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는 쪽은 가볍게 한 사람만 달랑 타는 경우가 거의 없다. 무게를 달아서 요금을 책정하는 기준 및 시스템 같은 것도 없다. ⓒ 이형수 (※ 사진을 클릭하시면 크게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시티오브조이'라고 하면, 누구나 알 것이라 여겼는데, 요즘 젊은 세대들 중에는 모르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1992년에 영화로 만들어진 작품이라서, 이미 20년이나 가까이 된 영화인걸 생각하면, 모른다고 해도 그리 이상할 일도 아닌 것 같다. 그래도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 알고있을 만한 영화가 바로 '시티오브조이'다. 미션과 킬링필드 등의 수작들로 이미 아카데미상을 탔었던 롤랑조페가 메가폰을 잡았던 영화라고 하면 도움이 될 듯. 나는 이 영화를 한참 후인 30살이 되기 직전에 봤다. 그러나 학창시절, 길에 보았던 인상적인 포스터는 그 전부터 머리 속에 남아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시티오브 조이만큼 내게 인도에 대해서 잘 가르쳐준 영화나 책은 없었다.

하지만 영화가 나왔을 당시엔, 영화 내용은 고사하고, 인도란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중동으로 가는 길목의 거대한 나라, '인더스 문명의 태고지'라고 들어만 봤을 뿐, 얼마나 깊은 역사를 가진 나라인지… 얼마나 많은 사람과 많은 종교, 많은 문화가 공존하는 나라인지 조차 전혀 알지 못했다. 국제화가 급속하게 이루어진 지금도 밸리댄스라든지, 요가 등 수출용으로 상업화된 인도의 문화에서부터 교과서에 나오는 역사,  그리고 관광 책자에 나오는 타지마할의 아름다운 사진을 통해서 사람들은 인도를 피상적으로 접하지 않는가.

테레사 수녀님이 잠드신 Mother house. ⓒ 이형수

어느 나라나 그렇겠지만, 인도는 가보기 전에는 이야기 하기가 특히나 힘든 나라다.
마음과 영혼으로 느껴야 되는 나라라고도 얘기한다. 그런 인도로 가는 이는 누구나, 통상적으로 인도의 3대 메가시티 중 하나에 착륙해서 가게 되는데, 그 메가시티란 델리, 뭄바이, 그리고 꼴까따(구,캘커타)다.

이 씨티오브조이의 배경이 바로 그 사람 많은 메가시티 중에서 제일 지저분하고 가난한 도시로 알려진 꼴까따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 꼴까따는 테레사 수녀가 말기 환자(나병 환자)를 위한 요양소를 비롯한 많은 선행을 한 곳이기도 하다.

영화에서는 바로 이 꼴까따가 절망과 희망이 공존하는 도시로 비춰진다. 가뭄이 흉년을 불러온 비하르(bihar)지방의 평범한 농부 하사리 팔(Hasari Pal)이 가난과 소작농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아내와 아들둘 딸하나를 데리고 무작정 웨스트 벵갈 최대의 도시인 꼴까따로 향한다. 하지만 그 꼴까따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성공의 꿈이 아니라, 그들과 똑같은 처지의 수많은 빈민과 사기꾼, 가진자가 부리는 권력의 횡포 등. 그들이 순박한 시골에서 보지 못했던 인간들의 온갖 추한 모습과 삶의 치열함이었다. 그런 잔인한 현실에 부딪혀 갈 곳을 잃고, 길 바닥에서 한 가족이 여러 밤을 지새는 동안, 하사리가 어렵게 얻은 직업이 바로 릭샤왈라.

※ 릭샤왈라 : 인력거 또는 영화에서 human horse(인간말)이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미국에서 의사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무작정 인도로 온 '닥터 맥스'분의 패트릭스웨이지가 인력거인 릭샤뒤에서 환호하는 모습. 릭샤왈라인 하사리 팔과 닥터 맥스의 우정을 그리는 장면. ⓒ 이형수
하사리는 간신히 얻은 직업에 뛸듯이 기뻐하지만, 모든 종류의 운송 수단이 개미처럼 얽힌 복잡한 시내를 맨발로 달리는 일은. 기술, 지식 아무것도 제시할 것이 없는 사람이 맨몸으로 할 수 있는 가장 힘든 직업 중 하나이다.

언제 사고가 날지 모르는 거리 위를 쉴새 없이 달려야 하는 열악한 환경 속에 살아야 하는 것이다. 영화에서 이 릭샤는 주변 빈민들을 불러모으는 거대한 메기의 입 같은 꼴까따의 치열한 삶, 그리고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꺼지지 않는 에너지 전체를 상징하는 심볼이 된다. 주인공인 하사리는 매일 뼈가 쑤시는 고통과 결핵에 걸리는 와중에서도 릭샤로 버는 푼돈을 모아, 딸인 암리타를 시집 보내겠다는 희망으로 살아간다.

※ 원판 책을 읽어보면, 당시 웨스트벵갈과 비하르 지방에서는 딸을 시집보내기 위해서는 Dowry(결혼 지참금)가 필요한데, 딸을 시집 못 보내는 것만큼 아버지로써 불명예는 없다고 한다.

사실, 이 시티오브조이는 단순히, 릭샤왈라(인력거꾼)과 닥터맥스라는 사람의 드라마 이상의 가치가 있다. 영화에서는 극적인 장면만을 하이라이트 하기 위해, 책 내용중 많은 부분이 생략되어 있지만, 원판인 책은 마치 인도를 소개하는 교과서가 따로 필요 없을만큼 많은 문화가 맛있는 양념처럼 가미되어있다. 저자인 도미닉 라피에르는  십수년동안 꼴까따와 인도에서의 경험과 릭샤꾼들과의 인터뷰로, 이 책을 완성했다. 하사리 팔이나, 그 주변인물들이 소설 속 인물이지만, 그 책의 스토리는 허구가 아니라, 그가 보고, 경험했던 인도인들의 삶 그 자체였다.

영화도 수작이지만, 원판인 책은 영화에서 언급되지 않은 세세하고 가슴 짠한 얘기들이 훨씬 더 많은 수작이므로, 한번씩 다 읽어보길 권유한다.

꼴까따에 와서 처음 찍은 사진, 빈 릭샤를 끄는 릭샤왈라가 보인다. ⓒ 이형수
이 훌륭한 작품의 심볼인 이 릭샤(인력거)를 아직도 꼴까따에서는 만날수 있다.

여행자거리인 Sudder St.와 주변 시장에서 특히나 많이 볼 수 있는데, 현재 관광상품이 아닌 생계형 인력거꾼은 이곳 꼴까따만이 유일하게 남아있다고 한다. 사실 꼴까따에서는 교통체증으로 인력거의 수를 줄이고 있다.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풍경이 될지 모를 일이다.

비오는 날 sudder st의 릭샤, 릭샤는 그들에게 우산이며 집이다. ⓒ 이형수
여행자들 중에는 인력거를 타지 않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 그 이유는 일단 가격흥정을 해야되고, 그 보다 큰 이유는 인력거 꾼이 대개 깡마르고, 늙은 탓에, 죄책감을 느끼고, 불편해 하는 탓이다. 하지만, 인력거꾼에게는 자신의 뒤에 타는 손님이 가벼운 어린 아이든, 뚱뚱하든, 자신의 일에 충실할 뿐이며, 그 일로 내일 아침 밥벌이를 할 수 있다면, 당신이 몇 kg이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깡마른 인력거꾼이 힘든 일을 하는게 안타깝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당신이 그에게 다른 직업을 만들어 줄 능력이 없다면, 인력거를 타는게 그를 도와주는 일이고 그들의 직업을 존중해주는 일이 될 것 이다.

사실 인도에는 그날 벌지 못하면, 말 그대로 내일의 먹을거리를 걱정해야 되는 사람이 많다. 많은 릭샤왈라들도 그런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그마저도 그들이 건강하게 뛸 수 있을때까지라는 것.

꼴까따의 도로는 차와 릭샤,오토바이뿐아니라 소, 염소 등의 통로이기도 하다. ⓒ 이형수
흥정의 경우도, 릭샤왈라들이 관광객 상대로 바가지를 치기도 하지만, 그건 인도 어디서나 있는 일이며, 인도를 편안히 여행하려면 오히려, 흥정에 재미를 느끼고, 익숙해지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 심지어 영화에서도, 순진한 농부였던 하사리마저, 딸의 사리를 살 돈을 모으기 위해 손님의 거스름 돈을 떼먹는 장면이 나온다.

인도에서는 단 몇 푼의 바가지에 열을 올리기 보단, 그 경험으로 우리 일상에서는 느껴보지 못하는 그들 만의 삶 속에서 볼 수 있는 매순간 치열함을 느껴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외모로 보기엔, 노인정에 있어야 할 분들이 릭샤를 끄시기도 한다. 하지만 고생을 해서 그런지 외모로 보이는 것 보다는 나이가 대부분 적다. ⓒ 이형수
영화에서는 인도에서 가장 가난하다고 하는 Bihar지방의 사람들이 주로 꼴까따에서 릭샤왈라(인력거꾼)을 하고 있지만, 최근에는 이웃 나라인 방글라데시에서도 와서 릭샤를 끈다고 한다. 책에서처럼 아직도, 릭샤를 독점하고 있는 부자 몇몇에게 버는 돈의 절반 이상을 높은 대여료로 지급해야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재도 그들의 힘든 삶이 릭샤를 끌어서 개선될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 이형수

꼴까따에 온 이후, 나는 며칠동안 릭샤에 넋을 잃고 있었다. 저 큰 바퀴 위로 어떤 사연을 짊어지고, 달리고 있을까? 뒤에 탄 승객이나, 짐이 아무리 무거운들, 눈에 보이지 않는 그들의 삶의 굴레와 사연들만큼 무겁지는 않을 것 같았다. 저 사람들은 가족이 있을까? 영화처럼 가족을 홀로 먹여살리고 있을까? 몸에 병은 없을까? 잠은 어디에서 잘까?

(좌) 릭샤는 비를 피하게 해주는 쉘터고, 씨에스타를 위한 침대이기도 하다. (우) 릭샤왈라에게 다리를 다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나쁜 소식이다. 다리를 다쳐, 일을 못하게 된 릭샤왈라와 그를 대신해서 일하는 친구. ⓒ 이형수
사진을 찍으면서, 저 사람들의 깡마르고 단단한 몸,굳은 표정과 터질 것 같은 다리의 핏줄을 내가 나중에라도 다시 보면, 적어도 내일 아침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내 생활에 감사하며, 주위에 힘든 사람들을 다시 한번 돌아보는 계기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얼마나 이 릭샤왈라를 볼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이 가장 기초적이며 원시적인 운송수단이 아직도 굴러다닌다는 것은, 단순히 영화에 나왔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운송수단이 가지지 못하는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근거리를 택시보다 싸고, 빠르게 갈 수 있다는 장점뿐아니라, 거친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이들의 치열한 삶 속에서 묻어나는 인간미, 정감 때문일 것이다.



혼과 철학이 담겨있는 곳으로 떠나다

세계에서 7번째로 넓은 국토 면적을 자랑하는 인도는 여행자들을 무척 고민하게 만드는 나라다. 북인도와 남인도의 개성 강한 도시들을 비롯해 다양한 종교 유적지들, 독특한 인도인 삶이 묻어나는 장소 등 구석구석 둘러볼 곳이 많기 때문이다. 한정된 시간에 인도를 좀 더 알차게 둘러보고 싶다면 몇 가지 테마를 정해 목적지를 정하는 것이 좋다. 현지인들에게 중요한 의미가 되는 가트와 종교 문화 유적지를 둘러보는 일정도 추천할 만하다.

↑ 사르나트

↑ 아그라 타지마할

◆ 다양한 사연 담은 종교 유적지 오랜 역사를 거쳐 왔으며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인도에는 역사적인 문화유산이 무척 많다. 그중에서도 아그라에 위치한 타지마할은 인도의 상징이자 세계적으로 불가사의한 건축물로 꼽힌다.

타지마할은 무굴 제국 5대 황제 샤쟈한의 부인 뭄타즈 마할 무덤으로, 인도 이슬람 예술의 걸작이라고 평가받는다. 순백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궁전 같은 모습이 눈부시다. 공사기간 22년에 2만여 명이 동원되었고 1653년에 완공되었다. 물안개가 낀 새벽녘과 해가 질 무렵 석양과 어우러진 타지마할 모습이 특히 인상적이다.

이번에는 인도가 자랑하는 또 다른 유적지, 아잔타 동굴군을 찾아가보자. BC 2세기부터 AD 7세기에 걸쳐 형성된 것으로 미완굴을 포함해서 30개 석굴이 있다. 아잔타 석굴 사원은 모두 불교 동굴로 이뤄졌고 동굴 안에는 생동감 넘치는 벽화가 가득하다. 흙이나 점토 등으로 그림을 그리고 색칠한 벽화들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인디아게이트'라고 하는 인도문은 인도 역사의 한 부분을 보여주는 건축물로 뭄바이와 델리 두 군데에 세워져 있다. 뉴델리 중심가, 코넛플레이스에서 동남쪽으로 2.5㎞ 지점에 위치한 델리 인도문은 1차 세계대전 때 전사한 인도 병사들을 위한 위령비다. 높이가 42m로 멀리서도 잘 보이며 뒤로는 국회의사당 건물과 정부 청사 건물이 서 있다.

델리에는 또 인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이슬람 사원 '자미 마스지드'가 있다. 타지마할을 완성한 샤자한 황제가 세운 건축물로 1658년에 완공되었다. 인도와 이슬람 양식을 적절하게 혼합했으며 약 2만명이 동시에 무릎을 꿇고 경배를 올릴 수 있을 규모를 자랑한다.

40m 높이로 양쪽에 솟은 뾰족한 탑도 인상적이다. 일반인에게 개방된 남쪽 탑에 올라가면 델리 시내가 한눈에 펼쳐진다. 자미 마스지드 사원 주변으로는 많은 상점이 늘어서 있어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고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인다.

◆ 인도인 삶의 일부, 가트많은 여행자들이 인도 여행에서 기억에 남는 곳으로 꼽는 곳이 바로 '가트(Ghat)'다. 인도 북부를 흐르는 갠지스강가에 위치한 가트는 강 옆에 이어진 돌계단을 말한다. 강을 따라서 100여 개 가트가 조성되어 있는데 화장터와 빨래터, 목욕탕 등 여러 용도로 사용돼 여행자 눈길을 끈다.

바라나시 젖줄이기도 한 갠지스강은 인도인들에게 '어머니의 강'으로 불리며 오래전부터 성스러운 것으로 여겨져 왔다. 또 강 곳곳에 인도인 사상과 삶의 모습이 녹아 있다. 갠지스강 가트에는 화장터가 여러 곳 위치해 하루에도 많은 시신들이 화장된다. 한쪽에는 강물에서 목욕을 하며 수영을 즐기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상반된 모습들이 낯설게 느껴지지만 육체에서 영혼이 해방하는 화장 의식을 성스럽게 생각하는 인도인 사상을 이해하고 본다면 공감이 되는 부분도 있다.

가트 중에는 집단 빨래터로 이용되는 곳도 많은데, 이를 도비가트라고 한다. '도비(Dhobi)'는 빨래하는 것을 직업으로 가진 사람들로 그들의 공동 작업장이자 일종의 대형 세탁소라 할 수 있는 장소들이 가트에 위치해 있다.

'도비가트'는 인도 뭄바이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풍경으로 많은 여행객이 들르는 곳이다. 180년 넘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도 놀랍다. 뭄바이 시내에서 수거된 많은 빨랫감이 이곳에서 사람들 손으로 세탁되는 모습에서 이들 애환과 인도에 아직 남아 있는 신분제도를 엿볼 수 있다.

아프리카 ‘동물의 왕국’에서나 봤을 아득한 풍경이 인도에서 재현된다. 인도 아삼주(아쌈주)의 카지란가(카지랑가) 국립공원은 코뿔소와 코끼리가 유유자적 거니는 야생초원이다. 에코투어를 갈망하는 유럽인들이 때묻지 않은 풍광에 매료돼 찾아드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이다.

코끼리를 타고 외뿔 코뿔소 가까운 곳까지 다가설 수 있다.



외뿔 코뿔소가 뛰노는 세계유산

카지란가에서는 코끼리를 타고 코뿔소를 보러 간다. ‘아삼’하면 끝없는 차밭만을 연상했는데 꼭 그것만은 아니다. 드넓은 녹지대를 벗어나 달리면 차밭보다 광활한 초원이 펼쳐진다. 상상 밖, 마주치는 생경한 장면들은 거대한 땅덩이 인도가 뿜어내는 또 다른 매력이다.

인도 동북부 브라마푸트라강 남쪽에 위치한 카지란가 국립공원의 넓이는 430㎢, 그중 66%가 초원이다. 야생동물 보호구역인 이곳에서 멸종위기의 인도산 외뿔 코뿔소 1,800여 마리가 서식한다. 세계 3분의 2가 여기에 있다. 세계에서 가장 밀도 높은 호랑이 밀집지역 중 하나이고 물소, 사슴, 몽구스, 긴팔원숭이도 같이 뛰논다. 국제자연보전연맹(IUCN)이 멸종위기로 분류한 15종의 동물이 곳곳에 흩어져 산다.

어미 코끼리와 동행하는 새끼 코끼리.

한국인들에게는 생경한 장소지만 유럽인들에게는 남아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야생동물의 서식지로 통한다. 지프차를 타고 오가는 사람들의 국적이 독일, 네덜란드 등 제각각이다. 좋은 숙소는 두세 달 전 마감되고, 입장 수가 제한된 국립공원 역시 서둘러 예약이 동난다.



코끼리 타고 코뿔소를 구경하다

공원 구경은 지프차나 코끼리를 타고 진행된다. 코홀라 마을을 지나 공원 경계를 넘어선 지프차들은 코끼리 앞에 일단 멈춰 선다. 이곳에서의 코끼리 탑승은 뭔가 좀 다르다. 어미 코끼리 곁을 새끼가 쫓는 생경한 풍경이다. 게다가 총을 든 안전요원이 동행을 하고 길이 아닌 초원으로 방향을 잡는다. ‘그 총 뭐냐’고 손짓하면 총잡이가 “타이거!(호랑이), 리노!(코뿔소)” 때문이라고 간결히 답한다.

광활한 공원은 지프차로 달리며 구석구석을 감상할 수 있다.

길목을 가로막은 코뿔소. 코뿔소의 최고속도는 80km에 달한다.

사실 호랑이는 보기 어려워도 코뿔소는 흔하게 마주친다. 굼뜬 코뿔소를 따라 열대초원의 질퍽한 길을 코끼리가 쫓는다. 코뿔소와 야생물소들의 꽁무니에는 새들이 한가롭게 매달려 있다. 느림보처럼 보이지만 코뿔소의 순간 최고속도는 시속 80km에 달한다. 안전요원이 동행하고, 길목에서 코뿔소를 마주친 지프차가 부리나케 내달린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렇게 만나는 코뿔소와 코끼리는 공원 투어의 일부일 뿐이다. 동물 군락은 습지를 따라 일렬로 아득하게 도열한다. 인간이 오가는 길목을 벗어나 브라마푸트라강변을 따라 멀리 목격되는 무리들의 모습은 평화롭다. 감동의 슬라이드가 느리게 넘어가는 잊지 못할 풍경이다. 모두들 말문을 닫은 채 그 풍경에 빠져들게 된다.

카지란가 투어는 4월까지가 적기다. 5월에 접어들면 우기가 시작된다. 2,000mm가 넘는 비가 내리며 브라마푸트라강이 범람해 카지란가 전체가 습지대로 변한다. 카지란가 사파리는 코호라 마을 외에도 서부 나가온(나가옹) 지역에서도 가능하다. 숙소는 코호라 마을 일대에 밀집돼 있다. 4성급의 깔끔한 리조트도 들어서 있으며 숙소에서는 현지인들의 민속쇼도 관람할 수 있다.

아삼주를 대표하는 차밭. 차는 이곳 사람들의 주 수입원이다.

국립공원의 관문인 코호라 마을에서 이곳 현지인들을 만나는 것도 즐겁다. 그들의 생활상은 국립공원에 사는 동물처럼 순박하다. 같은 관광지라도 전하는 미소가 도시와는 다르다. 동네 이발소에서 머리를 손질하는 장면도 정겹고 아침이면 차이(짜이) 한잔을 마시는 모습도 친근하다. 계급적 차이에 상관없이 인도인들은 ‘차이’를 공유하며 일상생활의 평화를 함께 나눈다. 차이 한잔은 4루피(약 100원). 인도식 부침개인 로티(로띠) 한 장까지 곁들이면 인도식 ‘브런치’로 훌륭한 메뉴다.

아삼주로 가는 길에는 인도 뒷골목의 외딴 풍경과 조우하게 된다.

아삼주 경계선을 넘어서 실롱지역으로 들어서면 인도 북부의 희고 훤칠한 아리안계도 아니고, 남부의 짤막하고 검은 피부의 드라비다계도 아닌 다양한 소수민족을 만나게 된다. 눈에 익숙한 동아시아인의 순박한 얼굴은 카지란가에서 조우했던 코뿔소의 눈망울처럼 골목마다 따사롭게 담겨 있다.


가는 길
한국에서 카지란가까지는 델리콜카타 등을 경유하는게 일반적이다. 카지란가까지는 조르하트 공항이나 아삼주의 주도 가우하티(구와하티)를 거쳐 이동한다. 인도 입국에는 비자가 필요하다. 카지란가 지역은 낮에는 더워도 아침, 저녁 기온은 선선한 편이다. 카지란가 현지투어를 위해서는 사전 예약을 해야 한다. 인도관광청을 통해 자세한 현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 인도 자이푸르의 거리모습

경중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사람들은 저마다 중독증에 시달린다.

사랑에, 영화에, 돈에, 알코올에 그리고 사람에. 집 떠나면 고생인 줄 알면서도 틈만 나면 떠나고 싶어 쩔쩔매게 되니, 여행 역시 중독의 기운이 있다. 그리고 여행목적지 가운데 가장 중독성이 강한 곳을 고르라면 하릴없이 인도를 꼽게 된다.

인도를 한 번이라도 다녀온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보면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너무 너무 좋아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와 "고생을 하도해서 생각도 하기 싫다"는 두 부류로 극명하게 갈린다는 점이다. 더 흥미로운 발견은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두 진영의 의견이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는 것.

"인도에 다시 가고 싶다"로, "인도가 자꾸만 부른다"로, 무엇이 인도 중독증을 불러일으키는 것일까. 무엇이 그 수많은 관광지 중에서도 인도를 독특한 자리에 위치 지우는 것일까. 어떤 광휘로 사람들의 마음을 몰아치는 것일까.

그 해답의 단초는 극단의 경험에서 오는 어떤 깨달음에서 찾아야하지 않을까 싶다.

세상의 어느 나라이건 간에 저쪽 끝과 이쪽 끝, 저편과 이편 사이의 간극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겠지만 인도만큼 유별난 곳도 드물다. 최고와 최저, 무한과 유한, 화려함과 초라함 등 양 극단의 모습을 시치미 뚝 떼고 보여 준다.

양쪽 끝을 체험하는 것이 한편으로는 어지럽고 적잖이 당황스럽지만 인도 여행이 끝날 즈음에는 그렇게 느끼는 것조차 사치스럽게 느껴진다. 어느 시점부터라고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그저 보면 느끼고, 느끼면 보인다는 마음가짐이 자연스레 자리 잡게 된다.



↑ 인도 자이푸르의 거리모습

극단의 모습을 오간다는 것은 인도가 그만큼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뜻도 된다.

길거리 여기저기에는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소들과 구걸하는 사람들이 즐비한 반면 과거 지배층의 맥을 잇는 현재 인도 부호들의 여유로움은 상상을 초월한다.

봉건시대에서나 남아 있음직한 신분제도인 카스트 제도가 뉴 밀레니엄의 시대에도 버젓이 남아 있고, 불교와 힌두교의 발상지로서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신들이 존재하기도 한다.

수많은 문화유적과 고단한 삶의 애환은 최첨단 테크놀로지와 어깨를 부딪는다. 어딘가 허전해 보이고 가열찬 희망의 빛이 희박한 듯 하면서도 볼리우드라 불릴 정도로 많은 영화를 생산해내고 있다. 영화가 꿈의 공장임을 떠올릴 때 참 묘한 이중성이란 생각이 든다.

서로 융화화기 어려울 것 같은 다양한 면을 통해 얻는 깨달음이 인도 기행의 가장 큰 매력이자 수확임을 감안하면 인도에 대한 지레짐작, 예단은 당연히 금기사항에 속한다. 다시 말해 인도는 너무 거대하고 복잡다단하여 인간의 조악한 마음과 작은 머리로 가늠하기란 어림없는 일이다.

예를 들어 인도하면 바랜 황토빛만이 너울거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빨강, 노랑, 파랑, 분홍 등의 선명한 원색이 눈길을 잡아끌기도 한다.

어떤 로맨틱한 기운마저 피워 올린다. 그리고 인도의 어느 주보다도 화려하고 강렬함을 전하는 곳이 있으니 바로 인도 북서부의 라자스탄이다. 그리고 라자스탄의 주도가 바로 자이푸르다.

◈극단의 미학이 펼쳐지다

파키스탄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라자스탄은 독특한 느낌으로 중무장한 곳.

역사가 뿜어내는 신비로운 전설과 다양한 이야기 거리들이 발길에 채이고, 광활한 사막을 울타리 삼은 아름다운 궁전과 산과 호수가 신비스런 분위기를 자아낸다. 라자스탄은 인도에서도 대표적인 저개발 지역이다.

인구밀도도 가장 낮고 문자가득률 또한 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 지역 주민들의 자부심은 다른 지역 사람들의 그것보다 훨씬 더 팽팽한데, 면면히 흘러온 역사 그리고 라즈푸트족과 관련이 있다.



↑ 인도 자이푸르의 거리모습

라자스탄이 역사의 한 페이지에 본격적으로 이름을 내민 것은 기원 후 4세기에서 6세기 경. 8세기에서 12세기에는 오늘날 라자스탄의 특색과 전통을 이루는 데 골간이 되는 라즈푸트의 여러 왕조가 흥과 쇠를 거듭했다.

힌두교를 신봉하는 라즈푸트족은 용맹스러운 전사였다. 전쟁에 임하면 죽을지언정 물러서지 않는 불퇴전의 정신으로 유명했다. 이러한 용맹함이 있었기에 인도 전역을 통일하였던무굴제국도 라자스탄만은 무력에 의한 점령 포기하고 혼인을 통한 유화정책으로 화해를 이뤄냈다.

라즈푸트족의 남자들은 전쟁에서 전세가 불리하면 목숨을 초개같이 버렸을 뿐만 아니라 여자와 아이들마저 적을 피해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러한 불굴의 의지가 오늘날의 자부심을 형성했다.

라자스탄의 여행은 자이푸르에서부터 시동을 걸어야 한다.

인도의 수도 델리, 타지마할이 있는 아그라와 더불어 소위 '골든 트라이앵글'로 불린다. 인도의 참모습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코스로 힌두문화와 이슬람문화가 어우러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델리와 아그라에 무굴제국의 흔적인 선연하게 남아 있는 반면에 자이푸르는 힌두문화가 잘 보존되어 있다.

인도 북부 맥그로드 간즈는 히말라야의 작은 티베트로 불리는 곳이다. 중국을 떠난 티베트 난민들의 망명 정부와 삶터가 들어선 애틋한 땅이다. 한국에 ‘다람살라’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지만 히마찰 프라데시주의 다람살라는 맥그로드 간즈보다는 큰 지역단위다.

맥그로드 간즈는 히말라야의 산자락에 소담스럽게 들어서 있다.



히말라야에 들어선 티베트인의 망명정부

달라이 라마가 황무지 맥그로드 간즈에 티베트 망명정부를 세운 게 50여 년 전의 일이다.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온 난민들이 꾸준히 정착했고, 현재 4,000여 명의 티베트인들이 이곳에서 자국의 문화를 보존하며 살아가고 있다.

