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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터키

터키 이스탄불 : 넌 어디니? 유럽이니 아시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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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포루스 다리 - 아시아와 유럽이 겹쳐지다

아시아와 유럽은 이스탄불에서 만난다. 하나의 도시는 두 개의 대륙에 걸쳐 있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이스탄불의 서쪽은 유럽, 동쪽은 아시아이다.


오스만 터키가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계책은 배를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골든혼 해협 쪽으로 갈라타지구의 육로를 통해 넘긴 것이었다. 정복자 메흐메드 2세는 골든혼 해협 입구를 쇠사슬로 막아놓고 아시아 쪽에서 유럽 쪽을 넘보는 군대만 경계하던 비잔틴 제국의 뒤통수를 쳤다. 당시 이미 쇠약해있던 비잔티움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면서 결정적으로 멸망했다. 이렇듯 유럽 쪽의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면서, 오스만 터키는 두 대륙을 갈라놓은 보스포루스 해협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이곳을 허가 없이 지나는 배들은 사정없이 공격당했다.


이곳에 처음 바다를 건너는 다리가 건설된 것은 1973년이었다. 두 대륙을 걸어서 왕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보스포루스 대교’라 명명된 이 다리가 만들어진 이후, 두 번째 다리는 1988년에 완성되었는데 ‘제2의 보스포루스 대교’혹은 ‘파티하 술탄 메흐메드 교’라 불린다. 1453년에 비잔틴을 정복했던 메흐메드 2세의 이름이 상징적으로 다리에 붙여진 것이다.

하기아 소피아 -그리스정교회와 이슬람이 겹쳐지다

‘성스러운 지혜’를 뜻하는 이름을 가진 하기아 소피아는 1453년 메흐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점거하기 직전까지 그리스 정교회 의 총본산이었다. 처음 건립된 것은 360년, 콘스탄티누스 2세에 의해서였다. 404년과 532년의 2차에 걸친 화재로 큰 피해를 입어 현재의 모습에서 처음의 모습을 찾기는 어렵다. 그만큼 화려하고 아름답게 다시 지어진 것. 특히 두 번째 재건 때는 아름다움이 극에 달하여, 재건을 명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537년의 헌당식날 “솔로몬이여, 내가 그대에게 승리했도다!”를 외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드 2세는 하기아 소피아를 모스크로 사용하겠다고 선언했다.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하자마자 곧장 이 전설적인 대성당으로 향하여 그 자리에서 명한 것이었다. 거대한 돔형의 지붕을 얹은 하기아소피아는 사실, 모스크로 바로 사용되기에도 구조에는 무리가 없었다. 미흐라브(메카 방향을 나타내는 아치형 벽관)와 미나레트(첨탑)를 설치하고 아름다운 모자이크화들을 우상이라 하여 지우기만 하면 되었던 것. 모자이크화들은 천으로 덮여 있다가 정복자의 증손자인 쉴레이만 1세 때 훼손되었으며, 처음에는 임시로 쓰기 위해 소박하게 만들어졌던 미나레트도 11대 황제였던 셀림 2세 때에 이르러 위풍당당한 네 개의 첨탑으로 완성되었다.


1923년 터키공화국이 수립되었을 때 유럽 각국은 하기아 소피아의 반환과 종교적 복원을 강력하게 요구한다. 이에 터키 정부는 이곳을 박물관으로 운영하기로 결정하고 기독교든 이슬람이든 그곳에서의 종교적 행위를 금지했다. 현재 이곳에는 성당으로서의 흔적과 모스크로서의 흔적이 사이좋게 같이 공존하고 있다.


하기아 소피아의 내부 모습.

파묵아파트 - 구세대와 신세대가 겹쳐지다

오르한 파묵의 젊은 시절.


