일 사람들이 오페라를 보러 배를 타고 오는 것이다. 서쪽으로 떨어지는 햇빛을 받으며 기항(寄港)하는 배를 보는 것도 참으로 멋지다. 배에서 내린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자리를 잡으면, 조명들이 꺼지고 오페라가 시작된다.

그때가 보통 저녁 9시에서 9시 30분이다. 1막이 진행될 때까지는 하늘이 다 어두워지지 않는다. 음악을 들으면서 석양을 감상하는 것도 브레겐츠의 잊을 수 없는 추억인데, 호수의 풍광을 잘 즐기려면 앞자리가 아니라 맨 뒤의 높은 자리가 더 좋다.

무대 세트의 놀라운 크기와 합창단, 무용단, 엑스트라의 엄청난 규모는 처음부터 관객들을 압도하기에 충분하다. 앞자리에 앉으면 목이 아파서 올려다보기도 힘들 정도로 거대한 세트에서 작은 창문들이 열리면, 각 창문마다 조명들이 튀어나와 관객들로 하여금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브레겐츠 페스티벌의 가장 큰 특징은 엄청난 세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숨은 곳에 있으니, 이곳의 공연은 마이크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가수들은 저마다 귀밑에 마이크를 붙이고 나온다. 관객에게는 지휘자도, 오케스트라도, 심지어 오케스트라 박스도 보이지 않는다. 이들은 모두 축제극장의 건물 속에 숨어서 모니터와 마이크를 통해 서로 사인을 주고받는다. 이 모든 것은 전자 장치에 의해 조절된다.

스탠드의 맨 뒷자리 뒤에는 축제극장의 꼭대기 층이 보이는데, 그곳은 전면이 유리로 되어 있어서 마치 대형 유조선의 조타실이나 국제공항의 관제탑처럼 무대와 호수와 객석을 전부 조망할 수 있다. 그곳에서 모든 조명과 음향 등을 지시하고 그에 따라 무대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이다. 그곳에는 실내 라운지로 된 호사스러운 특별석도 있지만, 처음에는 노천에 앉아서 경험해 보기를 권한다. 어찌 되었거나 이곳에 처음 와 본 사람이라면 감동과 흥분을 넘어서 거의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진지한 클래식 팬이라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할 음향 부분에서 거부감을 느끼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마이크를 쓰는 다른 지역의 공연들(사실 그리 많지는 않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정교한 기술로, 음향은 예상보다 좋은 편이었고 독창자와 합창단, 오케스트라 사이의 음량 분배도 상당히 잘 조절되고 있었다.

비 때문에 호상 무대에서 공연이 어려우면 실내인 이곳 축제극장으로 무대를 옮겨 공연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다.

막간이 없는 오페라, 그 충돌의 충격

1999년에는 베르디의 오페라 《가면무도회》가 올라갔다. 호수 안에 몸 절반을 담근 채 서 있는 거대한 해골 모형 덕분에 잊을 수 없는 무대였다. 《가면무도회》는 실제로 있었던 스웨덴 왕 구스타프 3세의 암살 사건을 다룬 역사적인 드라마다. 구스타프는 가장 친한 친구이자 심복인 요한 앙카스트룀 백작의 부인인 아멜리아를 남몰래 사랑하고 있다. 그러나 친구의 아내를 사랑한다는 죄책감으로 괴로워한다. 앙카스트룀은 왕의 이런 심정을 모르는 채 왕과 자신의 부인의 관계를 의심하고, 결국 가면무도회 도중에 왕을 저격한다는 내용이다.

무대 옆에 서 있는 해골은 커다란 책을 펼치고 보고 있는데, 이 책이 바로 무대가 된다. 그러니 가수들은 바로 그 책 위에서 오페라를 공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책은 춤 교본 같은 것으로, 그 위에는 춤출 때 밟은 스텝의 움직임이 그려져 있다. 즉 모든 출연자들은 책 위에서 춤을 추고, 왕은 해골, 즉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자신의 운명에서 도망 갈 수 없다는 것을 호수 위의 거대한 무대가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깜짝 놀랄 만한 이 무대를 만든 연출가는 리처드 존스와 앤서니 맥도널드로서, 이들은 이 무대를 통해 그 이름을 전 세계에 드날렸다.

2001년 여름에는 푸치니의 《라 보엠》이 호수를 장식했다. 연출은 역시 리처드 존스와 앤서니 맥도널드로서 또 한 번 브레겐츠에서 깜짝 놀랄 만한 아이디어를 선보였다. 파리의 카페를 연상시키는 테이블형 무대 위에서 출연자들은 대인국(大人國)에 온 소인들처럼 보였다. 소인들은 현란한 색상의 재떨이나 볼펜 위를 뛰어다녔다. 무대 뒤의 엽서 판매대에는 각 막마다 파리의 다른 풍경들을 보여 주는 엽서들이 나타나, 각 장면의 분위기를 연출했다. 정교한 무대 위에서 가수들이 노래할 때, 관객들은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이하 ‘빈 심포니’)가 연주하는 푸치니 음악과 함께 [걸리버 여행기]의 먼 나라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무대 앞의 호수에 등장하는 보트 위에서도 연기가 벌어지는데, 이것은 매년 보여 주는 장치다.