티베트주민들이 거주하는 대부분의 가옥들은 벼랑길 골목에 들어서 있다. 해발 1,800m을 넘나드는 비탈에 의지한 집들은 이곳의 변화무쌍한 날씨에 익숙한 듯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한다. 낭떠러지를 사이에 둔 채 등짐을 메고 산길을 오르는 주민들 뒤편에 티베트의 새로운 삶터가 있는 게 다행스럽고도 생경하다.

망명궁전인 쭐라캉으로 이어지는 중앙로인 ‘템플 로드’는 온통 승려들과 전 세계에서 몰려든 배낭족들의 세상이다. 승려들은 환전도 하고, 노점상에서 생필품도 구입하며 일상의 한 단면으로 존재한다.



승려와 배낭족, 현지인들이 공존하다

티벳 망명정부에서는 현지인들과 승려, 이방인들은 경계를 허물고 공존하며 살아간다. 승려와 배낭족이 게스트하우스옆 노천카페에 마주앉아 정겹게 차를 한잔 마시는 모습은 이곳에서 흔한 풍경이다. 템플로드 좌우로는 좌판대가 늘어서 있고 그 좌판대의 주인장이 티베트인들이다.

달라이 라마는 각국의 수행자나 중생들을 대상으로 중앙사원인 냠걀 사원에서 설법을 펼치고, 이 설법을 듣기 위해 세계에서 사람들이 몰려들기도 한다. 불탑인 초르텐이나 냠걀사원에서는 티베트 문자가 새겨진 수십개의 원통들을 시계방향으로 돌리며 자신들만의 종교를 추앙하는 티베트 주민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템플로드를 오가는 승려들의 뒷모습. 골목의 하루는 승려들의 발걸음으로 시작되고 마무리된다.

맥그로드 간즈에서의 산책과 상념은 트레킹 코스로 연결된다. 박수나트 폭포나 다람코트까지 이어지는 길은 히말라야 하이킹의 재미를 선사한다. 마을의 윤곽을 내려다보며 산허리를 따라 걸으면 시바 사원과 공동 빨래터를 지나 박수나트 폭포로 향하는 길이 이어진다. 맥그로드 간즈의 수원지 역할을 하는 박수나트 폭포는 설산에서 눈 녹은 물이 흐른다. 사람들은 성스러운 폭포아래서 헤엄을 치며 휴식을 즐긴다. 20세기초 이 일대는 영국인들이 인도의 폭염을 피해 만든 여름 휴양지이기도 했다.

다람코트로 가는 숲길은 고국을 등지고 히말라야를 넘어 맥그로드 간즈로 향해야 했던 난민들의 눈물이 담긴 길이기도 하다. 산정인 트리운드나, 달 호수와 티베트 어린이 마을로 연결되는 길목 어느 곳에도 풍광만큼이나 진한 사연이 서려 있다.

맥그로드 간즈 인근의 노블링카는 티베트의 문화, 풍습 등을 전승하기 위해 설립된 곳으로 장인들의 수준높은 공예품들이 전시돼 있다. 현실의 골목에서도 그들만의 일상은 묻어난다. 망명정부의 젊은이들은 담장 아래 모여 티베트식 알까기를 즐기고, 티베트식 만두인 ‘모모’를 즐겨 먹는다. 외지인들과 뒤엉켜 길목의 모습은 퇴색됐지만 의연하게 티베트인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가는길=인천에서 인도 델리를 경유해 맥그로드 간즈의 관문인 캉그라 공항까지 이동한다. 델리까지는 아시아나 등 직항편이 있다. 캉그라 편 항공은 연착되는 경우가 있으니 사전에 꼼꼼히 체크해야 한다. 인도 입국에는 별도의 비자가 필요하다. 뉴델리역 빠하르간지에서 맥그로드 간즈까지 가는 버스 편도 있다. 맥그로드 간즈에 배낭여행자들을 위한 게스트 하우스들이 다수 있으며 기온은 고산지대라 서늘한 편이고 낮과 밤의 일교차가 크다.

'첫사랑 찾으려다 사랑에 빠지다'뻔한 스토리? 그래도 매력적인 소재인걸

세상에 두 종류의 사람이 존재한다. 첫사랑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나는 단연코 후자다. 그런데 나로 말하면, 내 첫사랑은 예기치 않게 '인간극장'에 등장했었다. 그것도 자신의 부인과 함께. 아이도 두 명 있었다. 나는 그가 지방 어디에서 무슨 직업을 가지고 어떻게 사는지, 심지어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그의 부모님의 얼굴까지 속속들이 알게 되었다. 15년 만이었다. 내 첫사랑의 판타지는 그렇게 박살났다. 그의 자글자글한 눈 밑 주름과 출렁이는 배를 봐버렸으니 어쩐다. 맙소사! 나는 그의 아내가 아이에게 수유하는 장면까지 봐버렸다.

고백하면 나는 첫사랑 타령하는 드라마나 영화가 싫다. '겨울연가'니 '가을동화'니 내 취향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어떤 특별한 공간은 사람을 미치게 만들기도 한다. 이유 없이 열병에 시달리게 하고, 걸신들린 것처럼 두리번거리게도 한다. 특별한 공기, 날씨, 태양의 빛, 향신료, 독특한 억양의 언어들은 사람의 '외로움'을 더욱 기울게 해,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가게 만드는 마법을 부린다. 더군다나 그곳이 서걱대는 모랫바람이 부는 사막 한가운데의 도시라면 말할 것도 없다. 나는 인도의 '라자스탄'이 그런 곳이라고 믿고 있다.

여행은 외로움을 느낀 사람들을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가게 만드는 마법을 부린다. 인도인들이 신혼여행을 많이 가는 라자스탄(Rajasthan)의 모습. / 인도 라자스탄주 홈페이지
조드푸르, 자이푸르, 우다이푸르를 아우르는 '라자스탄'은 우리나라로 치면 제주 경주처럼 인도인들이 신혼여행을 많이 가는 곳이기도 하다. 사실 사막을 끼고 있는 도시라 꽤 척박하고 메마른 느낌이 나지만, 낙타가 많아서인지 낙타 가죽으로 만든 아름다운 물건들이 즐비하고, 알싸한 '짜이'향기를 풍기는 시장 주변엔 싸고 맛있는 오믈렛 가게나 카레 집들이 많다.

그런 질척한 음식을 인도인처럼 젓가락 아닌 손가락 끝으로 휘저어 빨아 먹다 보면 누구라도 본능에 더 충실해질 것이다. 그림자조차 말라버린 오후 두 시의 땡볕, 나무며 사람들이며 겨우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뜨거운 도시에 앉아 멍하게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쳐다보면 몸에 난 구멍들 사이로 뭔가 줄줄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 것이다. 나는 인도에서 대책 없는 사랑에 빠진 남녀들을 참 많이도 봤었다.

'블루시티'라 불리기도 하는 '조드푸르'는 특히 구 시가지의 대부분이 푸른색으로 도배되어 있다. 도시를 걸을 때는 느낄 수 없지만 '메헤랑가르 포트'에 올라가 도시를 내려다보면 온통 파란 물감을 뿌려놓아 '스머프 왕국'처럼 보일 지경이다. 힌두의 '시바'를 상징하는 색이 푸른색이기 때문이다.

'김종욱 찾기'는 인도를 배경으로 한 영화다. 뮤지컬 무대감독인 서지우는 인도에서 만난 김종욱을 잊지 못해 '첫사랑 찾기 사무소' 한기준에게 사람을 찾아달라고 의뢰한다. 밑도 끝도 없이 이름 하나 가지고 사람을 찾자니, 두 사람은 이름이 비슷한 김종묵을 찾기도 하고, 축구 선수 김종욱이나 출가해 머리를 깎은 김종욱을 찾는 등 우여곡절을 겪는다. 그리고 그런 우여곡절 끝에 한기준과 서지우는 '김종욱'을 매개로 자신들이 진짜 서로의 인연이었음을 깨닫는다.

내용이 꽤 빤하지 않은가.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상투성은 결국 그만큼 재미있고 매력적이다 보니 자꾸 반복되고, 반복되다 보니 더 진부해진다는 것이다. 돌고 돌고 도는 이 진부함의 굴렁쇠의 결말은 이렇다. 사실 재미있는 이야기는 원래 진부했다.

장 마르크 파라시의 '마지막 첫사랑'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기억하라. 세상 모든 사랑은 첫사랑의 상처였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라. 세상 모든 사랑은 첫 사랑의 유적들이었으니." 김종욱을 찾다가 김종묵이나 김종육이나 김종혁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이들 역시 모두 '김종욱'의 변형들이 아닌가. 첫사랑이란 좋든 싫든 그런 황당한 존재들인 것이다. 

●김종욱 찾기: 인도네시아에 여행가겠다는 고객들에게 '쓰나미'를 경고할 정도로 고지식한 여행사 직원 한기준은 좀 더 뜻깊은 일을 하고자 사표를 쓰고 '첫사랑 사무소'를 연다. 

아버지에게 끌려 '첫사랑 사무소'의 고객이 된 서지우. 하지만 그녀가 알고 있는 정보라곤 첫사랑의 이름 석 자인 김종욱뿐이다. 동명 뮤지컬 연출자이자 작가인 장유정 감독의 첫 번째 영화 연출작이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인도 콜카타(Kolkata, 구 캘커타)는 두 얼굴의 도시다. 영국풍의 정제된 건물과 뒷골목의 삶이 한 공간에 뒤엉켜 있다. 영국 식민지 시대 때 수도였던 화려한 경력의 이면에는 서민들의 애환과 생채기도 남아 있다. 갠지스강(갠지즈강)의 지류인 후글리강과 낡은 트램은 도시의 지난한 세월을 묵묵히 가로지른다.

갠지스강의 지류인 후글리강은 콜카타 서민들에게 삶의 버팀목이자 성스러운 존재다.

콜카타는 색의 대비가 강하다. ‘이국적인 인도’에 대한 깊은 인상은 색감이 던져주는 화려함 때문인지도 모른다. 콜카타의 첫인상은 노란색 택시로 채워진다. ‘블랙’이 뒤섞인 델리뭄바이의 택시와는 또 다르다. 뜨거운 태양 아래 번쩍이는 택시의 행렬은 이질감을 더욱 증폭시킨다.




영국풍의 거리에 취하다


런던의 한 골목을 걷고 있다는 착각을 부추기는 것은 영국풍의 단아한 건물들이다. 초우링기(Chowringhee) 거리를 지나치다 보면 영국 식민지 시절의 잔영들과 맞닥뜨린다. 그중 ‘빅토리아 기념관(빅토리아 메모리얼, Victoria Memorial)’은 콜카타 여행의 상징 같은 건축물이다. 빅토리아 여왕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기념관은 도시에 흐르는 면면을 잘 대변한다. 본 건물은 유럽풍으로 지어졌지만 돔은 인도 무굴식이며 내부는 영국 왕실의 역사와 업적을 담아내고 있다. 기념관 앞의 연못과 잔디밭은 젊은 청춘들의 밀애 장소다. 흰색의 뽀얀 건물과 짙은 피부색의 민족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것에서 도시의 지난한 과거가 엿보인다.

빅토리아 여왕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빅토리아 기념관’.


대영제국의 좀 더 깊은 잔영을 만나고 싶다면 ‘비비디 박(B. B. D. Bagh)’으로 향한다. 식민지 시대의 건물들은 그 용도를 달리하며 나란히 늘어서 있다. 분명 콜카타의 중심거리가 맞는데 도시를 가로지르는 트램이나 택시, 이탈리아제 피아트 차량들이 눈을 현혹시킨다. 동인도 회사가 있던 자리에는 주정부 건물이 들어서 있고 고풍스러운 건물 옆 커다란 연못에서는 주민들은 천연덕스럽게 몸을 씻거나 낮잠을 즐긴다.

‘비비디 박’에서는 영국풍의 건물과 도심풍경을 

만날 수 있다.

콜카타의 트램은 1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며 도심을 가로지른다.


사람들이 간신히 지나는 좁은 골목으로는 오래된 트램이 달린다. 인도 내에서 트램이 있는 도시는 콜카타가 유일하다.. 최근 들어 새롭게 단장했다고 하지만 털털거리는 느린 속도에 투박한 외형은 여전하다. 1870년대에 개통된 트램은 그 역사가 100년을 훌쩍 넘어선다. 식민지 시대 때는 트램이 두 칸으로 나뉘어 운행됐다고 한다. 두 칸짜리 트램은 남아 있어도 그때처럼 계급, 남녀의 자리 구분을 두고 있지는 않다.




후글리 강변과 꽃 시장

후글리강을 따라 북쪽으로 향하면 도심의 색채가 변한다. 길은 미로처럼 복잡해지고 정돈되지 않은 서민들의 공간이 속살을 드러낸다. 사람이 직접 끄는 릭샤도 곳곳에서 눈에 띈다. 릭샤 역시 델리, 뭄바이에서는 보기 어렵게 된 교통수단이다.

오랜 콜카타의 거리에는 사람이 직접 끄는 

릭샤가 오간다.

하우라 다리 인근의 꽃시장 ‘믈리끄 가뜨’.


콜카타의 아이콘으로 여겨지는 하우라 다리(Howrah bridge)는 흙빛 후글리강을 외롭게 가로지른다. 길이가 705m에 이르는 다리는 ‘라빈드라 세투’로도 불리는데 2차대전때 지어진 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오가는 빽빽한 다리가 됐다. 교각이 없는 하우라 다리 동쪽 아래로는 꽃시장 ‘물리끄 가뜨’가 들어서 있어 뒷골목 서민들의 삶을 떠받친다. 이곳은 유럽에서 만나는 단아한 꽃시장과는 차원이 다르다. 개미 골목 사이로 꽃을 치장하고 파는 사람과 형형색색의 꽃들이 자욱하게 늘어서 있다.


꽃시장을 벗어나 붉은 담벼락을 지나면 후글리 강둑이다. 콜카타 주민들에게 후글리 강은 신성한 존재다. 해 질 녘 목욕을 하거나 성물을 바치는 행위가 강둑에서 펼쳐진다. 이국적인 도심풍경과 허상의 꽃향기를 털어내고, 가장 신성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만날 수 있는 곳도 하우라 다리가 배경이 된 이 강둑이다. 콜카타에서 숨 깊은 도시의 진면목은 이렇듯 외딴 어느 강변이나 골목에서 드러난다.

콜카타의 뒷골목으로 접어들면 

친근한 서민들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자인 페스티벌은 1년에 한 차례 열리는 자인교의 대축제다.


유럽풍이든 서민적 삶이든, 단절된 것들을 담아내는 게 종교다. 콜카타에 흩어져 있는 인도 사원들 중 쉬딸나뜨지 자인교 사원(Sheetalnathji Jain Temple)이나 깔리 힌두교 사원은 도시를 채색하는 화려한 건축물들이다. 인도 동부 사원 중 최고라는 평을 듣는 쉬딸나뜨지는 오밀조밀한 색으로 단장된 섬세한 장식들이 시선을 끈다. 1년마다 한번 보름에 펼쳐진다는 자인 페스티벌 때는 사원 일대가 흥청거린다. 깔리 사원은 동부 벵골(벵갈) 양식의 독특한 외관이 돋보인다.

화려한 장식이 돋보이는 쉬딸나뜨지 사원.

빈민들의 어머니로 노벨 평화상을 받은 마더 테레사의 집.


콜카타는 노벨상을 받은 위인들의 흔적을 만날 수 있어 더욱 의미 깊다. 빈민을 위해 생애를 바쳤던 마더 테레사의 집과 시인 타고르의 생가도 시내에 남아 있다. 수도가 델리로 옮겨진 이후에도 콜카타를 지성과 문화의 수도로 칭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가는길
한국에서 직항 편은 없다. 제트 에어웨이즈(Jet Airways) 등을 이용해 방콕을 경유하는 게 편리하다. 델리, 뭄바이 등 인도 각지에서도 연결편이 다수 있다. 인도 입국 때는 비자가 필요한데 비자 받는 과정은 많이 까다로워졌다. 콜카타는 환전소에 따라 환율에 차이가 있는 편이다. 인도관광청(www.incredibleindia.co.kr )을 통해 다양한 현지정보를 얻을 수 있다. 콜카타의 트램은 고풍스런 여행을 위해서라도 한번 타보면 좋다.

티베트 불교를 보호하다, 티베트하우스(Tibet House)

‘티베트하우스’는 티베트에 관한 작은 박물관이다. 이곳에 전시된 물건들의 중심은 티베트의 정치적인 지도자이자 종교적인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Dalai Lama)가 인도로 망명 올 때 가지고 왔던 의식용 물품이다. 1974년 티베트하우스의 새 빌딩을 지을 때 달라이라마가 주춧돌을 직접 올리는 등, 달라이라마와 이곳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외에도 1959년 이후 정치적인 문제로 티베트에서 험한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인도로 망명한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온 종교적으로 중요한 책과 물품들이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 티베트의 탱화라 할 수 있는 “탕카(Thangka)”가 200여 점. 각종 조각상 100여 개 등등. 그리고 3천 권 이상의 책이 모여 도서관을 이룬다. 티베트 승려의 학문적인 깊이와 티베트 문학에 대해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다.


이곳은 단순히 자료들을 모아놓은 박물관의 역할에만 만족하지 않는다. 티베트 불교에 대한 강의를 개최하여 티베트의 문화를 알리고, 티베트의 음악을 알리기 위한 경연대회도 열고 있다. 티베트 특유의 향 등 티베트 물품들을 파는 매장도 그러한 문화 전파에 한몫 한다.


티베트인들에게 티베트 불교는 생활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티베트불교에서는 스승, 즉 라마를 중시한다. 그 때문에 라마교라 불리기도 한다. 티베트의 불교는 인도에서 직접 들어온 것으로, 티베트어 경전은 인도의 산스크리트어 경전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가장 규모가 큰 이슬람사원, 자미 마스지드(Jami Masjid)

델리에는 인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이슬람 사원이 있다. 이 건물을 건축한 이는 타지마할을 지은 샤 자한(Shah Jahan) 황제. 그가 마지막으로 세운 건축물인 이 사원에서는 2만여 명이 동시에 알라신에게 무릎을 꿇고 경배를 올릴 수 있다고 한다.


인도와 이슬람 양식이 융합된 무굴 건축의 걸작인 이 사원은 1644년에 착공하여 15년 뒤인 1658년에 완공되었는데, 붉은 사암과 하얀 대리석으로 쌓아 올린 40m의 뾰족탑이 특히 볼 만하다. 두 개의 탑 중 일반인에게 공개된 남쪽의 탑에 올라서면 델리의 풍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너비 60m, 길이 36m의 거대한 모스크, 흰 대리석 돔을 보면 인도에서 가장 큰 이슬람사원이라는 것이 실감난다.


무슬림이 인도에 들어와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한 것은 8세기경부터이지만, 인도의 지배적 종교인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사이는 오랫동안 좋지 않았고 여전히 좋지 않다.


1852년에 그려진 자미 마스지드.

근본적으로 화합할 수 없는 사상과 문화를 가진 이들은 심각한 유혈사태를 일으키기도 했다. 특히 19세기말 인도를 식민지 삼았던 영국이 분리통치정책의 일환으로 힌두-무슬림의 종파적 갈등을 이용하는 바람에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독립으로 치달으며 충돌하여 백만 명이 사망하는 대참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현재 인도에 거주하는 무슬림은 약 1억 2천만. 소수집단인 이들은 정부의 무슬림 포용정책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인도 내에서 종파갈등을 겪고 있다.



새의 병원, 디감바 자인교 사원(Digambar Jain Temple)

자인교는 생명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찬드니 촉 거리의 초입에는 자인교(Jainism)의 작은 사원이 서 있다. 1656년에 지어진 이곳의 이름은 ‘디감바 자인교 사원’이지만, 별칭은 “새의 병원(Bird Hospital)”이다. 먹이를 찾아 날아오는 새들을 돌봐서인지, 이곳에는 다친 새들이 스스로 찾아온다고. 사원의 위층에 새의 병원이 마련되어 있는데, 사원에 들어가려면 가죽신, 가죽옷 등 몸에 지닌 가죽제품을 모두 내려놓아야 한다. 생명을 중시하기 때문에 시체의 일부인 가죽 또한 금지하는 것이다.


자인교는 BC 6~5세기 무렵. 부처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마하비라(Mahavira)가 주창한 종교이다. 자인교의 목표는 영혼을 완전히 정화하여 삶의 비참한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 그것을 그들은 ‘승리한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승리자, 혹은 정복자를 의미하는 ‘지나’에서 ‘자인교’라는 이름이 유래했다. 자인교란 “지나의 가르침”을 뜻한다.


자인교의 특징 중 하나는 물질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다. 그 때문에 자인교 수행자들은 극단적인 무소유인 나체수행을 지향한다. 또 하나의 특징은 불살생과 비폭력을 추구하는 것. 동식물은 물론이거니와, 땅[地(지)]·물[水(수)]·불[火(화)]·공기[대기(大氣)]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수많은 여러 생물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들 생명의 존엄성을 지켜주자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평등의 이름, 구루드와라 방글라 사힙(Gurdwara Bangla Sahib)

시크교도들의 성전 ‘구루드와라 방글라 사힙’은 8대 시크교 구루인 하르 크리샨이 1664년 왕의 초대로 델리를 방문했을 때 머문 곳에 지어졌다. 당시 인도 왕인 라자 자이 싱의 소유였던 이 건물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황금 돔이다. 모든 순례자에게 아침 3시부터 저녁 9시까지 열려 있는 이 예배당의 동쪽에는 무료로 매일 식사를 제공하는 채식식당이 있다.


이곳을 방문하던 당시 구루 하르 크리샨의 나이는 일곱 살이었다. 다섯 살 때 손수건 하나로 나병환자를 낫게 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그는 천연두와 콜레라가 돌던 델리 주민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빈민가를 방문하여 새 옷을 주고 치유력이 있는 성수라 알려진 방글라 사힙의 우물물을 나누어 주었다. 현재에도 이곳의 물은 치료에 효과가 있는 성수로 여겨진다. 결국 하르 크리샨은 많은 사람들을 만나던 중 그들에게 옮은 천연두 때문에 일곱 살의 나이로 세상을 뜨게 된다.


이곳을 방문했던 구루 하르 크리샨의 나이는 일곱 살이었다.

시크교는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합친 종교로, 16세기 초반에 구루인 나나크 데브(1469∼1539)가 주창했다. 시크교 안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신과 여신간에도 차이가 없고 남자, 여자, 부자, 가난한 자, 종교, 인종 모두 평등하다. 시크교는 카스트 제도를 거부한다. 어떤 동물도 죽이지 않는다. 시크교에 따르면, 인간은 신에 대한 사랑과 현세의 선행으로만 구제된다. 대부분의 남자신도들은 머리털과 수염을 절대 깎지 않아 외모만 보더라도 시크교도임을 알 수 있다.



수많은 신들의 둥지, 락슈미 나라얀 사원(Lakshmi Narayan Temple)

이곳은 여러 신의 조각들로 가득 차 있다.


비슈누와 그의 아내 락슈미를 모신 힌두교 사원인 ‘락슈미 나라얀 사원’의 다른 이름은 ‘비를라 만디르(Birla Mandir)’이다. 인도 굴지의 재벌 중 하나인 비를라 가문의 발데브 다스 비를라가 세운 사원이기 때문이다. 비슈누와 락슈미를 같이 묘사한 것을 보통 락슈미-나라야나(Lakshmi-Narayana)라 하는데, 사원의 이름도 이것에서 왔다. 하지만 수많은 신을 모시는 인도답게 이곳 또한 두 신만을 모시지는 않는다. 별관에는 시바와 그의 아내 두르가가 모셔져 있고, 한쪽에는 불교사원이 세워져 있기도 하다. 불교순례자는 누구나 사원의 숙박소를 별도의 요금 없이 이용할 수 있다.


1938년에 세워진 이 사원은 현대적 감각을 자랑한다. 사원 전체는 힌두 신화에 나오는 여러 장면들로 조각되어 있다. 이 작업에는 백 명 이상의 조각가들이 참여했다고 한다. 이 조각들 속에서 부처도 힌두교 신의 하나로 대우받는다. 비슈누의 아홉 번째 화신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

비를라 가문은 인도 전역에 수많은 사원과 천문관들을 세웠는데. 이 사원을 공개할 때는 간디를 초청하여 이곳이 종교나 신분에 구애받지 않는 열린 신전임을 내세웠다고 한다.


락슈미 여신은 어머니의 신으로 다산을 상징하였지만, 이후에 아름다움과 행운, 행복, 부를 상징하는 여신으로 여겨졌다. 주로 비슈누의 아내로 그려지고 있다.



모든 종교를 아우르다, 바하이 사원(Bahai House of Worship)

그토록 종교가 많은 인도. 모든 종교를 한꺼번에 아우르는 종교는 없을까? 있다. 19세기 초에 바하 올라(1817~1892)에 의해 중동에서 시작되어 1844년 인도로 들어온 ‘바하이’는 모든 종교들은 넓은 가슴으로 품는다. 이슬람교의 한 분파로 시작한 신흥종교인 바하이는 이슬람교의 ‘성전’을 거부하고 평화를 가장 큰 가치로 여긴다. 부처, 예수 등은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전파하기 위한 화신이라고 여긴다. “전 세계는 하나의 나라이고 인류는 그 나라의 시민들이라”는 말에서도 엿볼 수 있듯, 전 인류는 형제라 여기고 모든 국가는 통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또 가르친다. “자기 조국을 사랑하는 자신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전 세계를 사랑하는 자신을 자랑해야 한다. 지구는 한 나라요, 인류는 그 백성이다”라고.


미국, 독일, 호주, 파나마 등 세계 곳곳에 사원이 있지만, 특히 델리에 있는 바하이 사원은 그 아름다움으로 눈길을 끈다.


바하이교는 아름다운 사원으로 더욱 알려졌다.

1980년에서 86년에 걸쳐 지어진 이 사원은 연꽃의 모양이다. 이란의 건축가 파리부르즈 사바(Fariburz Sahba)가 설계한 이 사원은 아홉 개의 연꽃잎이 삼층으로 겹쳐져, 총 27개의 연꽃잎이 정갈하게 모여 있다. 사원 주위의 아홉 개의 연못은 연꽃을 둘러싼 푸른 잎이다. 아홉이라는 숫자가 반복되는 이유는 바하이에서 9가 통합을 의미하는 숫자이기 때문.


지름 70m, 높이 34.27m의 바하이 사원의 실내에서는 1300명이 함께 앉아 집회를 가질 수 있다. 어떤 신전과도 다른 특징은 신을 묘사하는 조각, 그림, 글씨는 물론이거니와 제단도 없다는 것이다. 방문자들이 제각각의 신에게 기도를 올릴 수 있는 의자만 비치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신분, 종교와 상관없이 자신이 믿는 신에게 기도하고 명상할 수 있다.



철학자의 신격화, 간디 슴리티(Gandhi Smriti)

간디는 인도인들 사이에서는 신에 가까운 존경을 받고 있다.


간디는 인도의 철학자이자 정치적 지도자로, 인도인들에게는 거의 신격화에 가까운 사랑을 받고 있다. 간디에게 ‘위대한 영혼’이라는 의미의 ‘마하트마’라는 호칭을 부여한 것은 인도의 시성 타고르이다. 그는 “참된 사랑이 인도문 어귀에 모습을 드러내자 문이 활짝 열렸다. 모든 망설임은 사라졌다. 진리는 진리를 불러일으켰다. 진리의 힘을 눈에 보이게 한 마하트마를 찬양하라!”고 그를 우러렀다.