이스탄불에서 태어나 자라난 세계적 작가 오르한 파묵은 현재에도 ‘파묵 아파트’에 살고 있다. 그곳은 그의 말에 따르면 “어머니가 나를 품에 안고 처음 세상을 보여주고, 처음 사진을 찍었던 곳”이다.
그의 가족들, 어머니, 아버지, 형, 할머니, 삼촌들, 고모들, 숙모들이 살았고 살고 있는 ‘파묵 아파트’는 5층짜리 건물이다. 삼대에 걸친 대가족은 이 건물의 각층을 차지하고 살았다. 오르한 파묵이 태어나기 일 년 전까지만 해도 돌로 지은 대저택에서 함께 살았던 이 대가족은 그 건물을 사립초등학교에 임대하고 그 옆에 현대적인 아파트를 지어 ‘파묵 아파트’라 이름지었다. 가로로 넓었던 대가족의 저택이 세로로 올라앉은 셈이다. 파묵은 그 아파트들의 문이 대부분 열려 있었던 것을 회상한다. 터키의 이 부유한 대가족은 파묵 아파트 안에서 서로 겹치고 영향을 주고 간섭하다가 결국 오르한 파묵의 작품세계에까지 만만치 않은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파묵 아파트가 자리 잡고 있는 니샨타쉬는 구찌, 루이뷔통, 휴고보스, 아르마니 등 여러 명품샵들이 들어서있는 고급주택가이다. 부유층과 유명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이 동네는, 원래는 아르누보 스타일의 아파트 빌딩으로 유명하다. 이곳의 지명인 니샨타쉬의 의미는 ‘타겟스톤’. 옛날 오스만의 군인들이 돌을 세워놓고 사격연습을 하던 곳이었다. 작은 오벨리스크처럼 생긴 그 돌은 아직도 포도에 남아있다.

예레바탄 사라이 - 그리스와 비잔틴이 겹치다

이스탄불은 그리스의 식민도시에서 출발했다. 기원전 7세기경 지중해와 흑해에서 활발한 해상무역을 하던 그리스인이 처음 도시를 세웠던 것이다. 그들이 세웠던 아크로폴리스의 흔적은 현재 지하 물 저수지인 예레바탄 사라이에 남아 있다.


532년 콘스탄티누스 1세 때 만들어지기 시작한 예레바탄 사라이는 길이 141m, 폭 73m에 달하는 거대한 공간이다. 원래는 ‘예레바탄 사룬치(지하 저수장)’라 불리었으나, 그 규모로 인해 ‘예레바탄 사라이(지하궁전)’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예레바탄(yere batan) ’이란 ‘땅에 빠진’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이곳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8m 높이의 돌기둥 336개인데, 건축자재가 부족했던 당시의 상황 때문에 그리스 식민시절의 기둥들이 동원되었다. 다 다른 모양의 기둥들 중에서도 가장 이색적인 것은 거대한 메두사 얼굴이 초석으로 사용되고 있는 기둥. 옆으로 뉘어 있거나 거꾸로 놓여 있는 메두사의 얼굴은 음침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예레바탄 사라이 전경.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메두사라는 괴물자체가 마주보면 돌이 되는 저주에 걸려있기에 눈길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얼굴을 뒤집어놓은 거라는 얘기도 있고, 건설하던 기독교도들이 이교도를 멸시하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놓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19km 떨어진 벨그라드 숲에서 끌어온 물을 최대한 8만 톤을 채울 수 있는 이 저장고에서 메두사의 얼굴은 가장 낮고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가, 현재는 가장 각광받는 전시물이 되어 있다.

톱카프 궁전 - 중국과 오스만 터키가 겹쳐지다

15세기 중순부터 19세기 중순까지 약 400년 동안 오스만 제국의 군주가 거주한 궁전인 톱카프 궁전은 중국의 자금성과 비슷하다. 현재의 규모는 많이 축소되었지만 지어질 당시에는 자금성 과 규모도 비슷했다고 한다. 왕이 바뀔 때마다 수많은 증축과 개축이 진행되고 네 번의 대화재를 거치면서 현재의 모습은 반듯하게 계획된 자금성과는 달리 무질서하게 보이지만, 자금성과 비교해 보면 그 의도를 알 수 있다.

톱카피 궁의 전경.


자금성의 천안문에 해당하는 문은 ‘바브 휘마윤’이다. 신성한 문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 문은 황제의 문 또는 술탄의 문이라고도 불린다. ‘바브 웃 셀람’, 즉 경건한 문이라 불리는 제2의 문은 자금성의 ‘오문(午門)’에 해당한다. 세 번째 문, ‘바쉬스 싸데’는 지복의 문으로, 군주와 군주의 측근만이 통과할 수 있다. 이곳을 통과하면 제3정원과 알현실이 나오는데, 자금성으로 치자면 ‘건청문(乾淸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자금성의 후궁에 해당하는 것이 톱카프의 하렘이다. 250개의 방이 있는 이곳은 수많은 방문자들의 호기심을 끌고 있다.


