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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독일

독일 베를린 : 그곳을 아는가? 화해와 타협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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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과 지하가 만나다 - 훔볼트하인의 방공호

베를리너 운터벨텐은 ‘베를린의 지하세계’라는 뜻을 가진 단체이다. 1998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이 단체의 목적은 베를린의 지하를 체계적으로 조사하고, 공개하여 사람들이 직접 볼 수 있게 만드는 것.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도시가 동서로 분단되면서 수많은 시설들이 더 이상 쓰이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잃어버린 지하 시설들이 통일된 베를린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된 것이다. 새롭게 발굴된 교통용 터널, 전철역, 수송로, 방공호, 공기송출 우편시설 같은 지하시설들이 덕분에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고 있다.


베를린 훔볼트하인 공원 언덕 위에 자리한 방공호 또한 그렇게 해서 공개된 시설의 하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5만 명의 시민들이 공습을 피했던 방공호는 중세시대의 요새와 같은 위용을 자랑한다. 당시 대공포가 설치되어있던 85m 높이의 방공호 탑에서는 베를린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다. 현재 이곳은 4월부터 10월까지만 공개되어 있는데, 겨울에는 동면하는 박쥐를 보호하기 위해 입장이 금지된다고 한다.



예술가와 정부, 타협하다 - 타헬레스(Tacheles)

1990년 2월, 일군의 예술가들은 화려한 퍼포먼스를 벌이며 방치된 백화점에 입성했다. 무단점거운동, 스쾃(squat)의 대표적인 이름이 된 '타헬레스'의 탄생이었다. 타헬레스란 ‘자신의 주장이나 견해를 명확하게 말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유대어다. 이 명랑한 스콰터(squatter)들은 명확하게 “너희는 건물을 가졌지만 쓰지 않고 있고, 우리는 돈이 없지만 작업실이 필요하다.”라고 말하며 당당하게 자리 잡았다.


원래 그 건물은 1907년 백화점으로 지어졌다가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폐허가 된 건물이었다. 이곳은 철거될 운명에 놓여있었는데, 예술가들이 이곳을 다시 살려냈다. 하지만 정부의 관점은 예술가들과는 달랐다. 그 후 10년간 강제퇴거의 협박과 버티기의 지난한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정부가 “문화공간으로 보존할 가치가 있다.”라고 판단을 바꾸면서 타헬레스의 위상은 극적으로 바뀌었다. 1999년, 정부 보조금까지 받는 예술단지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50여 명의 전세계 예술가들은 관리비에 해당하는 저렴한 임대료를 내고 작업실을 합법적으로 대여할 수 있게 되었으며, 불법이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골든홀과 블루살롱, 영화관 겸 카페 Highend 54 등의 공동 공간에서 수시로 전시회, 공연, 콘서트, 영화상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피티로 가득 찬 타헬레스 전경.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합법적인 지위와 실험성을 바꿨다.”는 통렬한 비난과 정부의 간섭이 타헬레스에 미친 영향도 적지 않았지만, 2009년 이 건물을 소유한 투자펀드 푼두스 그룹에서 10년의 임대계약이 끝났다며 예술가들에게 강제퇴거를 통보해 또 다른 지난한 싸움을 맞이하게 되었다. 베를린 반문화(Counterculture)운동의 상징이었던 타헬레스는 이에 “우리는 과거에도 무단점거자였고, 이제 다시 무단점거자로 돌아왔을 뿐”이라며 당당한 한판 싸움을 다시 벌이고 있다.



천사와 인간, 손을 잡다 - 전승기념탑(Siegessaule)

전승기념탑 꼭대기의 '황금의 엘제'는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를 통해
그 아름다움을 널리 알렸다.


천사 다미엘은 황금빛 여신의 동상 어깨에 앉아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독일어로 속삭이는 목소리가 인상적이었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 Der Himmel ueber Berlin]는 1987년 빔 벤더스 감독이 연출하고 페터한트케가 공동으로 각본을 쓴 작품이다. 서커스단에서 공중그네를 타는 아름다운 마리온을 사랑하게 된 천사 다미엘은 고뇌 끝에 인간이 된다. 영화적 완성도로도 격찬을 받았던 이 영화는 베를린 전승기념탑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데도 한몫했다.