1948년 1월 30일, 저녁기도를 하기 위해 정원을 가로지르던 간디는 한 힌두 광신도가 쏜 총을 맞고 쓰러진다. 그때 간디의 나이 79세였다. 그가 죽기 직전 144일간 머물렀던 그의 후원자 비를라의 저택 뜰에는 그가 죽기 전에 걸어갔던 마지막 발자국이 시멘트 모형으로 남아 있다. 그 저택은 현재 ‘간디 슴리티’라는 이름으로 일반인에게 공개되고 있다. 간디의 침대, 그의 둥근 안경과 지팡이, 그가 늘 곁에 두었던 물레와 신던 샌들, 책 몇 권을 볼 수 있다. 그에 관한 영화도 상영한다.


그는 살생을 하지 않는 아힘사의 계율을 지키는 한편, 비폭력을 주장했다. 그는 억압받는 이에게 증오와 이기심을 누르고 정의, 사랑, 자기희생의 정신을 갖기를 요구했는데, 그의 비폭력 정신은 억압자들에게도 효과적으로 작용했다. 인도 각지에 남아있는 간디의 흔적은 그가 아직도 인도인들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지 보여준다.

ⓒ 손수원

인도는 영적인 여행지라는 말을 많이 한다. 인도는 휴식을 위한 곳이 아닌, 무언가 얻기 위해 떠난다는 말도 많이 듣는다. 하지만 굳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떠났던 것은 아니다. 나의 인도 여행 3개월의 첫 시작은 ‘가깝고 싸니까’였다. 당연히 나의 무계획 인도 여행은 좌충우돌 그 자체였다.

인디라간디국제공항. 자정이 지나 비행기에서 내린 나는 고온다습한 공기에 적응할 틈도 없이 공항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걱정해야 할 판이다. 인도에 대한 가이드북에서는 늦은 밤에 공항 밖으로 나오는 것은 위험하니 아예 공항 안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나오는 게 낫다고 적어놨을 정도니 인도가 처음인 여행객에게는 진땀이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럴 때는 그냥 포기하고 공항의 딱딱한 의자에 몸을 맡기거나 용기를 내 바깥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객기로 밖으로 나가면 후회할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이때는 프리페이드(pre-paid) 택시를 이용하는 편이 낫다. 공항 내에 있는 부스에서 미리 택시비를 내고 지정된 택시를 타는 것인데, 이것 또한 사기를 당할 확률이 있지만 그래도 맨몸으로 나가 택시를 잡는 것보다는 안전하고 믿을 만하다(최근에는 공항과 뉴델리 기차역이 지하철로 연결되어 훨씬 이동하기 수월해졌다).

하지만 택시를 무사히 탔다하더라도 안심하긴 이르다. 브레이크 라이닝 타는 냄새가 진동하는 오래된 택시는 차선 무시, 깜빡이 무시, 사이드 무시다. ‘제대로 된’ 운전사를 만나면 한국의 총알택시는 얼마나 얌전하게(?) 운전하는 건지를 깨닫게 될 정도다.

ⓒ 손수원

여행자들의 베이스캠프 파하르간지
델리에서 여행자들이 베이스캠프로 삼는 곳은 뉴델리 기차역 맞은편의 파하르간지(Pahar Ganj)다. 대략 시장 거리 정도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특히 델리의 파하르간지는 인도를 여행하는 세계 각국의 여행자들이 모여드는 ‘여행자 거리’다.
새벽에 도착해 생각지도 않은 거금 400Rs(루피)극 내고 첫 숙소를 잡고 방으로 들어간 순간,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덩그러니 방 한가운데 놓인 침대는 그렇다 치고, 땀범벅이 된 몸을 씻으려 화장실 문을 여니 엄지 손가락만 한 바퀴벌레가 ‘안녕?’ 하고 더듬이를 흔들어댄다. 수세식이라 믿었던 변기는 양동이로 직접 물을 흘려보내야 하고, 석회질이 듬뿍 함유된 수돗물은 누군가가 ‘조금이라도 마시면 폭풍 설사를 경험하게 될 것’ 이라고 겁을 준지라 비좁은 화장실에서 입을 앙 다문 채 큰 맥주잔만 한 양동이로 겨우 땀만 씻어낼 수밖에 없었다.

사람과 릭샤, 소와 개가 한 공간에서 공존하는 델리의 파하르간즈는 인도의 과거와 오늘, 미래까지도 공존하는 장소다. ⓒ 손수원

뜬눈으로 밤을 보내고 거리로 나오자 현지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사람이 끄는 릭샤(인력거)부터 사이클릭샤와 오토릭샤, 거기에 사람과 개, 소가 뒤섞인 풍경은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다. 아침 청소 시간인지 아낙들은 연신 바닥을 쓸어내지만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먼지만 날리게 만들 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노 프라블럼(No problem)’이다. 먼지가 입에 모두 들어가도, 소가 길 한복판에 떡하고 서서 길이 막혀 꿈쩍하지 못해도 그저 ‘노 프라블럼’이다. 역시 인도인들의 무한 긍정의 힘은 대단하다. 길가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이는 인도가 낯선 외국여행객들뿐이다.

1 길에서 사모사와 과일 등을 파는 노점상인. 처음에는 먹을 엄두가 나지 않지만 한번 맛들이면 헤어나올 수 없을 정도로 맛있다. 2 인도의 소는 못먹는 것이 없다. 과일 껍질은 물론, 종이와 비닐까지도 아주 잘 먹는다. 3 카메라를 든 외국인은 인도 아이들에게 더없이 좋은 구경거리이자 놀잇거리여서 카메라만 들이대면 알아서 재밌는 포즈를 척척 연출해준다. ⓒ 손수원
현지 식당에서 카레와 차파티(밀가루로 만든 납작한 빵)로 요기를 하는데, 향신료 냄새가 어찌나 심한지 반도 채 먹지 못했다. 한국에서 먹던 카레와 다를 거라는 것은 각오하고 있었지만 마른입에 한술 떠먹으려니 이것도 고역이다. 앞으로 험난한 여행이 될 거란 예감이 든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있는 나를 보고 인도인 사장은 웃으며 “Are you happy?”라고 묻는다. 나 또한 억지웃음을 지으며 “No problem”이라고 말해주었다. 결국 인도인 사장은 한사코 괜찮다는 나를 위해 카레를 리필해주었다.

무굴제국의 부귀영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올드델리의 붉은 성. 일단 규모에서부터 압도된다. ⓒ 손수원

야무나강이 흐르는 올드델리와 뉴델리
델리는 고대부터 수없이 많은 주인이 바뀌었다. 왕조의 교체는 물론, 이웃나라의 침략으로 힌두교와 이슬람문화가 공존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델리는 크게 올드델리와 뉴델리로 구분할 수 있다. 올드델리는 수천 년에 걸쳐 생긴 도시다. 무굴제국 시절 황제 샤자한은 건축에 대해 굉장한 집착을 보였는데, 올드델리 또한 그의 손을 거치면서 성벽도시로 탈바꿈했다. 반면 뉴델리는 인도를 정복했던 영국에 의해 건설되어 가지런한 시가지와 영국풍의 건물이 인상적이다.

인도에서의 첫 여정은 붉은 성으로 시작하기로 한다. 흔히 ‘랄 킬라(LalQuila. 랄은 붉은, 킬라는 성을 뜻한다)’라고 불리는 붉은 성은 델리에서 도 올드델리에 속하는 곳에 있는데, 아그라의 타지마할을 세운 샤자한이 아그라에서 델리로 수도를 옮기면서 지은 것으로 유명하며 그의 일생에서 마지막으로 세운 성으로 알려져 있다. 붉은 성 입장료는 250Rs. 우리나라 돈으로 약 7000원 정도다. 웬만한 게스트하우스 하루치 숙박비에 맞멎는 금액이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현지인들은 단돈 10Rs란 것이다. 외국인 여행객들의 입장료가 무려 25배나 더 비싼 셈.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지만 어쩌랴 난‘Incredible India’에 들어와 있는 걸….

1 붉은 성으로 들어가는 입구. 테러사건이 종종 일어나는 인도인지라 검색이 철저하다. 2 인도에서 흰 소는 신과 같은 신성한 대접을 받는다. ⓒ 손수원

붉은 성은 200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정복은 하지 않고 침략만 당한 인도의 역사 속에서 붉은 성도 세포이 항쟁 대 많은 부분이 파괴되고 훼손되었다. 비록 영국 식민지 시절에 일부 복원되었다고는 하나 너무도 성의 없이-기술의 부족함일지 모르겠지만- 시멘트를 덕지덕지 발라놓거나 대충 페인트칠을 한 티가 난다. 하지만 그와는 상관없이 붉은 성은 성 자체의 위용과 성 안의 아름다운 건축물만으로도 예술 작품 그 이상의 볼거리를 준다. 무굴의 황제들이 앉아 손님을 맞이했을 디와니카스(Diwan-i-khas)는 비싼 보석으로 치장이 되어있었다.

샤자한은 10년에 걸쳐 이 성을 완성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이 성에서 지내지 못했다. 그가 델리로 수도를 옮기기도 전에 그의 아들 아우랑제브에 의해 왕좌를 빼앗기고 아그라 포트에 감금해버렸기 때문이다. 붉은 성 안은 여느 평범한 공원과 같은 분위기가 난다. 현지인에게는 소풍을 즐길 수 있는 장소이고, 델리의 무더운 날씨에 적응을 하지 못하는 여행객들에게는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는 휴식처가 되어 준다.

붉은 성 맞은편 언덕에 당당한 위용을 뽐내며 서 있는 건물은 인도 최대의 모스크인 자미 마스지드(Jami Masjid)다. 인도는 힌두교의 나라지만 델리는 무슬림의 영향력이 큰 탓에 이렇게 이슬람 사원이 공존한다. 인도 최대의 시장 ‘찬드니촉(Chandni Chowk)’은 그야말로 사람의 바다다. 평일인데도 사람에 치여 앞으로 나가기는커녕 오히려 뒤로 밀려나기 일쑤다. 찻길과 인도가 따로 없는데다 오토릭샤와 오토바이, 자동차는 연방 경적을 울려댄다. 우리나라에서는 욕먹을 짓이지만 인도에서는 경적을 울려주는 것이 예의다. 그래서 자동차나 오토릭샤 뒤를 보
면 으레 ‘Horn Please’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사이드미러조차도 자동차의 옵션인 인도에서는 경적이 운전의 일상인 셈이다.

1 델리의 중심을 유유히 흐르는 야무나강. 이 강은 후에 갠지스강과 합쳐서 바라나시의 타즈마할을 지난다. 2 인도 최대의 시장인 찬드니촉. 사람이 붐비면 ‘10억 인구의 나라’를 몸으로 느낄 수 있다. 3 인도에서 가장 자주 먹게 되는 비리야니. 한국이 볶음밥과 비슷하지만 쌀 자체가 달라 금방 허기가 진다. 4 영국풍 분위기가 물씬 느껴지는 코넛 플레이스는 인도에서도 가장 현대적인 느낌이 나는 곳이다. ⓒ 손수원

찬드니촉에서는 10억 인구란 말이 실감 난다. 남대문 시장, 동대문 시장만 해도 눈이 핑핑 돌아갈 정도인데, 찬드니촉에서는 그런 비교조차되지 않는다. 외국인 여행객으로서 물건 하나 사기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게 느껴질 정도다. 사람의 물결은 그렇다 치고 장사꾼의 호객 행위는 기가 찰 정도다. 50Rs도 안 되는 물건을 두고 300Rs부터 불러 크게 선심 쓴다는 표정으로 150Rs를 부른다. 이럴 때는 미련 없이 뒤돌아서면 그만이다. 5초도 안 되어 따라와선 “Your last price?”를 부르기 때문이다. 당연히 처음 가격보다도 싼 40Rs를 불러도 거래는 이뤄진다. 이것이 바로 인도의 ‘local price’다. 이런 흥정 과정이 처음에는 무척 짜증나고 기분 상하지만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인도인들과 흥정하기 만큼 재미있는 일도 없을 정도다. 그런 와중에도 인도인들은 기분 상한 표정을 짓지 않는다. 비싸게 팔면 좋은 것이고 자기가 손해를 보더라도 그것은 신의 뜻이기 때문이다.

정신없는 올드델리와는 달리 뉴델리 쪽은 비교적 정리가 잘 된 편이다. 로터리가 여기저기 뒤섞여 신호등도 없는 도로는 여전히 눈을 핑핑 돌게 만들지만 코넛 플레이스(Connaught Place)나 인디아 게이트 쪽으로 발길을 돌리면 현대를 수용한 인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맥도널드와 커피데이 등 외식 체인점은 물론, 리복, 나이키, 아디다스 매장도 곳곳에 들어와 있다. 나름 스카이라인을 형성한 현대적인 건물들도 올드델리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심지어 이곳엔 지하철역도 들어와 있고, 지하상가도 있으니 여긴 서울과 별반 다를 것이 없을 정도다. 그래서 대부분의 여행객들은 일부러 시간을 내어 델리를 둘러보지 않는다. 흔히 골든 트라이앵글(델리-아그라-자이푸르)이라고 불리는 단기간 인도 여행의 시작점이자 끝이기에 남는 시간 동안 둘러보면 그만인곳이다. 더구나 3개월 정도의 장기간 여행자라면 델리는 최소 3~4번은 들러야 하는 곳이다.

인도의 첫 여정인 델리는 이렇게 인도의 사람들에게 적응하는 과정이다. 그들이 입에 달고 다니는 ‘No problem’의 뜻을 1/10이라도 이해한다면 더 이상 인도는 ‘충격과 공포의 나라’가 아닌 ‘가장 자유롭고 편안한 나라’로 여행자의 마음속으로 들어온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이형수의 포토에세이

타는 쪽은 가볍게 한 사람만 달랑 타는 경우가 거의 없다. 무게를 달아서 요금을 책정하는 기준 및 시스템 같은 것도 없다. ⓒ 이형수 (※ 사진을 클릭하시면 크게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시티오브조이'라고 하면, 누구나 알 것이라 여겼는데, 요즘 젊은 세대들 중에는 모르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1992년에 영화로 만들어진 작품이라서, 이미 20년이나 가까이 된 영화인걸 생각하면, 모른다고 해도 그리 이상할 일도 아닌 것 같다. 그래도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 알고있을 만한 영화가 바로 '시티오브조이'다. 미션과 킬링필드 등의 수작들로 이미 아카데미상을 탔었던 롤랑조페가 메가폰을 잡았던 영화라고 하면 도움이 될 듯. 나는 이 영화를 한참 후인 30살이 되기 직전에 봤다. 그러나 학창시절, 길에 보았던 인상적인 포스터는 그 전부터 머리 속에 남아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시티오브 조이만큼 내게 인도에 대해서 잘 가르쳐준 영화나 책은 없었다. 

하지만 영화가 나왔을 당시엔, 영화 내용은 고사하고, 인도란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중동으로 가는 길목의 거대한 나라, '인더스 문명의 태고지'라고 들어만 봤을 뿐, 얼마나 깊은 역사를 가진 나라인지… 얼마나 많은 사람과 많은 종교, 많은 문화가 공존하는 나라인지 조차 전혀 알지 못했다. 국제화가 급속하게 이루어진 지금도 밸리댄스라든지, 요가 등 수출용으로 상업화된 인도의 문화에서부터 교과서에 나오는 역사,  그리고 관광 책자에 나오는 타지마할의 아름다운 사진을 통해서 사람들은 인도를 피상적으로 접하지 않는가.

테레사 수녀님이 잠드신 Mother house. ⓒ 이형수

어느 나라나 그렇겠지만, 인도는 가보기 전에는 이야기 하기가 특히나 힘든 나라다.
마음과 영혼으로 느껴야 되는 나라라고도 얘기한다. 그런 인도로 가는 이는 누구나, 통상적으로 인도의 3대 메가시티 중 하나에 착륙해서 가게 되는데, 그 메가시티란 델리, 뭄바이, 그리고 꼴까따(구,캘커타)다. 

이 씨티오브조이의 배경이 바로 그 사람 많은 메가시티 중에서 제일 지저분하고 가난한 도시로 알려진 꼴까따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 꼴까따는 테레사 수녀가 말기 환자(나병 환자)를 위한 요양소를 비롯한 많은 선행을 한 곳이기도 하다. 

영화에서는 바로 이 꼴까따가 절망과 희망이 공존하는 도시로 비춰진다. 가뭄이 흉년을 불러온 비하르(bihar)지방의 평범한 농부 하사리 팔(Hasari Pal)이 가난과 소작농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아내와 아들둘 딸하나를 데리고 무작정 웨스트 벵갈 최대의 도시인 꼴까따로 향한다. 하지만 그 꼴까따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성공의 꿈이 아니라, 그들과 똑같은 처지의 수많은 빈민과 사기꾼, 가진자가 부리는 권력의 횡포 등. 그들이 순박한 시골에서 보지 못했던 인간들의 온갖 추한 모습과 삶의 치열함이었다. 그런 잔인한 현실에 부딪혀 갈 곳을 잃고, 길 바닥에서 한 가족이 여러 밤을 지새는 동안, 하사리가 어렵게 얻은 직업이 바로 릭샤왈라.

※ 릭샤왈라 : 인력거 또는 영화에서 human horse(인간말)이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미국에서 의사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무작정 인도로 온 '닥터 맥스'분의 패트릭스웨이지가 인력거인 릭샤뒤에서 환호하는 모습. 릭샤왈라인 하사리 팔과 닥터 맥스의 우정을 그리는 장면. ⓒ 이형수
하사리는 간신히 얻은 직업에 뛸듯이 기뻐하지만, 모든 종류의 운송 수단이 개미처럼 얽힌 복잡한 시내를 맨발로 달리는 일은. 기술, 지식 아무것도 제시할 것이 없는 사람이 맨몸으로 할 수 있는 가장 힘든 직업 중 하나이다. 

언제 사고가 날지 모르는 거리 위를 쉴새 없이 달려야 하는 열악한 환경 속에 살아야 하는 것이다. 영화에서 이 릭샤는 주변 빈민들을 불러모으는 거대한 메기의 입 같은 꼴까따의 치열한 삶, 그리고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꺼지지 않는 에너지 전체를 상징하는 심볼이 된다. 주인공인 하사리는 매일 뼈가 쑤시는 고통과 결핵에 걸리는 와중에서도 릭샤로 버는 푼돈을 모아, 딸인 암리타를 시집 보내겠다는 희망으로 살아간다. 

※ 원판 책을 읽어보면, 당시 웨스트벵갈과 비하르 지방에서는 딸을 시집보내기 위해서는 Dowry(결혼 지참금)가 필요한데, 딸을 시집 못 보내는 것만큼 아버지로써 불명예는 없다고 한다.

사실, 이 시티오브조이는 단순히, 릭샤왈라(인력거꾼)과 닥터맥스라는 사람의 드라마 이상의 가치가 있다. 영화에서는 극적인 장면만을 하이라이트 하기 위해, 책 내용중 많은 부분이 생략되어 있지만, 원판인 책은 마치 인도를 소개하는 교과서가 따로 필요 없을만큼 많은 문화가 맛있는 양념처럼 가미되어있다. 저자인 도미닉 라피에르는  십수년동안 꼴까따와 인도에서의 경험과 릭샤꾼들과의 인터뷰로, 이 책을 완성했다. 하사리 팔이나, 그 주변인물들이 소설 속 인물이지만, 그 책의 스토리는 허구가 아니라, 그가 보고, 경험했던 인도인들의 삶 그 자체였다.

영화도 수작이지만, 원판인 책은 영화에서 언급되지 않은 세세하고 가슴 짠한 얘기들이 훨씬 더 많은 수작이므로, 한번씩 다 읽어보길 권유한다.

꼴까따에 와서 처음 찍은 사진, 빈 릭샤를 끄는 릭샤왈라가 보인다. ⓒ 이형수
이 훌륭한 작품의 심볼인 이 릭샤(인력거)를 아직도 꼴까따에서는 만날수 있다.

여행자거리인 Sudder St.와 주변 시장에서 특히나 많이 볼 수 있는데, 현재 관광상품이 아닌 생계형 인력거꾼은 이곳 꼴까따만이 유일하게 남아있다고 한다. 사실 꼴까따에서는 교통체증으로 인력거의 수를 줄이고 있다.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풍경이 될지 모를 일이다.

비오는 날 sudder st의 릭샤, 릭샤는 그들에게 우산이며 집이다. ⓒ 이형수
여행자들 중에는 인력거를 타지 않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 그 이유는 일단 가격흥정을 해야되고, 그 보다 큰 이유는 인력거 꾼이 대개 깡마르고, 늙은 탓에, 죄책감을 느끼고, 불편해 하는 탓이다. 하지만, 인력거꾼에게는 자신의 뒤에 타는 손님이 가벼운 어린 아이든, 뚱뚱하든, 자신의 일에 충실할 뿐이며, 그 일로 내일 아침 밥벌이를 할 수 있다면, 당신이 몇 kg이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깡마른 인력거꾼이 힘든 일을 하는게 안타깝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당신이 그에게 다른 직업을 만들어 줄 능력이 없다면, 인력거를 타는게 그를 도와주는 일이고 그들의 직업을 존중해주는 일이 될 것 이다.

사실 인도에는 그날 벌지 못하면, 말 그대로 내일의 먹을거리를 걱정해야 되는 사람이 많다. 많은 릭샤왈라들도 그런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그마저도 그들이 건강하게 뛸 수 있을때까지라는 것.

꼴까따의 도로는 차와 릭샤,오토바이뿐아니라 소, 염소 등의 통로이기도 하다. ⓒ 이형수
흥정의 경우도, 릭샤왈라들이 관광객 상대로 바가지를 치기도 하지만, 그건 인도 어디서나 있는 일이며, 인도를 편안히 여행하려면 오히려, 흥정에 재미를 느끼고, 익숙해지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 심지어 영화에서도, 순진한 농부였던 하사리마저, 딸의 사리를 살 돈을 모으기 위해 손님의 거스름 돈을 떼먹는 장면이 나온다.

인도에서는 단 몇 푼의 바가지에 열을 올리기 보단, 그 경험으로 우리 일상에서는 느껴보지 못하는 그들 만의 삶 속에서 볼 수 있는 매순간 치열함을 느껴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외모로 보기엔, 노인정에 있어야 할 분들이 릭샤를 끄시기도 한다. 하지만 고생을 해서 그런지 외모로 보이는 것 보다는 나이가 대부분 적다. ⓒ 이형수
영화에서는 인도에서 가장 가난하다고 하는 Bihar지방의 사람들이 주로 꼴까따에서 릭샤왈라(인력거꾼)을 하고 있지만, 최근에는 이웃 나라인 방글라데시에서도 와서 릭샤를 끈다고 한다. 책에서처럼 아직도, 릭샤를 독점하고 있는 부자 몇몇에게 버는 돈의 절반 이상을 높은 대여료로 지급해야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재도 그들의 힘든 삶이 릭샤를 끌어서 개선될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 이형수

꼴까따에 온 이후, 나는 며칠동안 릭샤에 넋을 잃고 있었다. 저 큰 바퀴 위로 어떤 사연을 짊어지고, 달리고 있을까? 뒤에 탄 승객이나, 짐이 아무리 무거운들, 눈에 보이지 않는 그들의 삶의 굴레와 사연들만큼 무겁지는 않을 것 같았다. 저 사람들은 가족이 있을까? 영화처럼 가족을 홀로 먹여살리고 있을까? 몸에 병은 없을까? 잠은 어디에서 잘까? 

(좌) 릭샤는 비를 피하게 해주는 쉘터고, 씨에스타를 위한 침대이기도 하다. (우) 릭샤왈라에게 다리를 다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나쁜 소식이다. 다리를 다쳐, 일을 못하게 된 릭샤왈라와 그를 대신해서 일하는 친구. ⓒ 이형수
사진을 찍으면서, 저 사람들의 깡마르고 단단한 몸,굳은 표정과 터질 것 같은 다리의 핏줄을 내가 나중에라도 다시 보면, 적어도 내일 아침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내 생활에 감사하며, 주위에 힘든 사람들을 다시 한번 돌아보는 계기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얼마나 이 릭샤왈라를 볼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이 가장 기초적이며 원시적인 운송수단이 아직도 굴러다닌다는 것은, 단순히 영화에 나왔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운송수단이 가지지 못하는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근거리를 택시보다 싸고, 빠르게 갈 수 있다는 장점뿐아니라, 거친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이들의 치열한 삶 속에서 묻어나는 인간미, 정감 때문일 것이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부처님의 땅에서 만난 인도인 동생 Anup

수자타 마을에서 보이는 전정각산의 모습. ⓒ 이형수 ※사진을 클릭하시면 큰 이미지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보드가야에 도착했을때는 10월 초순, 2개월간 내 몸이 이미 인도의 무더위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보드가야에서 만난 더위는 인도 여행의 어느때보다 참을 수 없을만큼 힘들었다. 10분마다 물을 계속 마셔주지 않으면 갈증을 느낄 정도였다.

보드가야 옆을 흐르는 큰 강은 무릎에도 차지 않을만큼 차츰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보드가야 (또는 부다가야라고도 한다)는 전 세계 불자들의 최고의 성지이다. 후에 부처가 된 싯다르타왕자가, 보리수 나무 아래서 마침내 해탈(Nirvana)에 이르렀던 바로 그 장소이기 때문이다.

마하보디 사원이라고 불리는 이 성지에 가면 아주 커다란 보리수(Bodhi tree)가 있다. 부처가 열반을 할 당시 보리수나무는 불교를 반대하던 왕에 의해 잘려져 나갔었다. 지금 성지에 자리잡은 보리수는 스리랑카의 한 공주가 원래 보리수를 스리랑카에 일부 옮겨다 키웠다가 그 후손을 다시 가져다 놓은 것이라고 한다. 매일 전세계의 수많은 승려와 불자들이 이 곳을 찾아, 절을 하고, 경전을 읽고, 명상을 한다.

(왼쪽부터) 마하보디 사원의 마하보디 대탑의 모습. 경전을 외고 있는 태국에서 온 비구니. 보디 사원 안에서 수련을 하고 있는 승려. ⓒ 이형수
우리나라에도 깊은 뿌리를 두고 있는 불교의 최초 발원지인 인도에서, 가장 성스러운 성지인 보드가야를 지나칠 수는 없었다. 당초에 보드가야에서 부처의 고뇌와 가르침을 조금이라도 느껴보려 했지만, 나는 불자도 아니었을 뿐더러, 10월 건기의 보드가야는 도착한 직후부터 나의 체력과 인내심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나는 당시 미얀마 스님들이 머무르는 수도원인 Vihara라고 하는 곳에 머물렀는데, 아침 겸 점심은 주로 Vihara앞에 있는 너저분한 식당에서 해결하곤 했다. 다시 생각해도 보드가야의 주변식당은 다른 인도지방에 비해 형편없는 수준으로 기억되지만, 그 더위에 어떤 음식이 맛있었으랴?

한 날은, 맛없는 고무 같은 오믈렛을 질겅질겅 씹고 있는데, 옆 테이블의 한 인도청년이 일본말로 인사를 해왔다. 일본인처럼 보이나 보지? 그때까지 방문했던 여느 다른 인도지방의 젊은 애들처럼, ‘뭐 한건 해먹을건 없나’ 찔러볼 수도 있고, 그냥 심심하니 말장난이나 하자는 식 일수도 있었다.

보드가야 마을 풍경. ⓒ 이형수 
어떤 쪽이든, 덥고 짜증나기는 마찬가지라 퉁명스럽게, 일본인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니 이젠 한국말로 인사를 한다. 실실 웃으며, 한국말까지 하니, 왠지 더 사기꾼 같아 보였다.

몇번 말을 안 받아주다가, 계속 옆에서 웃으며 말을 거는데, 무시할 수는 없어, 한 두번 못내 말을 받아주었다. 이름은 Anup, 나이는 한 20대 초반으로 보이고, 하는일은 현재는 무직, 이전에는 어떤 불교방송의 리포터를 맡았다고 한다. 몇 마디 주고받더니, 대뜸 자기 마을을 보여줄 테니 따라 가자고 한다. 더위 때문에 어떤 것도 흥미가 동하지 않는 시기라, 이런들 어떠랴 하는 마음으로 그를 따라 나섰다.