브레겐츠 페스티벌 공연의 또 다른 특징은 막간에 휴식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호상 무대이므로 1막이 끝나도 막을 내릴 수 없다. 그러나 브레겐츠 공연들은 이런 점을 도리어 살려서, 1막이 끝나면 놀라운 장면 전환을 보여 주면서 바로 2막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3막, 4막으로 이어진다. 곡을 직접 작곡한 베르디나 푸치니가 보면 놀랄 일이겠지만, 실제로 극이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질 때의 효과는 신선하고 대단하다.

2007년 무대는 로버트 카슨이 맡아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는 호상 무대 전체를 정유공장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의 무대인데, 이 작품은 중세 스페인의 왕위 계승 전쟁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헤어진 형제간의 사랑과 전쟁 이야기다. 그런데 현대에 왕위 계승 전쟁이라는 것이 설득력이 있을 리 없다. 그래서 카슨은 무대를 정유공장으로 옮기고, 여기서 일어나는 경영권 다툼의 이야기로, 즉 현재 사장과 퇴출당한 노조 위원장 사이의 싸움으로 그리고 있다.

노조의 돌격대가 공장으로 침입하는 장면은 마치 눈앞에서 영화가 펼쳐지는 것 같다. 공장 꼭대기에서 유격대처럼 로프를 타고 일순간에 무대로 들어서는가 하면, 연인을 납치하여 보트에 태워서 보덴 호수 저편으로 사라지기도 하고, 객석 사이의 출입구를 통해 등장한 합창단들은 호수 위의 무대로 기어 올라가면서 〈대장간의 합창〉을 부른다. 이 모든 것들이 브레겐츠라는 독특한 환경을 잘 살린 연출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상상력도 호수 저편으로 나래를 편다.

최근에는 비제의 《카르멘》, 베토벤의 《피델리오》, 베르디의 《나부코》 등이 2년 간격으로 공연되었고, 모두들 참신한 연출로 브레겐츠 페스티벌의 이름을 드높였다. 이어서 베르디의 《가면무도회》, 푸치니의 《라 보엠》, 번스타인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 푸치니의 《토스카》, 베르디의 《아이다》가 공연되었고, 2011~2012년에는 조르다노의 《안드레아 셰니에》가 공연되고 있다.

현재, 가장 전위적이고 참신한 연출가의 한 명인 영국의 데이비드 파운트니가 브레겐츠 페스티벌의 예술 감독을 맡고 있는데, 그의 취임 이후 브레겐츠는 더욱 화려한 무대와 친절한 서비스, 그리고 공격적인 마케팅을 보여 주고 있다.

선상 공연이 하이테크놀로지 공연으로 일어서다

세계 최초의 호상 오페라 축제인 브레겐츠 페스티벌이 시작된 것은 1945년이었다. 처음에는 호수에 큰 배를 띄우고 그 위에서 공연을 했는데, 관객들은 호숫가에서 공연을 감상했다. 그런데 그 행사가 브레겐츠와 보덴 호숫가의 여러 도시들을 찾는 휴양객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그리하여 주최 측은 1948년부터 호수 위에다 아예 무대를 만들기 시작했다. 초창기의 레퍼토리는 주로 요한 슈트라우스 2세나 프란츠 레하르 같은 이들의 빈 오페레타가 주를 이루었는데, 시설도 제대로 되지 않은 야외에서 본격적인 오페라를 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무리였을 것이다.

케이스 워너가 연출한 <안드레아 셰니에>는 다비드의 명화 ‘마라의 죽음’을 호수 위에 재현했다.

그러던 것이 지금과 같은 현대식 시설을 갖추게 된 것은 1979년이었다. 그때부터 호상 무대에 기계식 이동 장치와 첨단 음향 시설이 생기고, 이어서 1980년에는 축제극장이 만들어졌다. 그리하여 제대로 된 오페라 하우스보다 더욱 웅장한 무대와 더욱 엄청난 음향을 들려주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초기 무대를 장식하던 오페레타 레퍼토리들이 사라지게 된다. 그 대신에 무대의 작품성에 역점을 둔 본격적인 오페라들이 올라가게 되어, 베르디, 바그너, 푸치니 등의 정극(正劇) 오페라들이 이곳의 주 레퍼토리가 되었다.

