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이 '러시아의 파리'라 불리는 이르쿠츠크로 날아간다.

대한항공은 오는 29일부터 시베리아의 진주라 불리는 바이칼 호수로 유명한 이르쿠츠크에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2회씩 정기 직항편을 신규 취항한다.

러시아와 몽골의 접경지대에 위치한 이르쿠츠크는 바이칼 호수의 관광 기점으로, 동시베리아 최대의 도시로 경제·문화의 중심지이자 시베리아 철도의 주요 역 중 하나다. 또 '풍요로운 호수'의 의미를 지닌 바이칼 호수는 세계에서 가장 깊은 민물 호수로, 특히 여름철에 시원함까지 느낄 수 있어 전 세계 관광객들로부터 극찬을 받는 아름다운 관광지이기도 하다.

기존에 바이칼 호수로 여행을 가기 위해서는 블라디보스톡 등 다른 러시아 도시들을 경유해서 이동할 수밖에 없어 시간과 비용이 두 배로 들었다. 그렇지만 대한항공의 이번 신규 직항편 취항으로 관광객들의 바이칼 호수 여행이 더욱 편리해질 전망이며 이번 직항노선 취항을 통해 러시아 관광 수요가 대폭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대한항공은 인천-이르쿠츠크 노선에 145석 규모의 B737-800 기종을 투입하며, 출발편은 밤 8시 35분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해 다음 날 오전 0시 45분 이르쿠츠크 공항에, 도착편은 오전 3시 이르쿠츠크 공항을 출발해 같은 날 오전 6시 30분에 인천공항에 도착하게 된다.


동방박사의 유해가 보존되어 있다는 쾰른대성당을 멀리 하자 1949년부터 옛 서독의 수도였던 본이 눈앞에 바로 다가선다. 본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동독과 서독으로 분리되었을 때 40여 년간 서독의 수도로서 독일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무엇보다 본은 우리에게 악성 베토벤의 고향이자 슈만이 라인강에 몸을 던져 자살을 시도했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또한 본과 쾰른 사이에 놓여진 무한질주의 아우토반은 자동차 마니아들에게도 명성이 널리 알려져 있다.

↑ 베토벤 동상과 뮌스터 교회 첨탑이 한 눈에 들어오는 구시가지 광장 

본의 첫인상은 수도라는 선입견과 달리 너무나 소박하고 조용한 도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개의 수도들은 세련된 고층 빌딩이나 화려한 네온사인이 도시를 감싸고, 빌딩 숲 사이로 수많은 자동차의 물결이 흐르며, 잘 차려 입는 도시인의 모습이 그려진다. 하지만 본에 발을 내딛는 순간 이런 것은 하나의 선입견에 불과함을 느끼게 된다. 하늘을 찌를 듯한 고층 빌딩도 없고, 자동차로 인해 교통이 막히는 현상도 볼 수 없다. 그 대신 로마시대 때부터 지어진 대성당과 중세시대 때 건축된 바로크 양식의 고풍스러운 건축물, 시간에 의해 낡아진 옛 시가지 광장 등이 여느 수도와는 다른 분위기를 연출한다. 물론 본이 과거에 수도였기 때문에 눈에 띄는 세련된 거리와 카페, 레스토랑, 호텔 등이 있지만 대체적으로 본의 분위기는 중세풍의 우아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로마시대 때 '카스트라보넨시아'라는 이름으로 명명되었던 본은 16세기 이후 쾰른 대주교 겸 선제후의 궁정도시로 성장하였다. 궁을 둘러싼 귀족들의 집들이 하나둘씩 늘어나면서 본은 독일에서 부유하고 교양이 넘치는 도시로 변모하였다. 많은 귀족과 부를 바탕으로 본이 성장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문화 예술이 화려하게 꽃을 피웠고, 베토벤 같은 위대한 음악가를 배출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베토벤이 태어날 당시 인구는 1만명 정도였지만 지금은 30만명이 훌쩍 넘는다. 여느 도시와는 달리 이런 역사적인 고도임에도 불구하고 본은 생각만큼 번잡스럽지 않다. 프랑크푸르트의 높은 현대식 빌딩이나 뮌헨처럼 높은 시청사처럼 도시를 상징할 만한 건축물이 없다. 굳이 본을 대표하는 건축물을 꼽는다면 본대학이나 베토벤 하우스처럼 18세기에 지어진 바로크 양식의 중산층 집들이다. 어쩌면 소박한 본의 이미지가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이유가 된다.

바로크 양식 건물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는 옛 시가지는 현지인과 관광객들로 인해 활기가 넘쳐난다. 오렌지 빛의 오후 햇살이 뮌스터광장에 뒹굴고, 광장 중심에 세워진 베토벤 동상은 햇살을 받아 더욱 찬란하고 아름답게 빛난다. 그리고 지나치는 노천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베토벤의 음악과 함께 본의 여행은 시작된다. 이 도시에서 제일 먼저 찾게 되는 곳은 단연 베토벤 생가다.

보통 여행의 출발점이 중앙역이나 시청사지만 본에서만큼은 악성 베토벤이 태어난 집부터 시작된다. 대부분 이곳을 찾은 여행자들은 본의 건축물이나 박물관을 관람하기보다는 베토벤이 22세까지 살았던 곳을 찾아가 그의 향기를 쫓는 것이다. 위대한 음악가가 태어난 집과 그가 뛰어놀던 골목길, 부모님 손에 끌려가던 교회, 산책을 즐겼던 라인 강변, 오르간을 연주하던 대성당,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며 음악에 대한 열정을 꽃피웠던 선술집 등 그와 관련된 유적지는 본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바로크 양식의 두툼한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짙은 담쟁이 잎 사이로 여러 개의 베토벤 흉상이 여행자들을 기다린다. 생가는 외부에서 보면 다른 집과 별 차이 없지만 내부로 들어서면 작은 마당과 파릇한 담쟁이넝쿨이 반가운 인사를 건넨다. 외부에서 문을 열면 바로 방으로 이어질 것 같지만 베토벤 하우스는 건물 안으로 마당과 정원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건물 2채가 들어서 있는 구조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헐릴 집이었지만 본 시민의 12명이 기금을 모아 생가를 구입해 베토벤 기념관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생가 내부에는 작은 정원과 여러 개의 베토벤 흉상이 시선을 끈다. 흉상들을 얼핏 보면 베토벤의 모습이 똑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생김새가 모두 다르다. 흉상의 모델은 베토벤이 분명하지만 조각가가 다르기 때문인지 그의 흉상의 얼굴이 제각각이다. 하지만 바람결에 날린 듯한 물결 모양의 머리카락이 베토벤임을 알려준다.

마당에 세워진 흉상을 감상하고 나면 본격적으로 그의 음악 세계로 빠져들게 된다. 내부에 들어서면 본격적으로 베토벤과 관련된 다양한 유품들이 여행자의 시선을 유혹하기 시작한다. 3층 건물에 12개 방에는 세계에 흩어져 있던 유품 15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베토벤의 초상화, 그가 쓰던 악기, 친필 악보 등 베토벤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것이 너무나 많다.

베토벤 생가 이외에도 본에는 다양한 볼거리들이 산재돼 있다. 시장광장을 굽어보고 있는 바로크 양식의 옛 시청사는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과 '본 여름 노천 문화축제'의 배경이 되어왔고,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본 교회는 쾰른대성당의 초석이 마련되기 시작할 즈음에 완공되었을 정도로 역사가 오래된 건물이다.

SS 카시우스와 플로렌티누스에게 바쳐진 유서 깊은 뮌스터교회는 라인 강변에 있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로는 가장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처럼 본은 유서 깊은 역사의 도시답게 곳곳에 눈여겨 볼 만한 건축물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 독일 본! 이것만은 알고 떠나세요△가는 길=우리나라에서 독일 프랑크푸르트까지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이 매일 운항하고 있다. 서독의 옛 수도였던 본까지는 프랑크푸르트에서 기차를 타고 2시간이면 충분히 갈 수 있다.

△슈만 하우스=본은 베토벤의 고향이지만, 독일이 낳은 비운의 천재 슈만이 만년을 보낸 곳이다. 본의 구시가지에서 1㎞ 정도 떨어진 곳에 슈만이 자신의 아내이자 성악가인 클라라와 함께 살았던 '슈만하우스'가 있다.


지상과 지하가 만나다 - 훔볼트하인의 방공호

베를리너 운터벨텐은 ‘베를린의 지하세계’라는 뜻을 가진 단체이다. 1998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이 단체의 목적은 베를린의 지하를 체계적으로 조사하고, 공개하여 사람들이 직접 볼 수 있게 만드는 것.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도시가 동서로 분단되면서 수많은 시설들이 더 이상 쓰이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잃어버린 지하 시설들이 통일된 베를린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된 것이다. 새롭게 발굴된 교통용 터널, 전철역, 수송로, 방공호, 공기송출 우편시설 같은 지하시설들이 덕분에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고 있다.


베를린 훔볼트하인 공원 언덕 위에 자리한 방공호 또한 그렇게 해서 공개된 시설의 하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5만 명의 시민들이 공습을 피했던 방공호는 중세시대의 요새와 같은 위용을 자랑한다. 당시 대공포가 설치되어있던 85m 높이의 방공호 탑에서는 베를린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다. 현재 이곳은 4월부터 10월까지만 공개되어 있는데, 겨울에는 동면하는 박쥐를 보호하기 위해 입장이 금지된다고 한다.



예술가와 정부, 타협하다 - 타헬레스(Tacheles)

1990년 2월, 일군의 예술가들은 화려한 퍼포먼스를 벌이며 방치된 백화점에 입성했다. 무단점거운동, 스쾃(squat)의 대표적인 이름이 된 '타헬레스'의 탄생이었다. 타헬레스란 ‘자신의 주장이나 견해를 명확하게 말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유대어다. 이 명랑한 스콰터(squatter)들은 명확하게 “너희는 건물을 가졌지만 쓰지 않고 있고, 우리는 돈이 없지만 작업실이 필요하다.”라고 말하며 당당하게 자리 잡았다.


원래 그 건물은 1907년 백화점으로 지어졌다가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폐허가 된 건물이었다. 이곳은 철거될 운명에 놓여있었는데, 예술가들이 이곳을 다시 살려냈다. 하지만 정부의 관점은 예술가들과는 달랐다. 그 후 10년간 강제퇴거의 협박과 버티기의 지난한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정부가 “문화공간으로 보존할 가치가 있다.”라고 판단을 바꾸면서 타헬레스의 위상은 극적으로 바뀌었다. 1999년, 정부 보조금까지 받는 예술단지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50여 명의 전세계 예술가들은 관리비에 해당하는 저렴한 임대료를 내고 작업실을 합법적으로 대여할 수 있게 되었으며, 불법이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골든홀과 블루살롱, 영화관 겸 카페 Highend 54 등의 공동 공간에서 수시로 전시회, 공연, 콘서트, 영화상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피티로 가득 찬 타헬레스 전경.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합법적인 지위와 실험성을 바꿨다.”는 통렬한 비난과 정부의 간섭이 타헬레스에 미친 영향도 적지 않았지만, 2009년 이 건물을 소유한 투자펀드 푼두스 그룹에서 10년의 임대계약이 끝났다며 예술가들에게 강제퇴거를 통보해 또 다른 지난한 싸움을 맞이하게 되었다. 베를린 반문화(Counterculture)운동의 상징이었던 타헬레스는 이에 “우리는 과거에도 무단점거자였고, 이제 다시 무단점거자로 돌아왔을 뿐”이라며 당당한 한판 싸움을 다시 벌이고 있다.



천사와 인간, 손을 잡다 - 전승기념탑(Siegessaule)

전승기념탑 꼭대기의 '황금의 엘제'는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를 통해
그 아름다움을 널리 알렸다.


천사 다미엘은 황금빛 여신의 동상 어깨에 앉아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독일어로 속삭이는 목소리가 인상적이었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 Der Himmel ueber Berlin]는 1987년 빔 벤더스 감독이 연출하고 페터한트케가 공동으로 각본을 쓴 작품이다. 서커스단에서 공중그네를 타는 아름다운 마리온을 사랑하게 된 천사 다미엘은 고뇌 끝에 인간이 된다. 영화적 완성도로도 격찬을 받았던 이 영화는 베를린 전승기념탑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데도 한몫했다.


다미엘이 앉아있는 황금빛 여신을 베를린 사람들은 ‘황금의 엘제’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원래는 승리의 여신인 ‘빅토리아’다. 키가 무려 8.3m에 달하는 이 조각상은 무게만도 무려 35톤. 프리드리히 드라케(Friedrich Drake)가 조각한 것이다.


베를린 중심가에 있는 그로쎄 티어가르텐(GroBe Tiergarten)공원에 자리 잡고 있는 전승기념탑은 1873년에 하인리히 슈트라크스(Heinrich Stracks)의 설계로 완성되었다. 덴마크(1864년), 오스트리아(1866년), 프랑스(1870년~71년)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탑이었다. 탑 내부에 있는 285개의 계단을 오르면 베를린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지만, 아쉽게도 다미엘처럼 황금의 엘제 어깨에 앉아보지는 못할 것이다. 67m 높이까지는 엘리베이터로 올라갈 수 있으니, 다미엘의 기분을 비슷하게 느껴볼 법도 하다.



동독과 서독, 마주보다 - 브란덴부르크 문

브란덴부르크 문은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의 경계선에 자리하고 있어, 한때는 독일의 분단을 상징했고 이제는 독일통일의 상징이 되었다. 1788년부터 91년까지 3년여에 걸쳐 지어진 이 문을 설계한 이는 칼 고트하르트 랑한스(Carl Gotthard Langhans). 처음에는 도시 성문으로 만들어졌으나 도시가 점점 커지면서 시내 중심에 자리잡게 되었다. 브란덴부르크 문 위의 동상 크바트리가(Quadriga)는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가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에 올라타고 달리는 형상을 하고 있다.


2009년 11월 9일은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진 지 20년째 된 날이었다. 포츠다머 플라츠에서 시작하여 브란덴부르크 문을 거쳐 국회의사당까지, 1.5km에 걸쳐 베를린 장벽이 서 있던 선을 따라 1,000여 개의 도미노 벽이 세워졌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재연하기 위해서였다. 각국의 예술가들이 하나씩 맡아 자유의 메시지를 형상화한 이 도미노 벽은 10만 명이 참여한 대대적인 ‘자유의 축제’ 끝에 장엄하게 쓰러졌다.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을 나누었던 베를린장벽은 통일 이후 부서진 조각들조차 기념품으로 부지런히 실려나가 지금은 보기 힘들다. 오스트반호프(Ostbahnhof)역 부근에 남은 장벽만이 세계 각국의 118명의 작가들이 그림을 그린 이스트사이드갤러리(East Side Gallery)가 되었다.


동서분단시절 브란덴부르크문을 낀 장벽을 통과하는 방법을 설명한 안내문.



음악, 모두의 손을 잡다 - 러브퍼레이드

여러 도시에서 계속되고 있는 러브퍼레이드 포스터.


독일은 음악과 아주 밀접한 나라이다. 바흐, 헨델, 베토벤, 바그너, 멘델스존, 슈만, 브람스, 말러 등의 대가 이름만 떠올려도 그 관계가 어렵지 않게 짐작되리라. 베를린 필하모니, 드레스덴 오페라, 라이프치히 오케스트라는 또 어떤가. 현대음악에서도 독일의 활동은 대단하다. 그런 곳이기에 ‘러브 퍼레이드’가 열리는 게 가능했을 것이다.


사랑과 평화의 테크노 축제 ‘러브 퍼레이드’ (Love Parade)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넉 달 전, 생활 예술가이자 DJ이며, 미장이였던 ‘모테 박사’(Dr. Motte)의 주창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자신의 생일을 쓸쓸히 보내고 싶지 않다는 단순한 이유로 퍼레이드를 개최한다. 그가 집회 허가 신청을 낼 때 내세웠던 모토는 ‘평화, 기쁨 그리고 팬케이크’ 였다. 그것은 군비 축소와 음악을 통한 화해, 그리고 공정한 분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날, 한 대의 트럭과 약 150명의 사람들이 당시 서베를린의 소비의 중심지였던 쿠담(Kurf rstendamm)거리를 행진했다. 그것이 말 많고 탈도 많으면서 기쁨으로 가득찬 러브 퍼레이드의 시작이었다.


참가자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1996년부터 에른스트 로이터 광장, 6월 17일의 거리, 브란덴부르크 문, 전승기념탑까지 펼쳐지게 된 러브 퍼레이드는 매년 7월 첫째 토요일에 열린다. 행사로 인한 소음과 환경파괴, 엄청난 쓰레기 처리문제, 마약의 남용과 폭리, 무단방뇨 등등의 문제로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러브 퍼레이드의 정신은 세계 각지로 퍼져 다양한 나라에서 같은 이름의 퍼레이드가 열리고 있다.



학살자, 죽인자를 추모하다 - 유태인 박물관(Judisches Museum)

히틀러 정권에 의해 학살된 유태인은 600만 명. 믿을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비극의 가해자로서, 독일은 반성을 아끼지 않는다. 위령탑을 건설하고 광장을 만드는 한편, 유태인들의 끔찍했던 경험을 간접적으로나마 짐작하게 만드는 유태인 박물관 건설에도 발벗고 나섰다.

2001년 다니엘 리베스킨트(Daniel Libeskind)가 설계한 이곳은 소장품이 아니라 건물 자체로 유명해진 드문 케이스의 박물관이다. 이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바로크풍의 구 박물관을 지나 지하통로를 거쳐야 한다. 입구에서부터 가스실과 수용소에서 대량학살된 유태인들을 떠올리게 한다. 다윗별을 참고한 건물의 전체적 모양, 칼로 난도질한 듯한 가늘고 길고 불규칙한 창문들, 49개의 기둥에 심어놓은 49그루의 올리브나무로 이루어진 ‘Garden of Exile(추방의 정원)’, 메나슈 카디쉬만(Menache Kadishman)의 작품 [낙엽]을 설치하여 절규하는 사람얼굴 모양의 철 조각들을 깔아놓아 밟아야만 지나갈 수 있게 만든 [memory void, 공백의 기억], 아무것도 없는 거대하고 높은 밀실인 홀로코스트 타워 등의 요소들은 풍부한 상징을 담고 있다. 빈 전시실조차도 사라진 유대문화를 상징하고 있다.


원래 지금과 같이 따로 지을 계획이 아니라, 베를린 박물관의 부속건물인 유대인관으로 계획되었던 이곳은 일련의 과정을 거쳐 현재와 같이 확장되었다.


유태인 박물관 내부전시실 풍경.



동성끼리 팔짱을 끼다 - 놀렌도르프 광장

20세기 초의 놀렌도르프 주변.이때부터 게이 커뮤니티가 형성되었다.


베를린의 다른 이름은 동성애자들의 천국이다. 전체 주민의 약 10%, 35만 명 가량이 동성애자라는 수치는 이곳이 다른 도시에 비해 동성애자들에게 비교적 관대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분단시절 서베를린으로의 이주를 유도하기 위해 군대 면제 등의 혜택을 내밀자 이를 받아들인 동성애자들의 이주가 급격히 늘면서, 베를린은 명실상부한 유럽 최대 동성애 도시로 떠올랐다.


‘놀렌도르프 광장(Nollendorfplatz)’은 동성애자들이 즐겨 찾는 식당과 술집, 바, 카바레들이 모여 있는 카페거리로 유명하다. ‘놀렌도르프 광장’ 역 건물에는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죽어간 동성애자들을 추모하는 기념물이 있다. 나치가 학살한 것은 유태인만이 아니었다. 게르만 민족의 피를 더럽히는 불순한 자들로 규정된 동성애자들은 가슴에 핑크색 역삼각형(Rosa Winkel)을 붙이고 강제수용소에 감금되어야 했는데, 더군다나 유태인이라면 노란색 정삼각형을 겹쳐 달아야 했다. 그들에 대한 대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끔찍했다고 한다. 1933년에는 놀렌도르프 광장 주변의 동성애자 카페들이 대부분 강제로 폐쇄당하는 역사적 아픔을 겪기도 했다.

'뭉쳐야 뜬다' 콘셉트로 패키지 프랑스 여행이라. 구미가 확 당겼다. 사실 자유롭게 돌아다닌다고 해도 문제는 안전이다. 차라리 약간의 불편함을 즐기되 안전을 선택한 프랑스행. 비행기에 올라 '안정환'이 되리라, 외쳤다. 프랑스는 수도 파리뿐 아니라 지방 소도시까지 볼거리와 매력적인 곳이 많아 한국 여행객들이 자주 찾는 여행지 열 손가락 안에 매년 드는 곳이다. 가이드북, 론리플래닛도 필요 없다. 그저 가이드 말에만 따르면 될 뿐. 오히려 그게 홀가분하다. 머리 아플 게 없으니. 줄줄 쏟아져 나오는 가이드 아저씨의 필살기 이빨. '예술의 나라임을 깨달을 수 있다는 프로방스 대표 도시 아를, 엑상프로방스, 생폴드방스가 있고 남프랑스의 해변을 따라서는 니스, 마르세유, 모나코 등 휴양으로 유명한 도시가 즐비하다'는 것. 와인의 천국 특유의 깊고 진한 와인을 즐길 수 있는 와이너리 투어와 미식의 나라다운 고유 음식까지 맛볼 수 있어 볼거리 먹거리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고 즐길 수 있는 것이 프랑스 여행의 포인트란다. 