Anup의 집은 수자타(Sujata)라는 마을 안에 있었다. 그는 마을과 주변 사원들을 두루 보여주며, 자신이 아는 흥미로운 부처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었다.

동굴 안에서 먹지 않고, 6년간의 고행을 마친 피골이 상접한 싯다르타에게 맨 처음 우유죽을 대접한 여인인 수자타 이야기부터 재미로 사람의 손가락을 잘라서 목에 걸고 다니던 악인에게 부처가 풀잎을 땐 후, 다시 붙여보라는 얘기를 들려준 후(때어진 풀잎도 다시 붙이지 못하면서, 하물며 사람의 손가락을 어떻게 뗄 수 있냐는 의미) 그 악인이 부처의 제자가 되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풀잎을 흐르는 강에 놓으니, 풀잎이 강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갔던 이야기까지 이전에는 모르고 있었던 이야기들을 하나 둘씩 해주었다.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그 이야기의 현장에 두발로 서있다고 생각하니, 옛날 속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가는듯한 착각도 들었다.

전정각산 주변 풍경, 아이들은 학교에 가야할 나이지만, 전정각산의 고행동굴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고 있었다. ⓒ 이형수 
나에게 조금은 과도한 친절을 베풀어주던 Anup과는 금새 친해지게 되었고, 그와 대화를 하면서, 정직한 사람을 의심했던 내가 부끄럽게 느껴졌다. 다음 날도 나는 Anup의 오토바이로, 부처의 고행 경로 한군데를 방문했다. 바로 유명한 전정각산 싯다르타의 고행동굴이었다. 

Anup이 이곳 저곳 보여주긴 했지만, Anup과 더 친해지게 된 계기는 따로 있었다. Anup은 나와 지낸 3일째, 그가 추진하고 있는 조그만 사업을 조심스레 보여주었다. 그것은 고아와 가난한 마을아이들을 위한 학교.

연령대가 다른 아이들이 시멘트 바닥에 앉아서 열심히 수업을 듣는 모습. ⓒ 이형수 
손수 벽돌과 시멘트를 사와서 논 한가운데, 조그만 건물을 지었고, 그 안에 두 칸을 만들어 선생님의 사무실과 교실을 만들었다. 학교라고 할 수조차 없을 만큼, 허름한, 창문도 없고, 비나 겨우 피할 수 있는 공간이었지만, 내가 그 교실을 방문한 그날 아침, 그 아이들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는 이게 학교라는 사실을 증명하는데 충분했다. 아침에 건물에 들어가니, Anup이 개인적으로 돈을 겨우 모아 고용한 과외 선생님 한분이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나와 Anup이 들어서니 아이들이 일제히 일어나, “Good morning Sir!”라고 외쳤다. 당황한 마음에 급히 애들을 앉히고 보니, 그 조그만 공간 안에 20명이 넘는 아이들이 옹기종기 앉아 있었다. 나이가 4살 남짓한 아이부터, 16살쯤 되는 아이까지 한 교실에서 같이 배우고 있었다. 선생님이 4살 또래 애들을 가르칠때 그 나머지 연령대 아이들은 숙제를 혼자 푸는 식이었다.

(좌) Anup이 싼 월급을 주고 고용한 비정규 선생님, 전과목을 가르친다. 영어만 봤을때 문법을 많이 틀리게 가르쳐주고 있었다. (우) 숙제를 안해온 죄로 벌을 서는 모습. 쪼그려서 고개를 숙인 자세로 벌을 받는다. 벌을 서는 모습이 이채롭다. ⓒ 이형수
이상하게도 ‘이런 수업이 과연 돌아갈까?’ 하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만약 그런 생각이 들었었다면, ‘이런 건물에 아이들이 공부하러 올까?’라는 생각부터 먼저 들었어야 했을 것이다.

그렇게 교실을 방문한 첫날, 나는 일일교사가 되었다. 눈에 넣어도 아플 것 같지 않은 아이들이 알파벳이나 산수 숙제를 가지고 와서 힌디도 못하는 내게 검사를 맡으면, 틀린 것이 있는지 체크하고 사인을 해주는 역할을 했다.

학교도 가지않고, 주변 웅덩이에서 고기를 잡는 마을 아이들 모습. ⓒ 이형수 
부처의 역사속 마을인 수자타 마을에는 불행히도,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이 반을 넘어선다. 인도에서 가장 못사는 주(州)인 비하르주의 어떤 마을이나 마찬가지다.
우리처럼 초등교육이 의무교육이 아닌 인도에는 글 한자라도 배우려면 돈을 내고 학교를 가야한다. 불교의 최고 성지이며, 매년 수많은 불교 순례자가 오는 그 유명한 보드가야의 바로 옆 마을은 이렇게 가난 때문에 교육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수없이 많다. 여담이지만, 부처가 태어난 불교 성지인 네팔의 룸비니도 주변 마을이 가난하며, 교육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다.

아이들의 해맑은 모습과 작은 칠판. 닳아 거의 없어진 분필로 알파벳을 적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 이형수 
누군가는 이런 불쌍한 아이들을 도와야 했지만 그렇게 많은 순례자와 지역 유지들,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고 한다. 농사꾼 출신이었던 Anup라는 20대 청년이 그가 불교방송 리포터로 모은 돈과, 여기저기 관광객들이 돌아가면서 후원해주던 자투리 돈을 모아 학교를 어렵게 꾸려나가고 있던 것이다. Anup은 또 부모가 아프거나, 내버리듯 한 아이들을 주변 마을에서 데려와, 가족처럼 키우고 있었다. 결혼도 안한 청년이 돌봐주는 아이가 6명이나 되었다. 하지만 그의 큰 대의와는 달리, 사정은 좋지 않았다. 내가 방문한 날도 개인적으로 고용한 선생님이 따로 Anup을 불러 무언가를 심각하게 이야기 하였다. 나중에 Anup에게 무슨 일인지 물어보니, 선생님에게 줄 월급이 3달치가 밀려있다고 했다.

또, 어렵게 건물 옆에 아이들의 식수를 위해 설치한 수도도 어느 누군가가 밤에 뜯어갔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보드가야에서 나와 Anup이 같이 밥을 먹고 어울려 다닐때는, 주변 청년들이 질투심에 그를 사기꾼으로 모함하기도 했다. 이런 환경 속에서도 그는 그만의 학교를 힘들게 꾸려나가고 있을 것이다.

두르가푸자때는 저렇게 조금 촌스러운 인형극을 곳곳에서 한다. 내용은 두르가 여신이 악마를 처치하는 내용. 인도인 조차도 매년 보는 내용이라 흥미는 없지만, 신이 자신들을 악마로부터 보호해준다는 믿음으로 본다고 한다. ⓒ 이형수 
한편, 내가 있을 무렵에는 두르가푸자(Durga Puja)라는 축제가 한창이었다. Anup과 큰 도시인 Patna까지 가서, 인도 영화도 보고, 두르가푸자의 축제 인파 속에서 즐기기도 했다. 두르가푸자는 두르가라는 여신이 악마를 처치한걸 기리는 날인데, 두르가푸자 축제 때는 학교도 휴강이라, Anup과 함께 Patna에 다녀온 다음 날에는, Anup이 돌보고 있는 아이들을 데리고, 마을 축제를 다니며, 구경도 시켜주고, 맛난 것도 사주었다.

축제일이라, 때때옷으로 한껏 멋을 낸 Anup의 아이들. ⓒ 이형수 
애들과 즐겁게 놀아준 그 뒷날, 나는 내 여행을 통틀어 가장 지독한 장염에 걸렸다. 처음에는 그냥 설사이려니 했지만, 하루에도 20번이 넘게 화장실을 들락날락 거렸다. 아마도 축제때 먹었던 가내제조 아이스크림이 문제였던 것 같다.(인도사람들은 인도 물에 내성이 있지만, 나 같은 여행객들은 토종 바이러스나 균에 대한 항체가 없다) 3일간 그렇게 시름시름 앓다가, Anup의 권유로 병원에 가게 되었다. 

병원에서 독한 항생제를 맞는 몇 시간 동안, Anup이 나를 지켜주었다. 치료가 끝난 후 의사가 나에게 현지인의 몇배가 넘는 바가지 요금을 매겼다. 다행이도 Anup이 의사에 항의하여 바가지 요금을 받아낼 수 있게 도와주었다. (삐걱거리는 녹슨 철제 간이 침대에 누워 링거를 맞는데, 침대 비용을 숙소 비용보다 비싸게 받았다. 링거만 꼽아줬는데도 간호 비용이라는 명목으로 몇 만원을 청구하였다.)

떠나기 전날, Anup과 아이들과 함께. ⓒ 이형수 
당초 보드가야에 올때는 약 3~4일정도 머물 생각이었었지만, Anup과 그의 가족이 된 고아들과 잊지 못할 추억을 쌓으며 10일정도 머물렀다. Anup과는 아직도 brother라고 부르며 서로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 인도를 여행하며 친구가 될만한 인도인은 심심치않게 만나곤 했지만, 친구이상 마치 가족처럼 서로에게 애틋한 정이 있었던 사람은 Anup이 유일하다.

다시 인도를 돌아갈 수 있는 날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인도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가게될 곳이 Anup의 집이라는 사실은 언제가 되었든 변함 없을 것이다. 그때까지 나의 인도인 동생 Anup의 사랑의 학교가 번창하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칠까한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인도에 오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른다는 바라나시(Varanasi). 바라나시에 무엇이 있기에 그 많은 사람은 바라나시에 가는가?

인도 바라나시에 있는 가장 큰 화장터. ⓒ 이형수

어떤 사람들은 바라나시를 ‘삶과 죽음의 경계’, ‘영혼의 쉼터’와 같은 거창한 이야기들을 한다. 하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은 그보다는 실체적인 것들을 찾아간다.

그 실체적인 것 중에서 가장 먼저 찾는 것이 바로 화장터다. 어느 문화에서도 화장터를 일반사람에게 공개하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이곳은 매일 수 없이 시체를 태운 재와 연기를 볼 수 있다. 가까이 다가가니 확연히 상황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본다고 그다지 흥미로운 일은 아니다.

인도 바라나시 Ghat의 낮 풍경. ⓒ 이형수

인도 곳곳에 강을 옆에 둔 화장터가 있긴 하지만, 가장 성스러운 갠지스 강(Ganges)의 화장터와는 감히 규모나 비용, 인기에서 비교조차 할 수 없다. 매년 약 10만 명 이상의 시신이 갠지스 강(강가 강)의 화장터에 실려온다. 화장터로 가는 좁은 골목에서는 “Ram nam satya hai”라고 외치며 시신을 든 남성들을 몇 분 간격으로 계속 볼 수 있다. 

* Ram nam satya hai : ‘Ram의 이름은 진실이다.’라는 뜻인데, 여기서 Ram은 라마 신을 말한다. 이 말은 ‘죽은 사람은 라마신의 진실(숨)이 없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매일 밤,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식을 한다. 의식을 보기 위해, 많은 인도인과 여행자들이 모인다. ⓒ 이형수
갠지스 강(강가 강)에서 화장을 이렇게 헌신적으로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힌두교도 불교와 마찬가지로 윤회 사상이 있다. 가장 성스러운 강에서 사후를 맞는 것이 다음 세상에 나올 때 도움이 되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이런 성스러운 갠지스 강(강가 강)의 생성에는 여러 설이 있지만, 주민들은 힌두교에서 가장 추앙받는 신 중의 하나인 시바(시와) 신이 전 세계를 집어삼킬 만한 큰물이 떨어지는 것을 자신의 머리로 받아 강으로 흐르게 했다는 설을 가장 많이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새벽녘, 우리를 배로 안내하는 소년 ⓒ 이형수
화장터에 가보면, 화장되는 장소도 사회 계급에 따라, 돈의 여유에 따라 다르며 태우는 나무의 종류도 다르다. 가장 비싼 땔감으로는 Sandal Wood(백단향) 종류가 있으며 부자들은 땔감으로 몇 백만 원이 들어간다고 했다. 화장 후, 아들이나 친지가 시체의 가슴뼈를 모아서 배를 타고 갠지스 강(강가 강)에 던진다. 

갠지스 강(강가 강)은 종교적으로는 성스러울지는 몰라도, 과학적으로는 아주 오염되어 있다. 책에서는 하천의 대장균 검출 한계치의 30배가 넘는 대장균이 살고 있다고 한다. 화장된 시체와 화장되지 않은 인간의 시체(아이들, 독사에 물린 사람, 임산부, 사두, 나병환자는 순수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화장하지 않는다)와 동물의 시체가 강으로 들어오고, 하수구도 강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건기에는 유속도 느려진다. 침전물들은 유속이 느린 곳에 퇴적된다.

성스러운 목욕을 하는 인도인들. 화장터와 Ghat의 반대편 강가에 혹자는 시체가 많이 몰린다고 한다. 배를 타고 강 반대편을 향해 출발한지 5분도 채 안 되어, 보트의 줄에 걸려 떠내려가지 않는 한 남자의 시체를 봤다. ⓒ 이형수

이런 곳에서 매일 목욕을 하고, 그 물을 마시는 광경이 타지인에게는 신기하다 못 해, 존경스럽기도 하다. 그들만의 성스러운 의식과 행동들이 바라나시를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과학적으로는 오염되었지만, 종교적으로는 순수한 이곳… 모순적인 매력을 지닌 성스러운 이 젖줄을 보기 위해 수 많은 순례자가 찾으며, 축제나 성스러운 기간에는 그 수가 가히 엄청나다고 한다. 이런 바라나시의 풍경이 인터넷에 소개되어 있겠지만, 나의 눈을 통해 본 바라나시의 풍경을 소개한다.

바라나시(Varanasi)의 가장 신비로운 시간은 아침이다. 갠지스 강(강가 강)의 물안개가 신비스럽게 수면을 감돈다. 순례자들은 아침 일찍 목욕재계하고, 목욕이 끝난 후 명상을 하는 순례자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여행객이나 관광객들은 아침 일찍 배를 빌려, 이런 광경을 강 중앙에서 바라보곤 한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길 위의 교실] 현세의 끝에서 - 모순적인 매력이 있는 '인도 바라나시'

사진으로 보는 Varanasi는 매력적인 장소지만, 이상하게도 Varanasi에서 며칠 되지 않아 지쳐버렸다. 매일같이 들어와서, 아침저녁마다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는 관광객들과 마리화나를 팔려고 끈질기게 붙는 젊은 인도 애들, 인도의 여느 도시나 마찬가지로 인파로 북적대는 바라나시에서 잠시 방향성을 잃었다고나 할까?

매일 같은 광경 속에서 특별히 할 일을 찾지 못한 나는 3일째부터는 강가에서 멍하니 강을 바라다보는 일이 잦아졌다. 때로는 시체가 떠내려오는 것도 보고, 때로는 배를 빌려 저 멀리 강 건너편에 혼자 노를 저어 가볼까 생각도 해봤다. 여행하다가 한 곳에 며칠 있게 되면, 그래도 마음에 드는 장소가 생기게 되고, 다른 곳보다 그곳에 자주 가게 되곤 하는데. Varanasi에도 그런 곳이 있었다. 지금은 그 Ghat이름이 생각이 나지 않지만, 사람들의 인적이 뜸했던 곳이었던 것만은 기억한다.

며칠 그 Ghat에서 앉아서 강을 쳐다보니, 아는 사람이 한 명 생겼다.

처음 만난을 때 Babu, 연주해달라는 부탁을 하지도 않았지만, 연주를 선보여 주었다. ⓒ 이형수
빠뿌의 딸 무갈 ⓒ 이형수
그 사람도 나만큼 외로이 앉아서 강가를 멍하니 쳐다보곤 했다. 그 사람 앞에서는 아들로 보이는 4~5살 된 아이가 여기저기 혼자서 뛰놀곤 했다. 이 남자의 이름은 빠뿌(Babu), 멋들어지게 기른 콧수염에, 여태껏 내가 보지 못한 악기를 하나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아쟁처럼 키는 현악기인데, 빠뿌 말로는 라자스탄 악기인 ‘라븐카’라 했다.
라자스탄이라면, 인도의 서쪽인데, 혹시 거기서 왔느냐고 하니, 라자스탄州 자이푸르 변두리 시골에 자기네 집이 있다며, 가족사진을 꺼내 보여준다. 

빠뿌와 빠뿌의 딸 무갈, 그리고 동네꼬마 ⓒ 이형수
사진 속에는 무슨 동화처럼 흐릿한 초점에 아리따운 아내 옆에, 전통복장을 말끔히 차려입은 빠뿌가 라븐카를 들고, 호수를 배경으로 앉아 있다. 아이들 사진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사랑스러운 가족을 두고 라자스탄을 왜 떠났느냐고 물어봤다.

그의 얘기인즉, 라자스탄에서 만난 서양 여행객이 있었는데, 자신에게 음악을 배우다, 라자스탄 다음에는 바라나시로 갈 계획이니, 바라나시에서 다시 음악을 가르쳐달라고 했단다. 물론 교습비를 내고 말이다. 빠뿌에게는 그 교습비가 꽤 괜찮은 수입이었던 것 같다. 황당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그 말을 믿고, 빠뿌는 바라나시로 왔고, 하지만 바라나시로 온지 2주가 지났는데도 아직 그를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전화도 없이 어떤 식으로 그를 만나려고 했는지 몰라도, 그 여행객에 대한 믿음이 컸던 만큼 실망도 커 보였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한 주 전부터 시름시름 아파서, 돈벌이도 못하고, 낮 동안에 거의 Ghat에서 누워 지내는 일이 많았다. 그나마, 근처 외국에서 운영하는 무료 진료소가 있어서, 진통제류라도 조금 받아와서 먹고 있었다.

말이 통하지 않아 늘 혼자 놀아야 했던 무갈. ⓒ 이형수
하루는 지나가는 관광객 중에 독일에서 온 간호사가 있어서, 빠뿌를 좀 도와달라고 했더니, “의사를 만나보라”는 뻔한 이야기만 하고 횅하니 가버린다.
의사에게 가볼 만한 처지로 보이는지? 괜히 내가 화가 났었다.

빠뿌와 나는 거의 매일 만났고, 빠뿌의 딸(처음에는 아들인 줄만 알았다)인 무갈과도 금세 친해져, 무갈을 데리고 여기저기 구경도 다니고, 배도 태워주곤 했다. 

아픈 모습의 Babu ⓒ 이형수
아버지인 빠뿌가 아프니, 무갈은 늘 혼자 놀아야 했고, 그것도 라자스탄 말이 바라나시에서 쓰는 말과 달라, 친구도 만들기 어려웠다. 매일 같은 옷에다, 아직 뒷 처리도 아버지가 주로 해주는데, 며칠이 지나니 옷에서 냄새도 나고, 씻겨주고 싶은 맘이 한결같았으나, 남의 딸을 내가 씻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버지가 아픈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래도 무갈은 해맑게 까르르 웃으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빠뿌와 내가 짜이를 마시면, 어느새 금세 나타나서 자기 것도 시켜서 배달해온다.

빠뿌와 만나는 동안 만 31번째 생일을 맞았는데, 빠뿌가 내 생일 축하곡을 직접 연주해주었다. 

내 생일날 곡을 연주해준 Babu. ⓒ이형수
매일 몇 잔이고 마시던 설탕과 같던 짜이. ⓒ 이형수
빠뿌, 무갈과 며칠간 계속 지냈지만, 내가 바라나시를 떠나야 하는 날이 하루하루 다가왔다. 마음 같아서는 더 있고 싶었지만, 여행이 1년도 넘어간 시점에 이별과 만남은 싫어도 받아들여야 하는 운명의 고리같이 느껴졌다. 

떠나기 전, 빠뿌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래도 뭐라도 한줌 쥐어주는 것 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늘 설탕이 반인 짜이로 배를 채우는 무갈이 안쓰러워 저녁이라도 같이 한끼 사서 먹이라고, 돈을 좀 쥐어줬다. 다음 날 아침에 물어보니, 그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던 협잡꾼한테 사모사(인도식 튀김만두)를 좀 사오라고 시켰는데, 그 길로 날라버렸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그 인간을 같이 보곤 했는데 그날 이후로 볼 수 없었다.

잘 못 먹는 무갈이 안타까워 무갈을 데리고, 근처 한국식당에 가서, 애들이 좋아하는 치킨가스를 사서 먹였더니, 너무 잘 먹었다. 한번은 돈 없는 빠뿌에게 비싼 치킨가스를 사달라고 할까봐, 그 집을 지나쳤더니, 온 동네가 떠나가라고 울어 재꼈다. 할 수 없이 또 사줘야만 했다.

떠나는 날 밤, 내 손에 장난감 헤나로 문양을 그리는 귀여운 무갈. ⓒ 이형수
마지막 떠나는 날 밤, 아쉬움을 달래며 밤늦게까지 이 부녀와 같이 있었다. 빠뿌의 몸도 그렇고, 그 서양여행객이 나타날 일도 없고, 홀로 노는 무갈을 위해서도 최선의 방법은 라자스탄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판단되었다. 라자스탄으로 돌아갈 수 없는 또 다른 어떤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라자스탄으로 가는 것이 나을 것 같다고, 빠뿌를 설득하였다. 그도 그러고 싶다고 동의를 한다. 이미 빠뿌가 돌아갈 차비가 없는 걸 알았기에, 빠뿌와 무갈이 서쪽 자이푸르까지 갈 수 있는 차비를 쥐어주며, 꼭 고향으로 가라고 한번 더 얘기해본다. 빠뿌는 고개만 끄덕일 뿐이다. (사실 후에 자이푸르에서 다시 만나자고, 빠뿌의 조카 핸드폰 번호를 받았었는데, 2주 후 자이푸르에 갔을 때 빠뿌조카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삼촌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바라나시의 밤, 가로등 불 아래 수많은 곤충과 모기떼가 날아다니고, 그 딱딱한 콘크리트 바닥에 잠자리를 피는 그부녀를 두고 나는 그렇게 돌아서야 했다. 죄책감과 아쉬움, 무력함을 같이 느끼며. 언젠가는 빠뿌가 그의 고향 라자스탄으로 돌아가 그의 아내와 아이들과 사진 속 호숫가에 모여 앉아 라븐카를 키고 있을 것을 상상하며….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인도 푸쉬카르 낙타축제
전통춤 공연, 낙타경주, 인도인 신부대회…
다채로운 행사와 볼거리에 놀라

매년 10월~12월중 인도에서 가장 유명한 주인 라자스탄주의 한 중앙에 위치한 작은 마을에서는 아주 흥미로운 축제가 열린다. Pushkar라고 불리는 낙타축제가 바로 그것이다.

낙타축제라고 통틀어 일컫긴 하지만, 크게는 낙타를 사고파는 시장(Camel Fair)과 힌두교도의 축제가 동시에 일어난다. 보통 축제는 5일간 진행되는데, 실제 낙타매매는 축제 전부터 시작해서 축제 첫 2일안에 거의 끝난다. 축제기간에는 수만마리의 낙타, 소, 말등도 함께 거래가 이루어진다.

Pushkar는 산스크리트어로 푸른 연꽃이라는 뜻인데 신들이 거위에게 연꽃을 물려 하늘에서 떨어뜨렸는데 그렇게 떨어진곳이 마침 브라마신이 의식을 행했던 곳이었다고 한다. 연꽃이 떨어진 바로 그곳을 Pushkar라고 부른이후에 마을이름이 되었다. 천지 창조의 신인 Brahma를 숭배하는 temple이 있는 곳은 인도전역을 통틀어 드물다고 한다. 힌두교도의 축제는 pushkar의 한가운데 있는 성스러운 호수에 몸을 담궈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순례자들로 매일같이 넘쳐난다. 특히 5일중 힌두교도들의 숫자가 급격히 증가하는 하루가 있는데 이날은 골목을 걷는것조차 힘이 든다.

골목의 축제인파중
골목의 축제인파중
씹는 담배와 간단한 스낵류를 파는 상인

Pushkar에 오는 pilgrim들과 낙타와 가축을 매매하기 위해 온 상인과 낙타축제를 구경하기 위해 온 여행객들로 영화에 나오는 사막속 바자(Bazzar)를 때로 연상케하는 이곳은 축제기간 동안에는 숙박비도 평소의 몇배씩 뛰곤 한다. 내가 갈 즈음에도 축제 며칠전부터 숙박이 다 예약이 되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실제로 가보니 잘 자리는 꽤 있었다.

축제의 인기를 틈타 자이푸르나 조드푸르, 자이살메르에서부터 방이 없다는 소문을 흘리고 친구한테 알아봐서 어렵게 방을 구해준다는 상술을 써 돈을 많이 받아내는 인도인들이 간혹 있으니 조심해서 알아봐야 한다.

일반 순례자나 여행객들은 호텔이나 게스트하우스 등에서 잠을 자지만 낙타와 가축을 매매하러 라자스탄의 각지에서 온 낙타주인들은 혹시라도 누가 낙타를 훔쳐갈 수도 있으므로 모래사장에 천막을 치고 낙타 옆에서 잠을 잔다. 동이 트는 아침과 해가지는 저녁무렵에 수많은 낙타와 함께 천막 앞에 앉은 사람들이 밥을 해먹는 풍경은 평화스럽기 그지 없다.

동이트는 아침 무렵, 낙타들도 잠에서 깨어난다
낙타를 모는 상인들
라자스탄 사람들은 인도에서도 알아주는 멋쟁이들이다, 멋진 수염과 색색의 터번으로 낙타장수라고는 걸맞지 않을만큼 멋에도 신경을 많이 쓴다.
전통춤을 추는 라자스탄 여인들
Pushkar 낙타축제는 낙타매매로 끝나는 축제가 아니다. 해를 거듭하면서 점정 다채로운 행사와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는데 그중 매년 인기리에 벌어지고 있는 것이 라자스탄의 전통춤 공연, 낙타경주, 낙타 선발대회, 터번감기, 멋진 수염대회, 인도인 신부대회등이다.

라자스탄 남자들의 자랑인 수염대회
야간 공연 및 인도인 신부대회, 외국인여성을 인도 신부처럼 분장하여 이쁜 여인을 선발하는 대회다.
이같이 주최측에서 여는 공연이나 볼거리 외에도 사람이 많이 몰리다보니 야시장처럼 개인들이 펼치는 조그마한 볼거리나 공연도 무시할 수 없다.

밤에도 조그맣게 여기저기 천막을 쳐놓고 공연하는 볼거리들이 있다. 싼 가격에 보는거라 기대에 못 미칠경우가 많지만 축제의 분위기에 젖어들다 보면 그마저도 하나의 추억거리가 된다.

이외에도 pushkar에서는 즐길게 많다. 정말 당찬 여행자라면 낙타를 한마리 사서 사막을 여행을 할 수도 있을 것이고(사실 외국인이 좋은 낙타를 사는 것 부터가 힘들지만) 그렇지 않으면 하루정도 낙타를 빌려 주변을 사파리 해보는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순례자들을 따라 여러가지 사원들을 방문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근처 산정상에 Saraswati등 사원에 올라서면 사막 중앙에 있는 Pushkar가 한눈에 들어오니, 이것 또한 놓치긴 아까운 풍경이다.

Pushkar의 낙타축제는 사진 만으로도 많은 것을 전달할 수 있기에 하고자 하는 말들은 대부분 사진으로 대신 하려 한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영하 20도를 넘는 겨울이 8개월 이상 계속되는 척박한 환경에서 최소한의 것으로 자급자족하는 공동체를 일구며 살아온 땅. 서구 문명의 질주를 막기 위해 애쓰는 강인하고 소박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인류의 ‘오래된 미래’를 찾아가는 길.

