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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터키

터키 페네지구 : 色色 빨래와 건물에서… 마주한 소박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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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페네지구

[노은주·임형남의 골목 발견] 터키 페네지구
그림=임형남 건축가
터키의 이스탄불에 가게 되면 보통, 가장 유명하다는 유적지들을 둘러보고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배를 타고 이국적인 도시의 풍경을 훑어보기에도 바쁘다. 그러나 제대로 그 도시를, 문화를, 역사를 보기 위해서는 버스에서 내려 그 도시의 가장 오래된 골목을 걸어야 한다.

유럽 구시가지 파티흐 지역에 있는 페네(Fener) 지구가 바로 그런 곳이다. 페네 지구는 1453년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며 동로마제국을 몰락시킬 때 밀려난 그리스인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동네라고 한다. 그리고 지금은 이스탄불에서 가장 오래된 동네이며, 개발을 엄격히 제한하고 보존하는 곳이기도 하다.

세월의 흔적 그대로… 등대같이 빛난 페네 지구

페네는 그리스어로 등불, 등대 등을 뜻하는 '파나리(fan�ri)'에서 온 말이다. 실제로 비잔틴 시대에는 등대가 서서 바다를 밝혀주기도 했다고 한다. 이곳에 살던 부유한 그리스인들은 오스만 시대에 정치, 경제 등 많은 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파나리오테스(Phanariotes)'라고 불리기도 했다.

아직도 그곳에는 동로마제국부터 이어지는 정교회의 총대주교가 살고 있다. 1930년대 이후 도로 확장 공사 등으로 경관이 많이 훼손되기는 했지만, 가파른 언덕에 집들이 빼곡히 들어찬 모습이 어쩐지 낯설지 않다. 골목에는 공을 차며 노는 아이들과 머리 위를 가로지르며 널려 있는 빨래 등이 무척 편안한 느낌을 준다. 이방인에게 눈치 주지 않고 친절하게 맞아주는 사람들 덕에 마치 오래전 우리의 옛 골목을 걷는 느낌마저 든다.

노랑, 빨강 등 강렬하고 다양한 색상의 건물들과 어지러이 날리는 빨래 등은 어찌 보면 생경하고 눈이 어지러울 지경일 텐데도, 자연스럽게 퇴색하고 낡은 집들과 색들이 마치 잘 숙성된 음식처럼 서로 기대고 있어서 무척 편안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투르크인들이 자신을 터키인으로 부르는 것을 싫어하는 것처럼, 500년도 넘은 옛날 외지인에게 밀려나면서도 본래의 색을 잃지 않고 지키려 했던 그리스인들의 모습이 얼핏 보이는 듯했다.

터키와 그리스는 역사를 통해 늘 앙숙의 관계였다고 알고 있었는데, 이렇듯 그리스인이나 유대인, 아르메니아인 등 다양한 인종을 받아들이고 인정한 덕에 '문화의 용광로'로 불렸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인지 서구인과 동양인과 아랍인의 얼굴이 묘하게 결합되어 있는 터키인들은 사막을 달려 세상을 정복했던 역사를 뒤로하고, 무척 조용하고 소박한 모습으로 따뜻하게 이방인들을 맞이한다.

◇사막서 마주친 겹겹한 시간의 흔적

페네 지구에서 다시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오리엔트 특급열차의 종착역이었던 시르케지(Sirkeci) 역이 있다. 서쪽에서 유럽인들이 기차를 타고 이곳에 다다랐다면, 동쪽에서는 대상들이 실크로드를 따라 헐벗은 광야를 오래도록 달려왔을 것이다.

터키 여행길에 버스를 타고 심심한 빈 들판을 한참 달리다 갑자기 나타난 건물에 무척 놀랐던 적이 있다. 사막 한가운데 어떻게 저런 것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크고 정교하고 아름다운 그 건물은 실크로드를 지나다가 잠시 쉬는 대상들의 숙소인 '카라반 사라이(caravan sarai)였다. 사막에서 발견한 그 건물에서 나는 잠시 몇 백 년의 시간을 거슬러 오래된 문화와 한때의 영광을 만났다. 페네 지구에서 만났던 것 역시 조용히 바닥에 깔렸다가 사람들이 찾아다니면서 눈을 들이대면 드러나는 겹겹이 쌓인 시간의 흔적이었다.

도시는 하나의 복합체이다. 그래서 도시를 관광객에게 제공하는 한 바퀴의 관광코스로 돌아보고 그 도시를 보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터키에서의 마지막 날 아침, 숙소 창문을 열자 출근하는 사람들과 갓 널린 빨래 등 생활의 모습이 담긴 뒷골목의 풍경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그 풍경 속으로 언제든 한 걸음 걸어 들어가면, 우리를 압도하는 놀랍고 거대한 스케일의 유적이 아닌 사람의 이야기가 담긴 역사를 만나게 된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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