귀가 즐거울 무렵, 어느 새 도착한 곳이 몽생미셸. 베르사이유 궁전과 함께 몽생미셸은 프랑스 방문객에겐 숙명과 같은 곳이다. 세계 문화유산이기도 한 몽생미셸은 약 1300년 전 대천사장 미카엘의 계시를 받은 노르망디 주교 오베르가 예배당을 건축한 것이 시초다. 몽생미셸이란 이름 자체가 '성 미카엘의 산'이란 뜻. 이후 중세 프랑스 군의 요새 역할을 하기도 했고 프랑스 혁명 때 감옥으로 이용되기도 하며 현재 수도원의 모습을 갖추기까지 80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 

몽생미셸을 제대로 즐기려면 걸어서 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 발걸음을 옮긴다. 몽생미셸이 위치한 북부 프랑스로 가는 길은 노르망디 지역 특유의 여유와 신비로움이 있다. 지평선 너머 하나의 점으로 아득히 있는 성을 향해 걸으며 다가오는 몽생미셸의 존재감을 느껴본다. 마치 중세시대 명을 받고 성에 찾아가는 사자가 된 듯하다. 천사의 수도원 몽생미셸은 평소에는 육지의 모습이지만 만조가 되면 섬이 된다. 앙상한 바위섬 위 수도원과 성채의 고색창연한 모습. 바다 위에 홀로 떠있는 천공의 섬, 아니 마법의 성이라는 말이 어울릴까. 날이 어두워지자 불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황금색 빛에 둘러싸였다. 이때가 바로 몽생미셸 아름다움의 절정이다. 아, 볼 것 없이 여기서 한 컷. 사실 뭉쳐야 뜬다형 패키지 여행에 좋은 것 중 하나가 인증샷이다. 일행 옆구리를 쿡 찌르고 부탁만 하면 되니깐. 

성 입구 쪽에 안내소를 지나 왕의 문을 통과하면 수도원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좁은 길을 따라 굽이굽이 올라간다. 오밀조밀 단장한 가게들과 레스토랑이 몽생미셸 정상에 오르는 내내 재미를 더해준다. 다시 15분 정도 비탈길을 올랐을까. 시원한 바닷바람과 함께 해안가를 뒤로한 노르망디 지방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길의 끝에 당도하는 순간, 범접하기 어려운 압도감에 적지 않은 흥분이 느껴졌다. 성벽을 손으로 더듬어 보았다. 기나긴 세월과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만져졌다. 

 기사의 1번째 이미지

고딕과 로마네스크 양식이 어우러진 독특한 외관의 슈농소 성. [사진 제공 = 롯데관광]

수도원 문을 지나 돌층계를 올랐다. 1·2층에는 순례자를 보살폈던 방과 귀빈을 접대하던 귀빈실, 기사의 방 등 여러 방이 미로처럼 꾸며져 있다. 3층에는 잘 가꾼 정원을 품은 회랑이 있는데 회랑은 다양한 종교적 주제를 소재로 조각된 127개의 돌기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돌기둥의 건축미 또한 돋보인다. 수도원 내부는 특유의 어둑어둑함과 고즈넉함이 가득했다. 80m 바위 위에 솟아있는 수도원 건물 꼭대기까지 높이는 157m. 첨탑 꼭대기에는 눈부시게 반짝이는 미카엘 천사의 금빛 동상이 세워져 있다. 오른손에는 칼을, 왼손에는 방패를 들고 발밑에는 용을 깔고 있는 모습이 흥미롭다. 몽생미셸의 다양한 곳 중 '클로이스터'라고 불리는, 수도사들의 휴식과 명상의 공간은 몽생미셸의 신비로움을 더해준다. 

몽생미셸을 뒤로하고 남부 프랑스로 내려오면 천재 화가 고흐가 사랑한 도시 아를이 자리하고 있다. 아를의 곳곳에는 고흐의 흔적이 있어 그것을 따라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구석구석 구경하다 보면 고흐의 대표적인 작품의 배경을 만나 볼 수 있어 마치 그림 속으로 빠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프로방스를 대표하는 도시답게 강렬한 햇빛과 색채가 인상적이며, 남부 프랑스 특유의 고즈넉함이 어우러진 특유의 느낌은 아를을 더욱 멋스럽게 만든다. 오, 그러고 보니 좋다. 가끔은 이런 구속형 패키지 여행. 아름다운 구속이다. 


■ 남프랑스 리버크루즈…황금연휴 10일간의 휴식 

 기사의 0번째 이미지

매일 새로운 펼쳐지는 리버크루즈 기항지 투어

누구나 한번쯤은 꿈꿔봤을 그림 같은 유럽 여행, 늘 시간이 부족해 망설였다면? 올해 추석 황금연휴가 절호의 찬스다. 하루만 연차를 내도 최대 10일을 쉴 수 있어 장거리 여행을 하기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모처럼의 해외여행, 긴 여행에 너무 피곤하지 않을까 싶어 망설여진다면 유럽 리버크루즈가 정답이다. 

◆ 발코니 선실 파노라마 뷰 장관 

유럽 패키지여행 하면 장거리 이동 시간과 매일 바뀌는 숙소 등으로 고단함이 가장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매일 숙소가 바뀌는 만큼 매일 짐을 싸고 풀어야 하는 불편함도 보통일이 아니다. 

리버크루즈를 이용한다면 유럽 여행이 달라진다. 일단 리버크루즈에 오르는 순간부터 해야 할 일이라고는 온전히 누리는 것. 선실 한 면이 통유리로 되어있는 발코니 선실에서 파노라라 뷰를 즐기며 선내에서 제공하는 최고급 식사와 서비스를 마음껏 즐기기만 하면 된다. 사진이나 그림을 통해 봐왔던 유럽 강변의 풍경을 배경으로 선내에서 준비한 강연을 즐기고 매일 정박하는 유럽 소도시에서 수급한 신선한 식자재로 만든 고급 코스 요리를 맛볼 수 있다. 지역 특산 와인과 맥주까지 포함된 식사에서는 크루즈가 통과하는 유럽 곳곳의 향취가 그대로 묻어난다. 이렇게 선내 생활을 만끽하는 동안 유럽 곳곳의 소도시로 향하기 때문에 이동 시간을 느낄 수 없어 더욱 좋다. 

 기사의 1번째 이미지

크루즈 갑판에서 휴식을 즐기는 크루즈 관광객

◆ 아를, 아비뇽, 비비에르 남프랑스 기항 

남프랑스 리버크루즈를 대표하는 크루즈는 유럽 리버크루즈 베스트 4선에 손꼽히는 아발론 워터웨이즈이다. 아발론 워터웨이즈는 정통 리버크루즈 선사로서 유럽에서 가장 연식이 짧은 스위트 크루즈선을 운영하고 있다. 다른 선사와 달리 천장에서 바닥까지 통유리로 되어있는 발코니 선실을 보유하고 있다. 타 리버크루즈보다 훨씬 시원한 파노라마 뷰를 즐길 수 있으며 창을 향해 있는 침대에 누워 유럽 강변 특유의 분위기와 아름다움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편안하게 즐길 수 있다. 

추석 연휴기간 떠나는 리버크루즈 여행은 유명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 곳곳에서 등장하는 론강을 지나가는 남프랑스 리버크루즈 일정이다. 남프랑스를 지나 지중해로 흐르는 론강을 따라 5박의 크루즈 일정 동안 반 고흐가 사랑한 도시 아를, 14세기 아비뇽 유수의 배경이 된 아비뇽, 중세 로마네스크미술 문화의 중심지 비비에르, 빛의 도시 리옹 등에 기항한다. 리버크루즈로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유럽에서 가장 매혹적인 도시들은 모두 강변에 위치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크루즈가 강변에 정박하기 때문에 하선 후 바로 자유 관광을 즐길 수 있다. 리버 크루즈에는 기항지 관광이 모두 포함돼 있다. 가이드가 동행하지 않는 일정을 선택해도 강변을 따라 이어진 산책로를 걷다 보면 진정한 의미의 '힐링'을 만끽할 수 있다. 

레드캡투어에서 남프랑스 리버크루즈 9박10일 상품을 판매한다. 전 일정 기항지, 식사 포함. 예약자 전원 발코니 선실 무료 업그레이드, 사전 예약 고객 동반 1인 100만원 할인. 10월 1일 출발. 요금은 899만원. 


 기사의 0번째 이미지

마을 중앙에는 두 남자의 동상이 서 있다. 이들은 1786년 세계 최초로 몽블랑에 오른 가브리엘 파카드와 자크 발마다.

'몽블랑'이라는 이름을 말하면 동명의 만년필 브랜드를 떠올리기 쉽다. 

 기사의 1번째 이미지

새보다 아름다웠다. 고요한 마을을 가로지르는 그림자. 하늘 위에 떠서 내려다보는 샤모니는 어떤 모습일까.

하지만 몽블랑은 프랑스 샤모니에 높이 솟아오른 산의 이름이다. 

 기사의 2번째 이미지

정상 전망대에는 사방을 투명 유리로 만든 기념촬영소가 있다. 기념사진을 찍는데 날이 흐린 게 아쉽다.

 기사의 3번째 이미지

며칠 뒤 정상이 맑았다. 230년 전 두 산악인은 몽블랑을 오르며 자기 자신과 끊임없이 싸웠을 것이다.

샤모니 기차역에 내리면 눈앞으로 동화 속 풍경이 펼쳐진다.


아이들 등하굣길을 책임지는 코펜하겐의 카고 바이크

앞 바구니에는 짐을, 뒷자리에는 아이를 싣고 집으로 향하는 엄마 아빠들을 마주하는 일에 익숙해질 즈음이면 우리는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대체 자전거는 덴마크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코펜하겐의 자전거 도로 위를 달리고 있는 카고 바이크. 오후 네 시경 아이들이 하교하는 시간이면 퇴근하는 직장인들의 러시아워도 함께 시작된다.

30년 역사의 카고 자전거, 뒷자리는 아이들 차지

덴마크 가정에서는 대개 자녀가 세 살 무렵부터 여섯 살 사이에 자전거를 가르친다. 예전에는 페달이 달린 세발자전거를 주로 이용했지만 오늘날에는 페달이 없는 트레이닝 자전거로 균형 감각을 익히고 스피드 조절을 하며 아이 스스로 자전거를 놀이처럼 즐기면서 배울 수 있게 한다.

이를 통해 자전거는 유년 시절 코드의 하나로 깊숙이 자리매김된다. 이런 동기 부여 과정은 부모가 자전거를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가정에서 더욱 극대화되는데, 특히 덴마크에서 눈에 띄는 자전거는 아이들의 등하굣길을 책임지는 카고 바이크다.

카고 바이크는 말 그대로 수레를 끄는 자전거다. 매일 아침 8시에서 9시경 학교 앞에는 아이들을 카고 바이크에 싣고 등교시키는 부모들의 행렬이 이어진다. 일곱 살과 두 살배기 두 아이를 둔 젊은 워킹 맘 스티느에게 카고 바이크는 차보다 편리한 교통수단이다. 우선 차를 차고에서 빼내고 또 학교 앞에 주차하느라 걸리는 시간이 절약되므로 아이들은 그 시간만큼 아침잠을 더 잘 수 있다.

또 출근 시간에 차가 막혀 지각하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며, 아이를 등하교시키며 운동까지 할 수 있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다. 학교 앞의 자전거 등교 풍경 속에서 만난 리센느 역시 아들을 등교시키는 중이었다. 그는 카고 바이크의 일종인 크리스티아니아 바이크를 만들고 있는데, 흔쾌히 인터뷰에 응하며 바이크 제작 공간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직접 만든 자전거로 아들과 함께 등하교하면서 더 많은 교감을 할 수 있어 기쁘다고 덧붙였다. 등굣길에는 아이의 컨디션과 기분을 체크하고, 하굣길에는 그날 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란다.

크리스티아니아 대장간은 올해로 30년을 맞아 그동안 만들어낸 자전거의 변천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외부에 전시를 해놓고 있었다. 자전거 카고의 형태와 옵션에 따라 가격이 다른데, 기본적인 패밀리 모델은 1만1600크로나(한화 210만원 정도)에 구매할 수 있다.

조금은 부담스러운 가격이지만 튼튼하고 정교하기 때문에 한 번 구매하면 자신이 탄 뒤 다시 수리하여 자녀가 타는 경우가 많다고 하니 대를 물려 이어지는 덴마크인의 자전거 사랑을 엿볼 수 있다.

하교 시간인 오후 세 시 반, 리센느는 아들을 데리러 가는 길에 필자를 카고 바이크에 태워 시내 구경을 시켜주겠다고 했다. 한 바퀴로도 여유롭게 자전거를 타는 그에게 믿음이 가 카고에 올라타니 새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버스로 40분 남짓 걸렸던 거리가 20분 거리로 짧아졌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자전거 수레 속에서 봤던 가을날의 풍경은 정말로 아름답고 경이로운 추억으로 남았다.

1

아빠가 운전하는 카고 바이크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꼬마 숙녀. 어린아이들에게 안전을 위해 헬멧을 착용시키는 것은 부모의 의무이다.

2

학교 앞에 가지런히 세워져 있는 아이들의 자전거와 카고 바이크들. 자신의 자전거로 등교하는 아이들은 이미 이 자전거 주차장에서 질서를 배운다.

크리스티아니아 바이크

크리스티아니아 바이크는 카고 바이크 브랜드의 오리지널로 꼽힌다. 크리스티아니아 바이크가 만들어진 이후 7~8개 브랜드가 후발 주자로 생겨났지만 카고 바이크 하면 여전히 크리스티아니아 바이크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자전거 구매에 대한 정보는 홈페이지(www.christianiabikes.com)에서 얻을 수 있다. 본사를 직접 방문하고 싶다면 Christiania Smedie, Mælkevejen 83a, 1440 København K.

유모차만큼 흔한 필수품, 소규모 가판대로도 이용

덴마크 사람들에게는 카고 바이크보다 크리스티아니아 바이크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1971년부터 코펜하겐시 동쪽의 해군 기지 터에 히피, 예술가, 젊은 사회 운동가들이 자리 잡으면서 만들어진 문화 예술 공동체 혹은 새로운 대안 마을인 크리스티아니아에서 처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곳의 초창기 주민 900여 명은 버려진 군사 시설이던 34헥타르의 땅에 평화를 지향하는 자신들만의 문화를 보존해가겠다는 의지를 피력했고, 정부는 긍정적인 측면의 '사회적 실험'으로써 이들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물질적 가치로 결정되는 삶을 거부하고 작은 일 하나도 표결을 통해 결정하는 직접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있는데, 이 작은 공동체 부락에는 자동차가 없다. 허락된 유일한 교통수단은 자전거뿐.

1978년 문을 연 대장간 'Christiania Smedie'에서 침대 프레임을 이용해 짐을 옮길 수 있는 카고 바이크를 만들어 자신의 약혼녀에게 선물한 대장쟁이의 아이디어가 크리스티아니아 바이크의 시초가 되었다.

1984년 이 자전거의 시중 판매가 이루어진 이후 30년을 맞이한 올해, 크리스티아니아 바이크는 덴마크의 오래된 자전거 문화에 한 획을 긋는 발명품일뿐 아니라 여러 나라에 수출까지 하면서 덴마크의 심벌로도 유명해졌다.

현재 크리스티아니아 바이크는 열두 가지 모델을 선보이고 있다. 덴마크에서는 우체부가 모터바이크 대신 카고 바이크를 타고 우편 배달을 하고, 아이가 있는 가정에서는 유모차만큼이나 흔한 육아 필수품으로 사용된다.

더욱이 아이들뿐 아니라 아이를 동반한 어른 한 명을 태워도 거뜬하며(자전거 운전자를 제외하고 100kg까지 적재 가능하다), 가판대로도 활용 가능한 수레가 달린 이벤트 바이크도 있어 자신만의 소규모 창업도 가능하다. 이쯤 되면 카고 자전거가 갖는 매력과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덴마크에서 카고 바이크를 비롯한 자전거가 가장 편리하고 긍정적인 교통수단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덴마크는 가장 높은 지대가 해발 150미터에 불과할 만큼 국토 대부분이 평지로 이루어져 있는 등 자전거를 타기에 쾌적한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다. 또 환경 보호 정책의 하나로 이산화탄소를 많이 배출하는 제품에 매기는 탄소 배출세를 자동차 구매 시에는 180퍼센트나 부과한다.

여기에 안전하게 정비된 자전거 도로(코펜하겐 시내에만 411km의 자전거 도로가 마련되어 있다)와 자전거를 위한 교통 시스템도 큰 몫을 차지한다. 따라서 덴마크인들에게 자전거는 '가장 빠르고 편리하면서 가장 경제적인 교통수단'인 것이다. 즉 자전거가 환경을 보호하며 합리적이고 경제적인 교통수단이라고 생각하는 덴마크인의 정서와 이를 정책으로써 뒷받침하는 국가의 노력이 고루 맞아떨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을 쓴 정민혜는…

도쿄를 거쳐 파리에 정착한 지 5년. 온라인 빈티지 숍을 운영하며 틈나는 대로 유럽의 도시에서 한 달 동안 살아보기 프로젝트를 통해 체험한 그곳의 라이프스타일을 사진과 글로 전하고 있다.

남프랑스 툴룽부터 이탈리아까지 이어지는 40킬로미터의 해안을 일컫는 코트다쥐르.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기로 소문난 2곳의 휴양지 칸과 생트로페를 찾았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휴가를 보냈다.

↑ 남프랑스 ㅋ코트다쥐르의 바닷가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승자는 혼자다>에는 영화제 기간 동안 칸을 찾는 다양한 사람들에 대한 묘사가 등장한다. 영화 제작자의 눈에 들기 위해 1년 내내 모은 돈으로 산 가장 비싼 옷을 입고 온 배우 지망생, 다시 한 번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위해 영화제를 찾은 왕년의 스타 등 칸 영화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꿈과 욕망의 파노라마에서 칸은 꿈과 허영, 패션과 유명인, 물질과 가치 등 모든 것이 공존하는 곳으로 표현된다. 크루아제트 거리Boulevard de La Croisette의 벤치에 앉아 있는데 한 번도 직접 보지 못했던 람보르기니와 롤스로이스가 차례로 지나갔다. 관광객은 물론이고, 동네 할머니 패션조차 예사롭지 않다. 택시 운전사도 레스토랑 점원도 할리우드 배우 빰치게 잘생겼다. 칸에서 볼 수 있는 흔한 풍경이다.

칸은 압도적인 레드 카펫의 이미지에 밀려 도시 자체의 아름다움이 가려진 것도 사실이다. 은막에 고정된 시선을 잠시 돌리면 칸은 영화만의 도시가 아니다. 도회적인 건물들과 큰 도로에 일렬로 종려나무가 서 있는 풍경은 언뜻 하와이나 캘리포니아와도 겹쳐진다. 니스에서 남쪽으로 26킬로미터 떨어진 칸은 코트다쥐르의 피한, 피서지로 유명하다. 중세까진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았으나 19세기에 해수욕장으로 발전했으며, 특히 제2제정시대(나폴레옹 3세 통치 시대) 이후 대규모 호텔이 건립되면서 세계적인 관광지가 되었다.

"칸은 니스의 5분의 1밖에 되지 않는 크기지만 비즈니스는 프랑스에서 파리 다음으로 많이 이루어지는 곳이에요. 작지만 4성급 이상의 호텔이 100여 개나 있고, 매달 이벤트와 국제적 규모의 각종 축제가 열리죠. 9월 9일에는 인터내셔널 보트 쇼인 칸 요팅 페스티벌Cannes Yaching Festival이 열리기도 했어요." 칸 관광사무소의 카린 오스Karin Osmuk은 칸이 고급 휴양지인 동시에 비즈니스 포럼이나 영화제, 광고제 등 국제적인 페스티벌이 많이 열리는 문화와 비즈니스의 도시라는 것을 강조했다.

관광은 보통 칸 국제 영화제가 열리는 '팔레 데 페스티벌에 데 콩그레Palais des Festival et des Congres'(이하 '팔레 데 페스티벌')부터 시작한다. 세계적인 영화제가 열리는 곳 치고 생각보다 평범해서 실망스러웠을 때, 길바닥에 새겨진 세계적인 배우들의 프린팅이 눈길을 모았다. 새겨진 이름을 하나하나 살피며 시동을 걸다보면 그 옆에서 칸의 백미라 할 수 있는 크루아제트 거리가 손짓을 하며 유혹한다.