그리고 브레겐츠 무대에 오르던 수상(水上) 오페레타들은 멀리 오스트리아 동부의 뫼르비슈 호숫가로 옮겨지게 된다. 브레겐츠 공연은 비록 마이크 등의 전자 장치를 쓰기는 하지만 그 음향이 참으로 대단해서 무려 300미터 밖의 호반에 앉아서도 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고 한다. 이처럼 브레겐츠는 세계 야외 오페라 무대의 음향 발전에 늘 선구적인 역할을 했으며, 지금도 가장 발달한 음향 테크놀로지를 보여 주는 곳이다. 베이징 쯔진청(紫禁城)의 《투란도트》, 나일 강 테베의 《아이다》 등 세계의 주요 야외 오페라들은 모두 이곳 브레겐츠의 기술에 의존한 것들이었다.

그동안 브레겐츠에서 상연되었던 프로덕션들 중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던 공연으로는 1985년 푸치니의 《투란도트》, 1991년 비제의 《카르멘》 등을 꼽을 수 있다. 특히 지금은 브레겐츠 페스티벌의 예술 감독이 된 연출가 데이비드 파운트니가 연출했던 1994년의 《나부코》는 이스라엘과 바빌로니아(지금의 이라크)의 전쟁을 현대의 중동 사태를 연상하게끔 만들었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끌려가서 <노예들의 합창>을 부르는 대목 등은 나치에 의한 홀로코스트처럼 묘사했으며, 기관총의 총격전이 난무하고 화염이 자욱한 전투 장면을 연출하는 등 브레겐츠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호상 무대가 유명하긴 하지만, 브레겐츠 페스티벌에 호상 오페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1980년에 개장한 축제극장에서는 야외와는 별도로 예술적 가치가 높은 작품이나 현대 오페라들을 매년 올리고 있다. 그러므로 두 장소의 오페라를 번갈아 보는 묘미도 있다. 2001년에는 마르티누의 오페라 《줄리에트》가 축제극장에서 공연되어 호상 무대의 《라 보엠》보다 더 높은 격찬을 받았던 것이다.

축제극장은 2006년에 확장되어 좌석을 1,600여 석으로 늘리는 등, 유럽에서도 가장 현대적이고 훌륭한 공연장의 하나로 탈바꿈했다. 이곳에서는 야외 오페라와는 별도로 빈 심포니의 콘서트 등이 열린다.

브레겐츠 페스티벌에서는 1948년부터 해마다 빈 심포니가 참여하여, 모든 오페라 공연을 연주한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빈 필과 같은 역할을 하는 셈이다. 이렇게 오랫동안 이어진 기여를 기리기 위해 축제극장 앞 광장의 이름이 ‘빈 심포니 플라츠’로 명명되었다. 빈 심포니는 오페라가 쉬는 날에는 콘서트를 열어 7월 중순부터 8월 중순까지 한 달 정도 열리는 페스티벌 기간에 단 하루도 쉬지 않는다. 최근에는 블라디미르 아시케나지, 블라디미르 페도세예프, 대니얼 나자렛 등의 지휘자들을 초대하여 이 페스티벌에서 빈 심포니를 지휘하게 하는 등 다양한 관현악을 선사했다.

참여했고, 다수의 실내악단들이 크고 작은 콘서트를 열었다. 그뿐 아니라 연극, 무용 공연과 세미나가 열렸고, 빈 심포니는 워크숍도 가졌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무대 장치와 호상 무대의 객석

골목에서 마주치는 작은 풍경들

브레겐츠는 걷기에 딱 좋은 곳이다. 그것은 시내나 호반이나 다 그러하다. 특히 아침에 인적이 드문 시가지를 걸으면, 좁은 골목을 돌 때마다 앙증맞은 풍경이 이방인을 맞는다. 조용하고 예쁜 도시 구석구석에 작은 갤러리, 서점, 카페들이 있고, 전통 식당들도 많다.

시내 곳곳에는 이탈리아 오페라와 관련된 상호들이 많아서, 마주칠 때마다 “아, 여긴 페스티벌의 고장이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빈 심포니 플라츠 앞의 식당은 이름이 ‘심포니’이며, 카지노의 식당은 트라토리아 ‘팔스타프’다. 시내에서 가장 유명한 카페는 ‘로시니’이며, 호반의 한 식당에서 파는 이곳 특유의 파스타 이름은 ‘스파게티 카루소’다. 브레겐츠의 정적과 이탈리아 오페라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그래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산속의 조용한 오스트리아 사람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삶을 살아가다 보면 가끔은 뜨거운 이탈리아 오페라와 카루소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브레겐츠를 방문할 때 절대로 빼놓지 말아야 할 곳이 현대 미술관인 ‘브레겐츠 쿤스트하우스(KUB, Kunsthaus Bregenz)’다. 호수가 바라보이는 시내에 자리 잡은 초현대식 건물인 브레겐츠 쿤스트하우스는 스위스의 세계적인 건축가 페터 춤토르가 설계한 건물로서 1997년 개관 때부터 지금까지 세계적인 건축물들 가운데서도 늘 주목을 받고 있다. 이곳에서는 전위적인 현대 미술전 《세상을 넘어World Beyond》가 열리는 등, 페스티벌 기간에 항상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유럽 전위 작가들의 특별전이 준비되어 있다.