아름다운 것을 만나기 위한 기다림의 시간

인도 대륙의 북동부, 히말라야 산맥을 타고 앉은 잠무카슈미르 주의 라다크(Ladakh)으로 가는 길은 멀고 험하다. 아름다운 것을 만나기 위해서는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기에 라다크을 만나기 위해서도 인내의 시간이 요구된다. 일 년에 여름 석 달간 열릴 뿐인 라다크로 가는 길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도로인 따글랑 라(Taglang La 5,325m)를 통과한다. 델리에서 출발해 히마찰 프라데쉬 주의 마날리까지 12시간, 마날리에서 라다크의 주도 레(Leh)까지 다시 24시간이 걸린다. 별빛이 초롱초롱한 밤의 장막을 가로지르고, 히말라야의 설산들을 스치며 사막과 같은 황량한 땅으로 들어서는 동안 바랄라차 라(Baralacha La 4,892m), 룽가라차 라(Lungalacha La 5,059m), 따그랑 라(Taglang La 5,325m)의 고개들을 연달아 넘는다. 그 사이 선물처럼 따라붙는 고산병으로 인한 두통까지 견뎌야한다.

남걀 곰파에서 바라보는 벌거벗은 산에 둘러싸인 레의 전경

문명의 손길을 타지않은 작은 티베트

‘고갯길의 땅’이란 뜻의 그 이름처럼 라다크는 지리적 폐쇄성으로 인해 오랫동안 문명의 손길을 타지 않았다. 덕분에 자급자족을 통한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지켜올 수 있었다. 티베트 불교를 믿으며 티베트 방언을 쓰는 ‘라다키’들의 삶 속에는 티베트의 문화와 풍속이 고스란히 살아있다. 1974년, 외부인에게 처음 개방된 이후 라다크는 종종 “작은 티베트”로 불리며 세계인을 매혹시켜 왔다.

라다크의 풍경은 알몸을 그대로 드러내는 사막을 닮았다. 벌거벗은 산과 황량한 땅은 투명하고 강렬한 햇살 아래 부끄러움도 없이 빛나고 있다. 공룡의 등뼈 같은 헐벗은 산들과 눈 쌓인 봉우리들, 그 골짜기 사이로 흐르는 강. 사막을 닮은 황량함이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 미루나무들이 우뚝 선 마을이 나타나는 라다크의 풍경은 몹시 비현실적이다. 하늘의 색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새파랗고, 태양은 머리를 태울 듯 뜨겁게 내리쬐는 데, 공기는 깜짝 놀랄 만큼 차가워 발가락이 얼어붙는 것만 같다. ‘차가운 사막’인 이곳에 밤이 오면 별들은 쏟아져 내릴 듯 가까이 빛나고, 막막하리만치 삭막한 풍경 사이 도드라지는 초록의 나무들은 곰파(라마교의 절)의 흰색과 놀라운 대비를 만들어낸다. 이토록 거친 환경 속에서 살아오기 위해서는 종교의 힘이 간절했으리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래서 라다크를 둘러보는 일은 주변의 곰파(Gompa)를 찾아나서는 여행이 될 수밖에 없다. 라다크의 중심 도시인 해발고도 3,505m의 레(Leh)에서부터.

매만지고 다듬고 가꾸어 온 초록빛

라다크의 모든 곳이 그렇듯 레에서도 곰파는 마을의 가장 높은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1830년대까지 라다크 왕국의 왕족이 거주하던 9층 건물 레 궁전을 지나 가파른 길을 오르면 남걀 체모 곰파로 가는 길이다. 수백 년을 견뎌온 탱화와 불상을 둘러보고 절 뒤의 무너진 성벽으로 향하자. 레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세워진 절에서 내려다보는 레의 모습은 돌처럼 단단한 심장도 흔들 만큼 초현실적인 풍경이다. 공허할 정도로 텅 빈 산들에 둘러싸인 작은 마을이 초록의 섬으로 떠 있다. 긴 세월을 건너오는 동안 사람이 매만지고 다듬고 가꾸어 온 초록빛이다. ‘사람의 손이 닿아 이렇게 아름다워질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 만큼 경이롭다. 남걀 곰파에서 내려와 메인 바자 로드를 지나 북서쪽의 창스파 방면으로 향한다. 식당과 게스트 하우스들로 이제는 붐비는 거리가 되어버린 창스파를 지나면 샨티 스투파. 일본인들에 의해 평화를 갈망하며 세워진 불탑이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며 체력을 시험하는 동안 해가 설핏해지기 시작한다면 휘파람을 불어도 좋다. 잠시 후 불탑을 등지고 앉아 바라볼 저녁노을은 하루의 노고를 기꺼이 보상해줄 테니까.

정담을 나누는 라마유르 곰파의 스님들

일 년에 석 달 열리는 라닥으로 가는 육로

바위산 꼭대기에 앉아 해지는 라다크를 바라보자

다음날은 알치(Alchi) 마을로 가자. 지나가는 트럭을 얻어 타고 가다 마음 내키는 곳에 내려서 걷자. 날 빛은 좋고, 길 위의 풍경은 평화롭다. 흰 구름이 떠가는 푸른 하늘과 흙산과 바위 언덕 그리고 하얀 쵸르텐과 바람에 나부끼는 탈쵸들. 11세기에 세워진 알치의 곰파는 라다크 주변에서 평지에 세워진 유일한 절이기에 더 사랑스럽다. 정오의 뜨거운 햇살에 달아오른 절은 고요하다. 법당마다 들어가 삼배하고, 시주하고 절마당을 기웃거리다가 처마 밑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쉰다. 어린잎들이 드리우는 순한 그늘 밑에서 한바탕 곤한 잠이라도 들고 싶은 오후. 알치 마을을 빠져나와 사스폴까지 내쳐 걷는다.

마을의 계곡에서 탁족을 하며 쉬다 보면 동네 꼬마 녀석들이 몰려든다. 지독한 발냄새에 포위당한 나른하고 평화로운 여름날 오후. 다시 걷다가 지칠 무렵 양계장 차라도 얻어 타고 스피툭(Spituk) 곰파로 이동. 그림자가 길어지는 시간, 바위산 꼭대기에 앉아 해지는 라다크를 바라보자. 이곳에서 레까지는 8킬로미터. 도로를 따라 두 시간 남짓 걸으면 된다.

이삼일 레에 머무르며 고도 적응도 하고, 충분히 걸었다면 레 주변의 곰파들을 만나기 위해 나설 차례다. 첫 절은 라다크에서 가장 오래된 절 라마유르. 범죄자들도 보호를 받을 수 있어 '자유의 장소'로 불려온 절과 마을의 풍경이 어여쁘다. 작은 우체국을 지나 무너진 흙담 사이를 걷다 보면 건초 마르는 냄새 사이로 내려앉는 한낮이 정적이 고즈넉하다. 햇살이 달군 담벼락 너머로는 "찡.니. 뚱에닷! (하나, 둘 셋)" 외치며 사진 찍는 동자승들. 절간의 예불 분위기는 감독이 소홀한 야간 자율학습 시간 같다. 다음은 테미스감(Temisgam) 곰파. 역시나 절은 산꼭대기에 있다. 지름길인 가파른 자갈길의 유혹에 진다면 기진맥진 넋이 나간 상태로 절간에 들어설 수도 있다. 천천히 돌아가는 길을 택하자. 스님이 푸자(예불)를 하기 위해 출타한 경우라면 절 내부를 못 볼 수도 있지만, 못 본들 또 어떠리. 세 번째는 리종(Rizong). 역시 산 중턱에 자리 잡은 하얀 절이다. 마을은 없고 절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파란 하늘에 하얀 회벽과 붉은 창틀이 눈부시다. 그 다음은 리키르(Likir). 멀리서 바라보는 절의 풍경은 설산을 뒤로한 절경이다. 올라가서 들여다보는 절간의 얼굴도 단정하다. 해지는 모습을 보고 절 마당을 나서면 또 하루가 간다.


앞모습은 검소하나 뒷모습은 화려한 라닥 여성들의 전통 복장

지친 영혼들마저 넉넉히 품어주는 땅

일 년에 겨울이 8개월 이상인 땅에서 버터와 소금을 섞은 보릿가루를 주식으로 살아가는 곳. 주름진 얼굴 가득 미소를 담고 “줄레”라고 인사하는 소박하고 강인한 사람들. 광풍처럼 들이닥친 서구 문명의 파도 속에서 천 년을 건너온 전통을 지키려 애쓰는 사람들. 그들은 사라져가는 ‘오래된 미래’를 만나기 위해 전 세계에서 몰려든 지친 영혼들마저 넉넉히 품어준다. 간소한 삶을 이어가는 영적인 이들 곁에서 자신과 마주 서고, 자연과 마주 서고, 마침내 신과 마주 서게 되는 땅. 그곳은 라다크이다.

라닥의 사찰 중 하나인 리끼르 곰파

코스 소개
히말라야의 그늘에 내려앉은 티베트 문화권 라다크는 스웨덴 출신의 언어학자 헬레나 노르베르 호지의 빼어난 저작 [오래된 미래, Ancient Futures : Learning form Ladakh]로 유명해졌다. 파키스탄과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군사적 요충지로 외부 접근이 어려운 환경 덕분에 자급자족의 공동체 문화를 오랫동안 유지해 올 수 있었다. 1974년 개방 이후 빠르게 서구화되고 있으나 공동체 문화를 지키려는 운동 또한 최근 활발해지고 있다.


라다크의 면적은 98,000㎢로 한반도 남녘땅의 크기에 인구는 겨우 15만. 인도에 편입되기 전까지 티베트에 속했던 곳으로 10세기 무렵 티베트에서 분리된 후 라다크 왕국의 수도로 번성한 곳이 레다. 레는 마을과 곰파 전부를 도보로 둘러볼 수 있는 규모다. 주변의 곰파들은 차를 빌리거나 버스와 히치하이킹을 섞어야 한다. 대부분의 절이 산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어 걷기는 필수다.

찾아가는 길
델리에서 레까지는 인도항공이 비행기를 운행하고 있다. 1시간 20분 소요. 육로로는 델리에서 출발해 마날리를 경유, 레로 가는 코스를 주로 이용한다. 이 육로는 6월부터 9월까지 석 달 남짓 열린다. 스리나가르를 경유하는 길도 있지만 정치적 상황에 따라 폐쇄되기도 하므로 미리 확인해야 한다.

여행하기 좋은 때
라다크를 여행하기 좋은 때는 6월 중순부터 9월 중순까지의 여름이다. 날씨도 온화하고, 육로가 열리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대신 전 세계에서 몰려든 여행자들로 라다크 전체가 붐비는 시기이기도 하다. 9월 중순을 넘어서면 육로가 닫히고, 대부분의 식당과 숙소들도 문을 닫는다.

여행 Tip
라다크는 이동에 걸리는 시간이 많고 고도가 높기 때문에 일정을 넉넉하게 짜야한다. 1년에 300일 태양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연평균 강수량은 100미리 정도. 6월부터 9월까지의 여름 기온이 -3도에서 30도 사이를 오가는 극단적인 기후로 유명하다. ‘그늘에서는 동상에 걸리고 햇볕에서는 화상을 입는’ 날씨이므로 여름이라 해도 따뜻한 옷과 선크림을 함께 준비해야 한다.


라다크는 공동체 문화를 지키기 위한 다양한 실험이 모색되고 있다. 라다크를 여행하는 동안 가급적 원주민인 라다키들이 운영하는 숙소와 상점, 식당을 이용하자. ‘여성협회’에 들러 BBC에서 제작한 다큐 [오래된 미래]를 보며 좋은 여행자가 되기 위한 토론의 시간을 가져보자. 플라스틱 병에 든 생수 대신 물통을 지니고 다니며 정수된 물을 사먹는 것도 작은 실천이다. [오래된 미래]를 읽는 것은 여행 준비의 필수.


라다크 주변으로는 야영 장비를 준비하고 가이드를 고용해야 하는 본격적인 트레킹 코스도 많다. 여건이 허락한다면 라다크의 자연과 문화를 더 깊이 느낄 수 있는 장거리 트레킹에 참여해보자. 원숭이해(2016년)마다 열리는 헤미스 곰파의 축제도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인도 서부에 자리한 자이살메르는 사막과 초원이 펼쳐지는 황금 도시이다. 900년 전에 세운 황금색 요새에서 아직도 평범한 일상을 만들어내는 풍경은 신비감마저 갖게 한다. 사막을 가로지르는 낙타 사파리는 밤하늘에 수놓인 무수한 별을 선물해 주었다.

현지에 적응한다는 핑계로 델리 파하르간즈에서만 일주일을 하릴없이 보낸 나는 슬슬 몸이 근질근질해지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 라씨 한잔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이곳저곳 시장 곳곳을 둘러보며 현지인들과 짜이(인도식 홍차)를 마시며 싱거운 농담 따먹기를 하는 것도 이제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 델리에만 머물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아무리 계획 없이 인도에 왔더라도 가끔은 ‘눈 호강’을 하고 싶었다. 천장에서 물이 줄줄 새는 현지 극장에 앉아 다음 행선지를 생각했다. 델리에서 가장 흔히 다음 행선지로 삼는 곳은 사막의 도시 ‘자이살메르’나 인도 최고의 보석 타지마할이 있는 ‘아그라’이다. 생각 끝에 이참에 자이살메르로 가서 인도 서쪽의 해안선을 따라 인도 일주를 하리라 마음먹었다. 80일이라는 여정을 남겨두고 ‘과연 그게 가능할까?’ 란 생각은 인도에선 쓸데없는 생각이다. 아무리 철저하게 계획을 짜고 왔다고 해도 아무렇지도 않게 연착이 되는 기차와 운전사 마음대로인 버스 앞에선 모든 것이 신의 뜻일 뿐이다.

1 자이살메르 성안에서 배드민턴을 즐기는 현지인들. 성은 고스란히 그들의 생활공간이다. 2 외국인 관광객에게 거리낌없이 포즈를 취해주는 인도의 아이들. 3 인도의 아낙과 청년들이 성 입구에서 좌판을 벌이고 있다. 
황금빛 사막의 도시 자이살메르
델리에서 20시간이 넘는 시간을 기차로 달린 탓에 거의 반죽음이 되어 자이살메르에 도착하자 게스트하우스에서 나온 호객꾼들이 모여든다. 여기저기서 정신없이 자기네 가게로 오라고 손짓을 하지만 한국인들이 자주 찾는다는 이름난 게스트하우스에 묵기로 하고 자이살메르 성으로 향한다. 기차를 타고 오는 과정이 너무 힘들어 이것저것 따지고 잴 힘도 없다. 오토릭샤를 타고 도착한 자이살메르 성은 압도적이다. 언덕 위에 우뚝선 황금색 성은 신비감마저 자아낸다. 거대한 요새 아래에서 사람과 소, 개와 원숭이가 뒤섞여 사는 목가적인 풍경은 인도에서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여행객에게 잠시의 게으름을 강요한다.
여느 성 같으면 당연히 입장료를 받고 관광지역으로 만들었겠지만 자이살메르 성은 관광지 아닌 관광지다. 그도 그럴 것이 성 안에는 아직도 사람들이 집을 짓고 일상을 꾸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이살메르 성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성안은 평범한 인도의 일상이 이어진다. 복잡하게 연결된 골목에선 꼬마들이 크리켓을 즐기고 있고 동네 청년들은 한가로이 여행객에게 농담을 건네거나 기념품을 팔고 있다. 과연 이곳이 900년 전에 지어진 성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그들의 일상은 자연스럽고 평범하다.

1 ‘친구 가격’으로 비싸게 물을 판 머리좋은(!) 인도 청년. 2 인도 특유의 화려한 색이 아름다운 가방들. 자이살메르에서는 낙타 가죽으로 만든 가방이나 신발을 살 수 있다. 
“어이~ 친구 친구! 콜라 있어요. 물 있어요. 싸게 줘요. 이리와요.” 

어디선가 익숙한 한국말이 들려온다.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니 잘생긴 인도 청년이 자기네 가게에서 물건을 사라며 손짓을 한다. 외국인은 인도 현지의 물을 마실 수 없는 경우가 많아 항상 물을 사들고 다녀야 한다. 1ℓ짜리 생수 한 병에 10Rs~30Rs까지 지역마다, 브랜드마다 그 가격대도 다양하다.

“빠니(물) 하나 주세요.”
“써티 루피예요.”

델리에선 10루피면 살 수 있던 물이 너무 비싸다. 사막지역이라서 물도 귀한 모양이다. “깜까로나(깎아주세요) 플리즈~” 여행객의 필살기인 ‘깎아줘 신공’을 펼치니 청년은 넉살 좋은 웃음을 지어보이며 “투엔티 루피! 코리아 프렌드 프라이스!”를 외친다. 말 한 마디에 무려 10루피나 깎았다. 하지만 ‘이 청년 인심 좋네’라는 생각을 하며 물을 뜯어 마시는 순간, 현지인에게 물 한 병을 10루피에 파는 그. 어이가 없어 노려보니 그는 하늘을 가리키며 “Are you happy?”라고 되묻는다. 역시 인도에선 모든 게 신의 뜻이다. 이제껏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친해졌는데 고작 10루피 때문에 기분이 상하고 싶지 않아 사진이나 한 장 찍으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No problem!” 청년은 바지춤에서 도끼빗을 꺼내더니 가르마를 정성스럽게 정리한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모양이다. 참 황당한 상황이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여기는 인도가 아닌가. 모든 일이 신의 뜻이기를.

타르사막까지 우리를 인도해준 낙타들. 
별이 쏟아지는 사막에서 하룻밤 낙타 사파리
자이살메르가 인도 여행객에게 인기가 높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낙타 사파리 덕분이다. 특히 사막이란 것이 없는 한국 사람에겐 자이살메르의 낙타 사파리는 거의 필수 코스처럼 여겨진다. 2만원이 조금 넘는 비용으로 낙타를 타고 사막을 타박타박 걷는 체험은 숨 막히는 모래먼지를 참아가며 이곳에 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숙소에서 지프를 타고 사막 입구로 가니 여덟 마리의 낙타가 숨을 고르고 있다. 큰 눈을 깜빡거리는 낙타는 온순해 보였지만 막상 등에 올라 일어서니 바닥까지 2m는 족히 되어 보인다. 여기서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하지만 오늘 우리를 이끌어줄 낙타몰이꾼은 “You very strongman! No problem! 형님!”이라며 안심시킨다.

낙타몰이꾼의 막내들은 장동건, 소지섭 등의 한국 이름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데, 오늘 우리를 이끌어줄 아이의 이름은 ‘이승기’란다. 자기 친구인 ‘원빈’이는 한국의 한 프로그램에 소개된 후 인기를 끌어 낙타를 샀다고 한다. 자기도 나중엔 그렇게 될 거라며, 일단은 델리에 한번 가보는 것이 소원이란다. 
낙타 타기는 크게 위험하지는 않지만 줄을 이어 간격을 촘촘하게 유지해 앞 낙타가 방귀를 뀌거나 뒤의 낙타가 트림이라도 할라치면 어김없이 모래바람보다 고통스러운 순간을 맞게 된다. 게다가 처음 타는 낙타라서 허리가 아픈 것은 둘째 치더라도 엉덩이에 살이 까지는 듯 아프다. 그렇게 2시간 정도를 걸으니 이윽고 타르사막이 모습을 드러낸다. 끝없이 펼쳐지는 모래 언덕과 화살을 쏘듯 따갑게 피부를 파고드는 햇볕은 ‘이곳이 과연 사막이구나’ 하는 생각을 절로 들게 만든다.

엉덩이가 쓰라려 낙타 타기가 더 이상 재미없어 질 무렵, 하룻밤을 묵을‘샘둔’에 도착했다. 우리는 여기에 모포와 침낭을 깔고 야영을 하게 된다. 낙타몰이꾼들이 준비한 저녁 식사는 고작 차파티와 카레 정도였지만 사막이라는 장소에서 먹으니 더욱 맛이 좋다. 물론 밀가루처럼 고운 모래가 입안에서 그대로 씹히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해가 지자 사막은 불빛 하나 없는 칠흑이 되었다. 우리는 장작불에 닭을 구워 먹었는데, 그 냄새가 사막에도 퍼졌는지 개들이 모여든다. 거하게 바비큐와 맥주 한 병을 먹고 난 후 침낭에 누웠다. 사막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온통 별천지다. 그 와중에 하나둘씩 떨어지는 별똥별은 눈물이 날 만큼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시끄럽고 정신없고 혼잡한 인도의 또 다른 한편엔 이렇게 평화롭고 고요하기 그지없는 사막의 밤이 펼쳐지고있었다.

Travel Information
델리에서 자이살메르까지는 기차를 타는 것이 정석이다. 올드델리 기차역에서 약20시간이 걸린다. 기차에는 여러 등급이 있는데, 보통 여행자들은 침대가 있는 SL등급을 많이 탄다. 하지만 20시간 이상 걸리는 자이살메르까지의 여정을 생각하면 3등석 AC나 2등석 슬리퍼를 타는 편이 낫다.
기차역에 도착하면 숙소에서 나온 호객꾼들이 대기하고 있다. 대부분 게스트하우스에서 낙타 사파리까지 함께 운영한다. 사파리를 한다면 방값은 100~150Rs 정도로 무척 싸다. 사파리는 대략 1박 2일 여정에 700Rs 내외를 생각하면 된다. 단, 여행객을 속이는 경우가 많은 만큼 사막코스, 식사 제공 여부, 타는 시간 등을 꼼꼼히 챙겨야 한다. 한국 여행객들은 타이타닉 게스트하우스와 머드미러 게스트하우스를 많이 이용한다. 하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현지에서 정보를 얻는 것이다. 인도는 언제 어떻게 사정이 바뀔지도 모르는 곳이기 때문이다.

손주은 기자.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총천연색의 빨랫감 같은 도시 - 도비 가트

뭄바이에는 사진작가나 여행자들을 유혹하는 포토 포인트가 하나둘이 아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성문, 비현실적일 만큼 거창한 기차역, 사람 하나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은 시장…. '도비 가트(Dhobi Ghat)'는 그들과는 또 다른 매력으로 카메라를 끌어들인다.


마하락스미 기차역 근처에 있는 도비 가트는 이 도시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시영 세탁소다. 말하자면 매머드급의 야외 빨래터인데, 이곳에 고용된 빨래 일꾼(dhobi)들은 매일 아침 4시부터 오후 6시까지 1인당 4백 벌가량의 세탁물을 처리한다. 이들은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커다란 빨래통에 세탁물을 불린 뒤 그것을 빨아 만국기처럼 줄에 매달아 놓는다. 그 총천연색의 빨래들은 마치 혼재의 도시 뭄바이를 상징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어디에서 날아왔는지 알 수 없는 온갖 더러운 빨래감들이 그곳에서 새로운 내일을 맞는다.

 

 

정글북의 고향 - 키플링의 생가

"나에게는 도시들의 어머니, 내가 그 문에서 태어났기에, 야자수와 바다 사이, 세계의 끝으로 가는 증기선이 기다리는 곳." [정글북], []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루디야드 키플링(Rudyard Kipling)은 이렇게 말했다. 진짜 그가 태어난 도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름은 뭄바이(Mumbai)가 아니라 봄베이(Bombay)였다.


봄베이는 17세기 후반부터 영국의 동인도 회사의 거점으로 육성된 무역항이다. 뭄바이(Mumbai)라는 지역 고유의 마라티 어로 개칭된 것은 1995년부터.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봄베이라고 부르고 있고, 도시 역시 19세기 영국 식민지 시절의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곳곳에 남아 있는 빅토리아 식의 거대한 건물들을 지나치다 보면, 키플링의 시대로 돌아가는 것도 어렵지 않아 보인다. 


키플링은 다섯 살 때 봄베이를 떠나 영국에서 공부를 한다. 그리고 십대 후반 옥스포드 대학으로의 진학이 여의치 않자 인도로 돌아오게 되는데, 봄베이 항에 들어서며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이제 나의 영국 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는 라호르(Lahore)를 비롯한 아시아 곳곳을 돌아다니며 그 이전의 유럽인에게서는 전혀 없던 감수성을 가지고 새로운 문학을 토해냈다. 키플링이 태어난 생가는 그의 아버지가 교수로 있었던 J.J. 응용예술학교(Sir J.J. Institute of Applied Art)의 캠퍼스 안에 남아 있다.    


 

키플링과 [정글북]의 감수성은 봄베이 해안에서 태어났다.

 

 

모든 신들과 짐승들의 기차역

1903년의 빅토리아 터미너스. 지금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도시는 모든 것이 과장되어 있다. 건축물에서부터 영화에 이르기까지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만들었을까'라는 마음이 들게 한다. 그 정점이 아마도 이 기차역(차트라바띠 시와지 터미너스, Chhatrapati Shivaji Terminus) 같다. 봄베이-뭄바이처럼 구 영국의 잔재를 없애기 위해 빅토리아 터미너스라는 이름을 내던졌지만 여전히 빅토리아로 부르는 이들이 많다. 터미너스는 1887년 '대 인도 반도 철도회사(Great Indian Peninsular Railway Company)'의 본부로 사용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웅장한 고딕의 형체 위에 온갖 상상과 현실의 동물들이 조각되어 있어, 카메라를 들이대다 보면 메모리 용량의 한계를 절실히 느끼게 한다.

 

 

식민의 도시이며 불복종의 도시 - 간디 기념관

인도인들은 말한다. "뭄바이는 인도지만 인도가 아니다. 오히려 유럽에 가깝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봄베이는 동인도 회사와 영국의 식민 거점이었다. 초기에는 아라비아 해상 무역의 중심지로 본토와는 독립적인 기능을 수행했다. 그러나 영국군이 1818년 마라타인들을 물리치고 서부 인도의 영토를 합병하면서부터는 본격적으로 인도 식민화의 중심지가 된다. 그러나 동시에 인도 독립운동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도시였기도 하다.


뭄바이에는 파시족이라는 페르시아 계의 소수 민족이 경제계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밝은 피부를 지니고 있는 그들은 일찍부터 영국인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무굴 제국과의 거래 중계를 통해 영국에 막대한 이익을 안겨주었다. 그런데 인도 식민화가 가속화되자 그 독립 운동을 위해 경제적 지원을 아낌없이 베푼 것도 그들이었다. 덕분에 뭄바이는 인도 독립운동의 중심지로 끝없는 투쟁의 장소가 되었다.  


뭄바이에 있는 간디 기념관(Mani Bhavan)은 그를 지지했던 친구의 집으로, 간디가 각지의 지지자들과 만난 장소였다. 1917~1934년에 독립운동 본부로 사용되었고 1932년 간디가 체포된 장소이기도 하다. 2층에 보존되어 있는 간디의 방에는 그가 실 잣는 법을 배우던 현장과 그가 애용하던 대나무 지팡이 등이 재현되어 있다. 


뭄바이는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기억한다.

 

 

볼리우드의 환영 - 필름 시티

볼리우드 영화는 할리우드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때 인도 하면 '카레'를 떠올리는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또 하나의 강력한 경쟁자가 등장했다. 바로 '맛살라' 영화다. 온갖 향신료를 집합해놓았다는 뜻의 '맛살라'는 인도 영화의 특색을 곧바로 전해준다. 영웅과 미녀의 로맨스, 춤과 노래의 향연, 권선징악과 쾌락의 공존…. 한 편의 영화 안에 좋다는 것은 모두 모아놓았다. 그 양념의 향연을 만들어내는 제작소 볼리우드(Bollywood)가 바로 뭄바이다.


봄베이와 할리우드가 합쳐져서 태어난 단어인 '볼리우드'는 원조 할리우드를 넘어 세계 최다의 영화 제작 편수를 자랑한다. 그 현장을 볼 수 있는 곳이 뭄바이 북쪽 산제이 간디 국립공원에 인접해 있는 대규모 영화 스튜디오인 '필름 시티(Film City)'다. 현지 투어를 이용하면 여러 영화의 제작현장을 둘러본 뒤 맛살라 스타일의 디스코 파티로 마무리 할 수 있다. 시내에 있는 100개가 넘는 영화관 역시 볼리우드의 진면목을 현지인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장소다. 처치게이트 스테이션 맞은편의 에로스, 메트로 극장 등이 유명하다.