웅장하고 고전적인 고급 호텔들과 명품 부티크, 길게 뻗은 백사장, 호화로운 요트와 바닷가 앞의 바, 거리를 수놓은 종려나무, 웃통을 벗고 거리를 뛰는 청년들. …, 이국의 정취가 물씬하다. 2킬로미터 남짓의 크루아제트 거리를 거닐다보면 마치 레드 카펫을 걷는 것처럼 흥분되고 들뜬다. 크루아제트 거리 앞 백사장은 대부분 호텔과 레스토랑 소유라 백사장에 몸을 눕히는 게 쉽지 않지만, 거리 벤치에 앉아 코발트빛 바다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국의 낭만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영화제가 열리는 시즌의 칸에서는 호텔 잡는 게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다. 수상작 못지않게 어떤 배우가 어떤 호텔에 머무는가도 이 시즌의 핫 이슈다. 크루아제트 거리에 있는 그랜드 하얏트 칸과 인터컨티넨탈 칼튼 칸은 그중에서 가장 핫한 호텔들이다. 인터컨티넨탈 칼튼 칸은 1911년에 생긴 유서 깊은 호텔로 그레이스 켈리, 알프레드 히치콕, 소피 마르소, 시드니 폴락 등 내로라하는 배우와 감독들이 머물렀던 곳이다. 그레이스 켈리는 1955년 칸 영화제 때 이 호텔에 머물다 모나코의 왕자 레니에 3세를 만나 이듬해 결혼했다. 7층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이 호텔에서 가장 럭셔리한 그레이스 켈리 스위트룸이 있다. 이외에도 스타들이 머물렀던 39개의 객실들은 스타의 이름이 붙어 있는데, 배우들이 이 호텔에 오면 그 방에 우선적으로 머문다. 그랜드 하얏트 칸 역시 오랜 역사와 고풍스럽고 우아한 건축 양식으로 유명 배우와 감독들이 즐겨 찾는 호텔이다. 이곳에는 27개의 스위트룸과 유럽 내에서 가장 큰 스위트룸인 '펜트하우스 스위트'가 있다. 리비에라 해안을 둘러싼 크루아제트 거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펜트 하우스의 테라스는 칸의 드라마틱한 야경을 감상할 수 있는 최고의 장소다. 가장 좋은 위치에 넓은 프라이빗 해변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미슐랭 2스타 레스토랑이 있어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 거리의 악사.

구시가는 크로아제트 거리와 달리 정감 있다. 포빌 시장 앞 거리의 악사.

↑ 칸에는 영화와 관련된 13개의 벽화가 있다.

칸에는 영화와 관련된 13개의 벽화가 있다.

↑ 구시가의 골목길을 찾은 관광객들.

구시가의 골목길을 찾은 관광객들.

↑ 이국의 정취가 물씬한 크루아제트 거리 앞 바다.

이국의 정취가 물씬한 크루아제트 거리 앞 바다.

살아 있는 칸을 만나는 법

살아 있는 칸의 모습을 만나려면 옛 항구 비외 포르Vieus Port로 가야 한다. 팔레 데 페스티벌 건물 서쪽, 크루아제트 거리가 끝나는 곳에 고깃배들이 가득 정박해 있는 비외 포르 서쪽의 르 시케Le Squet 지역과 서북쪽의 생앙투안Saint-Antoine 거리 근처가 바로 구시가다. 버스 터미널 건물에 그려진 거대한 벽화가 먼저 시선을 모은다. "거주민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 칸은 2002년부터 거대한 벽화 프로그램을 시작했어요. 도시의 다양한 장소에 영화와 관련된 그림을 그린 거죠. 모두 13개의 벽화가 있어요."

느긋하게 도시를 걷다보면 제임스딘, 마릴린 먼로, 찰리 채플린, 베트맨 등의 벽화가 있는 곳에서 발을 멈추게 된다. 언덕을 따라 좁은 골목을 올라가면 사람 냄새 나는 정겨운 풍경과 마주친다. 포빌 시장은 칸에서 가장 큰 시장이자 현지에서 나는 신선한 채소와 과일, 치즈, 올리브 등을 파는 푸드 마켓으로, 화요일에서 일요일까지, 오전 7시부터 오후 1시까지만 열린다. 월요일에는 각종 앤티크 그릇, 책, 인형, 잡화 등을 파는 벼룩시장이 열린다.

구시가 르 시케의 카스트르 광장 슈발리에 언덕으로 가면 칸의 역사적인 장소와 만난다. 카스트르 박물관Musee de La Castre은 12세기에 바다를 통해 침입하려는 외부의 적들을 감시하는 망루이자 선원들의 무사 귀환을 비는 예배당 역할을 했던 요새를 개조해서 만든 박물관이다. 네덜란드 출신 19세기 탐험가 바롱 뤼크마나Baron Lyckmana의 수집품을 기반으로 한 민속 인류학 유물, 아프리카,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부터 19세기 남프랑스 화가의 작품까지 다양한 물건들이 보존되어 있다. 시계탑에서는 칸 시내를 360도 파노라마로 내려다볼 수 있어 늘 관광객들이 북적인다.

↑ 카스트르 광장 슈발리에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

카스트르 광장 슈발리에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


↑ 앙티브 거리에서 만난 멋진 할아버지, 할머니.

앙티브 거리에서 만난 멋진 할아버지, 할머니.


↑ 인터컨티넨탈 칼튼 칸의 그레이스 켈리 스위트룸.

인터컨티넨탈 칼튼 칸의 그레이스 켈리 스위트룸. 1955년, 그레이스 켈리는 이 호텔에서 모나코 왕자를 만났다.


↑ 모차렐라 토마토 샐러드

그랜드 하얏트 칸 호텔 마르티네의 레스토랑에서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모차렐라 토마토 샐러드를 맛보았다.

↑ 구시가에 있는 포빌 시장. 월요일에는 벼룩시장이 열린다.

구시가에 있는 포빌 시장. 월요일에는 벼룩시장이 열린다.

칸은 아주 작은 도시다. 구석구석까진 아니어도 이틀이면 웬만한 데는 둘러볼 수 있다. 하루 더 머문다면 주변 섬으로 반나절 외유를 떠나는 것도 좋다. 칸 앞바다에는 레랭 제도로 묶이는 2개의 섬 생마르그리트Saint-Marguerite와 생토노라 Saint-honorat가 있다. 생마르그리트Saint-Marguerite는 둘 중 큰 섬인데 칸의 옛 항구 비외 포르에서 배로 15분이면 닿는다.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철가면>의 배경이 되었던 곳으로 <철가면>의 모델인 수수께끼의 죄인이 갇혔던 성채가 있다. 요새였던 이곳은 오랫동안 초소와 감옥 등으로 사용되었는데 그 형태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관광객뿐 아니라 현지 학생들에게도 좋은 견학 코스가 되고 있다. 좁은 감옥에 직접 들어가 보니, 철가면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됐다. 성채 안의 박물관 뮤제 드 라 메르Musee de La Mer에서는 오래전 침몰한3해적선이나 화물선에서 건진 전시물들을 만나볼 수 있다.

유칼립투스 나무와 소나무로 뒤덮인 섬은 산책하기에 좋다. 그리 크지 않아 1시간이면 넉넉히 돌아볼 수 있다. 소나무 숲이 울창한 해안가는 동서양이 섞인 오묘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같은 지중해이지만 배 타고 불과 15분 걸리는 육지에서와는 바다 빛깔이 전혀 다르다. 깨끗하고 조용하기 때문에 생마르그리트 섬은 현지인들이 망중한을 즐기는 장소로 인기가 높다. 생마르그리트 섬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뇌>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과거에는 한 번 갇히면 영원히 탈출할 수 없는 유배의 섬이었지만 <철가면>과 달리 <뇌>의 주인공은 건너편 섬으로 헤엄을 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처럼 외롭고 어두웠던 '유배의 섬'에서 이제 어둠은 사라지고 자유만 남았다. 자발적인 고립감을 느끼기 위해 15분만에 아름다운 섬으로 외유를 떠날 수 있는 칸 사람들이 마냥 부러웠다.



▲부속건물 뒤쪽에서 본 성스테판 대성당

[투어코리아=지태현 객원 기자] 누군가 그랬다. "패키지여행은 재미없고, 자유여행은 자신 없어 못한다고. 그래서 요즘 대세는 테마 여행이라고. 사진이나 패션 또는 건축이나 와인에서 순례에 이르기까지 일정한 테마를 주제로 하는 테마여행이 대세라고."


또한 유럽여행에서 서유럽, 남유럽, 동유럽이 그저 그렇게 비슷비슷하다고 느꼈다면 발칸으로 가보라고…. 그래서 정한 여행지 '발칸3국(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물론 여행사의 패키지여행이 아니고 자동차를 렌트해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스톤 게이트




기대감 충만했던 자그레브 & 블레드
자동차 여행의 출발지는 '자그레브'. 자그레브-in 자그레브-out으로 하는 기본 여행 계획을 짰다.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는 '2013년 골든 스핀 오브 자그레브 여자 싱글 프리 스케이팅 경기'에 김연아 선수가 참가하며 우리에게 점점 알려지기 시작했고, '꽃보다 누나'의 크로아티아편이 방송되면서 최근 인기가 높아진 여행지다.




항공편 예약을 마무리하고 자동차 여행 일정과 운행 예상 거리를 계산 해보니 약 1,500km 정도를 자동차로 이동해야 하는 일정이었다. 두브로브니크에서 자그레브로 돌아올 때는 현지 항공을 이용하지만 자다르부터 두브로브니크까지 약 500km는 아름다운 아드리아 해안도로가 이어진다. 때문에 많은 여행객들이 사랑한다는 아드리아 해안도로를 달린다는 것에 대한 설렘과 기대감으로 가득 했다.




숙소는 자유 여행이니만큼 민박과 펜션 그리고 아파트와 스튜디오는 물론 호텔에 리조트 호텔까지 다양한 종류의 숙소를 현지의 상황에 따라 경험해 보기로 했다.




아름다운 색감의 도시 '자그레브'
첫번재 목적지인 자그레브 공항에 도착해 트랩을 내려오며 느낀 첫 인상은 자그레브는 청명하고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과 주변의 환경이 상당히 컬러풀하게 조화된 색감 있는 도시라는 것이다. 호텔 체크인 한 후 바로 현지 교통인 트램을 이용해 시내 중심지인 반젤라치크 광장으로 가봤다.




광장에는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발랄하고 활기찬 젊은이들로 넘쳐나고 있었으나 관광객은 별로 보이지 않고 붐비지 않았다. 넓지 않은 광장을 잠시 둘러보고 언덕으로 조금 걸어 올라가니 아름다운 모습의 대성당 '성 스테판 성당'이 나왔다.



▲부속건물 뒤쪽에서 본 성스테판 대성당




성당 주변의 스톤 게이트를 넘어가니 지붕에 크로아티아 국기와 자그레브 도시기가 컬러풀하게 모자이크 된 성마르크 성당이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이곳도 인파가 북적이지는 않는 것이 다소 의외였다. 아마도 관광 비수라 그런 것은 아닐까 짐작해볼 뿐.




우리 일행이 좀 늦게 시내에 도착했는지 근처에 있었던 노천시장도 이미 장사를 마쳐 모두들 철수한 상태이지만 골목길의 노천 카페에는 그래도 몇몇 사람들이 커피나 맥주를 즐기며 밝은 모습들이었다.




우리가 시내를 걸어 다니며 이곳저곳 둘러본 시간이 약 3시간 정도 되었을까. 생각보다는 작고 조용한 도시 자그레브는 공항에서 처음 느낀 것처럼 아름다운 색감의 도시였다. 이 작은 도시를 구석구석 누비며 아름다운 색감을 만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여행지였다.



▲성마르크 성당




여행은 '예상치 못한 일의 연속'... 네비는 기능을 잃고 비는 내리고
다음날 우리는 예약한 자동차를 픽업하여 두번째 먼저 목적지인 슬로베니아 블레드로 향했다. 우리가 묵었던 호텔이 슬로베니아 국경과 그리 먼 곳이 아니었으므로 쉽게 A2-E70 고속도로 진입로를 찾아 들어갔다. 약 1시간 정도 운행하여 크로아티아 국경에서 출국 확인하고 10여 미터 전방에 슬로베니아 출입국 사무실에서 입국 수속을 했다.




그러나 여행은 항상 불확실하고 예기치 못한 일들이 발생해서 더 재미있는 것이라고 했던가. 당시엔 당황스럽고 짜증스럽긴 하지만 말이다.




역시나 A2-E70 고속도로로 슬로베니아 수도인 루블라냐쪽으로향하던 도중 자동차의 네비게이션(Garmin) 기능에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물론 출발 전에서부터 블레드의 숙소가 네비에 쉽게 입력이 되지 않아 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슬로베니아에 들어서니 "돌아가라"는 이상한 멘트가 계속 나오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휴게소에 차를 세워놓고 네비의 기능을 확인 하고자 했지만 쉽지 않아 자동차 여행 중 쉬고 있는 다른 나라의 젊은 여행객에게 네비의 상태를 설명을 하고 네비게이션 기능을 확인해달라고 부탁했다. 이것저것 눌러 보고는 모르겠다며 휴게소에서 지도를 구해서 지도를 보고 찾아가 보란다.









[월간웨딩21 편집부]
# 여행 살아보니 어때? 2

여행 중 현지인의 집에 머물며 여행할 수 있는 숙박 서비스가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이를 통해 로컬처럼 한 곳에 오래 머무르며 도시의 라이프스타일을 즐기는 거주형 여행도 가능하다.관광객 모드가 아닌 우리만의 의미 있는 ‘살아보는 여행’을 다녀온 세 부부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특별한 결혼식을 마친 후 유럽을 산책하다
이혜민 정현우 부부

살아 본 도시 스페인 그라나다,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총 8 도시, 포르투갈 포르투,리스본, 모로코 마라케시, 메르주가
기간 2014년 3월 15일 ~ 6월 10일



"서울이 아닌 낯선 도시에서 하는 장기 여행은 분명히 여유롭지만 새로운 것에 대한 긴장감이 늘 지속돼요.

부부가 함께 여행하면서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인 반면 쉽게 자신의 짐을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것은 단점이에요.

서로 의지하되 상대방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그래야 비로소 서로 행복하게 여행을 즐길 수 있어요."



900km의 긴 결혼식, 바르셀로나로 떠나기로 결심하다

이혜민, 정현우 부부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함께 걷는 것으로 결혼식을 대신했다. 남편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이던 산티아고 순례길 도보여행, 그곳을 버진로드 삼아 ‘세상에서 가장 긴 결혼 행진’을 떠난 것.

결혼식을 마친 후 신혼여행 코스로 스페인 전역과 그 주변국의 도시에 머물며 ‘살아보는 여행’을 감행했다. 지인들에게 유럽으로 떠난다고 했을 때, 이왕이면 유럽 전역을 돌고 오는 코스로 하루 이틀 도시에 머무는 여행을 추천했다.

하지만 그런 정신없이 ‘찍고 돌아오는’ 여행보다는, 그곳에 스며들어 현지인이 되어보고 싶었다. 적어도 한 도시에 일주일에서 열흘을 머무는 ‘어슬렁어슬렁’ 여행을 계획한 것이다.



유럽의 도시와 친해지기

두 부부의 총 90일 동안의 여행 기간 중 절반은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보냈고, 나머지는 스페인 그라나다를 포함한 여덟 도시와 포르투갈, 모로코의 도시에서 ‘살아보는 여행’을 했다.

새로운 도시와 만나는 일은 항상 두근거렸다. 설레는 마음에 무작정 거리를 나서 현지인처럼 도시와 친해졌다. 하루에 한 군데씩 꼭 방문하고 싶었던 관광지를 찾았고, 그 밖에 시간은 숙소 주변 골목길, 가게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새로운 무엇을 보기 위해 조급해하거나 열 내지 않았어요. 그냥 그 도시에 편안하게 살고 있다는 느낌이 좋았거든요. 물건이 가득한 상점과 놀이터의 아이들 모습 같은 풍경을 눈에 담으며 천천히 길을 걷다 보면 벌써 그 동네에 익숙해진 기분이 들었어요.” 

같은 유럽, 같은 나라이지만 도시별 골목은 그 문화나 분위기가 모두 달랐다. 특히 지역마다 음식과 로컬 맥주 문화도 그 맛이나 방식, 풍미가 달라서 즐기는 재미가 쏠쏠했다.



긴 결혼식 후 ‘쉬고 싶은 집’, 공유숙박을 선택하다

900km라는 긴 여정을 마친 후 스페인 전역을 여행하기로 결심한 두 부부는 우선 아늑하게 쉴 숙소가 필요했다. 

“장기 배낭여행을 한 뒤라서 무엇보다 빨래와 요리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중요했어요. 비현실적인 고급 호텔이 아니라 친숙하고 마음마저 편안한 숙소가 필요했죠. 또한 골목 사이를 누비는 산책 같은 여행을 고려했던 터라 에어 비앤비로 현지인들이 실제로 살고 있는 집을 선택했죠.”

현지인의 집에 머물다보니 각 도시의 라이프스타일과 분위기가 현실적으로 와 닿아 느껴졌다. 특히 국내에서도 맛집을 찾아다니는 두 부부는 로컬만 아는 비밀의 레스토랑을 직접 맛볼 수 있어 뜻 깊었다.

“관광지 레스토랑은 비싸기만 하고 과대평가된 맛집들이어서 실패하기가 일쑤인데, 현지인이 찾는 맛집을 가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로컬들이 매일 아침 출근길에 잠깐씩 들르는 레스토랑이나 카페에서 현지인과 함께 식사했죠. 그렇게 그들의 일상을 우리 삶의 일부로 담아내는 여행을 했어요.”



새로운 결혼 그리고 여행, 커플들에게 영감을 주다

정형화된 예식과 전혀 다른 결혼식 그리고 아직은 우리에겐 낯선 ‘살아보는 여행’을 시도한 이 커플은 얼마 전 둘만의 모든 여정을 담아 책을 발간했다. 특별한 결혼 이야기가 서점에 등장하자마자 많은 예비부부들의 관심을 받았다.

“남들이 하는 대로가 ‘정답’은 아니잖아요. 우리 부부는 우리만의 의미가 담긴 결혼식을 긴 고민 끝에 준비했어요. 당연히 다른 커플에게 ‘산티아고 순례길 웨딩 마치’가 정답은 아니죠.

여행도 마찬가지예요. ‘살아보는 여행’의 의미도 각 커플마다 다르다고 생각해요.여행을 떠나기 전, 어떤 마음가짐으로 여행하고 싶은지, 어떻게 하면 우리만의 ‘의미 있는’시간을 보낼지 서로 의견을 나누는 시간을 갖는 것이 중요해요.” 

두 부부가 책을 펴낸 이유는 남들이 하지 않는 결혼식이나 여행 준비 과정에서 현실적인 부분을 포기하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우리처럼 오직 부부만의 의미가 담긴 시간과 추억을 가질 용기를 주고 싶고, 그런 의지와 변화를 지지하고싶어요.”



두 부부의 900km 산티아고 순례길 결혼식과 유럽 여행이 궁금하다면 

《세상에서 가장 긴 결혼행진》
페이스북 www.facebook.com/900km
인스타그램 @900km_official


광인 돈키호테가 아직도 살아 숨쉬는, 스페인 광장

라 만차의 [돈키호테 Don Quixote de La Mancha]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소설이자, 최초의 근대소설이자, 문학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소설이다. 이 소설 속의 주인공 돈키호테는 무모한 광기의 대명사로 그 이름이 두루 쓰였다. 1605년 ‘재치있는 이달고 라 만차의 돈키호테’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어 속편까지 쓰여졌던 이 작품의 작가는 미겔 데 세르반테스. 군인생활을 하다가 한쪽 팔을 잃고, 해적에게 붙잡히고, 노예로 팔리고, 주인에게 몸값을 지급하고 마드리드로 돌아오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그를 유명하게 한 작품이 바로 [돈키호테]다. 이 작품 하나로 그는 스페인의 국민작가가 되었고, ‘지혜의 왕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마드리드의 중심가에 자리한 스페인 광장에 그의 동상이 서 있다. 세르반테스의 사망 30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진 탑이다. 그곳에 가면 세르반테스뿐 아니라 그가 써낸 불멸의 주인공들,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 둘시네아도 만날 수 있다.




피가 흥건한 광장, 플라사 마요르

단일한 카톨릭 이데올로기를 확립하겠다는 취지로 시작되었던 종교재판.

마드리드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아름다운 17세기 광장인 플라사 마요르는 사실 수많은 광기의 피가 겹겹이 스며 있는 곳이다. 한때는 투우장으로, 또 한때는 사형장으로, 그리고 한 시절은 종교재판장으로 쓰였던 이곳은 인간의 광기를 증명하는 곳이기도 하다.