특이한 것은 중국의 귀한 도자기들을 볼 수 있다는 것. 예전에 부엌으로 쓰였던 곳이 현재 동양 도자기 전시관이 되어 있는데, 컬렉션이 대단하다 하여 도자기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14~19세기 중국과 일본산 자기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중국도자기는 무려 10,350점이나 소장하고 있다. 수집용이라기보다 실제 사용하기 위한 용도로 구입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이 도자기들 덕분에, 톱카프는 자금성과 한층 겹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돌마바흐체 궁전 - 유럽과 오스만 터키가 겹쳐지다

돌마바흐체 궁전의 모델은 베르사유 궁전이다. 1843년 31대째의 술탄인 압둘 메지트가 짓기 시작한 이 건물은 유럽의 바로크 양식과 전통의 오스만 양식을 접목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접목시켰다지만, 방문자들은 유럽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인상을 받는다.


현존하는 궁전 중 가장 화려한 궁전이라는 평을 듣는 이곳을 꾸미기 위해 들어간 금만 해도 14톤. 은은 40톤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15,000㎡의 면적에는 방 285개, 연회장이 43개, 터키식 욕탕이 6개 있다. 홀은 43개, 화병은 280개, 시계는 156개가 있으며, 크리스탈 촛대 58개와 샹들리에 36개가 찬란하게 그 호화로움을 밝히고 있다. 카펫이나 커튼, 좌석커버 등은 터키제이지만 가구와 샹들리에는 대부분 유럽에서 주문한 것인데, 그중에는 외국 왕실이 보낸 선물도 없지 않다.


그토록 화려한 궁전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대형 연회장인 ‘황제의 방’은 넓이가 가로세로 40m에 중앙 돔의 높이는 36m에 달한다. 그곳에 걸려 있는 샹들리에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기증한 것으로, 무게가 4.5톤이나 되며 750개의 등이 달려있다 하니 그 사치를 짐작해볼 수 있다.


돌마바흐체 궁의 모습.

‘터키의 아버지’ 아타튀르크로 불리는 터키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은 수도를 앙카라로 이전했지만 이스탄불에 머물 때는 돌마바흐체 궁전을 사용했는데, 그가 죽은 1938년 11월 10일 9시 5분을 기념하기 위해 현재 돌마바흐체 궁전 안의 모든 시계는 9시 5분에 멈춰 있다고 한다.

시르케지(Sirkeci) 역 _ 수많은 인종이 겹쳐지다

오리엔탈 익스프레스 포스터.


처음 오리엔트 특급이 다니기 시작하던 시절의 시르케지 역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유럽 대륙의 마지막 기차역인 시르케지 역은 아가사 크리스티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의 유명세에 힘입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지만, 그전에도 복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1883년부터 프랑스 파리와 터키 이스탄불 구간을 운행했던 오리엔트 특급 열차는 여러모로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다. 파리에서 출발하여 스위스 로잔, 이태리의 베네치아, 유고의 베오그라드, 불가리아의 소피아를 거쳐 이스탄불에 도착하는 이 열차는 사람들에게 최초로 유럽을 기차를 타고 횡단하는 경이로움을 안겨주었다. 많은 인종과 민족이 자리 잡은 유럽은 이 기차 안에서 엎치락뒤치락 겹쳐지고 섞여들어갔다. 개통된 지 94년 만인 1977년, 비행기로 인해 승객이 줄어들면서 문을 닫았지만, 그 명성만은 여전히 전해 내려오고 있다.


고급스러운 교통수단이었던 오리엔트 특급 열차를 주로 이용한 것은 부자와 고관들이었다. 그들이 이스탄불에 도착해서 묵을만한 호텔이 없는 것을 알아챈 프랑스의 ‘국제 침대열차 회사’는 1984년에 ‘페라 팔라스 호텔’을 짓는다. 터키 최초로 전기를 사용해 움직이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던 이 고급 호텔은 아가사 크리스티가 머물며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을 저술했던 장소로도 유명하다. 지금도 411호는 아가사 크리스티 기념 룸으로 남아있으며, ‘아가사 크리스티 홀’이 있어 당시의 인테리어를 잘 보존된 형태로 방문자들에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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