 

 

슬럼 위의 공중 정원 - 행잉 가든

볼리우드 바깥에서 만들어진 것 중, 이 도시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영화는 아마도 대니 보일의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아닐까? 영화는 도시 북서쪽에 있는 주후 슬럼에서 태어난 어린 주인공들이 암흑가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백만장자 퀴즈 대회'를 통해 보여준다. 대니 보일 특유의 스타일 감각이 굴절된 렌즈를 제공하지만, 영화는 이 도시의 극과 극, 빈곤과 사치의 대조를 분명히 보여준다.   


말라바 언덕에 있는 행잉 가든(Hanging Garden)은 이 도시의 아이러니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소 같다. 이 도시 연인들의 쾌적한 데이트 장소인 이 정원은 문자 그대로 호수 위의 공중에 지어져 있다. 이 근처에는 조로아스터교의 신자인 파시족들이 시체를 독수리에게 쪼여 먹이는 '침묵의 탑'이 있다.


공중정원에서 도시의 아이러니를 내려다본다.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한 장면. 

 

새들은 시체를 포식한 뒤 가까운 이 호수로 날아가 목을 축이는데, 그 때문인지 호수의 물이 지독히 오염되었고 공원을 그 위 공중에 지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지금은 독수리가 거의 사라졌는데, 시체들에서 나오는 화학물질을 너무 많이 먹어서라는 풍문도 있다.

 

 

웃음의 요가 - 게이트 오브 인디아

 

조지 5세의 방문을 위해 지어진 '게이트 오브 인디아'. 웃음 요가의 명소가 되었다. <출처: (cc) Rhaessner at en.Wikipedia>


'게이트 오브 인디아(Gateway of India)'는 1911년 영국 왕 조지 5세의 방문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바다 위의 거대한 문이다. 그 지나친 스케일이 희극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하는 건축물인데, 매일 아침 그 문 아래에서 혼신을 다해 웃고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영국의 인도 지배를 비웃고 있는 건 아니다. 그들은 '웃음 요가'를 하고 있다. 


뭄바이의 의사인 마단 카타리아(Madan Kataria)는 1995년 모두 다섯 명의 구성원을 모아첫 번째 공개적인 웃음 클럽의 행사를 열었다. 웃기는 일이 없어도 웃는 것 자체만으로도 몸과 마음에 활력을 얻을 수 있다는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이 웃음 요가는 곧바로 큰 인기를 모아 전 세계 60여 개국에 퍼져 나갔고, 뭄바이에만 70개 이상의 클럽이 만들어졌다. BBC의 다큐멘터리 [휴먼 페이스]의 진행자인 코미디언 존 클리즈는 뭄바이의 교도소에서 열리는 웃음 요가 행사에 함께하기도 했다. 이것도 요가인 만큼 무턱대고 웃는 게 아니다. 절차와 수련법이 있다. 깊은숨을 들이쉬고 웃음 연습을 시작해, 침묵의 웃음, 사자의 웃음, 칵테일 웃음 등을 배워나간다.

 

 

케랄라 주 내륙수위의 하우스보트들.
케랄라 주 내륙수위의 하우스보트들.

인도 남서쪽 끝에 위치한 케랄라(Kerala) 주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거나 떠올리는 인도와는 사뭇 다른 곳이다. 안내책자에서도 케랄라는 인도에서 가장 깨끗한 지역으로 문맹률이 아주 낮은 편이고 유아사망률 또한 가장 낮아 평균수명이 가장 긴 곳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종교인들끼리의 섬뜩한 싸움도, 남루한 거지들과 끊임없이 구걸해오는 아이들도 많지 않다. 안내책자의 설명처럼 케랄라에 도착해 게이트를 빠져나왔을 때 ‘이곳이 인도일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한없이 평온해 보이는 곳이다. 그리고 여행을 마쳤을 때는 밋밋한 해안선 루트와는 달리 숨은 볼거리와 아름다운 풍광으로 가득찬 여정이었다는 생각이든다.

남인도 여행의 시작, 코친

1 여유로운 남인도의 거리. 2 상점에 걸려있는 형형색색의 인도 옷들. 3 성 프란시스 성당의 전경. 4 페리야르 국립공원으로 가는 길. 5 매혹적인 남인도의 여인들.
1 여유로운 남인도의 거리. 2 상점에 걸려있는 형형색색의 인도 옷들. 3 성 프란시스 성당의 전경. 4 페리야르 국립공원으로 가는 길. 5 매혹적인 남인도의 여인들.
델리에서 코친으로, 데카디와 페리야르를 거쳐 엘레피, 코람과 코발람, 트리반드룸으로 끝나는 남인도 여행의 시작인 항구도시 코친(Cochin)은 아라비아 해와 인도 최대의 벰바나드(Vembanad) 호수가 만나는 곳에 위치해 있다. 처음 마주하는 코친의 풍경은 이국적이면서도 이질적이다. 포구를 따라 독특한 생김새의 중국식 어망이 해변에 펼쳐져 있고 거리에는 유럽풍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비릿한 바다 내음을 등지고 포구에서 10분 거리인 마탄체리(Mattancherry) 지구로 걸어가면 포르투갈의 식민지이자 포르투갈의 탐험가 바스코 다 가마가 묻혀 있는 성 프란시스 성당이 있다. 인도 최초의 유럽형 교회이다. 인도무역 책임자로 부임되어 인도양 개척 항해에 나선 다 가마는 과로로 숨을 거두었다. 성당에는 그 당시 항해사의 모습을 담은 액자와 무덤을 덮은 묘석이 놓여 있다. 성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마탄체리 궁전도 둘러보면 좋은 유적이다. 포르투갈 인들이 건설해 1555년 코친의 지배자인 비라 케랄라 바르마에게 선물한 건축물로, 네덜란드가 다시 증축해 네덜란드 궁전(Dutch Palace)이라고도 불리게 되었다. 마탄체리 궁전에서 북쪽으로 조금만 걸음을 옮기면 향신료와 그림, 탈, 인형, 목공예품 등 각종 기념품을 판매하는 유대인 회당에 도착한다. 향신료 무역을 위해 인도에 자리 잡은 유대인들은 다 가마가 상륙하기 이전까지 이곳의 상권을 주도했다. 한때는 꽤 많은 유대인들의 터전이었지만 20세기 중엽, 이스라엘이 건국된 이후 90%가 넘는 유대인들은 다시 팔레스타인 땅으로 돌아갔다. 코친에서 반드시 보고 가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카타칼리(Kathakali)이다. 어두침침한 무대 한쪽에 악사가 자리를 잡고 앉아 북을 두드리고 두 명의 배우가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얼굴로 표현한다. 잔뜩 부풀린 치마를 입고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한 두 남자 배우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대자연 속 야생을 만나다, 테카디

페리야르의 전경.
페리야르의 전경.
코친에서 버스를 타고 꽤 오랜 시간 산을 넘어 190km 동쪽으로 가다보면 테카디(Thekkady)에 도착한다. 인도 서부를 세로로 가로지르는 웨스턴 가츠 산맥을 넘어야 하기 때문인데, 이동 중 차창 밖으로 보이는 것은 거대한 차밭이다. 테카디에는 남인도에 10여 개 흩어진 야생동물 서식지 가운데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페리야르 야생동물보호구역(Periyar Wildlife Sanctuary)이 있다. 2시간 동안 유람선을 타고 호수를 돌아보는 투어 프로그램에 참여하면 동물원에서나 보던 희귀한 동물들을 배 위에서 볼 수 있다. 눈앞에서는 수많은 종류의 원숭이들이 사람들과 뒤섞여 뛰어다니고 물속에서 빠져나온 나뭇가지에는 물총새와 가마우지 등 야생조류가 앉아 있다. 호랑이와 사자, 표범 같은 맹수부터 코끼리와 몽구스까지 3백여 종이 서식하는 그야말로 자연 그대로의 ‘동물의 왕국’. 테카디의 고산 차밭을 힘겹게 넘은 보람을 찾을 수 있다.



하우스보트에서 보내는 하루, 엘레피

어망을 끌어올리는 어부들.
어망을 끌어올리는 어부들.
아라비아 해로 흘러드는 44개의 강이 서로 얽혀 있는 케랄라 주의 내륙수(Backwater)는 길이가 무려 900km에 이른다. 열대우림에 모세혈관처럼 퍼져 있는 강물은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운하처럼 마을들을 서로 연결하는 교통로 역할을 한다. 이곳의 하우스보트는 케랄라 내륙수도의 명물이다. 언뜻 보면 짚으로 엮은 집을 긴 배 위에 얹은 것 같지만 내부에는 침대와 욕실, 에어컨 시설까지 완벽히 갖추고 있다. 외국인을 위해 수상가옥을 개조한 레스토랑 겸 숙소이기 때문인데, 심지어 여성만 탑승할 수 있는 하우스보트가 있을 정도로 종류도 다양하다. 보트를 타고 가다보면 동양의 베네치아로 불리는 알라푸자를 비롯해 해수면보다 낮은 곳에서 농사를 짓는 쿠타나드, 마을과 수로가 조화를 이루는 쿠마라콤 등 각기 다른 개성의 마을을 만나게 된다. 물길 좌우로는 높다란 야자수들이 무성하고 수면 위에는 잡초들이 부유하다. 물 위에서 자연의 낭만을 즐기며 색다른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

에메랄드빛 아라비아 해, 코발람

2층으로 아루어진 하우스보드.
2층으로 아루어진 하우스보드.
케랄라 주에서도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남쪽 끄트머리의 코발람(Kovalam)이다. 주도인 트리반드룸(Trivandrum)에서 남서쪽 해안선을 따라 코발람과 초와라(Chowara) 등 푸른 아라비아 해를 마주보는 해변들이 이어진다. 끊임없이 늘어선 코코넛나무의 이국적 풍경과 멀리서 풍겨오는 바다 내음에 가슴속까지 상쾌해진다. 케랄라 북쪽에 위치한 광활한 고아(Goa) 주의 해변이 관광객들로 북적인다면 이곳에서는 고즈넉한 여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다. 이렇듯 코발람 해변이 특별한 이유는 찬란하게 아름다운 빛깔과 풍경을 간직한 ‘에메랄드빛 아라비아 해’를 직접 눈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부들이 갓 잡은 싱싱한 해산물요리를 싼값에 즐길 수도 있다. 늦은 오후, 코발람 해변 모래사장의 파라솔 아래에 누워 붉게 물들어가는 아라비아 해를 감상하는 것은 평생 잊지 못할 멋진 여행의 추억이 될 것이다.

놓치지 말아야 할 남인도 명소 3

아유르베다(Ayurveda)

아유르베다
아유르베다
기원전 600년 무렵 탄생한 아유르베다는 산스크리트어 아유르(생명)와 베다(과학, 철학)의 합성어이다. 각종 약초와 향신료, 오일을 이용한 인도 전통의학으로 5천 년 역사를 이어온 치료방식이다. 몸에 칼을 대지 않으며 식물치료와 마사지, 요가, 명상으로만 건강을 유지하는 것. 식물치료는 꽃잎이나 채소류로 만든 약제를 몸 특정 부위에 쏟아부어 몸속 독소를 제거한다. 약제에서 추출한 오일로 1~2시간 동안 마사지를 받는 방식은 몸과 관절, 피부의 피로해소와 혈액순환을 돕고, 요가와 명상으로는 근육이완 및 심신의 안정을 얻는다. 케랄라는 아유르베다가 시작된 곳으로 수많은 치료센터가 있는데, 트리반드룸과 코발람 사이에 자리 잡은 서머스리암과 마날스리암이 대표적인 리조트이다. 이곳에선 인도 정부가 인증한 의사의 상담을 거쳐야만 처방이 이뤄지는데, 이용객 대부분은 유럽과 미국에서 온 사람들이다. 가격은 치료옵션에 따라 다르며, 기본형이 1박에 약 200유로(30만4천원), 고급형이 약 450유로(68만4천원)이다.

카타칼리(Kathakali)

카타칼리
카타칼리
인도의 5대 고전무용 가운데 하나로 케랄라 주를 대표하는 무언극인 카타칼리는 이야기라는 뜻의 ‘카타’와 공연을 뜻하는 ‘칼리’가 합쳐진 단어이다. 카타칼리는 7년 정도 교육을 받은 남성 배우들이 공연하며, 관객들은 공연 전 그들의 분장 장면을 지켜볼 수 있다. 선한 인물을 표현하는 초록색과 흰색, 악한 인물을 표현한 검은색과 붉은색, 여성을 나타내는 노란색 등 그날그날의 공연 내용과 등장인물에 맞게 1시간 동안 화려하게 분장한다. 분장을 하고 의상을 입는 모습은 사뭇 진지하다. 전통방식으로 공연을 하면 하루를 꼬박 해도 다 볼 수 없을 만큼 오래 걸리지만 관광객들을 위해 1시간으로 짧게 줄여 공연하기도 한다. 어두침침한 무대 한쪽에는 악사가 자리를 잡고 앉아 북을 두드리고 배우는 기쁨, 슬픔, 놀람, 평화로움, 화 등 다양한 감정을 얼굴로 표현한다. 관객들은 조용한 가운데 배우들을 통해 힌두교 신들의 이야기에 빠져든다.

향신료 농장

향신료 농장
향신료 농장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항구 코친(Cochin)은 예부터 케랄라 해상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값비싼 향신료들이 이곳을 통해 중동과 유럽으로 실려나갔다. 중국과 아라비아 상인들이 끊임없이 드나들었고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영국 등 서구 열강이 몰려들어 치열한 다툼을 벌인 곳이기도 하다. 테카디 역시 향신료로 유명한 지역. 향신료 농원을 둘러보고 구입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준비되어 있다. 늘 가루 상태로만 봐왔던 후추나무 덩굴과 향신료의 여왕이라 불리는 카더몬, 향긋한 레몬글라스, 다섯 가지 맛을 내는 올스파이스, 계피 등을 재배하는 농장들을 여기저기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남인도로 떠나기 전, 준비해야 할 것

남인도의 커리와 짜파티.
남인도의 커리와 짜파티.
1 정보 수집 남인도 사람들은 북인도 사람들에 비해 피부가 더 까무잡잡한 편이며 언어도 각 주마다 고유의 체계를 유지하고 있다. 풍습도 다른데 무엇보다 남자들의 복장이 특이하다. 길거리에서 많은 남성들이 치마처럼 두르는 ‘룽기’(Lungi)라는 전통의상을 입고 다니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종교는 가톨릭과 기독교가 많다. 일찍이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등 서구 열강의 지배를 받은 탓인지 교회나 성당, 회교사원인 모스크 건물이 적지 않고 상점 안에 걸린 성모 마리아나 예수의 성화도 자주 보인다. 술에 대한 이중적인 시각도 특이하다. 술을 금하는 주는 아니지만 음주에 매우 엄격한 편이다. 관영상점에서 구입할 수는 있지만 영업시간이 짧은데다 휴일에는 문을 닫는다. 주류판매 허가를 받으려면 꽤 높은 금액을 지불해야 하는데 통과기준도 매우 까다롭기 때문이다. 또 구걸하는 아이들이 아닌 상점에서 만난 어린아이들에게 잔돈이나 팁 등을 주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북인도와 달리 동정을 받았다고 부모에게 오해를 살 수 있다.

2 비자 발급 비자 발급비는 유효기간 6개월의 관광비자가 6만5천원, 유효기간 15일 이내의 경유비자가 2만원이다. 6개월 미만의 관광비자는 비자신청서와 발급비 은행입금증, 여권, 사진 2장을 티티서비스코리아 인도비자접수센터(02-790-5672 www.indiavisa.co.kr)에 제출하면 다음 날 받을 수 있다.

2 항공 예약 에어인디아 항공사는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 일요일 총 4회에 걸쳐 델리로 출발하는 비행기 편을 운항하고 있다. 국제선과 이어지는 국내선을 최대 3회 무료 또는 할인된 가격에 이용할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www.airindia.co.kr 참조.

3 통화 및 환전 인도의 화폐 단위는 루피와 파이사(1.01루피)이다. 지폐는 1, 2, 5, 10, 20, 50, 100, 500루피가 있으며 1루피는 약 26.4원. 공항이나 은행, 호텔, 거리의 공식환전소 등에서 돈을 바꾸는 것이 좋다. 관광객들이 많이 이용하는 호텔이나 식당, 기념품점에서는 신용카드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4 음식 남인도의 요리는 다양하다. 둥근 모양이지만 차지지 않은 쌀밥을 주식으로 먹으며 레몬, 망고, 파인애플 등 과일과 향신료 및 양념을 섞어 만든 피클류, 구운 생선과 닭고기 등을 먹는다. 밀가루로 만든 빵인 차파티(Chapati)와 인도식 수프인 달(Dal)도 맛볼 수 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세계 최초로 죽음의 사막, 타클라마칸을 도보로 건넜던 카메라를 든 탐험가 남영호. 모래폭풍 속에서 만난 혜초의 그림자를 찾아 이번엔 인도 갠지스로 떠났다. <왕오천축국전>을 쓴 우리나라 최초의 탐험가이자 승려인 혜초는 그곳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삶과 죽음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영혼의 강’을 오직 카약에 의지해 떠돈 77일 간의 사진 기록은 지독히 아름다웠다.

<남영호 탐험사진가>

“강은 신성했으나 때론 추악했으며, 두려울 정도로 거대했다”

나는 인도에 있었다. 히말라야의 여신은 인류를 위해 인간 세상에서 강이 되어 대지를 적셨다. 사람들은 그 강을 ‘강가(힌디어·Gaⁿga)’라 부르며 세상에서 가장 신성한 곳으로 여긴다.

인도인들에게 갠지스는 어머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그리운 곳이고, 포근한 곳이고, 따뜻한 곳이다. 강물은 또한 신이 내린 선물이고 축복이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태어나고 다시 그곳으로 돌아간다.

강을 따라 많은 성스러운 도시와 신을 찬양하는 ‘만디르’(사원)가 생겨났다. 강물이 흘러온 시간보다, 흐르는 물의 양보다 많은 신과 인간들의 이야기로 차고 넘치는 갠지스.

차가운 히말의 바람과 강물은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의 땅으로 내려갈수록 그 기운은 약해졌다. 바람은 뜨거웠고 강물은 힘없이 흘러갔다. 시체가 썩어가는 냄새와 신에게 바쳐진 향 내가 섞여 강물 위를 떠다니고 ‘시바야 시바야’를 주문처럼 외는 찬송이 적막한 ‘강가’를 깨웠다. 나는 그 강물에 몸을 적신 채 긴 순례 길에 올랐다. 영혼의 강, 갠지스의 이야기, 신과 인간의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서.

인도 문게르. 사막화가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는 갠지스의 중류에는 사막의 모래바람이 불고 있다. <남영호 탐험사진가>

“신라의 순례자 혜초를 만나기 위해 또 짐을 꾸렸다. 1,300년 전, 천축국으로 길을 떠났다. 혜초의 길을 탐험하는 나는 매일같이 그에게 보내는 마지막 탐험일지를 썼다. 그 길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마지막 길, 마지막 날이라도 나는 행복했다. 타클라마칸을 건너 저 거대한 갠지스에 이르렀다. 혜초가 보았고 만났을 그 숱한 풍경과 사람들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지만 강물은 지나온 모든 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다르마의 물살에 몸을 담근 이 탐험은 아직 끝을 모른다. 갠지스의 태풍은 모든 걸 날려버렸고 나는 오랫동안 깨어나질 못했다.”- 탐험일기, 77일 중 마지막 날

인도 우타르카시. 보이는 것은 신상의 발 부분. 그곳 사람들은 가장 낮은 곳에 꽃을 바침으로써 신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남영호 탐험사진가>
인도 하리드와르. 힌두교 최대 축제인 쿰부멜라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강가엔 작은 마을이 생겨난다. <남영호 탐험사진가>
인도 바라나시. 매일 저녁 사람들은 강가에 모여 꽃과 불로 신을 찬양한다. <남영호 탐험사진가>
방글라데시 찬드푸르. 외국인의 방문이 없는 외딴 곳에서 만난 아이들은 낯선 이의 출현에 놀라 줄행랑을 쳤다. <남영호 탐험사진가>
<남영호 탐험사진가>
인도 다랄리. 텅 빈 산골마을에서 만난 아이는 적막한 마을의 풍경처럼 어떤 표정도 짓지 않았다. <남영호 탐험사진가>
히말라야에서 발원한 강물을 따라 나는 저 끝 인도양까지 먼 여행을 떠났다. 그 길은 무척 고단했지만 때론 나를 위로하고 보듬어주었다. 히말라야 산자락에서 만난 여인은 따뜻한 미소로 반겨주었고 모래바람이 불어대는 평원에선 수박농 농부가 내 갈증을 해소해주었다.

사두(힌두수행 했고 아이들은 환호와 웃음소리로 나를 즐겁게 해주었다. 시커먼 급류는 보트를 뒤집고 헤어 나오지 못하게 나를 마구 흔들어댔다. 거대한 강은 온갖 썩은 것들로 넘쳐났고 나는 그 물에서 허우적거렸다. 수많은 죽은 자들과 함께 강물을 떠다녔고, 밤마다 강가를 떠다니는 혼령들은 내 주변을 맴돌았다. 바람은 내 몸뚱이를 날려버릴 듯 거세게 불어댔고 한낮의 뜨거운 바람은 강물을, 땅을, 바람을 끓게 만들었다.

인도 바라나시. 아름다운 것 같으나 가까이 들여다보면 수많은 사연이 있는 곳이 갠지스다. <남영호 탐험사진가>


인도 리시케시.인도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었지만 결코 같지 않은 순례자. <남영호 탐험사진가>
인도 강고트리. 사두의 입에서 뿜어진 담배연기가 허공을 맴돌다 불빛을 따라 하늘로 올라갔다. 마치 수행자와 신의 교감을 지켜보는 듯했다. <남영호 탐험사진가>
방글라데시. 우리는 물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갠지스에서 나를 맞이한 것도 사람이었고, 마지막 순간을 배웅하는 것도 바로 사람들이었다. <남영호 탐험사진가>
사진을 찍고, 글을 쓴 남영호는 사진학과를 졸업하고 몇 년간 산악전문지 기자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신라의 고승 혜초의 길을 탐험과 사진이란 방식으로 재조명하고 있다. 2009년 세계에서 처음으로 타클라마칸을 도보 종단에 성공했고 올해 갠지스강 전 구간을 도보와 카약으로 탐험하며 사진으로 기록했다. 그 경험을 방송, 기고, 강연 등의 다양한 형태로 공유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앞으로도 역사 속 우리의 길을 찾아 나서는 탐험과 사진작업을 지속할 계획이다.


내가 이곳에서 살지 않을까? 황홀함에 점점 빠져든다. ⓒ이형수 (※사진을 클릭하시면, 큰 이미지로 화보를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내 삶에서 실제로 유령을 본적은 없다. 유령은 고사하고, 가위에 눌려본 적도 없다. 하지만 꼭 유령을 만나보고 싶었고, 마치 만날 것만 같았던 장소가 있었다. 사람을 놀래키는 '한(悍)' 많은 유령이 아니라, 미래에서 온 여행객에게 과거의 이야기를 조용하게 들려줄 것만 같은 그런 유령.

내가 묵었던 숙소는 'Shiva guesthouse' 바로 옆이었다. 밤마다 옥상에 올라가 의자에 앉아있으면 저 장엄한 짜투르부즈(Chaturbhuj)이 음산하면서도, 고요함을 가져다 주었다. 밤마다 저 안에서는 무슨일이 일어날까 궁금해하면서… ⓒ이형수
인도 북중부를 여행하다 우연히 들른곳, Orchaa에서 나는 그런 유령을 만나고 싶었다.

오르차는 8~90년대 히피여행자들의 주 서식지(?)였지만, 이제는 꽤나 알려진 탓에, 한국여행자도 곧잘 들르는 곳이다. 그런 얘기를 듣고 방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처음에는 이곳의 매력에 대해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은 하루가 지날수록 내게는 알수 없는 매력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인도 특유의 향 냄새도,여기저기 널려있는 소똥들도, 형형색색의 사리도, 털복숭이 사두들도 아니었다.

내게 신비스러운 매력으로 다가온건 해질녘 이곳 오르차의 고성에서 느낄수 있는 신비스러운 기운이었다. 마치 이 고성에서 밤을 지새면, 17세기의 유령들이 나와, 만찬을 즐기고, 또 내게 말을 걸 것만 같았다.

Orchaa palace에는 왕과 관련된 이야기나 그당시 풍습들이 벽화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 언어는 모르지만 벽화를 통하여 이야기를 볼 수 있었다. ⓒ이형수
오르차라는 주변을 합쳐 전체 만명 밖에 안되는 이 조그만 마을에는 1501년  이후 오르차의 왕이 된 분델라라는 지도자가 세운 고성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Orchaa의 뜻은 이곳 분위기와 아주 걸맞게 숨겨진 장소(hidden place)라고 한다.

오르차에 있는 동안에도 나는 혼자였다. 덕분에 남눈치 볼 필요없이 낮동안에 부지런히 혼자 고성들을 돌아보았고, 어떨때는 닫힌 문의 깨진 틈사이로, 올라가지 말아야 되는 좁은 계단 통로를 통해 탑의 꼭대기에 올라가보기도 했다. 오르차의 고성들은 특별히 관리자가 없었지만 아름답게 보존되어 있었다.

베트와 강(Betwa)에 비친 사원들은 마치 한폭의 그림과 같다. ⓒ이형수

낮동안에는 마을 사람들도 저마다 분주하게 지나다니고, 별다른 감흥이 없을지도… 그러나 해질녘이 되면,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듯 당시 왕국의 흥망성쇠, 전쟁과 암투, 사랑, 충성, 평화, 탄압 등 모든 사건들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듯한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곤 했다.

내가 제일 좋아했던 둥근사원. 해질녘에 사원에 홀로 문틈 사이로 저 베트와(betwa)강을 바라보았다. 뒤에서 누군가와 함께 내려다 보는 착각이 들었다. ⓒ이형수

ⓒ 손수원

인도는 영적인 여행지라는 말을 많이 한다. 인도는 휴식을 위한 곳이 아닌, 무언가 얻기 위해 떠난다는 말도 많이 듣는다. 하지만 굳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떠났던 것은 아니다. 나의 인도 여행 3개월의 첫 시작은 ‘가깝고 싸니까’였다. 당연히 나의 무계획 인도 여행은 좌충우돌 그 자체였다.

인디라간디국제공항. 자정이 지나 비행기에서 내린 나는 고온다습한 공기에 적응할 틈도 없이 공항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걱정해야 할 판이다. 인도에 대한 가이드북에서는 늦은 밤에 공항 밖으로 나오는 것은 위험하니 아예 공항 안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나오는 게 낫다고 적어놨을 정도니 인도가 처음인 여행객에게는 진땀이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럴 때는 그냥 포기하고 공항의 딱딱한 의자에 몸을 맡기거나 용기를 내 바깥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객기로 밖으로 나가면 후회할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이때는 프리페이드(pre-paid) 택시를 이용하는 편이 낫다. 공항 내에 있는 부스에서 미리 택시비를 내고 지정된 택시를 타는 것인데, 이것 또한 사기를 당할 확률이 있지만 그래도 맨몸으로 나가 택시를 잡는 것보다는 안전하고 믿을 만하다(최근에는 공항과 뉴델리 기차역이 지하철로 연결되어 훨씬 이동하기 수월해졌다).

하지만 택시를 무사히 탔다하더라도 안심하긴 이르다. 브레이크 라이닝 타는 냄새가 진동하는 오래된 택시는 차선 무시, 깜빡이 무시, 사이드 무시다. ‘제대로 된’ 운전사를 만나면 한국의 총알택시는 얼마나 얌전하게(?) 운전하는 건지를 깨닫게 될 정도다.