린다우에서 마시는 한 잔의 적요

브레겐츠의 주위에도 아름다운 곳들이 많은데, 보덴 호 주변의 여러 명소들 중에서도 린다우는 가장 두드러지는 도시다. 서울의 교외선 같은 시골 열차를 타고 브레겐츠에서 출발하면, 열차는 불과 15분 만에 마치 베네치아로 들어갈 때처럼, 보덴 호 가운데에 난 둑 위를 달려 작은 섬에 도착한다. 동화나 장난감처럼 아름다운 이 섬이 독일령 린다우다. 열차가 섬에서 나갈 때는 앞뒤를 바꿔서 움직인다.

비록 15분 거리이지만, 브레겐츠는 엄연히 오스트리아이고 린다우는 독일이므로 열차를 탈 때 여권을 소지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매일 이웃 마을처럼 왔다 갔다 하므로 여권을 항상 가지고 다니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다. 한번은 열차 안에서 경찰이 내게 여권 제시를 요구한 적이 있었다. 하는 수 없이 “호텔은 오스트리아에 있는데, 독일에 차를 마시러 가게 되었습니다”라고 난감한 표정으로 사정했다. 경찰은 씩 웃으면서 “잘 다녀오세요”라고 말했다.

스위스의 세계적인 건축가 페터 춤토르가 설계한 브레겐츠 쿤스트하우스는 또 하나의 명물이다.

섬 위의 도시 린다우는 13세기경부터 호수 위에 그림처럼 서 있다. 역에 내리면 바로 앞 항구에 정박한 수많은 돛단배들과 여름 태양을 반사하는 은빛 수면의 호수가 나그네를 맞이한다. 아름다운 건물들로 둘러싸인 린다우 항의 벤치에 앉아 있으면, 너무나 조용하여 들리는 것이라고는 돛대에 부딪치는 바람 소리와 물새들의 울음소리뿐이다. 미안하지만 이곳에 있는 동안만은 베토벤도, 말러도 생각나지 않는다. 린다우의 방파제와 예쁜 뒷골목을 천천히 걸어 보라. 세상의 번잡한 일들이 다 기억나지 않게 된다. 나는 브레겐츠 페스티벌에 참석할 때면 오전에는 어김없이 이곳 린다우에 와서 방파제에 앉아 사색이나 독서로 반나절을 보낸다. 그리고 배가 출출해지면 점심을 먹으러 오스트리아령 브레겐츠로 돌아간다.

잊을 수 없는 호수, 잊을 수 없는 음악

내가 본 브레겐츠 페스티벌 공연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오페라가 아니라 오케스트라 콘서트였다. 축제극장에서 열렸던 빈 심포니의 말러 교향곡 제5번 연주로 대니얼 나자렛이 지휘를 맡았다.

이전부터 그의 명성은 익히 들었지만 만날 기회가 없었는데, 우연히 브레겐츠에서 처음 그를 보게 된 것이다. 인도 태생인 그를 독일어권에서는 주빈 메타를 계승한다는 뜻으로 “리틀 주빈”이라고 부른다. 검은 얼굴에 인도 식 검은 옷을 입고 지휘대에 오른 그는 날카로운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의 지휘봉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빈 심포니가 토해 내는 연주는 한마디로 충격이었다.

나자렛의 말러가 끝난 저녁, 나는 떨리는 가슴을 다스릴 수 없었다. 아무도 없는 호텔 방에 가 봤자 잠이 올 리 만무했다. 나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보덴 호숫가로 향했다. 10시가 넘어도 유럽의 여름밤은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는다. 호수의 수면은 짙은 군청색이었고, 알프스의 빙하가 녹아서 된 신선한 물 냄새가 코끝에 스쳤다.

독일령 린다우의 적요한 풍경은 진정한 휴식을 준다.

호수 저편의 독일 땅 기슭에 점점이 박힌 레몬색 불빛들 사이로 음악이 들려오는 듯했다. 몇 시간 전에 들었던 말러의 아다지에토였다. 콘서트에서 물결처럼 밀려오던 현의 풍부한 음향이 호수에서 다시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것은 내 머릿속에 호수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호수 위에 성城을 만들고, 성 위에 또 성을 지었다. 브레겐츠,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곳이다.브레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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