1480년부터 스페인에서 있었던 종교재판은 아라곤 왕국페르난도 2세카스티야 왕국이사벨 1세에 의해 시작되었다. 단일한 카톨릭 이데올로기를 확립하겠다는 취지로 시작된 종교재판은 곧 광기에 휩싸이게 된다. 개신교 이단자, 카톨릭으로 거짓 개종한 유대교도와 이슬람교도들이 종교재판의 대상이었는데, 로마 교황의 대칙서를 받아 종교재판관이 진행한 이 재판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된다. 재판이었다고는 해도 피고인에게는 변론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고 판결의 결과도 알려주지 않았다. 고문과 자백이 있을 뿐이었다. 처벌의 형태는 다양했다. 징역, 참수형, 교수형, 화형. 희생자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었다. 이토록 피로 얼룩진 광장은 현재 과거를 잊고 평화로운 관광객들의 집합지가 되어 있다.




미친 천재들의 기숙사, 레지덴시아 데 에스투디안테스

스페인의 젊은 예술가들을 그린 영화 [리틀애쉬]


폴 모리슨이 감독하고 로버트 패틴슨, 하비에르 벨트란, 매튜 맥널티가 연기한 영화 [리틀애쉬 Little Ashes]는 20세기 초반 스페인의 젊은 예술가들을 보여준다. 화가 살바도르 달리, 시인 가르시아 로르까, 영화감독 루이스 부뉴엘을 비롯한 젊은이들은 파시즘 직전의 자유주의 시대를 보내며 서로 교류하고 영향을 받으며 지적이고 예술적인 흐름을 만들어냈다. 우정은 미묘한 애정으로 발전하기도 하고 궤를 벗어난 감정은 파국을 가져오기도 했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의 천재성과 광기를 불태우고 과시했다. 그 시대를 스페인에서는 ‘은의 시대’라 부른다.


세 사람이 머물던 곳, 레지덴시아 데 에스투디안테스는 마드리드에서 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이 거주하던 일종의 학생기숙사이다. 젊은 예술가들이 밀집된 그곳은 새로운 문화의 흐름을 이끌기에 충분했다. 이곳은 현재에도 중요한 문화센터로서 활발하게 제 몫을 다하고 있다. 콘서트와 전시 등 문화 행사들이 꾸준히 열리고 있는 한편에는, 지금도 스무 명의 젊은 예술가와 연구자들이 머물며 기라성같은 이름의 선배들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미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쉬를 만날 수 있는, 프라도미술관

프라도 미술관에는 미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쉬가 있다. 천하의 달리가 그의 작품 옆을 지날 때마다 질투심에 불타 눈을 가렸다는 바로 그 보쉬. 그의 상상력은 남달라서, 그의 작품 [세속적 쾌락의 정원]은 서양 미술 전체에서 가장 많이 연구되고 있고, 또 가장 다양한 해석을 낳고 있기도 하다. 펠리페 2세가 그의 팬이었던 덕분에 프라도 미술관은 보쉬의 패널화를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미술관이 되었다. 덜덜란드의 화가이기는 하지만, 그의 작품세계를 만끽하려면 프라도 미술관을 방문하는 것이 정석이다.


프라도 미술관에 가면 그의 또 다른 작품인 [미친 돌의 추출]도 볼 수 있다. 1475년에서 1480년 사이에 그려진 것으로 추측되는 이 작품은 미친 사람의 머리에서 광기의 돌을 꺼내는 장면을 보여준다. 이 그림에서도 그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상징물을 볼 수 있는데,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 탁자 위의 구근이다. 미친 사람의 머리에서 꺼낸 것은 광기의 ‘돌’이 아니라 바로 이 ‘구근’인데, 네덜란드에서는 튤립 구근이 바로 광기의 상징이라고.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작품 [미친 돌의 추출]

그들 때문에 미치는 사람이 부지기수, 레알마드리드

레알 마드리드를 그린 영화 [레알]의 포스터


마드리드에 연고지를 두고 있는 프로 축구팀 레알 마드리드 축구 클럽(Real Madrid Club de Fútbol)의 명성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만큼 자자하다. FIFA로부터 20세기 최고의 축구 클럽으로 선정된 이 팀의 자산가치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밀리지만 세계에서 제일 많은 소득을 올리고 있는 축구팀이기도 하다.


그러나 레알 마드리드를 둘러싼 움직임이 순수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공화국 정부에 반대하여 쿠데타를 일으킨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은 극우적인 일인 독재를 유지하기 위해 레알 마드리드를 이용했다. 국내로는 국민을 우민화하고 국외로는 자신의 정권을 홍보하는 데 활용했던 것이다. 레알 마드리드의 ‘레알’이 의미하듯, 이 팀은 오랫동안 부유층과 권력자들의 팀을 자임해왔다. 그 때문에 마드리드의 또 하나의 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레알 마드리드 정부의 팀, 나라의 수치”라는 가사가 든 노래를 부르면서 그들을 비판했다.


레알 마드리드를 논란으로 밀어 넣고 있는 또 하나의 존재는 극렬 서포터인 ‘울트라 수르’이다. 인종차별적인 발언과 행동을 하고 나치 문양의 문신을 한 채 상대편 흑인선수가 공을 잡으면 원숭이 울음소리를 내어 야유하는 이들을 제재하기 위해 세계축구연맹과 유럽축구연맹이 나서기도 했으나, 어쩌랴, 반쯤 미친 그들에게는 주변의 이성적인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꿈이 있다는 건 미쳐있다는 것, 페드로 알모도바르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꿈을 위한 첫 걸음은 어린 시절 교육을 받던 수도원을 뛰쳐나오는 것이었다. 종종 몰래 나와 영화관으로 숨어들곤 했던 그는 결국 16살에 마드리드로 무작정 상경하게 된다. 그러나 프랑코 정권 아래에서 영화학교가 폐쇄되면서 영화감독을 향해 가는 그의 길은 역경에 처하게 된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는 전화국의 사무보조로 일하며 꿈을 삭여야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꿈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프랑크 독재가 저물어가던 시절 활발하게 일어난 반문화 운동에 편승한 그는 이런저런 재미있는 일들에 뛰어들었다. 글램록의 패러디 듀오를 만들어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어렵게 월급으로 모은 돈으로 산 슈퍼 8밀리 비디오로 단편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그는 그렇게 만든 단편영화들을 마드리드의 클럽이나 바에서 상영했는데, 기술적으로 사운드를 입힐 수 없어 카세트테이프로 음악을 틀고 자신이 변사를 자처하기도 했다.


그의 첫 번째 장편 작품은 [페피, 루시, 봄 그리고 다른 사람들]. 1980년에 발표한 이 작품은 1년 반 동안 찍은 것이었는데, 배우와 스텝들의 경우 거의 모두 처음 영화작업을 하는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이 작품은 마드리드에 몇 개 없는 예술극장 중의 하나인 알파빌 극장에서 심야상영을 했는데, 여기서 번 돈으로 두 번째 영화 [정열의 미로]를 찍을 수 있었다. 현재 시네스 골렘으로 바뀐 그 작은 극장 덕분에 비로소 영화감독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의 그의 행보는 익히 알고 있는 바, 수없이 많은 영화를 찍고 수없이 많은 상을 받았다. 자신의 꿈에 미쳐 있었던 한 소년은 현재 미친 듯 아름다운 작품들을 찍어내는 감독이 되었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첫 영화 [페피, 루시, 봄 그리고 다른 사람들]

성인의 두개골, 뼈, 그리고 말라버린 피. 엔카르나시온 왕립수도원

펠리페 3세의 부인 마르가레트


엔카르나시온 수도원은 아우구스티누스회의 수녀원이다. 1611년, 펠리페 3세의 부인인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트를 위해 세워진 이 수도원은 현재 16~18세기의 진기한 작품들을 소장한 박물관으로 유명하다. 호세 데 리베라, 비센떼 까르두초, 까르레뇨 데 미란다, 안또니오 뻬레다, 그레고리오 페르난데스의 작품을 볼 수 있다. 고야의 처남인 프란시스코 바예우와 루카 히오르다노의 작품도 소장되어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유골함이 있는 방이다. 이 방에는 성인들의 두개골, 뼈 등이 보관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빤딸레온 성인의 굳은 피가 담겨있는 유리병이다. 매년 7월 27일, 즉 이 성인의 기일이 되면 말라버린 피가 녹아서 액체가 된다고 한다. 이렇게 건조된 피가 액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곧 마드리드에 재앙이 닥친다는 의미라고. 실제로 굳은 피가 액체가 되기는 힘들터이니, 이 전설이 의미하는 바는 마드리드는 재앙이 끊이지 않는 저주받은 도시라는 뜻인 것일까? 아니면 실제로, 마드리드의 평화를 약속하며 굳은 피는 그날 하루 붉게 흐르는 것일까?

일출 장관은 언제 어디에서 봐도 늘 벅찬 감동을 선사하지만, 세계 각국 명소에서 바라보는 일출은 또다른 묘미가 있지 않을까. 세계 각국 관광청들이 추천하는 일출명소를 소개한다. 여명을 뚫고 새벽을 알리는 닭처럼, '붉은 닭'의 해 정유년(丁酉年) 새해를 힘차게 시작해보자.

▲ ⓒBjarne Riesto /노르웨이관광청(Visitnorway.com) 제공

'노르웨이 노르캅'에서의 특별한 일출!


백야와 오로라의 나라 노르웨이. 노르웨이관광청이 추천한 일출 명소는 북위 71도에 자리한 '노르캅(NORDKAPP, 노스케이프 North Cape)'다.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자연 절경 1001'에 꼽힌 '노르캅'은 대서양과 북해가 만나는 지점에 거대한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절벽으로, 이 곳을 찾는 여행객은 연간 약 20만 명 정도다.



해수면으로 307m 위, 바다 쪽으로 돌출된 절벽 노르캅에서는 아주 특별한 일출을 만날 수 있다. 특히 5월 중순부터 7월까지는 밤 12시에도 태양이 바다 위에 떠있는 놀라운 풍경을 접할 수도 있다. 한 밤중 시간이 정지한 듯 하늘 중간에 걸려 있는 태양, 그리고 그 자리에서 아침에 떠오르는 거대한 태양은 한 번 본다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장관이다.


이 절벽 위에는 최북단 노르캅을 상징하는 듯 북극해를 바라보고 있는 지구 모양의 철제 조형물(Polar Circle)이 있어 관광객들이 기념사진을 찍는 포토존이 되고 있다. 또한 건물 지붕 위에 둥글고 하얀 구가 있는 건축물 '노스 케이프 홀센터(North Cape Hall)'에서는 일년 내내 다양한 전시회가 열려 여행객들에게 볼거리를 선사한다.

▲ ⓒ Karl Thomas/노르웨이관광청(Visitnorway.com)

노르웨이 최북단까지 와서 '해'만 보고 가기 아쉽다면, 다양한 체험에 도전해보자. 겨울엔 스노우모빌, 얼음 낚시, 스노우슈 스케이트, 개 썰매를 등 북극지방에서 체험할 수 있는 모든 모험을 즐길 수 있다. 환상적인 오로라 장관도 빼놓을 수 없는 최대 볼거리다.


한편, 노르캅 최초 여행객은 1664년에 방문한 이탈리아 사제 프란체스코 네그리였다. 그 후 19세기 중반까지도 일반 여행객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모험가들에게 열려 있던 미지의 땅이었다. 매우 험한 육로를 통해서만 닿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젠 호닝스버그와 노르캅을 연결하는 도로가 생겨나면서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됐다.


노르캅에 가려면 오슬로에서 호닝스보그(Honningsvåg)공항까지 비행기 타고 가서, 호닝스보그에서 유료 셔틀 버스 를 타면 된다. 또한 연안 쾌속선 '후티르튼(Hurtigruten)'을 타고 북부 노르웨이를 탐험하며 노르캅을 방문할 수도 있다. http://www.visitnordkapp.net/en/

▲ ⓒJohan Wildhagen /노르웨이관광청(Visitnorway.com)

<사진 및 자료협조 미국관광청, 하와이관광청, 스위스정부관광청, 독일관광청, 노르웨이관광청, 페루관광청, 두바이관광청>


■ 독일 종교개혁 500주년 

 기사의 0번째 이미지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는 바르트부르크성

기독교의 르네상스라 일컫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올해 500주년을 맞는다. 종교개혁은 16~17세기 유럽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쇄신을 요구하며 등장했던 개혁운동,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종교개혁 현장과 마르틴 루터의 도시를 찾는 여행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 루터의 공개청문회 개최된 하이델베르크 대학 

마르틴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95개조 논박문을 내걸었다. 그의 논박문은 유럽 곳곳으로 배달되어나갔다. 유럽 각지의 학자, 종교지도자들은 루터의 저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중 독일의 어느 대학교에서 루터를 공개청문회를 열어 초청했다. 1518년 4월 26일 루터는 그 청문회에 등장했다. 그곳이 지금의 하이델베르크 대학이다. 

하이델베르크는 네카강 연안에 자리 잡고 있는 도시로 12세기에 처음 문헌에 등장했다. 루터의 청문회가 열린 하이데베르크 대학은 1386년 선제후 루프레흐트 1세에 의하여 설립됐다. 프라하대학교와 빈대학교의 뒤를 이어 독일어권에서는 가장 오래된 대학으로 16세기에 종교개혁의 보루가 되었다. 

보름스는 유럽에서 가장 유서 깊은 도시 가운데 하나이다. 원래 켈트족의 정착지로서 보르베토마구스라고 하였다. 100여 차례나 되는 제국의회 등 여러 가지 중요한 회합이 이곳에서 많이 열렸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1076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폐위를 선언한 주교회의. 1122년 보름스협약으로 이어진 회의, 1495년 황제 막시밀리안 1세 때의 의회, 루터가 황제 카를 5세 앞에서 자기의 신념을 표명한 1521년의 의회 등이다. 

루터의 재판으로 불렸던 이 회의 장소가 되었던 제국교회 방문이 가능하다. 루터는 이 재판 후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피신하게 된다. 

 기사의 1번째 이미지

소박한 분위기의 바르트부르크 루터방

◆ 루터의 묘지가 있는 비텐베르크 

아이젠나흐는 바흐의 출생지다. 그가 태어난 집은 박물관으로 보존되어 옛 악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루터는 이곳에서 공부하고 바르트부르크에서 성경 번역에 착수하였다. 시내에서 루터하우스를 방문할 수 있다. 

인근에 있는 바르트부르크 성을 방문할 수 있다. 루터는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이로 인해 독일에 기독교가 널리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비텐베르크는 1517년 시작된 종교개혁의 발상지로서 유명하다. 루터를 비롯하여 멜란히톤, 부겐하겐의 집이 남아 있다. 

루터의 묘지와 그의 유명한 95개조를 써 붙인 테제의 문이 있는 성교회를 포함하여 종교개혁과 관련 있는 역사적 건물이 많다. 루터가 설교를 하였던 시교회, 종교개혁 역사박물관인 루터관, 루터가 살았고 멜란히톤의 집이었던 16세기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 등이 있다.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그의 목회 생활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비텐베르크에서 생활하였다. 루터와 관련하여 가장 많은 유적과 유물이 남아 있다 

레드캡투어(02-2001-4734)에서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유럽여행 상품을 판매한다. 여행기간 중 쎄시봉 가수 윤형주의 공연이 곁들여진다. 아시아나항공 또는 대한항공 이용. 2017년 3월21일 단1회 출발. 요금은 369만원부터. 


건강하게 여행하려면 밤에는 푹 잠을 자야 하는 게 바람직한 여행의 원칙. 하지만 밤하늘에 별이 많이 보이는 지역이라면 참 곤란한 딜레마에 빠진다. “저 별을 바라보고 또 사진으로 찍다 보면 금세 동이 틀 텐데 피곤해서 어쩌누…. 그래! 잠이 대수랴! 내일 차 안에서 쪽잠을 자더라도 오늘 밤은 꼭 저 별을 찍고 말리라!” 이렇게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 같은 사람들에게 필독을 권하는 ‘별 사진 찍는 법’을 소개한다.

촬영지ㅣ스위스 벵엔 카메라ㅣCanon EOS 6D, 초점거리 16mm, 촬영모드 M(매뉴얼)모드, ISO 3200, 조리개 F2.8, 셔터스피드 15초

밤하늘의 별을 따다 어떻게 카메라에 넣을까?  

별 사진을 잘 촬영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좋은 카메라일까? 노련한 기술일까? 정답은 싱겁게도 맑은 날씨다. 구름이 많으면 별이 안 보이는 것은 당연지사. 그래서 별을 잘 찍고 싶다면 여행지에서 노심초사 일기예보에 촉각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달 뜨는 밤은 로맨틱하지만 별 촬영과는 상극이다. 달빛은 생각보다 무척 밝기에, 특히 보름달밤에는 별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별 관측과 촬영을 목적으로 여행하는 사람들은 그믐 기간에 여행을 떠난다. 또한 달이 뜨고 지는 시간도 매일 다르므로 달이 낮은 시간을 노려야 한다.

이 사진 또한 그런 조건에서 촬영했다. 스위스 알프스의 융프라우 봉이 있는 베르너 오버란트 지역을 여행한 것은 다행히 달이 없는 그믐 기간이었다. 날씨만 맑으면 최고의 조건인데 머물렀던 3일 중 하룻밤이 구름 하나 없이 별이 총총했다. 마침 은하수도 잘 보이는 7월이었기에 은하수가 동남쪽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자정 무렵, 삼각대에 카메라를 단단히 물리고 하늘을 최대한 넓게 담을 수 있는 광각렌즈를 준비했다. 촬영 모드는 M(수동)으로 하고 워낙 어두운 환경이므로 ISO는 3200까지 올렸다. 조리개는 렌즈 최대 개방 조리개값인 F2.8로 설정했다. 그리고 셔터스피드는 별의 움직임이 나타나지 않도록 적당하게 15초 정도로 설정했다. 30초 정도의 더 느린 셔터스피드를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별은 북반구의 경우 북극성을 중심으로 움직이기에 별이 직사각형 모양으로 나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초점은 AF(자동초점)로 멀리 떨어진 마을의 불빛에 맞춘 뒤, 반셔터를 누른 채 MF(수동초점)로 전환을 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릴리즈의 셔터를 눌렀다. 그렇게 탄생한 알프스의 별 사진.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은하수의 길이 선명하게 담겼고, 별은 정말 쏟아지는 듯했다. 이렇게 별이 가득 담긴 이유는 카메라 세팅과 촬영법에도 있지만 무엇보다 날씨가 맑았고 그믐밤인데다 또 촬영을 한 지역의 고도가 높았기 때문이다. 이 날 묵은 호텔은 해발 1,620m에 자리 잡은 알프스의 산골마을 벵엔. 고도가 높을수록 별은 더 잘 보이고 또한 이런 시골에는 밤에 별 관측을 방해하는 광공해가 거의 없기에 총총한 별을 촬영할 수 있었다. 여행에서 정말 환상적인 별을 만나고 싶다면 이렇게 시기나 장소의 선택이 무척 중요하다.

●별을 촬영하기 위한 카메라 세팅

‘별 볼 일’이 없어서 그렇지 별만 잘 보인다면 생각보다 별 촬영의 기술적 부분은 그리 어렵지 않다. 여행 중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만났다면 아래의 내용들을 참조해서 황홀한 밤하늘의 보석들을 담아 보자.

▶카메라와 렌즈 설정하기 Basic Setting for Star

별 촬영은 크게 별의 점상 촬영과 궤적 표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전반적인 설정은 동일하다. 단 점상이나 은하수를 표현할 땐 셔터스피드를 보다 빠르게 설정하고(15~20초), 궤적용 컷을 찍을 땐 셔터스피드를 30초 혹은 그 이상으로 설정하고 릴리즈의 셔터록 버튼을 이용해 연사 모드로 촬영하는 게 다른 점이다. 촬영 환경이 무척 어두우므로 삼각대는 필수다.

RAW로 촬영한다.

고품질의 별 사진을 갖고 싶다면 후보정 과정이 필요하기에 보정이 용이한 RAW 파일이 필요하다. 한편, 별 궤적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JPEG가 편하므로 RAW+JPEG로 촬영하는 게 가장 무난하다.

M(수동) 모드로 찍는다.

그리고 노출을 조절해가며 찍는다. 노출은 약간 밝으면 후보정하기에 더 좋다. 어둡게 찍을수록 후보정시 화질이 깨지고 노이즈가 발생할 확률이 높다.

렌즈의 최대 개방 조리개값까지 개방한다.

조리개를 열수록 적정노출을 잡기 쉽고 별도 보다 굵게 표현된다. 평소라면 광각렌즈로 풍경을 촬영할 때 조리개를 많이 개방할 일이 거의 없지만 별 촬영시에는 최대 F2.8까지 개방하면 좋다. 그래서 최대 개방 조리개값이 밝은 렌즈가 유리하다.

파랗게 찍어라.

우리가 객관적으로 느끼는 밤하늘의 색상은 파란색에 가까운, 색온도(캘빈값) 기준으로 대략 3500K 전후다. 하지만 RAW로 촬영한다면 AWB(오토 화이트밸런스)로 촬영해도 무방하다.

정지컷인가 궤적 사진인가에 맞춰 셔터스피드를 조절하라.