ⓒ 손수원

여행자들의 베이스캠프 파하르간지
델리에서 여행자들이 베이스캠프로 삼는 곳은 뉴델리 기차역 맞은편의 파하르간지(Pahar Ganj)다. 대략 시장 거리 정도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특히 델리의 파하르간지는 인도를 여행하는 세계 각국의 여행자들이 모여드는 ‘여행자 거리’다.
새벽에 도착해 생각지도 않은 거금 400Rs(루피)극 내고 첫 숙소를 잡고 방으로 들어간 순간,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덩그러니 방 한가운데 놓인 침대는 그렇다 치고, 땀범벅이 된 몸을 씻으려 화장실 문을 여니 엄지 손가락만 한 바퀴벌레가 ‘안녕?’ 하고 더듬이를 흔들어댄다. 수세식이라 믿었던 변기는 양동이로 직접 물을 흘려보내야 하고, 석회질이 듬뿍 함유된 수돗물은 누군가가 ‘조금이라도 마시면 폭풍 설사를 경험하게 될 것’ 이라고 겁을 준지라 비좁은 화장실에서 입을 앙 다문 채 큰 맥주잔만 한 양동이로 겨우 땀만 씻어낼 수밖에 없었다.

사람과 릭샤, 소와 개가 한 공간에서 공존하는 델리의 파하르간즈는 인도의 과거와 오늘, 미래까지도 공존하는 장소다. ⓒ 손수원

뜬눈으로 밤을 보내고 거리로 나오자 현지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사람이 끄는 릭샤(인력거)부터 사이클릭샤와 오토릭샤, 거기에 사람과 개, 소가 뒤섞인 풍경은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다. 아침 청소 시간인지 아낙들은 연신 바닥을 쓸어내지만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먼지만 날리게 만들 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노 프라블럼(No problem)’이다. 먼지가 입에 모두 들어가도, 소가 길 한복판에 떡하고 서서 길이 막혀 꿈쩍하지 못해도 그저 ‘노 프라블럼’이다. 역시 인도인들의 무한 긍정의 힘은 대단하다. 길가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이는 인도가 낯선 외국여행객들뿐이다.

1 길에서 사모사와 과일 등을 파는 노점상인. 처음에는 먹을 엄두가 나지 않지만 한번 맛들이면 헤어나올 수 없을 정도로 맛있다. 2 인도의 소는 못먹는 것이 없다. 과일 껍질은 물론, 종이와 비닐까지도 아주 잘 먹는다. 3 카메라를 든 외국인은 인도 아이들에게 더없이 좋은 구경거리이자 놀잇거리여서 카메라만 들이대면 알아서 재밌는 포즈를 척척 연출해준다. ⓒ 손수원
현지 식당에서 카레와 차파티(밀가루로 만든 납작한 빵)로 요기를 하는데, 향신료 냄새가 어찌나 심한지 반도 채 먹지 못했다. 한국에서 먹던 카레와 다를 거라는 것은 각오하고 있었지만 마른입에 한술 떠먹으려니 이것도 고역이다. 앞으로 험난한 여행이 될 거란 예감이 든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있는 나를 보고 인도인 사장은 웃으며 “Are you happy?”라고 묻는다. 나 또한 억지웃음을 지으며 “No problem”이라고 말해주었다. 결국 인도인 사장은 한사코 괜찮다는 나를 위해 카레를 리필해주었다.

무굴제국의 부귀영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올드델리의 붉은 성. 일단 규모에서부터 압도된다. ⓒ 손수원

야무나강이 흐르는 올드델리와 뉴델리
델리는 고대부터 수없이 많은 주인이 바뀌었다. 왕조의 교체는 물론, 이웃나라의 침략으로 힌두교와 이슬람문화가 공존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델리는 크게 올드델리와 뉴델리로 구분할 수 있다. 올드델리는 수천 년에 걸쳐 생긴 도시다. 무굴제국 시절 황제 샤자한은 건축에 대해 굉장한 집착을 보였는데, 올드델리 또한 그의 손을 거치면서 성벽도시로 탈바꿈했다. 반면 뉴델리는 인도를 정복했던 영국에 의해 건설되어 가지런한 시가지와 영국풍의 건물이 인상적이다.

인도에서의 첫 여정은 붉은 성으로 시작하기로 한다. 흔히 ‘랄 킬라(LalQuila. 랄은 붉은, 킬라는 성을 뜻한다)’라고 불리는 붉은 성은 델리에서 도 올드델리에 속하는 곳에 있는데, 아그라의 타지마할을 세운 샤자한이 아그라에서 델리로 수도를 옮기면서 지은 것으로 유명하며 그의 일생에서 마지막으로 세운 성으로 알려져 있다. 붉은 성 입장료는 250Rs. 우리나라 돈으로 약 7000원 정도다. 웬만한 게스트하우스 하루치 숙박비에 맞멎는 금액이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현지인들은 단돈 10Rs란 것이다. 외국인 여행객들의 입장료가 무려 25배나 더 비싼 셈.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지만 어쩌랴 난‘Incredible India’에 들어와 있는 걸….

1 붉은 성으로 들어가는 입구. 테러사건이 종종 일어나는 인도인지라 검색이 철저하다. 2 인도에서 흰 소는 신과 같은 신성한 대접을 받는다. ⓒ 손수원

붉은 성은 200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정복은 하지 않고 침략만 당한 인도의 역사 속에서 붉은 성도 세포이 항쟁 대 많은 부분이 파괴되고 훼손되었다. 비록 영국 식민지 시절에 일부 복원되었다고는 하나 너무도 성의 없이-기술의 부족함일지 모르겠지만- 시멘트를 덕지덕지 발라놓거나 대충 페인트칠을 한 티가 난다. 하지만 그와는 상관없이 붉은 성은 성 자체의 위용과 성 안의 아름다운 건축물만으로도 예술 작품 그 이상의 볼거리를 준다. 무굴의 황제들이 앉아 손님을 맞이했을 디와니카스(Diwan-i-khas)는 비싼 보석으로 치장이 되어있었다.

샤자한은 10년에 걸쳐 이 성을 완성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이 성에서 지내지 못했다. 그가 델리로 수도를 옮기기도 전에 그의 아들 아우랑제브에 의해 왕좌를 빼앗기고 아그라 포트에 감금해버렸기 때문이다. 붉은 성 안은 여느 평범한 공원과 같은 분위기가 난다. 현지인에게는 소풍을 즐길 수 있는 장소이고, 델리의 무더운 날씨에 적응을 하지 못하는 여행객들에게는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는 휴식처가 되어 준다.

붉은 성 맞은편 언덕에 당당한 위용을 뽐내며 서 있는 건물은 인도 최대의 모스크인 자미 마스지드(Jami Masjid)다. 인도는 힌두교의 나라지만 델리는 무슬림의 영향력이 큰 탓에 이렇게 이슬람 사원이 공존한다. 인도 최대의 시장 ‘찬드니촉(Chandni Chowk)’은 그야말로 사람의 바다다. 평일인데도 사람에 치여 앞으로 나가기는커녕 오히려 뒤로 밀려나기 일쑤다. 찻길과 인도가 따로 없는데다 오토릭샤와 오토바이, 자동차는 연방 경적을 울려댄다. 우리나라에서는 욕먹을 짓이지만 인도에서는 경적을 울려주는 것이 예의다. 그래서 자동차나 오토릭샤 뒤를 보
면 으레 ‘Horn Please’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사이드미러조차도 자동차의 옵션인 인도에서는 경적이 운전의 일상인 셈이다.

1 델리의 중심을 유유히 흐르는 야무나강. 이 강은 후에 갠지스강과 합쳐서 바라나시의 타즈마할을 지난다. 2 인도 최대의 시장인 찬드니촉. 사람이 붐비면 ‘10억 인구의 나라’를 몸으로 느낄 수 있다. 3 인도에서 가장 자주 먹게 되는 비리야니. 한국이 볶음밥과 비슷하지만 쌀 자체가 달라 금방 허기가 진다. 4 영국풍 분위기가 물씬 느껴지는 코넛 플레이스는 인도에서도 가장 현대적인 느낌이 나는 곳이다. ⓒ 손수원

찬드니촉에서는 10억 인구란 말이 실감 난다. 남대문 시장, 동대문 시장만 해도 눈이 핑핑 돌아갈 정도인데, 찬드니촉에서는 그런 비교조차되지 않는다. 외국인 여행객으로서 물건 하나 사기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게 느껴질 정도다. 사람의 물결은 그렇다 치고 장사꾼의 호객 행위는 기가 찰 정도다. 50Rs도 안 되는 물건을 두고 300Rs부터 불러 크게 선심 쓴다는 표정으로 150Rs를 부른다. 이럴 때는 미련 없이 뒤돌아서면 그만이다. 5초도 안 되어 따라와선 “Your last price?”를 부르기 때문이다. 당연히 처음 가격보다도 싼 40Rs를 불러도 거래는 이뤄진다. 이것이 바로 인도의 ‘local price’다. 이런 흥정 과정이 처음에는 무척 짜증나고 기분 상하지만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인도인들과 흥정하기 만큼 재미있는 일도 없을 정도다. 그런 와중에도 인도인들은 기분 상한 표정을 짓지 않는다. 비싸게 팔면 좋은 것이고 자기가 손해를 보더라도 그것은 신의 뜻이기 때문이다.

정신없는 올드델리와는 달리 뉴델리 쪽은 비교적 정리가 잘 된 편이다. 로터리가 여기저기 뒤섞여 신호등도 없는 도로는 여전히 눈을 핑핑 돌게 만들지만 코넛 플레이스(Connaught Place)나 인디아 게이트 쪽으로 발길을 돌리면 현대를 수용한 인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맥도널드와 커피데이 등 외식 체인점은 물론, 리복, 나이키, 아디다스 매장도 곳곳에 들어와 있다. 나름 스카이라인을 형성한 현대적인 건물들도 올드델리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심지어 이곳엔 지하철역도 들어와 있고, 지하상가도 있으니 여긴 서울과 별반 다를 것이 없을 정도다. 그래서 대부분의 여행객들은 일부러 시간을 내어 델리를 둘러보지 않는다. 흔히 골든 트라이앵글(델리-아그라-자이푸르)이라고 불리는 단기간 인도 여행의 시작점이자 끝이기에 남는 시간 동안 둘러보면 그만인곳이다. 더구나 3개월 정도의 장기간 여행자라면 델리는 최소 3~4번은 들러야 하는 곳이다.

인도의 첫 여정인 델리는 이렇게 인도의 사람들에게 적응하는 과정이다. 그들이 입에 달고 다니는 ‘No problem’의 뜻을 1/10이라도 이해한다면 더 이상 인도는 ‘충격과 공포의 나라’가 아닌 ‘가장 자유롭고 편안한 나라’로 여행자의 마음속으로 들어온다.


부처님의 땅에서 만난 인도인 동생 Anup

수자타 마을에서 보이는 전정각산의 모습. ⓒ 이형수 ※사진을 클릭하시면 큰 이미지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보드가야에 도착했을때는 10월 초순, 2개월간 내 몸이 이미 인도의 무더위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보드가야에서 만난 더위는 인도 여행의 어느때보다 참을 수 없을만큼 힘들었다. 10분마다 물을 계속 마셔주지 않으면 갈증을 느낄 정도였다.

보드가야 옆을 흐르는 큰 강은 무릎에도 차지 않을만큼 차츰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보드가야 (또는 부다가야라고도 한다)는 전 세계 불자들의 최고의 성지이다. 후에 부처가 된 싯다르타왕자가, 보리수 나무 아래서 마침내 해탈(Nirvana)에 이르렀던 바로 그 장소이기 때문이다.

마하보디 사원이라고 불리는 이 성지에 가면 아주 커다란 보리수(Bodhi tree)가 있다. 부처가 열반을 할 당시 보리수나무는 불교를 반대하던 왕에 의해 잘려져 나갔었다. 지금 성지에 자리잡은 보리수는 스리랑카의 한 공주가 원래 보리수를 스리랑카에 일부 옮겨다 키웠다가 그 후손을 다시 가져다 놓은 것이라고 한다. 매일 전세계의 수많은 승려와 불자들이 이 곳을 찾아, 절을 하고, 경전을 읽고, 명상을 한다.

(왼쪽부터) 마하보디 사원의 마하보디 대탑의 모습. 경전을 외고 있는 태국에서 온 비구니. 보디 사원 안에서 수련을 하고 있는 승려. ⓒ 이형수
우리나라에도 깊은 뿌리를 두고 있는 불교의 최초 발원지인 인도에서, 가장 성스러운 성지인 보드가야를 지나칠 수는 없었다. 당초에 보드가야에서 부처의 고뇌와 가르침을 조금이라도 느껴보려 했지만, 나는 불자도 아니었을 뿐더러, 10월 건기의 보드가야는 도착한 직후부터 나의 체력과 인내심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나는 당시 미얀마 스님들이 머무르는 수도원인 Vihara라고 하는 곳에 머물렀는데, 아침 겸 점심은 주로 Vihara앞에 있는 너저분한 식당에서 해결하곤 했다. 다시 생각해도 보드가야의 주변식당은 다른 인도지방에 비해 형편없는 수준으로 기억되지만, 그 더위에 어떤 음식이 맛있었으랴?

한 날은, 맛없는 고무 같은 오믈렛을 질겅질겅 씹고 있는데, 옆 테이블의 한 인도청년이 일본말로 인사를 해왔다. 일본인처럼 보이나 보지? 그때까지 방문했던 여느 다른 인도지방의 젊은 애들처럼, ‘뭐 한건 해먹을건 없나’ 찔러볼 수도 있고, 그냥 심심하니 말장난이나 하자는 식 일수도 있었다.

보드가야 마을 풍경. ⓒ 이형수
어떤 쪽이든, 덥고 짜증나기는 마찬가지라 퉁명스럽게, 일본인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니 이젠 한국말로 인사를 한다. 실실 웃으며, 한국말까지 하니, 왠지 더 사기꾼 같아 보였다.

몇번 말을 안 받아주다가, 계속 옆에서 웃으며 말을 거는데, 무시할 수는 없어, 한 두번 못내 말을 받아주었다. 이름은 Anup, 나이는 한 20대 초반으로 보이고, 하는일은 현재는 무직, 이전에는 어떤 불교방송의 리포터를 맡았다고 한다. 몇 마디 주고받더니, 대뜸 자기 마을을 보여줄 테니 따라 가자고 한다. 더위 때문에 어떤 것도 흥미가 동하지 않는 시기라, 이런들 어떠랴 하는 마음으로 그를 따라 나섰다.

Anup의 집은 수자타(Sujata)라는 마을 안에 있었다. 그는 마을과 주변 사원들을 두루 보여주며, 자신이 아는 흥미로운 부처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었다.

동굴 안에서 먹지 않고, 6년간의 고행을 마친 피골이 상접한 싯다르타에게 맨 처음 우유죽을 대접한 여인인 수자타 이야기부터 재미로 사람의 손가락을 잘라서 목에 걸고 다니던 악인에게 부처가 풀잎을 땐 후, 다시 붙여보라는 얘기를 들려준 후(때어진 풀잎도 다시 붙이지 못하면서, 하물며 사람의 손가락을 어떻게 뗄 수 있냐는 의미) 그 악인이 부처의 제자가 되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풀잎을 흐르는 강에 놓으니, 풀잎이 강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갔던 이야기까지 이전에는 모르고 있었던 이야기들을 하나 둘씩 해주었다.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그 이야기의 현장에 두발로 서있다고 생각하니, 옛날 속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가는듯한 착각도 들었다.

전정각산 주변 풍경, 아이들은 학교에 가야할 나이지만, 전정각산의 고행동굴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고 있었다. ⓒ 이형수
나에게 조금은 과도한 친절을 베풀어주던 Anup과는 금새 친해지게 되었고, 그와 대화를 하면서, 정직한 사람을 의심했던 내가 부끄럽게 느껴졌다. 다음 날도 나는 Anup의 오토바이로, 부처의 고행 경로 한군데를 방문했다. 바로 유명한 전정각산 싯다르타의 고행동굴이었다.

Anup이 이곳 저곳 보여주긴 했지만, Anup과 더 친해지게 된 계기는 따로 있었다. Anup은 나와 지낸 3일째, 그가 추진하고 있는 조그만 사업을 조심스레 보여주었다. 그것은 고아와 가난한 마을아이들을 위한 학교.

연령대가 다른 아이들이 시멘트 바닥에 앉아서 열심히 수업을 듣는 모습. ⓒ 이형수
손수 벽돌과 시멘트를 사와서 논 한가운데, 조그만 건물을 지었고, 그 안에 두 칸을 만들어 선생님의 사무실과 교실을 만들었다. 학교라고 할 수조차 없을 만큼, 허름한, 창문도 없고, 비나 겨우 피할 수 있는 공간이었지만, 내가 그 교실을 방문한 그날 아침, 그 아이들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는 이게 학교라는 사실을 증명하는데 충분했다. 아침에 건물에 들어가니, Anup이 개인적으로 돈을 겨우 모아 고용한 과외 선생님 한분이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나와 Anup이 들어서니 아이들이 일제히 일어나, “Good morning Sir!”라고 외쳤다. 당황한 마음에 급히 애들을 앉히고 보니, 그 조그만 공간 안에 20명이 넘는 아이들이 옹기종기 앉아 있었다. 나이가 4살 남짓한 아이부터, 16살쯤 되는 아이까지 한 교실에서 같이 배우고 있었다. 선생님이 4살 또래 애들을 가르칠때 그 나머지 연령대 아이들은 숙제를 혼자 푸는 식이었다.

(좌) Anup이 싼 월급을 주고 고용한 비정규 선생님, 전과목을 가르친다. 영어만 봤을때 문법을 많이 틀리게 가르쳐주고 있었다. (우) 숙제를 안해온 죄로 벌을 서는 모습. 쪼그려서 고개를 숙인 자세로 벌을 받는다. 벌을 서는 모습이 이채롭다. ⓒ 이형수
이상하게도 ‘이런 수업이 과연 돌아갈까?’ 하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만약 그런 생각이 들었었다면, ‘이런 건물에 아이들이 공부하러 올까?’라는 생각부터 먼저 들었어야 했을 것이다.

그렇게 교실을 방문한 첫날, 나는 일일교사가 되었다. 눈에 넣어도 아플 것 같지 않은 아이들이 알파벳이나 산수 숙제를 가지고 와서 힌디도 못하는 내게 검사를 맡으면, 틀린 것이 있는지 체크하고 사인을 해주는 역할을 했다.

학교도 가지않고, 주변 웅덩이에서 고기를 잡는 마을 아이들 모습. ⓒ 이형수
부처의 역사속 마을인 수자타 마을에는 불행히도,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이 반을 넘어선다. 인도에서 가장 못사는 주(州)인 비하르주의 어떤 마을이나 마찬가지다.
우리처럼 초등교육이 의무교육이 아닌 인도에는 글 한자라도 배우려면 돈을 내고 학교를 가야한다. 불교의 최고 성지이며, 매년 수많은 불교 순례자가 오는 그 유명한 보드가야의 바로 옆 마을은 이렇게 가난 때문에 교육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수없이 많다. 여담이지만, 부처가 태어난 불교 성지인 네팔의 룸비니도 주변 마을이 가난하며, 교육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다.

아이들의 해맑은 모습과 작은 칠판. 닳아 거의 없어진 분필로 알파벳을 적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 이형수
누군가는 이런 불쌍한 아이들을 도와야 했지만 그렇게 많은 순례자와 지역 유지들,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고 한다. 농사꾼 출신이었던 Anup라는 20대 청년이 그가 불교방송 리포터로 모은 돈과, 여기저기 관광객들이 돌아가면서 후원해주던 자투리 돈을 모아 학교를 어렵게 꾸려나가고 있던 것이다. Anup은 또 부모가 아프거나, 내버리듯 한 아이들을 주변 마을에서 데려와, 가족처럼 키우고 있었다. 결혼도 안한 청년이 돌봐주는 아이가 6명이나 되었다. 하지만 그의 큰 대의와는 달리, 사정은 좋지 않았다. 내가 방문한 날도 개인적으로 고용한 선생님이 따로 Anup을 불러 무언가를 심각하게 이야기 하였다. 나중에 Anup에게 무슨 일인지 물어보니, 선생님에게 줄 월급이 3달치가 밀려있다고 했다.

또, 어렵게 건물 옆에 아이들의 식수를 위해 설치한 수도도 어느 누군가가 밤에 뜯어갔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보드가야에서 나와 Anup이 같이 밥을 먹고 어울려 다닐때는, 주변 청년들이 질투심에 그를 사기꾼으로 모함하기도 했다. 이런 환경 속에서도 그는 그만의 학교를 힘들게 꾸려나가고 있을 것이다.

두르가푸자때는 저렇게 조금 촌스러운 인형극을 곳곳에서 한다. 내용은 두르가 여신이 악마를 처치하는 내용. 인도인 조차도 매년 보는 내용이라 흥미는 없지만, 신이 자신들을 악마로부터 보호해준다는 믿음으로 본다고 한다. ⓒ 이형수
한편, 내가 있을 무렵에는 두르가푸자(Durga Puja)라는 축제가 한창이었다. Anup과 큰 도시인 Patna까지 가서, 인도 영화도 보고, 두르가푸자의 축제 인파 속에서 즐기기도 했다. 두르가푸자는 두르가라는 여신이 악마를 처치한걸 기리는 날인데, 두르가푸자 축제 때는 학교도 휴강이라, Anup과 함께 Patna에 다녀온 다음 날에는, Anup이 돌보고 있는 아이들을 데리고, 마을 축제를 다니며, 구경도 시켜주고, 맛난 것도 사주었다.

축제일이라, 때때옷으로 한껏 멋을 낸 Anup의 아이들. ⓒ 이형수
애들과 즐겁게 놀아준 그 뒷날, 나는 내 여행을 통틀어 가장 지독한 장염에 걸렸다. 처음에는 그냥 설사이려니 했지만, 하루에도 20번이 넘게 화장실을 들락날락 거렸다. 아마도 축제때 먹었던 가내제조 아이스크림이 문제였던 것 같다.(인도사람들은 인도 물에 내성이 있지만, 나 같은 여행객들은 토종 바이러스나 균에 대한 항체가 없다) 3일간 그렇게 시름시름 앓다가, Anup의 권유로 병원에 가게 되었다.

병원에서 독한 항생제를 맞는 몇 시간 동안, Anup이 나를 지켜주었다. 치료가 끝난 후 의사가 나에게 현지인의 몇배가 넘는 바가지 요금을 매겼다. 다행이도 Anup이 의사에 항의하여 바가지 요금을 받아낼 수 있게 도와주었다. (삐걱거리는 녹슨 철제 간이 침대에 누워 링거를 맞는데, 침대 비용을 숙소 비용보다 비싸게 받았다. 링거만 꼽아줬는데도 간호 비용이라는 명목으로 몇 만원을 청구하였다.)

떠나기 전날, Anup과 아이들과 함께. ⓒ 이형수
당초 보드가야에 올때는 약 3~4일정도 머물 생각이었었지만, Anup과 그의 가족이 된 고아들과 잊지 못할 추억을 쌓으며 10일정도 머물렀다. Anup과는 아직도 brother라고 부르며 서로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 인도를 여행하며 친구가 될만한 인도인은 심심치않게 만나곤 했지만, 친구이상 마치 가족처럼 서로에게 애틋한 정이 있었던 사람은 Anup이 유일하다.

다시 인도를 돌아갈 수 있는 날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인도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가게될 곳이 Anup의 집이라는 사실은 언제가 되었든 변함 없을 것이다. 그때까지 나의 인도인 동생 Anup의 사랑의 학교가 번창하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칠까한다.


인도에 오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른다는 바라나시(Varanasi). 바라나시에 무엇이 있기에 그 많은 사람은 바라나시에 가는가?

인도 바라나시에 있는 가장 큰 화장터. ⓒ 이형수

어떤 사람들은 바라나시를 ‘삶과 죽음의 경계’, ‘영혼의 쉼터’와 같은 거창한 이야기들을 한다. 하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은 그보다는 실체적인 것들을 찾아간다.

그 실체적인 것 중에서 가장 먼저 찾는 것이 바로 화장터다. 어느 문화에서도 화장터를 일반사람에게 공개하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이곳은 매일 수 없이 시체를 태운 재와 연기를 볼 수 있다. 가까이 다가가니 확연히 상황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본다고 그다지 흥미로운 일은 아니다.

인도 바라나시 Ghat의 낮 풍경. ⓒ 이형수

인도 곳곳에 강을 옆에 둔 화장터가 있긴 하지만, 가장 성스러운 갠지스 강(Ganges)의 화장터와는 감히 규모나 비용, 인기에서 비교조차 할 수 없다. 매년 약 10만 명 이상의 시신이 갠지스 강(강가 강)의 화장터에 실려온다. 화장터로 가는 좁은 골목에서는 “Ram nam satya hai”라고 외치며 시신을 든 남성들을 몇 분 간격으로 계속 볼 수 있다.

* Ram nam satya hai : ‘Ram의 이름은 진실이다.’라는 뜻인데, 여기서 Ram은 라마 신을 말한다. 이 말은 ‘죽은 사람은 라마신의 진실(숨)이 없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매일 밤,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식을 한다. 의식을 보기 위해, 많은 인도인과 여행자들이 모인다. ⓒ 이형수
갠지스 강(강가 강)에서 화장을 이렇게 헌신적으로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힌두교도 불교와 마찬가지로 윤회 사상이 있다. 가장 성스러운 강에서 사후를 맞는 것이 다음 세상에 나올 때 도움이 되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이런 성스러운 갠지스 강(강가 강)의 생성에는 여러 설이 있지만, 주민들은 힌두교에서 가장 추앙받는 신 중의 하나인 시바(시와) 신이 전 세계를 집어삼킬 만한 큰물이 떨어지는 것을 자신의 머리로 받아 강으로 흐르게 했다는 설을 가장 많이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새벽녘, 우리를 배로 안내하는 소년 ⓒ 이형수
화장터에 가보면, 화장되는 장소도 사회 계급에 따라, 돈의 여유에 따라 다르며 태우는 나무의 종류도 다르다. 가장 비싼 땔감으로는 Sandal Wood(백단향) 종류가 있으며 부자들은 땔감으로 몇 백만 원이 들어간다고 했다. 화장 후, 아들이나 친지가 시체의 가슴뼈를 모아서 배를 타고 갠지스 강(강가 강)에 던진다.

갠지스 강(강가 강)은 종교적으로는 성스러울지는 몰라도, 과학적으로는 아주 오염되어 있다. 책에서는 하천의 대장균 검출 한계치의 30배가 넘는 대장균이 살고 있다고 한다. 화장된 시체와 화장되지 않은 인간의 시체(아이들, 독사에 물린 사람, 임산부, 사두, 나병환자는 순수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화장하지 않는다)와 동물의 시체가 강으로 들어오고, 하수구도 강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건기에는 유속도 느려진다. 침전물들은 유속이 느린 곳에 퇴적된다.

성스러운 목욕을 하는 인도인들. 화장터와 Ghat의 반대편 강가에 혹자는 시체가 많이 몰린다고 한다. 배를 타고 강 반대편을 향해 출발한지 5분도 채 안 되어, 보트의 줄에 걸려 떠내려가지 않는 한 남자의 시체를 봤다. ⓒ 이형수

이런 곳에서 매일 목욕을 하고, 그 물을 마시는 광경이 타지인에게는 신기하다 못 해, 존경스럽기도 하다. 그들만의 성스러운 의식과 행동들이 바라나시를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과학적으로는 오염되었지만, 종교적으로는 순수한 이곳… 모순적인 매력을 지닌 성스러운 이 젖줄을 보기 위해 수 많은 순례자가 찾으며, 축제나 성스러운 기간에는 그 수가 가히 엄청나다고 한다. 이런 바라나시의 풍경이 인터넷에 소개되어 있겠지만, 나의 눈을 통해 본 바라나시의 풍경을 소개한다.

