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비야인의 열정은 인생을 즐기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신세계를 향한 호기심을 참지 않았고, 그 산물을 누리는 데도 거리낌이 없었다. 15~16세기, 대항해시대의 무역항이자 아메리카 여행지의 출발점. 세비야 출신이 아닌 콜럼버스의 무덤과 기념탑이 이곳에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세비야의 본격적인 발전은 아메리카 발견 이후에 왔다. 바로 이곳에서 콜롬버스가 아메리카를 향해 떠났고, 이후 식민지의 모든 생산물들은 세비야로 집중되었다. 이곳은 카스티야 왕국의 유일한 독점무역항 지위를 보장받았다. 그러한 번영은 16세기 초 카디스항이 개항하면서 무너지기 시작했지만, 그 전까지 식민지 개척의 달콤한 열매는 세비야를 살찌웠다. 세비야 대성당의 제단 정면에 있는, 콜럼버스가 신대륙에서 가져온 금 1.5톤으로 만든 성모마리아의 품에 안긴 예수상은 이 모험이 가져온 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세비야에서 모험을 시작한 이는 콜럼부스 외에 마젤란이 있다. 그 또한 에스파냐 왕실의 후원을 받아 세계일주를 떠났다. 그는 결국 돌아오지 못했지만, 그의 탐험대가 인도네시아의 몰루카 제도에 도착하여 향료를 손에 넣고 돌아오면서 스페인의 식민지는 급격히 넓어졌다.
그러한 탐험가들이 항해를 위한 자금을 원조받기 위해 스페인 국왕을 알현하던 곳이 바로 알카사르였다. 알카사르에는 식민지 사업을 총괄하던 '카사 데 콘트라타시온', 즉 무역관의 교회당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은 당시 통치자들이 외교적인 만남을 자주 하던 곳이라, 식민지 개척에 관한 중요한 회합과 결정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아메리카 발견을 거의 최초로 묘사한 작품인 알레 호 페르난데스의 [항해자들의 성처녀(The Virgin of the Navigators)]를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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