별은 일주운동을 하기 때문에 생각보다 빨리 이동한다. M 모드에서 최대로 느린 셔터스피드인 30초로 놓고 촬영하면 별이 직사각형 모양으로 일그러진다. 그래서 별을 동그랗게 담고 싶다면 15~20초 정도가 좋다. 적정노출에서 약간 밝은 정도로 노출계를 기준으로 잡고 조리개는 최대개방에서 ISO를 조절해가며 15초 정도를 맞춘다. 그러나 궤적을 염두에 둔 경우라면 나중에 촬영한 사진들을 합치기 때문에 셔터스피드가 길어도 상관없다. M 모드라면 30초. 벌브 모드라면 그보다 훨씬 긴 1~5분 정도로 셔터스피드를 줄 수도 있다. 아주 어두운 곳이라면 오래 노출할수록 ISO를 낮출 수 있어 노이즈를 억제할 수 있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벌브 모드가 유리하다. 벌브 모드로 별 궤적을 촬영할 때는 인터벌 릴리즈가 필요하다.

손떨림 방지 기능을 꺼라.

야경 등 장노출 촬영의 공통사항이지만 렌즈의 손떨림 방지기능인 IS와 VR 등은 모두 ‘OFF’로 해놓는다. 이 기능을 활성화하면 손으로 들고 찍을 땐 모터의 작동이 손떨림을 방지하지만 장시간 노출할 때는 진동으로 사진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캐나다 밴프

별을 촬영하다 보면 가끔 원시인이 되고 싶을 때가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의 지구는 밤을 밝히는 불빛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불빛은 별이 안 보이게 하는 가장 큰 적. 오죽하면 광공해라 부르랴. 하지만 또 암흑세상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우리 현대인이기에 전기를 발명한 에디슨에게 감사하며 도심이나 호텔 같은 곳에서도 주어진 대로 별을 촬영해 보기도 하자. 자동차가 질주하는 캐나다 밴프의 한 도로에서 촬영한 이 사진에서 자동차의 빨간 후미등이 길게 궤적으로 표현된 모습이 그렇게 흉하지는 않은 듯하다. 외려 밤 하늘의 별과 인류의 문명이 오묘한 조화를 이룬 것 같은 느낌은 필자만이 받는 감흥이려나.

한국 제주

별 촬영할 때마다 구름 한 점 없으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삼대가 덕을 쌓고 전생에 나라를 구하지 않고서야 어찌 촬영할 때마다 맑은 날씨를 만나랴. 요즘 꽤 정확해진 기상청의 예보를 철석같이 믿고 갔건만 생각하지 못한 구름이 나타났다면 좌절하지 말고 꿋꿋이 별을 촬영해 보자. 느린 셔터스피드로 촬영을 했기에 구름의 움직임이 표현되면서 그 사이에서 총총히 빛나는 별을 촬영할 수 있다. 제주도 삼다수 목장에서 촬영한 이 사진에서처럼 때로는 다 보여 주는 것보다 살짝 가린 상태에서 보이는 별이 더 섹시하기도 하다.

▶초점 맞추기 Focus in Darkness

별 촬영을 위해 기본적인 설정은 그리 어려울 게 없는데 초점 맞추기가 난제다. 별을 제외하고 아무 불빛도 없는 상황이라면(역설적으로 광공해가 전혀 없는 별 촬영에 완벽한 상황) AF(자동초점)로 초점을 맞출 재간이 없다. 그래서 MF(수동초점)로 초점을 맞춰야 하는데 이게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통상 렌즈의 초점링을 무한대(∞)까지 돌린 후 다시 반대로 살짝 돌려가며 촬영 후 액정으로 초점이 맞는지 확인하며 촬영을 해야 하는데 최소 3~4번 정도의 테스트를 해야 하며, 맞췄다 하더라도 별 궤적을 촬영할 때는 초점이 칼같이 맞았는지 확신을 하기 힘들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초점을 맞출 수 있는 불빛이 존재하지 않는 지역은 거의 없기 때문에 위 방법보다는 렌즈의 AF 상태에서 반셔터로 ‘띠딕’ 초점을 잡은 뒤 셔터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MF로 변환을 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렇게 하면 초점이 고정되기 때문에 렌즈의 초점링을 건드리지 않는 한 초점이 계속 맞게 된다.

▶구도 잡기 Lower Angle

별만 찍어도 아름답겠지만 별만 있으면 사진이 심심한 게 당연하다. 별이 총총한 밤하늘과 조화로운 피사체가 있어야 비로소 제대로 된 별 사진이 탄생한다. 그래서 멋진 산이나 조형물이 있는 장소가 별 촬영지로 인기가 많다. 특별한 피사체가 없다면 실루엣을 시도해 보면 좋다. 나무가 가장 대표적인 실루엣일 텐데. 나무조차 없다면 사람을 실루엣으로 표현하면 된다. 함께 간 사람이 모델 역할을 하면 되며 혼자라면 무선 리모컨이나 10초 타이머로 설정, 자신의 실루엣을 담을 수도 있다. 이때 하늘을 넓게 담고 하늘의 밝은 부분에 실루엣이 나와야 도드라지게 표현된다. 그래서 화각은 넓을수록, 앵글은 아래에서 위로, 로우앵글로 촬영하면 좋다.

한국 화천

밤에 탁 트인 높은 곳에 올라 별을 바라보면 “하늘이 이토록 넓었구나” 새삼 감탄하게 된다. 이렇게 넉넉한 밤하늘을 다 품기에 내 카메라의 소양은 밴댕이 소갈딱지처럼 좁기만 하다. 어안렌즈라 불리는, 초점거리가 극도로 짧은 렌즈를 이용하면 되긴 하지만 둥그렇게 왜곡이 너무 심하다. 밤하늘을 넓게 담고 싶을 때 쓰면 좋은 방법은 파노라마 촬영이다. 삼각대에 카메라를 세로로 물리고, 조금씩 방향을 오른쪽으로 옮기면서 한 컷씩 촬영을 한다. 촬영한 사진들을 나중에 포토샵 등의 편집 프로그램으로 합치면 화천 조경철 천문대에서 촬영한 이 사진처럼 하늘이 넓게 담긴 파노라마 사진을 얻을 수 있다.

인도 자이살메르

별을 촬영할 때 궤적 표현이나 은하수에 구애받지 않고 별 점상(정지컷)을 찍는다면 어떤 방향으로 촬영을 하든 상관없다. 하늘에서 가장 반짝이는 별은 금성. 저녁에는 서쪽 하늘에서 반짝이고 새벽이 가까워 오면 동쪽에서 반짝이는 샛별이 들어가면 보다 더 좋겠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별과 별자리, 그리고 하늘과 함께 담는 피사체가 잘 나타나는 방향으로 설정해 촬영을 하면 된다. 별은 생각보다 빨리 움직이므로 셔터스피드는 15~20초 정도가 적당하다. 인도 자이살메르 인근의 타르 사막에서 하룻밤 자며 찍은 이 사진에서 낙타와 몰이꾼 아저씨는 무려 20초 동안 ‘얼음땡’을 했다는 전설!

몽골 궁가로트

별 촬영이 재미있는 이유 중 하나는 별의 움직임을 사진으로 담을 수 있다는 것. 별은 북반구에서는 북극성을 중심으로, 남반구에서는 남십자성을 중심으로 일주 운동을 한다. 이것을 사진으로 표현하면 별의 움직임이 궤적(선)으로 표현된다. 이런 움직임을 한 장으로 표현하려면 무척 오랜 시간 동안 노출을 해야 하는데 아무리 어두운 상황이라도 오랫동안 노출을 하면 사진이 하얗게 과다노출로 나오기 마련. 그래서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을 할 때는 연속해서 여러 컷을 촬영해 포토샵이나 별 궤적 프로그램에서 사진을 한 장으로 합치기도 한다. 몽골의 게르와 함께 촬영한 이 사진은 북극성을 향해 셔터스피드를 30초씩 해서 연사 모드로 약 40분 동안 80컷 정도를 촬영해 별 궤적 합성 프로그램인 ‘스타 트레일즈(Star Trails)’로 합친 사진이다. 오래 촬영할수록 별의 일주운동을 더 오래 담을 수 있기에 별 궤적도 길어지게 되며 밤하늘에 구름이 적은 겨울이 별 궤적 촬영하기에 좋은 시즌이다. 철저한 방한대비는 필수!

이탈리아 토스카나

별 궤적사진도 아름답지만 별 촬영의 꽃은 뭐니뭐니 해도 은하수다. 은하수도 기술적으로는 별 점상 촬영과 다를 바가 없지만 은하수가 보이는 시기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은하수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은하수는 북반구의 경우 4월에서 9월까지, 여름철에 가장 잘 보이며 동쪽 끝 황소자리에서부터 시작해 남쪽 끝 전갈자리까지 이어진다. 가을과 겨울에도 은하수를 볼 수 있지만 상당 부분이 지평선에 넘어가 있기에 아름다운 은하수를 촬영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은하수가 잘 보이는 시즌에도 동쪽에서 뜨는 별은 매일 4분씩 빨리 떠오르기 때문에 매달 은하수 촬영의 최적 시간은 달라진다. 5월에는 새벽 1시경, 6월에는 밤 11시경, 7월에는 밤 9시경에 은하수를 목격할 수 있고 그로부터 2~3시간 뒤에는 하늘 중간을 가로지르게 되고 점점 남쪽으로 이동하게 된다. 5월의 그믐밤, 이탈리아의 토스카나에서 올리브 나무와 함께 은하수를 표현한 이 사진을 촬영한 시간은 새벽 2시경이었다.

몽골 노마디크 초원

은하수는 하늘을 가로질러 꽤 넓게 분포되어 있지만 사진으로 표현하기에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지평선 부근이다. 은하수에서 가장 밝고 또 암흑대가 뚜렷이 잘 표현되는 지점은 남쪽의 궁수자리와 전갈자리이므로 그 지점을 집중해서 잘 표현해야 한다. 별 잘 보이기로 소문난 몽골의 대초원에서 이렇게 은하수의 핵심 지점을 목도하는 순간은 짜릿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정도. 선명하게 보이는 궁수자리를 뒤로하고 함께 간 동료에게 유목민의 활을 들려 진짜 궁수처럼 사진을 찍었다.  

 

▲ ⓒ스위스정부관광청

[투어코리아]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최근 가장 많은 공감대를 일으키는 노래 말 중 하나다. 청년실업, 조기퇴직, 불황, 치솟는 물가, 어지러운 시국 등등 첩첩산중을 헤매듯 쉽사리 풀리지 않는 일상이 반복되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언젠가는 그래도 좋은 날이 올 것이라고.


그래서 좌절 금지, 무한 긍정으로 스스로를 다독이며 살아가는 이들은 새해면 새 희망을 품기 위해 일출 명소로 떠난다. 어슴푸레 어둠을 뚫고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 장관을 보며 희미해지는 꿈과 희망을 부여잡기 위해, 그리고 새로운 다짐과 계획이 올 한해는 뜻한 대로 이루어지길 소망한다.


일출 장관은 언제 어디에서 봐도 늘 벅찬 감동을 선사하지만, 세계 각국 명소에서 바라보는 일출은 또다른 묘미가 있지 않을까. 세계 각국 관광청들이 추천하는 일출명소를 소개한다.

▲ ⓒ스위스정부관광청


알프스의 장엄한 일출 만나러
스위스 '루체른 필라투스산'으로!

스위스 알프스 산 정상에서 맞는 일출은 어떨까. 투명하리만큼 맑고 깨끗한 알프스 풍경을 가로지르며 떠오르는 태양, 그 장엄한 순간의 감동을 직접 느끼고 싶다면 루체른 근교의 필라투스(Pilatus) 산 정상으로 가보자. 스위스 내에서도 일출과 일몰 명소로 소문이 자자한 곳이다.


특히 필라투스 정상에 있는 '호텔 필라투스 쿨름(Hotel Pilatus Kulm)'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일출을 볼 것을 추천한다. 알프스 산 위의 밤하늘엔 별빛이 쏟아지고, 산 아래로는 루체른 시내와 호숫가의 불빛이 아름다운 강을 이루는 파노라마가 펼쳐져 로맨틱한 밤을 선물한다.


그리고 다음날 이른 아침 알프스 너머로 펼쳐진 루체른 호수 위로 금빛가루를 뿌리며 찬란하게 솟아오르는 일출은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을 선사한다.

▲ ⓒ스위스정부관광청

아침 햇살을 받으며 필라투스 정상의 산책로를 거닐면서 고요한 파노라마를 만끽한 뒤, 호텔에서 제공하는 풍성한 아침 식사를 즐길 수도 있다. 특히 호텔의 퀸 빅토리아 레스토랑에서 낭만적인 분위기를 한껏 즐기며 필라투스 주변으로 펼쳐지는 오렌지빛 노을과 눈부신 일출을 만끽해 보자. 필라투스 쿨름 호텔을 이용할 때는, 필라투스 티켓 발권 시 반드시 정상에서 숙박을 한다고 이야기 해 다음날까지 이용할 수 있는 티켓을 받도록 한다. 호텔 숙박비는 1인당 싱글룸이 CHF 275.-부터, 더블룸이 CHF 185.-부터 다양하다.


겨울철 필라투스 정상을 가려면 루체른에서 버스 1번을 타고 크리엔스(Kriens)로 가 곤돌라와 케이블카를 타면 된다. 겨울에는 안전상의 이유로 '세상에서 가장 가파른 톱니바퀴 열차' 운행되지 않는다. 인천공항에서 직항 및 경유 비행기를 타고 취리히(Zurich) 공항에 내린 뒤, 취리히 공항역에서 직행기차를 타고 1시간 정도 가면 루체른(Luzern)에 도착할 수 있다.
www.pilatus.ch



일출 장관은 언제 어디에서 봐도 늘 벅찬 감동을 선사하지만, 세계 각국 명소에서 바라보는 일출은 또다른 묘미가 있지 않을까. 세계 각국 관광청들이 추천하는 일출명소를 소개한다. 여명을 뚫고 새벽을 알리는 닭처럼, '붉은 닭'의 해 정유년(丁酉年) 새해를 힘차게 시작해보자.

▲ ⓒBjarne Riesto /노르웨이관광청(Visitnorway.com) 제공

'노르웨이 노르캅'에서의 특별한 일출!


백야와 오로라의 나라 노르웨이. 노르웨이관광청이 추천한 일출 명소는 북위 71도에 자리한 '노르캅(NORDKAPP, 노스케이프 North Cape)'다.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자연 절경 1001'에 꼽힌 '노르캅'은 대서양과 북해가 만나는 지점에 거대한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절벽으로, 이 곳을 찾는 여행객은 연간 약 20만 명 정도다.



해수면으로 307m 위, 바다 쪽으로 돌출된 절벽 노르캅에서는 아주 특별한 일출을 만날 수 있다. 특히 5월 중순부터 7월까지는 밤 12시에도 태양이 바다 위에 떠있는 놀라운 풍경을 접할 수도 있다. 한 밤중 시간이 정지한 듯 하늘 중간에 걸려 있는 태양, 그리고 그 자리에서 아침에 떠오르는 거대한 태양은 한 번 본다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장관이다.


이 절벽 위에는 최북단 노르캅을 상징하는 듯 북극해를 바라보고 있는 지구 모양의 철제 조형물(Polar Circle)이 있어 관광객들이 기념사진을 찍는 포토존이 되고 있다. 또한 건물 지붕 위에 둥글고 하얀 구가 있는 건축물 '노스 케이프 홀센터(North Cape Hall)'에서는 일년 내내 다양한 전시회가 열려 여행객들에게 볼거리를 선사한다.

▲ ⓒ Karl Thomas/노르웨이관광청(Visitnorway.com)

노르웨이 최북단까지 와서 '해'만 보고 가기 아쉽다면, 다양한 체험에 도전해보자. 겨울엔 스노우모빌, 얼음 낚시, 스노우슈 스케이트, 개 썰매를 등 북극지방에서 체험할 수 있는 모든 모험을 즐길 수 있다. 환상적인 오로라 장관도 빼놓을 수 없는 최대 볼거리다.


한편, 노르캅 최초 여행객은 1664년에 방문한 이탈리아 사제 프란체스코 네그리였다. 그 후 19세기 중반까지도 일반 여행객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모험가들에게 열려 있던 미지의 땅이었다. 매우 험한 육로를 통해서만 닿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젠 호닝스버그와 노르캅을 연결하는 도로가 생겨나면서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됐다.


노르캅에 가려면 오슬로에서 호닝스보그(Honningsvåg)공항까지 비행기 타고 가서, 호닝스보그에서 유료 셔틀 버스 를 타면 된다. 또한 연안 쾌속선 '후티르튼(Hurtigruten)'을 타고 북부 노르웨이를 탐험하며 노르캅을 방문할 수도 있다. http://www.visitnordkapp.net/en/

▲ ⓒJohan Wildhagen /노르웨이관광청(Visitnorway.com)


바르셀로나에서는 ‘곡선의 미’에 취한다. 육감적인 플라멩코 댄서의 휠 듯한 춤이 아니더라도 거리를 지나치면 문득 건축물에서 유연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가우디의 작품들이다. 바르셀로나에 가면 누구나 천재 건축가 가우디를 추억한다. 이 고집스러운 건축가 한 명이 도시의 지도를 바꿨다. 그의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바르셀로나를 찾는 관광객들은 한해 수백만 명에 달한다. 바르셀로나는 중독의 도시가 됐고, 그 지독한 중독의 중심에는 가우디가 있다.

 

구엘공원 정상에서 내려다 본 바르셀로나 전경. 뒤로는 지중해가 드넓게 펼쳐져 있다.

 

 

세계유산을 만든 천재 건축가

가우디가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걸쳐 바르셀로나에 남긴 건축물 중 다수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그 중 여행자들을 품에 안고, 눈을 자극하는 대표적인 작품이 구엘공원이다. 야자수를 닮은 돌기둥과 벤치에 새겨진 모자이크에는 모두 그의 열정이 서려 있다. 사람들은 벤치 위에 누워 따사롭고 호화로운 휴식을 즐기기도 한다.

 

자연에서 모티브를 빌린 아르누보 양식의 작품들은 화려하면서도 기이한 느낌이다. 공원의 건축물들은 파도를 치듯 언덕을 따라 흘러내린다. 정문 앞 경비실은 동화 속 풍경을 담았고 이 지역 카탈루냐 문양을 새겨 넣은 모자이크 된 뱀도 독특하다. 담 자락에서 발견하는 모자이크들은 깨진 타일들을 정교하게 조합한 형상으로 디자인도 제각각이다.

 

  • 1 구엘공원의 건축물들은 하나하나가 개성 넘친다. 정문앞 건물은 동화에서 소재를 얻었다.
  • 2 모자이크가 돋보이는 구엘공원의 도마뱀 상은 이방인들에게는 촬영 포인트로 인기가 높다.
  • 3 구엘공원의 개성 넘치는 모자이크.

 

 

공원 건축은 가우디의 오랜 친구이자 후원자인 구엘(Eusebi Güell)과의 인연 때문에 시작됐다. 본래는 주거용 목적으로 지었지만 공사는 도중에 중단됐고 일반인에게 선물로 주어졌다. 가우디의 저택과 광장을 거쳐 공원 뒤편 언덕에 오르면 바르셀로나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등 가우디가 꿈꾸며 그려낸 도시의 실루엣이 지중해에 비껴 어우러진다.


거리로 나서면 곳곳이 가우디의 작품이다. 1882년 짓기 시작한 대성당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가우디의 건축물 중 웅대한 규모에 있어서 첫손가락에 꼽힌다. 예수의 열두 제자를 상징하는 12개의 종탑과 돔은 창공을 찌를 듯 솟아 있다. 가우디는 40여 년간의 생애를 대성당 건설에 바쳤고 사후에도 성당 지하에 안치됐다.

 

가우디의 작품 중 가장 웅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사그라다 파밀리아에서 산트 파우 병원으로 이어지는 길은 가우디의 거리로 불린다. 이방인들은 밤늦도록 노천바에 앉아 대성당을 바라보며 가우디에 취한다. 쌉쌀한 맥주나 스페인 전통주 ‘상그리아’ 한 잔이 감동 위에 곁들여진다. 이곳에서 언뜻 눈에 띄는 바르셀로나 사람들의 식습관은 특이하다. 평일 점심때 2시부터 느긋하게 정찬을 즐기는가 하면 식사 후에는 시에스타 시간이 마련돼 있다. 저녁은 9시 넘어서 먹는다. 주말에는 아예 10시쯤 시작해 자정까지 저녁만찬을 즐기기도 한다. 거리의 예술작품만큼이나 생기 가득한 바와 카페들이 뒷골목에는 즐비하다.

 

 

건물에 깃든 고집스러운 곡선미

보행자의 거리인 람브라스에서 이어지는 길목에서도 가우디의 작품들은 이어진다. 걷다 보면 천재 건축가와 골목에서 조우하는 느낌이다. 구엘궁전은 실타래를 꼬아놓은 듯한 굽이치는 정문이 인상적이다. 카사 바트요나 아파트로 지었던 카사 밀라는 건축에 문외한인 사람들도 그 외형에 일단 눈이 현혹된다. 건축은 자연의 일부여야 한다는 가우디의 신념을 담아 석회암 건물의 창과 벽에 바다와 파도의 굴곡을 실었다. ‘직선은 인간의 선이며 곡선은 신의 선이다’고 한 가우디의 정신이 녹아 들었다.