다미엘이 앉아있는 황금빛 여신을 베를린 사람들은 ‘황금의 엘제’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원래는 승리의 여신인 ‘빅토리아’다. 키가 무려 8.3m에 달하는 이 조각상은 무게만도 무려 35톤. 프리드리히 드라케(Friedrich Drake)가 조각한 것이다.


베를린 중심가에 있는 그로쎄 티어가르텐(GroBe Tiergarten)공원에 자리 잡고 있는 전승기념탑은 1873년에 하인리히 슈트라크스(Heinrich Stracks)의 설계로 완성되었다. 덴마크(1864년), 오스트리아(1866년), 프랑스(1870년~71년)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탑이었다. 탑 내부에 있는 285개의 계단을 오르면 베를린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지만, 아쉽게도 다미엘처럼 황금의 엘제 어깨에 앉아보지는 못할 것이다. 67m 높이까지는 엘리베이터로 올라갈 수 있으니, 다미엘의 기분을 비슷하게 느껴볼 법도 하다.



동독과 서독, 마주보다 - 브란덴부르크 문

브란덴부르크 문은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의 경계선에 자리하고 있어, 한때는 독일의 분단을 상징했고 이제는 독일통일의 상징이 되었다. 1788년부터 91년까지 3년여에 걸쳐 지어진 이 문을 설계한 이는 칼 고트하르트 랑한스(Carl Gotthard Langhans). 처음에는 도시 성문으로 만들어졌으나 도시가 점점 커지면서 시내 중심에 자리잡게 되었다. 브란덴부르크 문 위의 동상 크바트리가(Quadriga)는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가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에 올라타고 달리는 형상을 하고 있다.


2009년 11월 9일은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진 지 20년째 된 날이었다. 포츠다머 플라츠에서 시작하여 브란덴부르크 문을 거쳐 국회의사당까지, 1.5km에 걸쳐 베를린 장벽이 서 있던 선을 따라 1,000여 개의 도미노 벽이 세워졌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재연하기 위해서였다. 각국의 예술가들이 하나씩 맡아 자유의 메시지를 형상화한 이 도미노 벽은 10만 명이 참여한 대대적인 ‘자유의 축제’ 끝에 장엄하게 쓰러졌다.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을 나누었던 베를린장벽은 통일 이후 부서진 조각들조차 기념품으로 부지런히 실려나가 지금은 보기 힘들다. 오스트반호프(Ostbahnhof)역 부근에 남은 장벽만이 세계 각국의 118명의 작가들이 그림을 그린 이스트사이드갤러리(East Side Gallery)가 되었다.


동서분단시절 브란덴부르크문을 낀 장벽을 통과하는 방법을 설명한 안내문.



음악, 모두의 손을 잡다 - 러브퍼레이드

여러 도시에서 계속되고 있는 러브퍼레이드 포스터.


독일은 음악과 아주 밀접한 나라이다. 바흐, 헨델, 베토벤, 바그너, 멘델스존, 슈만, 브람스, 말러 등의 대가 이름만 떠올려도 그 관계가 어렵지 않게 짐작되리라. 베를린 필하모니, 드레스덴 오페라, 라이프치히 오케스트라는 또 어떤가. 현대음악에서도 독일의 활동은 대단하다. 그런 곳이기에 ‘러브 퍼레이드’가 열리는 게 가능했을 것이다.


사랑과 평화의 테크노 축제 ‘러브 퍼레이드’ (Love Parade)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넉 달 전, 생활 예술가이자 DJ이며, 미장이였던 ‘모테 박사’(Dr. Motte)의 주창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자신의 생일을 쓸쓸히 보내고 싶지 않다는 단순한 이유로 퍼레이드를 개최한다. 그가 집회 허가 신청을 낼 때 내세웠던 모토는 ‘평화, 기쁨 그리고 팬케이크’ 였다. 그것은 군비 축소와 음악을 통한 화해, 그리고 공정한 분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날, 한 대의 트럭과 약 150명의 사람들이 당시 서베를린의 소비의 중심지였던 쿠담(Kurf rstendamm)거리를 행진했다. 그것이 말 많고 탈도 많으면서 기쁨으로 가득찬 러브 퍼레이드의 시작이었다.


