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덤 스미스는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항해’와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 항해’를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말한 바 있다. 사실 바스코 다 가마의 행로는 말 그대로의 최초가 아니라 “유럽인으로서 최초”일 뿐이지만, 유럽이 중세를 마감하고 근대로 진입한 시발점으로서 큰 의미를 가진다.
바스코 다 가마가 리스본을 출발한 것은 1497년 6월이었다. 그해 11월에 희망봉을 돌고, 인도 서해안의 캘리컷에 상륙한 것은 이듬해 5월 20일이었다. 항해 자체는 괴롭고 힘들기 그지 없었다. 괴혈병, 폭풍, 그리고 선상반란의 위협이 상존했다. 하지만 항해의 성과는 분명했다. 엄청난 양의 후추를 싣고 1499년 리스본으로 돌아온 그는 상상을 초월한 이익을 남기며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왕실로부터 연금, 재산에 덧붙여 귀족의 지위까지 부여받은 그는 아직도 역사상에 탐험가의 대명사와 같이 굳건한 이름을 남겼다.
하지만 그는 포르투갈의 입장에서만 “영웅”이었을 뿐이다. 1502년 다시 캘리컷에 간 그는 무슬림들을 학살하고 그들의 조각낸 신체들을 캘리컷의 왕 자모린에게 보내며 “카레를 만들라”고 비아냥거렸다. 도시를 파괴하고 무력으로 제압한 그는 포르투갈의 교역에는 톡톡히 이바지했지만, 현지인들에게는 ‘악마’일 수밖에 없었다.
1998년은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의 캘리컷 해안에 상륙한, 5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인도와 포르투갈에서는 각각 기념행사가 있었으나, 그 행사의 성격은 판이했다. 리스본에서는 대대적인 축하행사가 벌어졌으나 인토에서는 바스코 다 가마의 인형을 만들어 불태우고 검은 깃발을 올리며 항의행진을 했다.
바스코 다 가마 다리가 세워진 것도 1998년이다. 떼주 강 위를 가로지르는 이 다리는 총 길이 17.2km로 유럽에서 가장 긴 다리 1, 2위를 다툰다. 걸어서 건널 수는 없지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장관이다. 이토록 긴 다리에 바스코 다 가마의 이름을 붙여주면서 포르투갈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가장 먼 곳으로 나아가고 싶다는 열망이, 그의 이름을 다시 불러온 것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