 

  • 1 건물 정면을 석회암으로 치장한 카사 밀라.
  • 2 동굴 느낌을 연상시키는 카사 밀라의 창문.

 

 

바르셀로나에서는 가우디의 작품만 구경하는 별도의 투어 코스가 마련돼 있다. 물론 도시의 건축미가 가우디 혼자만의 열정으로 완성된 것은 아니다. 몬타네르(Lluís Domènech i Montaner)가 지은 카탈라냐 음악당과 산 파우 병원 역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프랑스 건축가 장 누벨이 가우디에 감명받아 건축한 첨단 돔형의 아그바르 타워는 바르셀로나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됐다.


바르셀로나는 유럽대륙과 맞닿은 지리적 여건 덕에 스페인 제일의 상공업 도시로 성장했고 그 성장을 자양분 삼아 수준 높은 예술을 꽃피웠다. 피카소, 미로 등도 이 중독의 도시에서 작품 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그 이름의 꼭짓점에는 가우디라는 천재 건축가의 삶과 열정이 자리 잡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가우디는 죽음을 앞두고 그의 전 재산을 사그리다 파밀리아의 건축을 위해 기부하기도 했다.

 

  • 1 바르셀로나에는 건축물 외에도 자유로운 예술의 혼이 숨쉰다.
  • 2 스페인의 플라멩코에는 강렬함과 곡선미가 함께 어우러져 있다.

 

 

굳이 계획된 르네상스가 아니더라도 예술의 힘은 세인의 상상을 넘어선다. 가우디가 만들어낸 우아한 건축미는 바르셀로나를 예술과 디자인의 도시로 재탄생시켰다. 그 완성에는 지난한 세월과 건축에 대한 짙은 사랑이 배경이 됐다. 가우디를 부둥켜안은 바르셀로나가 그래서 더욱 설레고 끌린다.

 

가는 길
바르셀로나까지 직항편이 운행 중이나 프랑스를 경유해 열차로 이동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열차궤도가 달라 국경역인 포르트부에서 갈아타야 한다. 역은 산츠역과 프란사 역으로 나뉘어 있으며 이탈리아 등에서 이어지는 야간열차나 특급열차도 여럿 있다. 바르셀로나 시내에서는 5개의 메트로 노선이 도심 구석구석을 연결한다. 메트로를 이용하기에는 산츠역이 편리하다.

 

 

  1. Favicon of https://travelbible.tistory.com 오리궁둥이 2014.11.28 07:47 신고

    구엘구엘 공원

  2. Favicon of https://travelbible.tistory.com 오리궁둥이 2014.11.28 07:47 신고

    가우디의 흔적을 볼 수 있따면 스페인!! 고고!!

25년이 지난 후 베를린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졌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후 수많은 가능성이 눈앞에 놓여 있었다.
독일 각지에서 몰려온 프로파간다들은 자신만의 아이디어로
꿈을 키워나갔고 지금의 베를린을 만들어냈다.

↑ 이미지 설명을 넣어주세요

혼돈의 시대를 기록하다

크리스 켈러&앙케 페젤

뮤지션이었던 크리스와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앙케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직후 베를린으로 이주했다. 베를린을 탈환한 아티스트들의 작업실로 대표되는 타헬레스에서 활동하며 격동의 시기를 지켜봤다. 그 이야기를 <베를린 원더랜드> 한 권에 몽땅 담아냈다.

↑ 호평을 받은 책

예술 및 라이프스타일 전문 출판사인 게슈탈텐과 함께 만든 책. 얼마 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참가해 호평을 받았다. 베를린에 얼마나 별난 사람들이 모여들었는지를 보여주는 사진들로 가득하다.



↑ 1992년 풍경

현재는 세련된 갤러리들로 가득 차 있는 오라니언부르거 거리의 1992년 풍경.



포토그래퍼이자 뮤지션이다. 독일 중부 도시인 다름슈타트Darmstadt 출신이며 1990년 베를린에 왔다. 현재 앙케와 함께 봅스에어포트Bobsairport(www.bobsairport.de)라는 포토 에이전시를 운영 중이다. (앙케) 그림 형제의 동화 <브레멘 음악대>로 유명한 북부 도시 브레멘Bremen 출신이다. 1990년 베를린자유대학에 입학하면서 베를린에 왔다. 현재 그래픽 디자이너로 카파Capa라는 디자인 스튜디오를 따로 운영하고 있다.



내가 속해 있던 밴드와 공연 리허설 중이었다. 공연은 취소됐고 밴드도 해체됐다. 다들 베를린 장벽으로 몰려가버렸으니까. (앙케) 고등학생으로 진로를 고민하고 있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것을 TV로 보곤 베를린으로 향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전혀 다른 세상, 새로운 미래가 펼쳐지고 있음을 느꼈다.



혼돈의 세상이었다. 정부가 재정비될 때까지 시간이 걸렸다. 이는 '자유'를 선사했다. 독일은 물론 전 세계의 예술가, 펑크족, 무정부주의자, 몽상가, 괴짜가 베를린으로 모여들었다. 우리는 빈집을 점거해 예술, 콘서트, 불법 파티 등을 여느라 바빴다. 앙케는 라이브 뮤직 클럽인 쇼콜라덴Schokoladen, '무단 점거'의 대표 아이콘이 된 타헬레스Tacheles에서 새로운 개념의 콘서트, 음악 이벤트를 열어 큰 호응을 얻었다.



타헬레스가 들어선 건물은 1907년에 지은 백화점이었는데 제2차세계대전 후 폐허가 되었다. 1990년 2월 여러 명의 예술가들이 방치된 백화점으로 향해 화려한 그래피티로 건물을 무장시켰다. 이러한 무단 점거 운동을 스Squat이라고 한다. 철거될 운명의 건물은 예술가들로 인해 베를린의 명소로 거듭났다. 하지만 정부의 입장은 달랐고, 강제 퇴거의 위기가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예술가들은 끝까지 버텼고 결국 정부는 베를린 역사의 한편을 장식할 반문화 운동의 상징이자 문화 공간으로 인정했다. 안타깝게도 건물 소유주의 압력에 의해 2012년에 문을 닫은 상태다.



<베를린 원더랜드>를 펴냈다. 사진과 내용이 굉장하다. (크리스&앙케)오랫동안 기획한 것이었다. 7명의 사진가가 1990년부터 1996년까지 베를린의 '야생의 시기'를 담아냈다. 사진 촬영을 할 당시의 상황과 자세한 이야기를 곁들였다. 그 시대를 함께 겪은 사람으로서 가슴을 다시 쿵쾅거리게 하는 훌륭한 사진이 많다.



표지에 올린 1990년의 킨칙 거리Kinzig Str. 풍경이다. 다큐멘터리 포토그래퍼 벤 드 빌Ben de Biel이 촬영한 것으로 베를린 동쪽 프리드리히스하인 지역의 무단 점거 현장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990년대 초를 휩쓸었던 다채로운 서브컬처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베를린 미테 지역. 하지만 여전히 많은 예술가들이 자리를 옮겨 열정을 쏟아내고 있다. 다른 대도시에 비하면 여전히 베를린은 '한번 해볼 만한' 도시다. 우리는 사진과 디자인을 통해 베를린을 기록하는 일을 할 것이다.



↑ 마크 볼라베

자게 클럽Sage Club 앞에서 만난 클럽 커미션의 창립자 마크 볼라베.

크리스 켈러&앙케 페젤

마크는 베를린에서 태어나고 자란 진짜 베를리너다. 그는 130여 개 클럽을 거느리는 클럽 커미션Club Commission의 대부답게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그날 밤 클러빙을 즐기고 있었다.

↑ 베를린의 클럽

실험적인 예술의 무대가 되고 있는 베를린의 클럽.



서베를린 노이쾰른 지역에 위치한 유명한 록 클럽이었다. 그날 새벽 4시쯤 클럽을 나서다 거리에서 친구를 만났다. 그런데 그녀가 대뜸 "브란덴부르크 문이 개방됐대!"라고 말하며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술에 취해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다. 집에 가려고 택시를 탔다. 아무래도 기분이 이상해 택시 기사에게 물어보니 택시 기사 또한 베를린 장벽에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난 것 같다고 하더라. 당장 브란덴부르크로 가자고 했다.



동, 서 양쪽에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브란덴부르크 문 앞으로 운집했다. 사람들은 장벽 위로 올라섰고 반대편 지역으로 뛰어내렸다. 예전 같았다면 군인이 탄압하거나 총을 쏘았을 텐데 군인들은 어찌할 줄 몰라 했다. 나도 다른 사람들을 따라 장벽을 넘었고, 동베를린에 발을 디딘 후 브란덴부르크 문을 통과해 다시 서베를린으로 돌아왔다. 축제 같은 분위기였지만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조금 긴장했다. 1953년도에 일어난 동베를린의 폭동 때처럼 무장한 소련군이 몰려올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시민들도 정부도 평화를 지켰다. 기적과도 같았다.



1980년대에 이미 독일은 영국과 함께 테크노 음악의 중심지로 거듭났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베를린 미테 지역을 중심으로 무료 지하 테크노 파티와 레이브 신이 생겨났다. 베를린엔 주인이 없는 '빈 공간'들이 넘쳐났다. 특히 장벽이나 양쪽의 정부 기관이 들어서 있던 곳이 그랬다. 포츠다머플라츠Potsdamerplatz, 빌헬름 거리Wilhelm Str.에 에-베르크E-Werk, 데어 벙커Der Bunker, 트레조Tresor와 같은 전설적인 클럽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1990년대 말 베를린에 불어닥친 개발 계획으로 인해 클럽들은 문을 닫거나 다른 지역으로 쫓겨나야 했다. 이러한 일을 겪은 뒤 클럽 신의 보존과 발전을 위해 2000년에 클럽 커미션을 창설하게 됐다.



트렌스 음악의 거장으로 불리는 동독 출신 DJ 폴 반 다이크Paul van Dyk는 베를린 장벽 붕괴 직후 벌어졌던 테크노 파티와 레이브 신이 동서독의 사회를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베를린에서 클럽은 단순히 하룻밤 유흥을 위한 장소가 아니다. 베를린에는 미술, 영화, 음악, 패션, 디자인 업계에서 활동하는 이들이 많다. 이들은 클럽에서 창조적 아이디어를 얻는다. 클럽엔 음악, 음향, 건축, 미술, 그래픽, 조명 디자인 등 다양한 예술적 장치들이 어우러진다. 훌륭한 클럽은 예술적인 생각, 실험 정신을 가져야 한다. 클럽 커미션은 이러한 클럽을 발굴하도록 돕는다. 처음엔 20여 개 클럽이 모여 시작했는데 현재 130개 클럽이 가입되어 있다.



베를린 클럽 신의 산증인과도 같은 트레조. 규모나 음악, 음향 시설, 레지던스 아티스트 등 여러모로 최고 수준을 보여주는 베르그하인Berghain.



기도의 '물 관리'는 클럽의 질을 높이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겉치장과는 상관없다. 이미 술에 취했다면-특히 남성 무리-입장이 어렵다. 평화로운 분위기를 지니며 감각을 열고 자유롭게 클러빙을 즐길 이들을 감별해내도록 교육받는다. 너무 어렵나?



↑ 톰 미헬베르거&이현지

미헬베르거 호텔의 아늑한 안마당에에서 만난 톰과 이현지.

오래된 공장의 창조적 변신

톰 미헬베르거&이현지

진짜 베를린을 만나고 싶다면 미헬베르거 호텔에서 머무르기를 추천한다. 오래된 공장이나 창고에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지닌 이들이 모여 새로운 일들을 만들어내는 대표적인 모델이다.



↑ 카페

편안하면서도 멋스러운 카페.




독일 남부의 작은 도시 출신이다. 2003년 베를린을 처음 찾았다. 장벽뿐만 아니라 도시 곳곳이 허물어져 있었다. 베를린 동쪽의 경우 3개 건물 중 하나는 레노베이션이 필요해 보였다. 베를린에 도착한 첫째 날, 이곳이 나의 새로운 터전이 될 것이라 직감했다. 나는 국제 비즈니스를 공부했지만 예술과 문화에 관심이 많았고 나만의 독자적인 일을 꾸리고 싶었다. 베를린은 최적의 도시였다. 이곳엔 한층 여유로운 시간과 공간이 존재했다. 저렴한 물가 덕분이다. 삶을 유지하기 위해 혹은 커리어를 쌓기 위해 쫓기지 않아도 됐다. 독일은 물론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전혀 다른 사람들, 도시가 지닌 놀라운 역사, 그래피티, 음악 등 곳곳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다.



영화감독이나 프로듀서를 꿈꿨지만 특출한 재능을 지닌 것 같지 않아 마음을 접었다. 공동 창업자인 나딘과 오랜 고민 끝에 호텔을 열자고 의견을 모았다. 호텔이라는 공간에서는 두 사람 모두 잘할 수 있고 또 하고 싶은 일들을 벌여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스위스 로잔에 위치한 호텔 학교에서 유학 중이었다. 취업을 알아보다 베를린에 새로운 호텔이 문을 연다는 소식을 들었다. 비행기를 타고 베를린까지 면접을 보러 갔다. 호텔리어답게 블랙&화이트 슈트를 차려입고 호텔에 도착했는데 캐주얼한 차림새의 톰과 나딘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대형 호텔들에서 느낄 수 없는 열정, 가족적인 분위기에 반해 미헬베르거 호텔에 합류했다.



2004년부터 호텔 오픈을 준비했다. 각종 계획을 짜고 호텔 건물을 알아보는 데 총 4년의 시간이 걸렸다. 딱 맞는 호텔 건물을 찾는 것이 관건 이었다. 베를린 내 100여 채가 넘는 건물을 보러 다녔고 결국 2008년 계약에 성공했다. 호텔 빌딩은 19세기에 지어진 공장이었다. 국가적으로 보존되고 있어 외관은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살리고 내부만 레노베이션했다. 우리는 호텔의 콘셉트와 디자인을 정할 때 다른 호텔들을 참고하지 않았다. 미헬베르거의 스태프와 참여한 건축가, 디자이너 등의 독자적인 아이디어와 컬래버레이션으로 완성한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오픈한 지 1년 만이었다. 런던에서 주최하는 어워드로 '카페, 바, 나이트클럽 혹은 라운지'의 카테고리에서 수상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아자르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런던과 바르셀로나에서 활동하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자 일러스트레이터로 호텔에 합류해 아이덴티티 구축과 디자인 등을 전체적으로 담당했다. 호텔 로고는 물론이고 브로슈어, 벽화, 홈페이지의 일러스트와 디자인 등 아자르 만의 독특한 스타일이 잘 어우러졌다. 늘 새로운 도전을 한다. 베를린에 '코코넛 워터'라니.

코코넛 워터는 물론 미헬베르거 크래프트 비어, 리큐어도 출시했다. 그중 리큐어는 미국에서도 판매될 예정이다. 뉴욕이나 런던과 같은 도시였다면 이러한 도전이 마냥 쉽지 않았을 것이다. 베를린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물가 덕분에 자신이 원하는 일에 더욱 쉽게 도전할 수 있고 수많은 아이디어, 열정을 가진 이들을 만나 이를 실현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 이미지 설명을 넣어주세요

컨테이너에서 싹튼 서브컬처

톰 뵈셔만

플래툰은 베를린과 서울을 본거지로 활동하고 있는 아트 커뮤니케이션 그룹이다. 이들이 각 도시에 들여놓은 컨테이너 '쿤스트할레'에선 서브컬처가 꿈틀댄다. 플래툰의 대표인 톰 뵈셔만은 최근 평양 여행을 다녀왔다.



↑ 쿤스트할레 베를린

서울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느낌의 쿤스트할레 베를린. 크리에이터들의 아지트로 자리 잡았다.



↑ 톰이 촬영한 평양 시내의 모습

톰이 촬영한 평양 시내의 모습. 놀랍다.



↑ 쿤스트할레 서울

쿤스트할레 서울. 컨테이너를 이용한 건축과 디자인으로 독일의 레드 닷 디자인 어워드에서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아니. 중부 하노버 근교의 데트몰트Detmold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1997년 베를린으로 옮겼다.

16세 때. 서베를린에 할머니가 사셨다. 할머니는 베를린에 온갖 '크레이지'한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고 했다. 당시 서베를린엔 젊은 청년들과 예술가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예술가들은 체질적으로 도발적인 환경을 좋아한다지만 청년들은 왜냐고? 베를린에 거주하는 남자는 군대를 가지 않아도 됐거든.

하노버에서 서베를린에 이르는 아우토반이 하나 있었다. 모두 그 길을 이용했다. 서베를린까지는 2시간 30분쯤 걸렸다. 베를린에 도착하기에 앞서 동독의 관문 도시인 막데부르크Magdeburg를 지나쳤는데, 와, 깜짝 놀랐다. 그렇게 가난할 줄 몰랐다. 얼마 전 북한을 방문했을 때와 비교해도 그때가 훨씬 충격적이었다.

독일문화원과 평양국제영화제를 다녀왔다. 베이징에서 고려항공을 타고 평양에 입성, 4박 5일간 있었다. 영화제 공식 일정과 평양 시내 투어를 했는데 북한 가이드가 내내 동행했다. 평양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놀랄 것이다. 서울의 타워팰리스와 같은 초호화 아파트가 들어서 있고, 값비싼 독일 차들이 도로를 달리며, 규모가 작긴 하지만 고급 백화점도 있다. 빼어난 레스토랑도 많다. 최근 오픈한 일식집에서 8코스 디너를 먹었는데 식재료며 요리 수준이 굉장히 높았다. 6년간 쿤스트할레 서울을 운영하며 한국 음식을 많이 먹어봤지만, 솔직히 말해 밥과 김치 등 기본적인 음식은 북한의 것이 더 맛있다. 그리고 술! 대동강 맥주! 감히 아시아 맥주 중 최고다.

소련의 신고전주의 양식 건축물과 거대한 동상들, 군인들의 시가 행진에 필요한 전시용 대로 등을 보며 베를린의 카를 마르크스 알레를 떠올렸다. 무엇보다도 평양과 베를린의 닮은 점은 '선택받은 자'들을 위한 도시라는 것이다. 평양에 사는 이들은 북한의 지도층이나 엘리트들이다. 동베를린도 마찬가지였다. 정치가나 군인, 교사, 예술가들이 기회를 얻었다.

당시 데트몰트의 한 마케팅 회사를 다니고 있었는데 휴가를 내고 친구들과 함께 베를린으로 향했다. 수많은 인파가 모여들어 장벽을 허물고 있었다. 사람들은 장비를 챙겨 장벽을 무너뜨렸다. 불도저와 크레인도 동원됐다. 지난여름 브라질 월드컵 우승 후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축하 파티가 벌어진 것을 보았나?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내 인생 최대의 축제를 경험했다.

1997년 베를린에 왔고 2년 후 동업자인 크리스토프를 만났다. 나의 마케팅 경력과 크리스토프의 디자인 실력을 합쳐 새로운 것을 창조해보자고 결의했다. 4~5개월간의 브레인스토밍으로 찾아낸 답은 '문화 마케팅'이었다. 1990년대 말은 신문, 방송, 잡지, 빌보드 등 매스커뮤니케이션이 급속도로 발달했던 시기였다. 우리는 새로운 문화를 통해 브랜드와 대중을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도맡았다. 그래서 비디오 아트, 그래픽 디자인, 스트리트 아트, 클럽 음악 등 서브컬처에 주목했다.

파드핀더라이Pfadfinderei는 모션 디자인과 비주얼 아트 분야에서 최고의 명성을 떨치는 아티스트 그룹이다. 이들은 일렉트로닉 음악과 비주얼 아트를 접목하며 VJ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선보였다. 그리고 슈퍼스타가 된 모데셀렉터Modeselektor. 일렉트로닉 듀오로 또 다른 일렉트로닉 뮤지션인 아파라트Apparat와 함께 모던 테크노 그룹인 모데라트Moderat를 결성해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2009년 쿤스트할레 서울에서 공연을 한 바 있다.

플래툰은 전 세계 다양한 분야에 포진하고 있는 3500여 개 커뮤니티와 네트워크를 이뤄 문화 활동을 기획, 지원하고 있다. 베를린을 시작으로 서울에 아시아 본부를 열었고, 내년에는 멕시코시티로 향한다. 그다음엔, 평양도 기대해본다.

베를린 분단 중 사용됐던 감시 초소, 동독 비밀경찰의 아지트, 통일 후 전설적인 클럽으로 거듭난
히틀러의 벙커 등을 방문했다. 베를린의 굴곡진 역사가 만든 현재의 삶도 만났다.


