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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중국

중국 둔황 : 사막에 핀 五色꽃 실크로드의 석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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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서부 석굴 기행

중국 간쑤성 황하 상류 병령사 계곡에 눈꽃이 날린다. 높이 27m짜리 대불(大佛) 머리 위에 나무로 만든 잔교(棧橋)가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다. 석굴 벽화와 불상을 보기 위해선 잔교가 유일한 통로다.
중국 간쑤성 황하 상류 병령사 계곡에 눈꽃이 날린다. 높이 27m짜리 대불(大佛) 머리 위에 나무로 만든 잔교(棧橋)가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다. 석굴 벽화와 불상을 보기 위해선 잔교가 유일한 통로다. / 김한수 기자
실크로드는 '욕망의 길'이다. 중국 진(秦)과 한(漢), 당(唐)의 수도였던 장안(현재의 시안)을 출발해 타클라마칸 사막을 넘어 서역(西域)으로 이어지는 이 길을 따라 중국에서 비단과 자기(磁器)가 건너가고, 서역의 향신료와 유리공예가 넘어올 때마다 부(富)가 쌓였다. 화약 제조술이 건너가고 요즘 탱크와 같은 위력적 기동력의 말(馬)이 건너올 때마다 실크로드 양쪽에선 권력의 향배가 바뀌었다. 그 부(富)와 권력의 신기루를 좇던 인간의 욕망이 2000년 동안 이 길에서 명멸(明滅)했다. 그러나 욕망이 닦아놓은 이 길로 제지술(製紙術)도 가고, 그리스 미술 양식과 서역풍 의복과 춤, 그리고 불교 경전과 스님, 부처님 사리도 건너왔다. 중국 서부 황량한 곳곳에 남은 1600년 된 석굴들은 실크로드에 핀 문화의 꽃, 문명의 오아시스다. 이달 초 4박 5일 동안 조계종 백련불교문화재단(이사장 원택 스님)과 함께 맥적산, 병령사, 둔황 석굴을 답사했다.

병령사석굴, 맥적산석굴
#1. 부처님 머리 위에 서다

지상 50m라 했다. 발아래엔 높이 27m짜리 대불(大佛)이 벽에 기대어 있는 걸 알지만 내려다볼 엄두가 나질 않는다. 삐걱거리고 휘청거리는 나무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동안 이미 공포는 온몸 가득 팽창했다. 바위를 뚫어 횡(橫)으로 나무를 박고 그 위에 폭 1~2m 널빤지를 댄 '잔교(棧橋)'. 곳곳에 옹이가 빠져 드러난 구멍으로 허공과 함께 이 잔교의 부실한 정체가 보인다. 두께는 겨우 2~3㎝. 그 위에 지금 20여명이 서 있다. 동굴 사방 벽엔 온통 불상(佛像)이다. 간쑤성(甘肅省) 병령사 석굴은 그렇게 천불동(千佛洞) 만불동(萬佛洞)이었다.

황하(黃河) 세 협곡의 물을 막았다 해서 황하삼협(黃河三峽)댐으로도 불리는 유가협댐의 상류. 하류엔 황토흙에 실어온 온갖 영양분을 선물하는 황하이지만 정작 그 고향 주변 땅엔 선물한 게 별로 없었다. 해발 420m 시안에서 톈수이(天水)를 거쳐 해발 1500m 란저우(蘭州)에 이르기까지, 서북향 길은 끝없는 오르막. 그동안 차창 밖에선 녹색을 황색이 대체하고 옥수수는커녕 풀도 귀해졌다. 그러나 하늘은 무심치 않았다. 댐 선착장에서 작은 보트에 몸을 맡겨 물안개 헤쳐가길 54㎞, 한 굽이 돌아서니 바로 선경(仙境)이다.

무딘 칼로 내리찍은 듯 우툴두툴한 수직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 펼쳐진 천하의 기암절벽들. 그 자연의 위대함에 겸손해진 인간들은 신앙심이 솟았던 모양이다. 절벽에 잔교를 놓고 올라가 굴 수백 개를 파고 색색의 그림 그리고 조각을 새겼다. 하이라이트는 역시 대불(大佛). 상체는 석벽을 깎은 마애불이고, 하체는 나무로 뼈대를 세우고 흙을 발라 만들었다는 당나라 때 불상은 이집트 아부심벨의 람세스상(像)을 연상케 한다.

의자에 앉은 모습도 그렇고 크기도 비슷하다. 이집트는 아스완댐을 만들면서 람세스상을 70m 옮겼지만 중국은 유가협댐을 만들 때 병령사 석굴들이 물에 잠기지 않도록 설계했다고 한다. 하긴 석굴을 옮기려면 산을 통째로 옮겨야 하니 아무리 우공이산(愚公移山)의 나라 중국이라 해도 그건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와불(臥佛) 한 점은 떼어내 계곡 맞은편 전시관에 옮겨 놓았다.

#2. 1600년 시간을 뒤섞다

그 전날 찾은 톈수이 인근 맥적산(麥積山)은 보릿단을 쌓아놓은 모양이라는 뜻 그대로다. 뒷덜미엔 소나무가 무성한 산이 동남쪽만은 지표면에서 60~70m에 이르는 깎아지른 절벽이었다. 여기도 인간은 그냥 두지 않고 굴을 파고 조각 새기고 그림 그렸다. 5호16국시대, 즉 4~5세기부터 파기 시작했다는 굴에는 불상은 당나라, 주변 벽화는 청나라 때 그린 것이 혼재돼 1600년 시간이 뒤섞여 있었다.

‘모래가 운다’는 뜻의 둔황 명사산 모래 비탈에 관광객들이 발자국으로 글자를 썼다.
‘모래가 운다’는 뜻의 둔황 명사산 모래 비탈에 관광객들이 발자국으로 글자를 썼다. / 김한수 기자
#3. 고속도로 전 마지막 주유소

마지막 방문지는 둔황. 란저우에서 침대기차를 타고 12시간 반, 하룻밤을 꼬박 달려 도착한 사막 속 오아시스 도시였다. 들어가면 살아 돌아오기 어렵다는 타클라마칸 사막 직전 마지막 오아시스, 요즘 식으로 치면 '고속도로 전 마지막 주유소'다. 먼저 간 사람과 낙타의 해골을 이정표 삼아 걷는다는 길이다.

그래서인지 이곳에 동굴을 파고 그린 벽화에선 비장한 아름다움이 더한 것 같았다. 스카이다이빙하듯 상체가 아래로 향하고 다리와 옷깃은 하늘을 향해 나풀거리는 비천상(飛天像)들은 저 죽음의 사막을 건너온 이들에겐 자신을 반기는 천사와 다름없었을 것이다. 부처와 보살이 늘어선 극락세계를 그린 벽화들은 명사산(鳴沙山) 넘어 길 떠날 이들에겐 사막 너머 그들이 꿈꾸는 서방정토처럼 보였을 게다.

현장 스님처럼 중국에서 출발한 이들도 생환(生還)을 기약하기 어려운 길, 서라벌을 떠나 장안에서 좀 쉬었다 이 사막 앞에 섰을 때 혜초 스님의 머릿속 계획표엔 신라로의 귀국은 아예 없었을 수 있겠다. 사즉생(死則生), 로프 없이 번지점프하듯 백척간두에서 몸을 던지는 각오로 떠난 길이기에 그의 '왕오천축국전'은 세계인의 보배로 남은 모양이다. 막고굴을 떠나 차로 2~3분 달렸을 뿐인데도 뒤돌아보니 모래바람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방금 본 화려한 석굴과 벽화, 불상들은 신기루였던가.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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