바라나시(Varanasi)의 가장 신비로운 시간은 아침이다. 갠지스 강(강가 강)의 물안개가 신비스럽게 수면을 감돈다. 순례자들은 아침 일찍 목욕재계하고, 목욕이 끝난 후 명상을 하는 순례자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여행객이나 관광객들은 아침 일찍 배를 빌려, 이런 광경을 강 중앙에서 바라보곤 한다.


 현세의 끝에서 - 모순적인 매력이 있는 '인도 바라나시'사진으로 보는 Varanasi는 매력적인 장소지만, 이상하게도 Varanasi에서 며칠 되지 않아 지쳐버렸다. 매일같이 들어와서, 아침저녁마다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는 관광객들과 마리화나를 팔려고 끈질기게 붙는 젊은 인도 애들, 인도의 여느 도시나 마찬가지로 인파로 북적대는 바라나시에서 잠시 방향성을 잃었다고나 할까?

매일 같은 광경 속에서 특별히 할 일을 찾지 못한 나는 3일째부터는 강가에서 멍하니 강을 바라다보는 일이 잦아졌다. 때로는 시체가 떠내려오는 것도 보고, 때로는 배를 빌려 저 멀리 강 건너편에 혼자 노를 저어 가볼까 생각도 해봤다. 여행하다가 한 곳에 며칠 있게 되면, 그래도 마음에 드는 장소가 생기게 되고, 다른 곳보다 그곳에 자주 가게 되곤 하는데. Varanasi에도 그런 곳이 있었다. 지금은 그 Ghat이름이 생각이 나지 않지만, 사람들의 인적이 뜸했던 곳이었던 것만은 기억한다.

며칠 그 Ghat에서 앉아서 강을 쳐다보니, 아는 사람이 한 명 생겼다.

처음 만난을 때 Babu, 연주해달라는 부탁을 하지도 않았지만, 연주를 선보여 주었다. ⓒ 이형수

 

빠뿌의 딸 무갈 ⓒ 이형수
그 사람도 나만큼 외로이 앉아서 강가를 멍하니 쳐다보곤 했다. 그 사람 앞에서는 아들로 보이는 4~5살 된 아이가 여기저기 혼자서 뛰놀곤 했다. 이 남자의 이름은 빠뿌(Babu), 멋들어지게 기른 콧수염에, 여태껏 내가 보지 못한 악기를 하나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아쟁처럼 키는 현악기인데, 빠뿌 말로는 라자스탄 악기인 ‘라븐카’라 했다.
라자스탄이라면, 인도의 서쪽인데, 혹시 거기서 왔느냐고 하니, 라자스탄州 자이푸르 변두리 시골에 자기네 집이 있다며, 가족사진을 꺼내 보여준다.

빠뿌와 빠뿌의 딸 무갈, 그리고 동네꼬마 ⓒ 이형수
사진 속에는 무슨 동화처럼 흐릿한 초점에 아리따운 아내 옆에, 전통복장을 말끔히 차려입은 빠뿌가 라븐카를 들고, 호수를 배경으로 앉아 있다. 아이들 사진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사랑스러운 가족을 두고 라자스탄을 왜 떠났느냐고 물어봤다.

그의 얘기인즉, 라자스탄에서 만난 서양 여행객이 있었는데, 자신에게 음악을 배우다, 라자스탄 다음에는 바라나시로 갈 계획이니, 바라나시에서 다시 음악을 가르쳐달라고 했단다. 물론 교습비를 내고 말이다. 빠뿌에게는 그 교습비가 꽤 괜찮은 수입이었던 것 같다. 황당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그 말을 믿고, 빠뿌는 바라나시로 왔고, 하지만 바라나시로 온지 2주가 지났는데도 아직 그를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전화도 없이 어떤 식으로 그를 만나려고 했는지 몰라도, 그 여행객에 대한 믿음이 컸던 만큼 실망도 커 보였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한 주 전부터 시름시름 아파서, 돈벌이도 못하고, 낮 동안에 거의 Ghat에서 누워 지내는 일이 많았다. 그나마, 근처 외국에서 운영하는 무료 진료소가 있어서, 진통제류라도 조금 받아와서 먹고 있었다.

말이 통하지 않아 늘 혼자 놀아야 했던 무갈. ⓒ 이형수
하루는 지나가는 관광객 중에 독일에서 온 간호사가 있어서, 빠뿌를 좀 도와달라고 했더니, “의사를 만나보라”는 뻔한 이야기만 하고 횅하니 가버린다.
의사에게 가볼 만한 처지로 보이는지? 괜히 내가 화가 났었다.

빠뿌와 나는 거의 매일 만났고, 빠뿌의 딸(처음에는 아들인 줄만 알았다)인 무갈과도 금세 친해져, 무갈을 데리고 여기저기 구경도 다니고, 배도 태워주곤 했다.

아픈 모습의 Babu ⓒ 이형수
아버지인 빠뿌가 아프니, 무갈은 늘 혼자 놀아야 했고, 그것도 라자스탄 말이 바라나시에서 쓰는 말과 달라, 친구도 만들기 어려웠다. 매일 같은 옷에다, 아직 뒷 처리도 아버지가 주로 해주는데, 며칠이 지나니 옷에서 냄새도 나고, 씻겨주고 싶은 맘이 한결같았으나, 남의 딸을 내가 씻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버지가 아픈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래도 무갈은 해맑게 까르르 웃으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빠뿌와 내가 짜이를 마시면, 어느새 금세 나타나서 자기 것도 시켜서 배달해온다.

빠뿌와 만나는 동안 만 31번째 생일을 맞았는데, 빠뿌가 내 생일 축하곡을 직접 연주해주었다.

내 생일날 곡을 연주해준 Babu. ⓒ이형수

 

매일 몇 잔이고 마시던 설탕과 같던 짜이. ⓒ 이형수
빠뿌, 무갈과 며칠간 계속 지냈지만, 내가 바라나시를 떠나야 하는 날이 하루하루 다가왔다. 마음 같아서는 더 있고 싶었지만, 여행이 1년도 넘어간 시점에 이별과 만남은 싫어도 받아들여야 하는 운명의 고리같이 느껴졌다.

떠나기 전, 빠뿌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래도 뭐라도 한줌 쥐어주는 것 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늘 설탕이 반인 짜이로 배를 채우는 무갈이 안쓰러워 저녁이라도 같이 한끼 사서 먹이라고, 돈을 좀 쥐어줬다. 다음 날 아침에 물어보니, 그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던 협잡꾼한테 사모사(인도식 튀김만두)를 좀 사오라고 시켰는데, 그 길로 날라버렸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그 인간을 같이 보곤 했는데 그날 이후로 볼 수 없었다.

잘 못 먹는 무갈이 안타까워 무갈을 데리고, 근처 한국식당에 가서, 애들이 좋아하는 치킨가스를 사서 먹였더니, 너무 잘 먹었다. 한번은 돈 없는 빠뿌에게 비싼 치킨가스를 사달라고 할까봐, 그 집을 지나쳤더니, 온 동네가 떠나가라고 울어 재꼈다. 할 수 없이 또 사줘야만 했다.

떠나는 날 밤, 내 손에 장난감 헤나로 문양을 그리는 귀여운 무갈. ⓒ 이형수
마지막 떠나는 날 밤, 아쉬움을 달래며 밤늦게까지 이 부녀와 같이 있었다. 빠뿌의 몸도 그렇고, 그 서양여행객이 나타날 일도 없고, 홀로 노는 무갈을 위해서도 최선의 방법은 라자스탄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판단되었다. 라자스탄으로 돌아갈 수 없는 또 다른 어떤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라자스탄으로 가는 것이 나을 것 같다고, 빠뿌를 설득하였다. 그도 그러고 싶다고 동의를 한다. 이미 빠뿌가 돌아갈 차비가 없는 걸 알았기에, 빠뿌와 무갈이 서쪽 자이푸르까지 갈 수 있는 차비를 쥐어주며, 꼭 고향으로 가라고 한번 더 얘기해본다. 빠뿌는 고개만 끄덕일 뿐이다. (사실 후에 자이푸르에서 다시 만나자고, 빠뿌의 조카 핸드폰 번호를 받았었는데, 2주 후 자이푸르에 갔을 때 빠뿌조카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삼촌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바라나시의 밤, 가로등 불 아래 수많은 곤충과 모기떼가 날아다니고, 그 딱딱한 콘크리트 바닥에 잠자리를 피는 그부녀를 두고 나는 그렇게 돌아서야 했다. 죄책감과 아쉬움, 무력함을 같이 느끼며. 언젠가는 빠뿌가 그의 고향 라자스탄으로 돌아가 그의 아내와 아이들과 사진 속 호숫가에 모여 앉아 라븐카를 키고 있을 것을 상상하며….


인도 푸쉬카르 낙타축제
전통춤 공연, 낙타경주, 인도인 신부대회…
다채로운 행사와 볼거리에 놀라

매년 10월~12월중 인도에서 가장 유명한 주인 라자스탄주의 한 중앙에 위치한 작은 마을에서는 아주 흥미로운 축제가 열린다. Pushkar라고 불리는 낙타축제가 바로 그것이다.

낙타축제라고 통틀어 일컫긴 하지만, 크게는 낙타를 사고파는 시장(Camel Fair)과 힌두교도의 축제가 동시에 일어난다. 보통 축제는 5일간 진행되는데, 실제 낙타매매는 축제 전부터 시작해서 축제 첫 2일안에 거의 끝난다. 축제기간에는 수만마리의 낙타, 소, 말등도 함께 거래가 이루어진다.

Pushkar는 산스크리트어로 푸른 연꽃이라는 뜻인데 신들이 거위에게 연꽃을 물려 하늘에서 떨어뜨렸는데 그렇게 떨어진곳이 마침 브라마신이 의식을 행했던 곳이었다고 한다. 연꽃이 떨어진 바로 그곳을 Pushkar라고 부른이후에 마을이름이 되었다. 천지 창조의 신인 Brahma를 숭배하는 temple이 있는 곳은 인도전역을 통틀어 드물다고 한다. 힌두교도의 축제는 pushkar의 한가운데 있는 성스러운 호수에 몸을 담궈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순례자들로 매일같이 넘쳐난다. 특히 5일중 힌두교도들의 숫자가 급격히 증가하는 하루가 있는데 이날은 골목을 걷는것조차 힘이 든다.

골목의 축제인파중
골목의 축제인파중
씹는 담배와 간단한 스낵류를 파는 상인

Pushkar에 오는 pilgrim들과 낙타와 가축을 매매하기 위해 온 상인과 낙타축제를 구경하기 위해 온 여행객들로 영화에 나오는 사막속 바자(Bazzar)를 때로 연상케하는 이곳은 축제기간 동안에는 숙박비도 평소의 몇배씩 뛰곤 한다. 내가 갈 즈음에도 축제 며칠전부터 숙박이 다 예약이 되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실제로 가보니 잘 자리는 꽤 있었다.

축제의 인기를 틈타 자이푸르나 조드푸르, 자이살메르에서부터 방이 없다는 소문을 흘리고 친구한테 알아봐서 어렵게 방을 구해준다는 상술을 써 돈을 많이 받아내는 인도인들이 간혹 있으니 조심해서 알아봐야 한다.

일반 순례자나 여행객들은 호텔이나 게스트하우스 등에서 잠을 자지만 낙타와 가축을 매매하러 라자스탄의 각지에서 온 낙타주인들은 혹시라도 누가 낙타를 훔쳐갈 수도 있으므로 모래사장에 천막을 치고 낙타 옆에서 잠을 잔다. 동이 트는 아침과 해가지는 저녁무렵에 수많은 낙타와 함께 천막 앞에 앉은 사람들이 밥을 해먹는 풍경은 평화스럽기 그지 없다.

동이트는 아침 무렵, 낙타들도 잠에서 깨어난다
낙타를 모는 상인들
라자스탄 사람들은 인도에서도 알아주는 멋쟁이들이다, 멋진 수염과 색색의 터번으로 낙타장수라고는 걸맞지 않을만큼 멋에도 신경을 많이 쓴다.
전통춤을 추는 라자스탄 여인들
Pushkar 낙타축제는 낙타매매로 끝나는 축제가 아니다. 해를 거듭하면서 점정 다채로운 행사와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는데 그중 매년 인기리에 벌어지고 있는 것이 라자스탄의 전통춤 공연, 낙타경주, 낙타 선발대회, 터번감기, 멋진 수염대회, 인도인 신부대회등이다.

라자스탄 남자들의 자랑인 수염대회
야간 공연 및 인도인 신부대회, 외국인여성을 인도 신부처럼 분장하여 이쁜 여인을 선발하는 대회다.
이같이 주최측에서 여는 공연이나 볼거리 외에도 사람이 많이 몰리다보니 야시장처럼 개인들이 펼치는 조그마한 볼거리나 공연도 무시할 수 없다.

밤에도 조그맣게 여기저기 천막을 쳐놓고 공연하는 볼거리들이 있다. 싼 가격에 보는거라 기대에 못 미칠경우가 많지만 축제의 분위기에 젖어들다 보면 그마저도 하나의 추억거리가 된다.

이외에도 pushkar에서는 즐길게 많다. 정말 당찬 여행자라면 낙타를 한마리 사서 사막을 여행을 할 수도 있을 것이고(사실 외국인이 좋은 낙타를 사는 것 부터가 힘들지만) 그렇지 않으면 하루정도 낙타를 빌려 주변을 사파리 해보는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순례자들을 따라 여러가지 사원들을 방문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근처 산정상에 Saraswati등 사원에 올라서면 사막 중앙에 있는 Pushkar가 한눈에 들어오니, 이것 또한 놓치긴 아까운 풍경이다.

Pushkar의 낙타축제는 사진 만으로도 많은 것을 전달할 수 있기에 하고자 하는 말들은 대부분 사진으로 대신 하려 한다.


인도 서부에 자리한 자이살메르는 사막과 초원이 펼쳐지는 황금 도시이다. 900년 전에 세운 황금색 요새에서 아직도 평범한 일상을 만들어내는 풍경은 신비감마저 갖게 한다. 사막을 가로지르는 낙타 사파리는 밤하늘에 수놓인 무수한 별을 선물해 주었다.

현지에 적응한다는 핑계로 델리 파하르간즈에서만 일주일을 하릴없이 보낸 나는 슬슬 몸이 근질근질해지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 라씨 한잔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이곳저곳 시장 곳곳을 둘러보며 현지인들과 짜이(인도식 홍차)를 마시며 싱거운 농담 따먹기를 하는 것도 이제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 델리에만 머물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아무리 계획 없이 인도에 왔더라도 가끔은 ‘눈 호강’을 하고 싶었다. 천장에서 물이 줄줄 새는 현지 극장에 앉아 다음 행선지를 생각했다. 델리에서 가장 흔히 다음 행선지로 삼는 곳은 사막의 도시 ‘자이살메르’나 인도 최고의 보석 타지마할이 있는 ‘아그라’이다. 생각 끝에 이참에 자이살메르로 가서 인도 서쪽의 해안선을 따라 인도 일주를 하리라 마음먹었다. 80일이라는 여정을 남겨두고 ‘과연 그게 가능할까?’ 란 생각은 인도에선 쓸데없는 생각이다. 아무리 철저하게 계획을 짜고 왔다고 해도 아무렇지도 않게 연착이 되는 기차와 운전사 마음대로인 버스 앞에선 모든 것이 신의 뜻일 뿐이다.

1 자이살메르 성안에서 배드민턴을 즐기는 현지인들. 성은 고스란히 그들의 생활공간이다. 2 외국인 관광객에게 거리낌없이 포즈를 취해주는 인도의 아이들. 3 인도의 아낙과 청년들이 성 입구에서 좌판을 벌이고 있다.
황금빛 사막의 도시 자이살메르
델리에서 20시간이 넘는 시간을 기차로 달린 탓에 거의 반죽음이 되어 자이살메르에 도착하자 게스트하우스에서 나온 호객꾼들이 모여든다. 여기저기서 정신없이 자기네 가게로 오라고 손짓을 하지만 한국인들이 자주 찾는다는 이름난 게스트하우스에 묵기로 하고 자이살메르 성으로 향한다. 기차를 타고 오는 과정이 너무 힘들어 이것저것 따지고 잴 힘도 없다. 오토릭샤를 타고 도착한 자이살메르 성은 압도적이다. 언덕 위에 우뚝선 황금색 성은 신비감마저 자아낸다. 거대한 요새 아래에서 사람과 소, 개와 원숭이가 뒤섞여 사는 목가적인 풍경은 인도에서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여행객에게 잠시의 게으름을 강요한다.
여느 성 같으면 당연히 입장료를 받고 관광지역으로 만들었겠지만 자이살메르 성은 관광지 아닌 관광지다. 그도 그럴 것이 성 안에는 아직도 사람들이 집을 짓고 일상을 꾸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이살메르 성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성안은 평범한 인도의 일상이 이어진다. 복잡하게 연결된 골목에선 꼬마들이 크리켓을 즐기고 있고 동네 청년들은 한가로이 여행객에게 농담을 건네거나 기념품을 팔고 있다. 과연 이곳이 900년 전에 지어진 성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그들의 일상은 자연스럽고 평범하다.

1 ‘친구 가격’으로 비싸게 물을 판 머리좋은(!) 인도 청년. 2 인도 특유의 화려한 색이 아름다운 가방들. 자이살메르에서는 낙타 가죽으로 만든 가방이나 신발을 살 수 있다.
“어이~ 친구 친구! 콜라 있어요. 물 있어요. 싸게 줘요. 이리와요.”

어디선가 익숙한 한국말이 들려온다.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니 잘생긴 인도 청년이 자기네 가게에서 물건을 사라며 손짓을 한다. 외국인은 인도 현지의 물을 마실 수 없는 경우가 많아 항상 물을 사들고 다녀야 한다. 1ℓ짜리 생수 한 병에 10Rs~30Rs까지 지역마다, 브랜드마다 그 가격대도 다양하다.

“빠니(물) 하나 주세요.”
“써티 루피예요.”

델리에선 10루피면 살 수 있던 물이 너무 비싸다. 사막지역이라서 물도 귀한 모양이다. “깜까로나(깎아주세요) 플리즈~” 여행객의 필살기인 ‘깎아줘 신공’을 펼치니 청년은 넉살 좋은 웃음을 지어보이며 “투엔티 루피! 코리아 프렌드 프라이스!”를 외친다. 말 한 마디에 무려 10루피나 깎았다. 하지만 ‘이 청년 인심 좋네’라는 생각을 하며 물을 뜯어 마시는 순간, 현지인에게 물 한 병을 10루피에 파는 그. 어이가 없어 노려보니 그는 하늘을 가리키며 “Are you happy?”라고 되묻는다. 역시 인도에선 모든 게 신의 뜻이다. 이제껏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친해졌는데 고작 10루피 때문에 기분이 상하고 싶지 않아 사진이나 한 장 찍으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No problem!” 청년은 바지춤에서 도끼빗을 꺼내더니 가르마를 정성스럽게 정리한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모양이다. 참 황당한 상황이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여기는 인도가 아닌가. 모든 일이 신의 뜻이기를.

타르사막까지 우리를 인도해준 낙타들.
별이 쏟아지는 사막에서 하룻밤 낙타 사파리
자이살메르가 인도 여행객에게 인기가 높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낙타 사파리 덕분이다. 특히 사막이란 것이 없는 한국 사람에겐 자이살메르의 낙타 사파리는 거의 필수 코스처럼 여겨진다. 2만원이 조금 넘는 비용으로 낙타를 타고 사막을 타박타박 걷는 체험은 숨 막히는 모래먼지를 참아가며 이곳에 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숙소에서 지프를 타고 사막 입구로 가니 여덟 마리의 낙타가 숨을 고르고 있다. 큰 눈을 깜빡거리는 낙타는 온순해 보였지만 막상 등에 올라 일어서니 바닥까지 2m는 족히 되어 보인다. 여기서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하지만 오늘 우리를 이끌어줄 낙타몰이꾼은 “You very strongman! No problem! 형님!”이라며 안심시킨다.

낙타몰이꾼의 막내들은 장동건, 소지섭 등의 한국 이름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데, 오늘 우리를 이끌어줄 아이의 이름은 ‘이승기’란다. 자기 친구인 ‘원빈’이는 한국의 한 프로그램에 소개된 후 인기를 끌어 낙타를 샀다고 한다. 자기도 나중엔 그렇게 될 거라며, 일단은 델리에 한번 가보는 것이 소원이란다.
낙타 타기는 크게 위험하지는 않지만 줄을 이어 간격을 촘촘하게 유지해 앞 낙타가 방귀를 뀌거나 뒤의 낙타가 트림이라도 할라치면 어김없이 모래바람보다 고통스러운 순간을 맞게 된다. 게다가 처음 타는 낙타라서 허리가 아픈 것은 둘째 치더라도 엉덩이에 살이 까지는 듯 아프다. 그렇게 2시간 정도를 걸으니 이윽고 타르사막이 모습을 드러낸다. 끝없이 펼쳐지는 모래 언덕과 화살을 쏘듯 따갑게 피부를 파고드는 햇볕은 ‘이곳이 과연 사막이구나’ 하는 생각을 절로 들게 만든다.

엉덩이가 쓰라려 낙타 타기가 더 이상 재미없어 질 무렵, 하룻밤을 묵을‘샘둔’에 도착했다. 우리는 여기에 모포와 침낭을 깔고 야영을 하게 된다. 낙타몰이꾼들이 준비한 저녁 식사는 고작 차파티와 카레 정도였지만 사막이라는 장소에서 먹으니 더욱 맛이 좋다. 물론 밀가루처럼 고운 모래가 입안에서 그대로 씹히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해가 지자 사막은 불빛 하나 없는 칠흑이 되었다. 우리는 장작불에 닭을 구워 먹었는데, 그 냄새가 사막에도 퍼졌는지 개들이 모여든다. 거하게 바비큐와 맥주 한 병을 먹고 난 후 침낭에 누웠다. 사막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온통 별천지다. 그 와중에 하나둘씩 떨어지는 별똥별은 눈물이 날 만큼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시끄럽고 정신없고 혼잡한 인도의 또 다른 한편엔 이렇게 평화롭고 고요하기 그지없는 사막의 밤이 펼쳐지고있었다.

Travel Information
델리에서 자이살메르까지는 기차를 타는 것이 정석이다. 올드델리 기차역에서 약20시간이 걸린다. 기차에는 여러 등급이 있는데, 보통 여행자들은 침대가 있는 SL등급을 많이 탄다. 하지만 20시간 이상 걸리는 자이살메르까지의 여정을 생각하면 3등석 AC나 2등석 슬리퍼를 타는 편이 낫다.
기차역에 도착하면 숙소에서 나온 호객꾼들이 대기하고 있다. 대부분 게스트하우스에서 낙타 사파리까지 함께 운영한다. 사파리를 한다면 방값은 100~150Rs 정도로 무척 싸다. 사파리는 대략 1박 2일 여정에 700Rs 내외를 생각하면 된다. 단, 여행객을 속이는 경우가 많은 만큼 사막코스, 식사 제공 여부, 타는 시간 등을 꼼꼼히 챙겨야 한다. 한국 여행객들은 타이타닉 게스트하우스와 머드미러 게스트하우스를 많이 이용한다. 하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현지에서 정보를 얻는 것이다. 인도는 언제 어떻게 사정이 바뀔지도 모르는 곳이기 때문이다.


인도 펀자브의 암릿사

이미지 크게보기
인도 북서부 암릿사의 골든 템플. 밤에도 화려하게 금빛으로 빛난다. / 케이채
인도 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타지마할이나 바라나시를 떠올린다. 하지만 인도 북쪽에서 살아온 시크(Sikh)족 사람들에게는 타지마할보다 유명하고 바라나시보다 성스러운 장소가 있다. 서북부 펀자브(Punjab) 지역의 암릿사(Amritsa)에 있는 하만디르 사힙(Harmandir Sahib)과 그 안에 있는 골든 템플(Golden Tem ple)이다.

암릿사는 1574년 시크교의 네 번째 지도자였던 구루 람 다스(Guru Ram Das)에 의해 세워졌다. 하만디르 사힙은 다섯 번째 지도자인 구루 아르잔(Guru Arjan)으로부터 처음 계획되어 1588년에 건축에 들어갔고, 1604년에는 시크교의 성전인 구루 그란스 사힙(Guru Granth Sahib)이 자리하게 되었다. 시크족 사람들에게는 가장 성스러운 장소가 되었고 매일 10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성지 순례를 위해 찾아오고 있다.

하만디르 사힙으로 통하는 입구는 동서남북으로 하나씩 있다. 이는 종교와 인종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시크교의 열린 교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구르드와라(gurdwara)라고 불리는 시크교 사원들은 기본적으로 남녀노소 누구나 종교에 상관없이 들어와 그들이 믿는 신을 자유롭게 섬길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로 지어졌기 때문에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 입구 발을 씻는 곳에서 신발을 벗고 발을 씻은 후 스카프를 받아 머리카락을 감싸는 것으로 입장의 예를 지키면 그것으로 입장 준비가 끝난다. 신발은 입구 근처 신발 보관소에 미리 맡긴다.

이미지 크게보기
시크족 사람들. 친절한 미소를 잊지 않는다. /케이채

사원 중앙 골든 템플이 화려한 금빛으로 시선을 잡아끈다. 밤이 되면 그보다 더 화려한 조명이 화려함을 뽐낸다. 꼭대기 지붕에는 황금 750㎏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곳의 성전인 구루 그란스 사힙을 보기 위한 순례객들의 긴 행렬이 이어진다. 하지만 이런 화려함과 달리 하만디르 사힙에서 정말 중요한 장소는 골든 템플을 둘러싸고 있는 사원 내부의 인공 호수다. 암릿 사로바르(Amrit Sarovar)라 불리는 이 호수는 암릿사라는 도시 이름의 기원이 되기도 한 곳이다. 이 호수가 특별한 이유는 치유의 효과를 지닌 성스러운 물로 시크교도들에게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곳을 방문하는 이들은 옷을 벗고 이곳에 몸을 담금으로써 자신들의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다. 남성들은 어디서나 물에 들어갈 수 있지만 여성들의 입수는 여성들만을 위한 전용 구역에서 가능하다.

시크교 사람들의 나눔의 정을 특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사원 서쪽 입구에 있는 구루 카 랑가르(Guru-Ka-Langar)다. 거대한 식당이라고 할 수 있다. 하만디르 사힙을 찾은 이라면 누구라도 무료로 밥을 먹을 수 있다. 끊임없이 거대한 솥에서 국을 끓이고 밀가루 반죽을 빚는다.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자원봉사자들이다. 방문하는 순례자들도 참여해 설거지를 돕거나 요리를 돕는다. 누구나 함께 음식을 나누는 모습에서 따뜻한 온정을 느낄 수 있다. 사원 내부에는 또한 자원봉사자들이 순례자들에게 마실 물을 나눠준다.

화려한 사원의 건축 양식이나 인공 호수에 있다는 영험한 힘보다도 이 장소를 마법처럼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이 시크족 사람들의 이런 따뜻함이다. 인공호수를 끼고 길게 사원을 한 바퀴 돌면서 만나는 다양한 시크교도들은 항상 미소 띤 얼굴로 당신을 대해줄 것이다. 친절한 사람들이 가득한 인도에서도 시크 사람들의 인정은 특별히 빛난다. 시크교를 믿지 않아도 종교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이 성스러운 사원은 똑같은 상냥함으로 여행객의 방문을 환영해준다.

가는길

에어 인디아와 아시아나에서 인도의 델리(Delhi)로 가는 직항편을 운항한다. 델리에서 국내선으로 암릿사까지 한 시간이면 닿을 수 있다. 기차를 타고 10시간 정도 걸려 가는 방법도 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