↑ 베를린 장벽 유적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

베를린 장벽 유적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

↑ 체크포인트 찰리 마우어뮤지엄 입구

체크포인트 찰리 마우어 뮤지엄 입구.

↑ 냉전 시대의 아픔을 보여주는 전시관 '블랙박스 콜드 워' 앞

냉전 시대의 아픔을 보여주는 전시관 '블랙박스 콜드 워' 앞.

↑ 베를린이 4개국에 의해 분할 점령을 당했을 때의 지도.

베를린이 4개국에 의해 분할 점령을 당했을 때의 지도.

↑ 러시아탱크를 볼 수 있는 소비에트 전쟁 기념관.

러시아 탱크를 볼 수 있는 소비에트 전쟁 기념관.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린 결정적인 인물은 휴가 중 바뀐 정책을 잘 몰라 말실수를 한 동독의 대변인이 아니에요. 독일어가 서툴렀던 이탈리아의 기자였죠. '여행 제한 조치를 완화했다'고 했을 뿐인데 '국경이 개방됐다'를 거쳐 '베를린 장벽이 붕괴됐다' 로 오역을 했어요. 대형 사고죠! 그가 전송한 기사는 세계 외신을 통해 일파만파 전해져 서독 TV에도 나오게 됐어요. 이를 본 시민들은 바로 베를린 장벽으로 몰려갔고 벽을 허물었죠.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어요. 한국도 그렇게 갑자기 통일이 될지도 몰라요. 어느 날 국민들이 국경을 허물지도요."

베를린의 개선문으로 불리는 브란덴부르크 문Brandenburger Tor 앞. 가이드인 샤샤가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 틀렸어. 우리의 국경 사이엔 지뢰밭이 있거든'이라는 말을 속으로 곱씹었다.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한국의 통일을 기원해주는 그에게 실망을 안기고 싶지 않았다. 베를린을 처음 찾는 여행자라면 가이드 북을 들고 다음의 장소를 찾게 된다. 동베를린과 서베를린간 검문소인 체크포인트 찰리, 동, 서독간 마지막 출입문이었던 브란덴부르크 문, 분단과 냉전의 상징에서 평화의 상징으로 거듭난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 올해는 더 많은 이들이 베를린의 역사적 장소들을 둘러보게 될 것이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지 25주년이 되는 해로 베를린 시에서 대대적인 행사를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업 시간에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란 노래를 배우며 자란 한국인이라면 베를린의 옛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언젠가는 우리에게 펼쳐질 일을 독일은 미리 겪은 게 아닌가.

그래서 베를린은 더없이 흥미로운 도시다. 나는 오랫동안 베를린이 동서로 나뉘어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베를린이 동독 지역 한가운데 위치해 있는 줄은 몰랐다. 서 베를린은 동독 지역 한가운데 떠 있는 외로운 섬과도 같았다. 베를린이 동과 서로 나뉘었던 세월은 45년이다. 두 지역 모두 각자의 노선대로 발전을 거듭했고 서로 다른모습을 지니게 됐다.

베를린의 동쪽과 서쪽을 깊숙이 들여다보기로 했다. 자전거 투어의 가이드인 샤샤는 자신을 '리얼 베를리너'라고 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요? 집에 있던 가장 큰 해머를 들고 친구들과 함께 뛰어갔죠! 그땐 어려서 다음 날 학교를 땡땡이칠수 있단 사실에 신이 났었죠. 역사적인 현장인데 교실에 앉아 있을 수 있나요?" 그는 먼저 프렌츨라우어베르크로 안내했다. 이 지역은 베를린의 중심인 미테에서 북동쪽을 차지한다. 여기엔 베를린 장벽에 대한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베를린 장벽 기념관Gedenkstatte Berliner Mauer이 있다. 장벽이 어떻게 세워졌는지에서부터 베를린 장벽의 모습, 이를 지키던 군인들의 임무, 탈출하다 희생당한 동독인 등 몇 시간을 꼬박 머물게 하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서독인들은 장벽 근처를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어요. 하지만 동독의 장벽 안에는 무인지대가 넓게 펼쳐져 있어요. 가까이 접근해 탈출을 시도하지 못하게 한 거죠." 야외에 전시된 사진 중 장벽을 바라보는 가족들의 사진이 눈에 띄었다. 가로등에 매달려 동베를린 쪽을 향해 손 흔드는 아이의 사진을 보니 가슴 한편이 아릿해졌다. "나는 베를린 시민이다Ich Bin ein Berliner"라고 운을 떼며 큰 호응을 얻었던 미국 캐네디 대통령의 연설이 떠올랐다. 그는 가족, 남편과 아내, 형제와 자매를 갈라놓고 함께 살고 싶어 하는 이들을 못 만나게 하는 것은 역사와 인륜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했다.

↑ 중앙에 이삭과 망치, 컴퍼스를 그려 넣은 옛 동독 국기.

중앙에 이삭과 망치, 컴퍼스를 그려 넣은 옛 동독 국기.

↑ DDR 뮤지엄에서 본 옛 동독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있는 캐비닛.

DDR 뮤지엄에서 본 옛 동독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있는 캐비닛.

↑ 과거 비밀경찰의 사무실 모습.

과거 비밀경찰의 사무실 모습.

↑ 영화 <타인의 삶>에서처럼 누군가의 사생활을 감청하던 방

영화 <타인의 삶>에서처럼 누군가의 사생활을 감청하던 방.

↑ 동독 비밀경찰에 관한 흥미로운 자료를 볼 수 있는 슈타지 뮤지엄.

동독 비밀경찰에 관한 흥미로운 자료를 볼 수 있는 슈타지 뮤지엄.

↑ 템펠호프 공항 지하의 비밀 벙커.

템펠호프 공항 지하의 비밀 벙커.

과거 프렌츨라우어베르크는 동쪽에 속했다. 이 지역은 통일 후 가장 큰 변화를 겪은 곳이다. "동독 노동자 출신들이 지냈던 곳이에요. 어떤 방은 1명이 썼지만 또 어떤 방은 12명씩 머물렀죠. 놀라운 것은 난방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는 거예요.1990년까지 벽난로에 석탄을 넣어 난방을 했더라니까요. 아직 곳곳에 그 흔적이 남아 있어요."

통일이 된 후 많은 젊은이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주인 없이 버려진 집이 허다했기 때문이다. 빈집에 들어가 '내 집이오' 하고 자물쇠를 채운 후 결국 주인이 돌아오지 않으면 그대로 자신의 명의로 남기도 했단다. 실제로 오더베르그 거리Oderberger Str.의 플랫을 거저 얻었다는 친구가 있다. 젊은이들은 이곳에 모여 콘서트를 열고 파티를 벌였다. "그래서 처음 이 지역엔 바와 클럽들이 가득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주방 용품이나 유아 용품 숍이 넘쳐나죠. 한때 마리화나를 피우며 게릴라 파티를 벌였던 이들이 25년이 지난 지금은 어엿한 가정을 꾸리게 되었거든요. 나이가 비슷하니 결혼도, 임신도 비슷하게 했을 거고, 그래서 한때 이곳은 프란츨라우어베르크(베르크는 '언덕'이라는 뜻)가 아니라 '임신부의 동산'이라고까지 불렸죠." 프렌츨라우어베르크를 떠나 자전거를 타고 찾은 곳은 '카를 마르크스 알레Karl MarxAllee'였다. '프렌츨라우어베르크가 노동자들의 땅이었다면 이곳은 상류층, 실적 좋은 공산주의자들이 사는 곳이었어요. 이러한 형태의 건물을 '러시아 사회주의적 고전주의'라고 하고 '웨딩 케이크 스타일'의 빌딩이라고 하죠." 영화 <타인의 삶>을 본이들은 알 것이다. 정치가며 군인, 유명한 예술가들은 이렇게 화려한 아파트에 살았다. 조금만 뒤로 가면 '플라텐바우plattenbau'라고 불리는 칙칙한 박스형 아파트가 있다. 겉모습은 우울하지만 당시로는 신식 주거 형태로 이곳에 사는 이들은 굉장히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자전거를 타고 프리드리히스하인 지역을 거쳐 슈프레 강변을 지나면, 그때부터 베를린의 서쪽이 시작된다. 왠지 서쪽이라고 하면 우아하고 깨끗한 거리만이 펼쳐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이미 1970년대부터 서브컬처가 발달하기 시작했다고요. 언더그라운드 클럽과 그래피티가 성행했어요." 크로이츠베르크 지역은 젊고 가난한 아티스트들이 모여들던 곳이었다. "다 옛날 이야기예요. 지금 크로이츠베르크는 베를린에 살러 온 주머니 두둑한 외국인들로 가득해요. 젊고 가난하며 재능있는 아티스트들은 이제 노이쾰른으로 향하죠."

최근에는 베를린의 서쪽이 뜨고 있다. 한동안 동쪽에만 집중되었던 관심과 투자가 다시 서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서쪽에서도 샤를로텐부르크 지역은 베를린 역사 대대로 왕이며 귀족, 부호, 지식인, 예술인이 살던 곳이다. 이곳이야말로 화려한 아르누보 양식의 건축물, 운치 있는 레스토랑과 카페, 40대 부인들을 위한 고급 부티크 등이 늘어서 있다. 최근에는 세계 최초의 콘셉트 몰이라는 '비키니 베를린'이 들어서 힙스터들까지 끌어들이고 있다.

베를린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핫한 도시 중 하나다. 아픔과 혼란의 역사를 겪었지만 이로 인해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매력을 지닌 도시로 거듭났다. 어쩐지 우리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든든해졌다.

↑ 오래된 공장 앞의 공터로 푸드 트럭들이 몰려든다

오래된 공장 앞의 공터로 푸드 트럭들이 몰려든다.

↑ 자빙니플라츠 역 아래에 위치한 서점.

자빙니플라츠 역 아래에 위치한 서점.

↑ 히틀러의 벙커가 결국 최고의 갤러리인 '잠룽 보로스'로 거듭났다.

히틀러의 벙커가 결국 최고의 갤러리인 '잠룽 보로스'로 거듭났다.

↑ 프렌츨라우어베르크의 맥주 공장은 맥주가 아닌 다채로운 문화를 생산해낸다.

프렌츨라우어베르크의 맥주 공장은 맥주가 아닌 다채로운 문화를 생산해낸다.

↑ 서베를린의 우아한 라이프스타일을 엿볼 수 있는 다스 스튜에 호텔.

서베를린의 우아한 라이프스타일을 엿볼 수 있는 다스 스튜에 호텔.

↑ 슈프레 강변 너머로 바라다보이는 베를린 돔.

슈프레 강변 너머로 바라다보이는 베를린 돔.


베를린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곳





1 슈타지 뮤지엄Stasi Museum

옛 동독 비밀경찰의 역사와 활약상은 물론 이들이 도청을 했던 방, 첩보에 쓰였던 기구 등이 전시되어 있다.


OPEN

월~금요일 오전 10시~오후 6시, 토,일요일, 공휴일 낮 12시~오후 6시

LOCATION

Rusche Str. 103, Haus 1


TEL

+49-30-553-68-54

WEB

2 옛 동독 박물관DDR Museum

옛 동독의 역사와 당시의 삶을 첨단 기술력와 멀티미디어, 위트 있는 장치로 재미있게 둘러볼 수 있게 했다.


OPEN

월~금요일, 일요일 오전 10시~오후 8시, 토요일 오전 10시~오후 10시

LOCATION

Karl-Liebknecht Str. 1


TEL

+49-30-847123731

WEB

3 체크포인트 찰리 박물관Museum Hausam Checkpoint Charlie


분단 당시 검문소를 재현해놓은 곳. 근처의 마우어 박물관에선 독일의 분단과 통일 관련 자료들을 볼 수 있다.


OPEN

오전 9시~오후 10시

LOCATION

Friedrich Str. 43-45, 10969, Berlin


TEL

+49-30-2537250

WEB

www.mauermuseum.de


4 베를린 장벽 기념관The Berlin Wall Memorial & Documentation Centre


베를린 장벽의 역사와 이에 얽힌 사연이 가장 꼼꼼히 기록되어 있는 곳. 베를린 장벽의 일부가 보존되어 있다.


OPEN

화~일요일 오전 9시 30분~오후 7시(4~10월), 화~일요일 오전 9시 30분~오후 6시

LOCATION

Bernauer Str. 111


TEL

+49-30-467986666

WEB

www.visitberlin.de/en/spot/the-berlinwall-memorial-and-documentation-centre


5 쿨투어브라우어라이Kulturbrauerei


'베를린 온 바이크' 투어의 본부가 위치해 있다. 박물관에서 <DDR 시대의 일상>이란 타이틀로 전시 중.


LOCATION

Schonhauser Allee 36


TEL

+49-3- 44352614

WEB

kulturbrauerei.de



바르셀로나에서는 ‘곡선의 미’에 취한다. 육감적인 플라멩코 댄서의 휠 듯한 춤이 아니더라도 거리를 지나치면 문득 건축물에서 유연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가우디의 작품들이다. 바르셀로나에 가면 누구나 천재 건축가 가우디를 추억한다. 이 고집스러운 건축가 한 명이 도시의 지도를 바꿨다. 그의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바르셀로나를 찾는 관광객들은 한해 수백만 명에 달한다. 바르셀로나는 중독의 도시가 됐고, 그 지독한 중독의 중심에는 가우디가 있다.

 

구엘공원 정상에서 내려다 본 바르셀로나 전경. 뒤로는 지중해가 드넓게 펼쳐져 있다.

 

 

세계유산을 만든 천재 건축가

가우디가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걸쳐 바르셀로나에 남긴 건축물 중 다수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그 중 여행자들을 품에 안고, 눈을 자극하는 대표적인 작품이 구엘공원이다. 야자수를 닮은 돌기둥과 벤치에 새겨진 모자이크에는 모두 그의 열정이 서려 있다. 사람들은 벤치 위에 누워 따사롭고 호화로운 휴식을 즐기기도 한다.

 

자연에서 모티브를 빌린 아르누보 양식의 작품들은 화려하면서도 기이한 느낌이다. 공원의 건축물들은 파도를 치듯 언덕을 따라 흘러내린다. 정문 앞 경비실은 동화 속 풍경을 담았고 이 지역 카탈루냐 문양을 새겨 넣은 모자이크 된 뱀도 독특하다. 담 자락에서 발견하는 모자이크들은 깨진 타일들을 정교하게 조합한 형상으로 디자인도 제각각이다.

 

  • 1 구엘공원의 건축물들은 하나하나가 개성 넘친다. 정문앞 건물은 동화에서 소재를 얻었다.
  • 2 모자이크가 돋보이는 구엘공원의 도마뱀 상은 이방인들에게는 촬영 포인트로 인기가 높다.
  • 3 구엘공원의 개성 넘치는 모자이크.

 

 

공원 건축은 가우디의 오랜 친구이자 후원자인 구엘(Eusebi Güell)과의 인연 때문에 시작됐다. 본래는 주거용 목적으로 지었지만 공사는 도중에 중단됐고 일반인에게 선물로 주어졌다. 가우디의 저택과 광장을 거쳐 공원 뒤편 언덕에 오르면 바르셀로나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등 가우디가 꿈꾸며 그려낸 도시의 실루엣이 지중해에 비껴 어우러진다.


거리로 나서면 곳곳이 가우디의 작품이다. 1882년 짓기 시작한 대성당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가우디의 건축물 중 웅대한 규모에 있어서 첫손가락에 꼽힌다. 예수의 열두 제자를 상징하는 12개의 종탑과 돔은 창공을 찌를 듯 솟아 있다. 가우디는 40여 년간의 생애를 대성당 건설에 바쳤고 사후에도 성당 지하에 안치됐다.

 

가우디의 작품 중 가장 웅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사그라다 파밀리아에서 산트 파우 병원으로 이어지는 길은 가우디의 거리로 불린다. 이방인들은 밤늦도록 노천바에 앉아 대성당을 바라보며 가우디에 취한다. 쌉쌀한 맥주나 스페인 전통주 ‘상그리아’ 한 잔이 감동 위에 곁들여진다. 이곳에서 언뜻 눈에 띄는 바르셀로나 사람들의 식습관은 특이하다. 평일 점심때 2시부터 느긋하게 정찬을 즐기는가 하면 식사 후에는 시에스타 시간이 마련돼 있다. 저녁은 9시 넘어서 먹는다. 주말에는 아예 10시쯤 시작해 자정까지 저녁만찬을 즐기기도 한다. 거리의 예술작품만큼이나 생기 가득한 바와 카페들이 뒷골목에는 즐비하다.

 

 

건물에 깃든 고집스러운 곡선미

보행자의 거리인 람브라스에서 이어지는 길목에서도 가우디의 작품들은 이어진다. 걷다 보면 천재 건축가와 골목에서 조우하는 느낌이다. 구엘궁전은 실타래를 꼬아놓은 듯한 굽이치는 정문이 인상적이다. 카사 바트요나 아파트로 지었던 카사 밀라는 건축에 문외한인 사람들도 그 외형에 일단 눈이 현혹된다. 건축은 자연의 일부여야 한다는 가우디의 신념을 담아 석회암 건물의 창과 벽에 바다와 파도의 굴곡을 실었다. ‘직선은 인간의 선이며 곡선은 신의 선이다’고 한 가우디의 정신이 녹아 들었다.

 

  • 1 건물 정면을 석회암으로 치장한 카사 밀라.
  • 2 동굴 느낌을 연상시키는 카사 밀라의 창문.

 

 

바르셀로나에서는 가우디의 작품만 구경하는 별도의 투어 코스가 마련돼 있다. 물론 도시의 건축미가 가우디 혼자만의 열정으로 완성된 것은 아니다. 몬타네르(Lluís Domènech i Montaner)가 지은 카탈라냐 음악당과 산 파우 병원 역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프랑스 건축가 장 누벨이 가우디에 감명받아 건축한 첨단 돔형의 아그바르 타워는 바르셀로나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됐다.


바르셀로나는 유럽대륙과 맞닿은 지리적 여건 덕에 스페인 제일의 상공업 도시로 성장했고 그 성장을 자양분 삼아 수준 높은 예술을 꽃피웠다. 피카소, 미로 등도 이 중독의 도시에서 작품 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그 이름의 꼭짓점에는 가우디라는 천재 건축가의 삶과 열정이 자리 잡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가우디는 죽음을 앞두고 그의 전 재산을 사그리다 파밀리아의 건축을 위해 기부하기도 했다.

 

  • 1 바르셀로나에는 건축물 외에도 자유로운 예술의 혼이 숨쉰다.
  • 2 스페인의 플라멩코에는 강렬함과 곡선미가 함께 어우러져 있다.

 

 

굳이 계획된 르네상스가 아니더라도 예술의 힘은 세인의 상상을 넘어선다. 가우디가 만들어낸 우아한 건축미는 바르셀로나를 예술과 디자인의 도시로 재탄생시켰다. 그 완성에는 지난한 세월과 건축에 대한 짙은 사랑이 배경이 됐다. 가우디를 부둥켜안은 바르셀로나가 그래서 더욱 설레고 끌린다.

 

가는 길
바르셀로나까지 직항편이 운행 중이나 프랑스를 경유해 열차로 이동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열차궤도가 달라 국경역인 포르트부에서 갈아타야 한다. 역은 산츠역과 프란사 역으로 나뉘어 있으며 이탈리아 등에서 이어지는 야간열차나 특급열차도 여럿 있다. 바르셀로나 시내에서는 5개의 메트로 노선이 도심 구석구석을 연결한다. 메트로를 이용하기에는 산츠역이 편리하다.

 

 

떠나간 연인을 쉽게 잊지 못하는 것처럼, 과거의 영광 또한 놓아버리기 어렵다. 사랑이 넘쳐 흐르던 시간들을 누군들 쉽게 잊을 수 있으랴! 하지만 이미 떠난 사랑과 과거는 온전히 보내주어야 한다. 그 자리에 새로운 인연과 찬란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15세기 황금기를 구가했던 스페인의 동부 도시, 발렌시아는 현재 새로운 세기의 수요의 부응하는 관광도시로, 제2의 부흥기를 맞이하고 있다. 풍부한 문화유산과 아름다운 해변을 지닌 도시, 발렌시아로 떠나보자.

시청광장의 야경. 분수와 건물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모습이다.

따뜻한 햇살을 맞으며 떠나는 도보여행

지중해와 인접해 있어 풍부한 햇빛과 비옥한 토지를 지녀서일까. 발렌시아는 따뜻한 햇살로 첫 인사를 건넨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난 거리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풍요로운 기분이 든다. 과거의 영광이 곳곳에 스며들어, 사람들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쳐 보인다. 따사롭고 기분 좋은 도시, 발렌시아에서 첫 걸음을 내디딘다.

발렌시아의 시내 여행은 구시가지에서부터 시작한다. 19세기 중엽까지 이곳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성벽은 철거되었으나, 토레스 데 세라노(Torres de Serranos)와 토레스 데 콰르트(Torres de Quart)는 아직까지 보존되고 있다. 특히 세라노 문은 발렌시아의 유명한 축제인 ‘불의 축제’ 때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곳이다. 거대하고 튼튼하게 만들어진 성벽의 위용은 그 당시 얼마나 강대한 도시였는지를 짐작케 한다.