참가자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1996년부터 에른스트 로이터 광장, 6월 17일의 거리, 브란덴부르크 문, 전승기념탑까지 펼쳐지게 된 러브 퍼레이드는 매년 7월 첫째 토요일에 열린다. 행사로 인한 소음과 환경파괴, 엄청난 쓰레기 처리문제, 마약의 남용과 폭리, 무단방뇨 등등의 문제로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러브 퍼레이드의 정신은 세계 각지로 퍼져 다양한 나라에서 같은 이름의 퍼레이드가 열리고 있다.



학살자, 죽인자를 추모하다 - 유태인 박물관(Judisches Museum)

히틀러 정권에 의해 학살된 유태인은 600만 명. 믿을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비극의 가해자로서, 독일은 반성을 아끼지 않는다. 위령탑을 건설하고 광장을 만드는 한편, 유태인들의 끔찍했던 경험을 간접적으로나마 짐작하게 만드는 유태인 박물관 건설에도 발벗고 나섰다.

2001년 다니엘 리베스킨트(Daniel Libeskind)가 설계한 이곳은 소장품이 아니라 건물 자체로 유명해진 드문 케이스의 박물관이다. 이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바로크풍의 구 박물관을 지나 지하통로를 거쳐야 한다. 입구에서부터 가스실과 수용소에서 대량학살된 유태인들을 떠올리게 한다. 다윗별을 참고한 건물의 전체적 모양, 칼로 난도질한 듯한 가늘고 길고 불규칙한 창문들, 49개의 기둥에 심어놓은 49그루의 올리브나무로 이루어진 ‘Garden of Exile(추방의 정원)’, 메나슈 카디쉬만(Menache Kadishman)의 작품 [낙엽]을 설치하여 절규하는 사람얼굴 모양의 철 조각들을 깔아놓아 밟아야만 지나갈 수 있게 만든 [memory void, 공백의 기억], 아무것도 없는 거대하고 높은 밀실인 홀로코스트 타워 등의 요소들은 풍부한 상징을 담고 있다. 빈 전시실조차도 사라진 유대문화를 상징하고 있다.


원래 지금과 같이 따로 지을 계획이 아니라, 베를린 박물관의 부속건물인 유대인관으로 계획되었던 이곳은 일련의 과정을 거쳐 현재와 같이 확장되었다.


유태인 박물관 내부전시실 풍경.



동성끼리 팔짱을 끼다 - 놀렌도르프 광장

20세기 초의 놀렌도르프 주변.이때부터 게이 커뮤니티가 형성되었다.


베를린의 다른 이름은 동성애자들의 천국이다. 전체 주민의 약 10%, 35만 명 가량이 동성애자라는 수치는 이곳이 다른 도시에 비해 동성애자들에게 비교적 관대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분단시절 서베를린으로의 이주를 유도하기 위해 군대 면제 등의 혜택을 내밀자 이를 받아들인 동성애자들의 이주가 급격히 늘면서, 베를린은 명실상부한 유럽 최대 동성애 도시로 떠올랐다.


‘놀렌도르프 광장(Nollendorfplatz)’은 동성애자들이 즐겨 찾는 식당과 술집, 바, 카바레들이 모여 있는 카페거리로 유명하다. ‘놀렌도르프 광장’ 역 건물에는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죽어간 동성애자들을 추모하는 기념물이 있다. 나치가 학살한 것은 유태인만이 아니었다. 게르만 민족의 피를 더럽히는 불순한 자들로 규정된 동성애자들은 가슴에 핑크색 역삼각형(Rosa Winkel)을 붙이고 강제수용소에 감금되어야 했는데, 더군다나 유태인이라면 노란색 정삼각형을 겹쳐 달아야 했다. 그들에 대한 대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끔찍했다고 한다. 1933년에는 놀렌도르프 광장 주변의 동성애자 카페들이 대부분 강제로 폐쇄당하는 역사적 아픔을 겪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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