콰르트 성벽에서 긴 대로변을 따라 죽 걸어가, 대성당(Cathedral)을 만난다. 200여 년에 걸쳐 완공된 이 성당은 기본적으로는 고딕 양식을 갖추고 있지만, 로마의 영향을 받은 로마네스크 양식과 바로크 양식도 섞여 있다. 대성당은 ‘벽화 성당’이라고 불릴 정도로, 내부에 벽화가 많다. 특히 예배당 안에는 예수가 최후의 만찬 때 사용한 성배가 안치되어 있기도 하다.

대성당. 발렌시아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건물이다.

라 론하 내부. 무역거래 당시 사용됐던 탁자가 그대로 남아있다.

발렌시아의 중심, 메르카도 구역

성당을 빠져나와 남쪽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메르카도 구역에 닿는다. 이곳은 발렌시아 시민들의 상업 활동 중심지 역할을 하는 곳으로, 두 개의 상징적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먼저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딕양식의 건물 라 론하(La Lonja)에 들어서면, 고풍스러운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된다. 이곳은 15세기 이슬람 왕궁 터에 실크와 상품 교역 거래소로 지어져 19세기까지 사용되었다고 한다. 무역거래를 위해 사용하던 탁자와 거대한 나선형 기둥으로 장식된 홀, 둥근 천장 등 건물 전체가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라 론하 맞은편에 자리 잡고 있는 중앙시장(Central market)은 20세기의 건축미가 반영된 현대적인 건물이다. 시장(?)인데도 불구하고, 세련된 건물 벽돌부터 천장의 유리돔까지 인테리어가 독특하다. 중앙시장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시장 중 하나라고 하니, 현대적 감각에 역사까지 깃들어 있는 장소로 볼 수 있다. 싱싱한 채소와 과일들이 상점마다 가득하지만, 이곳은 아침시장이기 때문에 오전 7시 30분부터 오후 2시까지만 운영한다.

중앙시장에서 좀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시청광장(Plaza del Ayutamiento)을 만날 수 있는데, 이곳은 발렌시아의 메인 광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특히 매년 3월에 열리는 라스 파야스 축제와 관련해 다양한 행사가 벌어지는 중심지역으로, 도시의 오랜 전통과 현대적인 모습을 한 곳에서 보게 된다. 바로 근처에는 국립도자기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바로크양식의 마르케스 데 도스 아구아스 궁전(Marques de Dos Aguas Palace)이 길가에 자리 잡고 있다.

예술과 과학의 조화, 미래도시를 만나다

예술과 과학의 도시 입구에 서면, 현대적인 건물과 물의 아름다운 조화로 인해 쉽게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는다. 사진으로는 전하기가 힘든, 감성을 자극하는 아스라함이 가슴 속에 들어오는 느낌이다. 이곳은 예술과 과학, 문화가 한데 어우러진 복합구역으로, 발렌시아 출신의 유명 건축가 산티아고 칼라트라바(Santiago Calatrave)와 스페인 출신이나 멕시코로 귀화한 펠릭스 칸델라(Felix candela)에 의해 만들어 졌다.

펠리페 왕자 과학박물관. 고래의 뼈를 모티브로 건축되었다.

이곳은 국제 회의장, 과학 박물관, 예술 궁전, 해양학 박물관, 산책로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예술과 과학의 도시라는 이름과 같이 미래 도시에나 어울릴 법한 아방가르드한 건물 디자인이 독특한 매력을 선사한다. 발렌시아의 남북을 관통하는 투리아(Turia)강과 인접한 점을 적극 활용해 물과 건축물의 조화가 자칫 인공적이고 딱딱하게 보일 수 있는 미래형 건물에 자연미가 더해졌다.

발렌시아는 과거 그리스와 로마, 아랍 등의 지배를 받는 아픔을 겪기도 했지만, 국민적 영웅 엘시드가 이를 다시 정복했고, 15세기에는 아라곤 왕국의 왕 하메스 1세에 의해 발렌시아는 황금기를 맞이했다. 그 이후 프랑스의 지배에 대한 저항으로 도시가 파괴되기도 했지만, 자유를 향한 시민들의 저항정신과 열정만은 그대로 남아, 현재는 ‘풍요의 도시’라는 말이 어울리는 지중해의 대표적 관광도시로 거듭났다.

과거는 끊임없이 새로운 미래가 다가오며 대체되지만, 발렌시아는 그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 마음들이 한데 모여 자유와 열정을 간직한 도시가 되었다. 역사와 전통 속에서 피어난 도시 발렌시아는 오늘도 자유와 열정을 향해 끊임없이 달리고 있다.

여행정보
시차는 스페인이 한국보다 8시간(서머타임 기간에는 7시간) 늦다. 통화는 유로(Euro)를 사용하며, 94%가 가톨릭교를 믿는다. 해가 늦게 지고, 온화한 기후로 인해 스페인 사람들은 대부분의 늦게 일어나고 저녁 늦게까지 활동한다. 식사 시간도 한국보다 늦어 점심 식사는 오후 2~4시에 먹으며, 저녁 식사는 오후 9시가 넘어서야 시작한다.

가는 길
우리나라에서 발렌시아로의 직항편은 없으며, 보통 파리를 경유해 이동한다. 인천-파리 노선(대한항공)은 약 11시간 50분 소요되며, 파리에서 발렌시아 노선(에어 유로파 운항)이 약 2시간이 걸린다.

날씨의 변덕에도 꿋꿋하게
브뤼셀의 옥상 풍경


옥상은 하늘과 가장 가까이 맞닿은 곳이라는 점에서 나라를 불문하고 매력적인 공간으로 손꼽힌다.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서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옥상을 즐기는 사람들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1, 2

매주 토요일마다 파킹 58의 옥상에서 열리는 칵테일 바 레 자르당 쉬스펜뒤의 모습과 이곳에서 바라본 브뤼셀의 풍경.

3

거대한 텃밭으로 변신한 왕립도서관의 옥상.

4

브뤼셀의 가장 핫한 복합 문화 공간 중 하나인 부으슈부르그의 5층 옥상 테라스에서는 빔 프로젝터를 이용한 상영회나 칵테일 파티가 열린다. 8월 한 달은 바캉스로 문을 닫고, 9월에 재정비된 하반기 프로그램으로 문을 열 예정.

탁 트인 시야가 보장되고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은밀한 공간 같은 느낌이 드는 옥상은 그 자체만으로도 매력적인 공간이다. 다만 머리 위 가림막이 없기 때문에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점이 걸릴 뿐. 프랑스의 북쪽에서 도버 해협을 면하고 있는 작은 나라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은 종잡을 수 없는 날씨 탓에 옥상 놀이의 제약도 꽤 많은 편이다.

한나절 동안 포근했다가 금세 강풍과 폭우가 쏟아지더니 이내 쾌청하고 쌀쌀했다가 다시 포근해진다. 그럼에도 이곳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중얼거린다. "오늘도 전형적인 브뤼셀 날씨군." 일례로 시내 한가운데에서 토요일마다 열리는 칵테일 파티를 들 수 있다.

브뤼셀의 중심가인 그랑플라스(Grand Place)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파킹(Parking) 58' 건물의 테라스에서 열리는 파티 '레 자르당 쉬스펜뒤'(Les Jardins Suspendus)가 그것으로, 올해 처음으로 개최되던 당일 변덕스러운 날씨 탓에 행사를 한 주 연기해야만 했다.

행사 연기 공지문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여름을 위해 싸우겠습니다! 태양이여, 우리와 함께 하소서.' 그랜드 오픈 당일에는 아쉽게도 행사를 연기했지만, 비가 오지 않는 주에는 예정대로 파티가 열려 석양을 바라보며 칵테일 한잔을 즐길 수 있다. DJ들의 음악을 배경으로 신선한 공기를 즐기며 모히토와 카이프리나 같은 칵테일을 마실 수 있는 파티니 어찌 매력적이지 않을까.

하늘 바로 아래에서 펼쳐지는 두 가지 풍경

반대로 변덕스러운 날씨의 덕을 톡톡히 보는 특별한 옥상도 있다. 바로 브뤼셀 왕립도서관 옥상에 설치된 텃밭이다. 2012년 친환경적 도심 텃밭을 널리 알리기 위해 350㎡ 넓이의 도서관 테라스에 각종 작물을 심은 이후, 매해 봄과 여름에 주기적으로 수확 이벤트를 한다.

이 신록의 테라스는 매일 도서관으로 출근하는 많은 취업 준비생, 시민들에게 잠시나마 숨을 돌릴 수 있는 쉼터가 되어주고 있다. 그런가하면 밤의 옥상도 매력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옥상 놀이를 고안해낸 문화 공간도 있다. 다국적 아티스트와 함께 전시, 퍼포먼스, 상영회, 콘서트 등을 펼치는 복합 문화 공간 '부으슈부르그'(Beursschouwburg)에서 지난 6, 7월 월드컵 기간에 맞춰 'Out Loud!'라는 이름으로 펼쳐진 축제다.

오후 10시부터 시작되는 나이트 파티로 뮤지션들의 콘서트를 비롯해 영화와 뮤직 다큐멘터리 상영이 진행됐다. 흔치 않기에 더욱 소중한 맑은 날을 만끽하기 위해 브뤼셀 사람들은 이렇듯 끊임없이 궁리 중이다. 옥상에서 벌어지는 흥미로운 일들은 땅을 밟고 있을 때는 보지 못하는 새로운 경험이 되어주고 있다.

이 글을 쓴 최혜진은…

『여성중앙』을 거쳐『쎄씨』피처 디렉터로 활동하기까지 누구보다 주도면밀하고 깐깐한 워커홀릭이었다. 천만다행으로 일보다는 연애를 더 좋아했다. 사랑하는 남자를 따라 유럽으로 날아가 프리랜서 글쟁이로서 제2의 삶을 꾸리고 있다. 책『그때는 누구나 서툰 여행』을 썼다. www.radioheadian.com

↑ 칼튼 힐에서 바라본 에든버러의 야경.

↑ 에든버러의 상징인 에든버러 성.

↑ 스코틀랜드 독립 영웅 윌리엄 월레스로 분장한 배우.

↑ 칼튼 힐의 저녁 무렵.

에든버러의 첫 인상은 귀족 가문의 조용한 숙녀와 마주하는 것 같았다. 도시 곳곳에 들어선 조지안 스타일의 건물들과 오래된 벽돌길, 잘 다듬어진 공원과 우뚝 솟은 성은 기품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저녁 햇살에 붉게 물들 때 바람에 실린 백파이프 소리가 아련하게 번져왔다.

스코틀랜드인의 자존심, 에든버러 성

에든버러는 영국이지만 영국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다. 도시의 풍경도 다르지만 언어도 확연히 다르다. 사투리가 굉장히 심하다. 사람들은 영어를 말하지만 마치 독일어처럼 들린다. 파운드화를 사용하지만 화폐 디자인도 잉글랜드 지역과 다르다.

올드타운 서쪽의 바위산에 자리한 에든버러 성(Edinburgh Castle)은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자부심을 상징한다. 6세기에 처음 지어진 에든버러 성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격렬한 투쟁사를 보여주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성의 대부분은 군사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수많은 전시품 중 제임스 2세의 손자 찰스 에드워드가 일으킨 1746년의 컬로든 모어 전투에서 사용된 군기 조각도 있다. 스코틀랜드인들이 국가의 자랑스러운 유물처럼 다루는 물건이다. 또한 16세기에 만들어진 스코틀랜드 전통의 왕관, 칼, 지휘봉 등이 전시돼 있다.

많은 작가가 배출된 에든버러에서 가장 사랑받는 작가는 소설 '아이반호'로 유명한 월트 스콧 경이다. 에든버러 시내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는 스콧 기념탑은 스콧 경의 죽음을 애도하기 만들어진 것이다.

에든버러의 정수를 품은 로열마일

에든버러의 가을을 즐기는 좋은 방법 중 하나는 로열마일(Royal Mile)을 천천히 거니는 것이다. 여기만 거닐어도 에든버러는 다 봤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올드타운에 있는 로열마일은 에든버러 성과 홀리루드하우스 궁전 사이에 뻗은 길이 1.6㎞의 자갈길이다. 지도에는 보통 하이 스트리트(High Street)라고 표시돼 있다. 과거에는 귀족들만 걸을 수 있었기 때문에 로열마일이라 부른다. 이곳에는 전통 토산품점, 오래된 펍, 시립박물관, 천문관측대, 스코틀랜드 각지의 위스키를 한자리에 모은 '스코치 위스키 헤리티지 센터' 같은 볼거리가 늘어서 있다.

평범한 백성들은 로열마일 대신 클로스(close)라는 작은 오솔길로 다녀야 했다. 클로스 중 가장 유명한 곳은 브로디스(Brodie's) 클로스다. 낮에는 목수와 시의원으로, 밤에는 강도와 도둑으로 살다가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한 윌리엄 브로디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그의 이중적인 캐릭터는 영국 소설가 R.L.B.스티븐슨에게 영감을 줬고, 소설 '지킬박사와 하이드'로 쓰여졌다.

로열마일 끝의 홀리루드하우스 궁전(Palace of Holyroodhouse)은 영국 왕실이 에든버러를 방문할 때 사용하는 궁전이다. 바로크 양식으로 호화롭게 지은 궁전은 과거 부유했던 스코틀랜드의 영광을 그대로 보여준다. 여왕의 식당에서는 16~17세기의 찻잔과 수저 장식물 등을 볼 수 있다.

낭만적인 에든버러의 야경, 칼튼 힐

가을에 잠긴 에든버러를 보고 싶다면 프린스 스트리트 동쪽 끝의 칼튼 힐(Calton Hill)로 가면 된다. 해발 105m 높이지만 대부분 평지인 에든버러에서는 높은 언덕과 같다. 칼튼 힐에는 에든버러의 역사를 보여주는 기념비가 가득하다. 칼튼 힐에서 가장 크고 눈에 띄는 건물은 국립 기념비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전사한 용감한 스코틀랜드 민족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에든버러 최고의 건축가 중 한 명인 윌리엄 헨리 플레이페어가 아테네의 신전을 본떠 설계한 것으로, 1822년 공사에 들어갔지만 재정상의 문제로 완공되지 못했다. 저녁 무렵 칼튼 힐에 올라가면 넬슨 기념비, 스콧 기념탑, 에든버러 시내를 붉게 물들인 노을을 볼 수 있다.

여행 정보

한국에서 에든버러까지 가는 직항이 없기 때문에 런던을 거쳐 가는 법이 제일 간단하다. 이지젯, 라이언에어 등 저가 항공편을 이용하면 싸다. 에딘버러공항은 시내 북서쪽으로 약 16㎞ 떨어져 있다.

런던 빅토리아 코치 스테이션에서 에든버러까지 매일 내셔널 익스프레스 버스가 운행된다. 9~12시간 정도 걸린다.

런던 킹스 크로스 역에서는 매일 20회 정도 에든버러까지 가는 기차가 운행된다. 4시간30분~5시간 정도 걸린다.

  1. Favicon of https://travelbible.tistory.com 오리궁둥이 2014.10.07 21:52 신고

    가고싶다 나도 ㅠ

파리에 새로운 장르의 공간들이 늘어나고 있다. 베를린을 필두로 다른 유럽 도시들에서
영감을 받아 생겨나고 있는 파리의 창의적인 공간들을 소개한다.


↑ LO/A 라이브러리 오브 아츠

LO/A 라이브러리 오브 아츠

갤러리와 콘셉트 스토어가 넘쳐나는 마레 지구에서 조금 벗어난 길에 눈에 띄는 공간 하나가 숨어 있다. 'LO/A 라이브러리 오브 아츠LO/A Library of Arts', 말 그대로 예술 서점. 이곳에 어떤 특별함이 있기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을까. '접근 가능한 예술'을 모토로 하는 이곳은 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와 예술 서적을 판매하는 서점이 합쳐진 공간이다. 3개월마다 지역, 도시, 트렌드 또는 시대 등 새로운 테마를 제시하면서 작품 전시를 하고, 관련 아트북, 고서적, 사진, 영화, 옛날 LP판, 음악 플레이 리스트까지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 이곳의 매력이다. 또 여느 서점과는 다르게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며 팝업 이벤트를 벌이거나 설치미술을 전시하기도 한다. 'LO/A 스튜디오'는 LO/A 라이브러리 오브 아츠의 콘셉트와 맥락을 같이하면서 출판과 아트 프로젝트를 담당한다. 이 스튜디오를 시작한 이들은 막심 뒤부아Maxime Dubois와 비즈니스 매니저 잔 홀스텐Jeanne Holsteyn이다. 새롭고 재미난 프로젝트와 작가들을 발굴하고 그 작가들과 컬래버레이션을 하는 것도 이 스튜디오의 임무다. 문득 예술적 영감을 듬뿍 받고 싶을 때 가볼 만한 곳.

LOCATION

17 Rue Notre Dame de Nazareth 75003, Paris

↑ 올리비아 안튜네스

↑ 듀오

듀오

전면 통유리의 깔끔한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하이브리드 공간 '듀오Duo'. 레스토랑, 사진전문 갤러리, 예술 서점을 겸한다. 일본인 셰프 마오리 무로타가 프랑스-일본 퓨전 메뉴를 선보이는 캐주얼 레스토랑과 5주마다 유명한 포토그래퍼의 개인 전시회나 독립 큐레이터의 그룹전, 해외 현대미술 초대전이 돌아가면서 열리는 갤러리, 아트북, 실험적인 음악들과 LP판이 빼곡한 스토어가 나란히 붙어 있으니 한데 둘러보기 좋다.



LOCATION


24 Rue du Marche Popincourt 75011, Paris

↑ 프레파스, '톰 10 르 카페' 프로젝트

프레파스, '톰 10 르 카페' 프로젝트

큐레이터이자 아티스트 커플, 나이스Nais와 레미Remi는 3년 전부터 마레 지구에 '프레파스Preface'라는 갤러리를 운영해오고 있다. 이 커플은 지난 4월 5일부터 갤러리를 카페로 단장하고, 예술 작품이 탄생하기 전 아티스트들 간의 교류를 보여주는 해프닝을 벌여왔다. '톰 10 르 카페 Tome 10 Le Cafe(10부 카페)'라는 이 프로젝트는 10월부터 장소를 옮겨 계속된다. 새로운 공간에서 나이스와 레미 커플이 정성스럽게 준비한 건강한 음식도 맛보고, 동시에 아트 프로젝트에도 참여해보자.
새로운 주소는 10월 오픈 직전 공개 예정!

tel

+33-6-72-93-29-35


web

↑ 나이스와 레미 커플이 정성스럽게 준비한 건강한 음식

↑ Tome 10 Le Cafe(10부 카페) 프로젝트에 참여한 사람들



독일 로렐라이 언덕·쾰른
강줄기따라 수채화 같은 풍경
언덕아래 마을 '뤼데스하임'엔 골목 곳곳 와인·맥주향 가득
고전·모던 공존하는 '쾰른'엔 632년 걸쳐 건축한 대성당
화려함·웅장함에 탄성이 절로

"가슴 저며 드는 까닭이야/ 내 어이 알리요/ 예부터 전해 오는 옛 이야기/ 그 이야기에 가슴이 젖네/ 저무는 황혼 바람은 차고/ 흐르는 라인강은 고요하다/ 저녁놀에/ 불타는 산정(山頂)/ 저기 바위 위에 신비롭게/ 곱디고운 아가씨가 앉아 있네 (중략) 뱃길 막는 암초는 보지 못하고/ 언덕 위만 바라보네/ 끝내 사공과 그 배는/ 물결에 휩싸였으리/ 로렐라이의 옛 이야기는/ 노래의 요술"

학창시절 누구나 한두 번은 불러 봤던 독일 가곡 '로렐라이'다. 독일의 후기 낭만파 시인인 브렌타노 등 많은 작가들이 문학의 소재로 다룬 '라인강 설화'를 하인리히 하이네가 시(詩)로 만들었고 거기에 프리드리히 질허가 곡을 붙인 것이 오늘날 세계인의 애창곡이 된 '로렐라이'이다.

◇로렐라이 언덕과 뤼데스하임=

로렐라이 언덕이 둥지를 트고 있는 라인강은 총 길이 1,300㎞에 달한다. 일반적으로 독일의 강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알프스 깊은 계곡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스위스ㆍ리히텐슈타인ㆍ프랑스ㆍ오스트리아ㆍ독일ㆍ네덜란드 등지를 거쳐 북해로 흘러들어 가기 때문에 서유럽 6개국이 공동 소유권을 갖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도 유난히 마인츠와 본, 쾰른 사이의 라인강이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떨치는 이유는 강을 번영의 지렛대로 활용했던 독일 사람들의 근면성과 경제적 성과 덕분이 아닐까 싶다.

라인강 빙겐(Bingen)에서 코블렌츠(Koblenz) 사이의 약 65㎞는 '로맨틱 라인'이라 불리는 곳으로 계절에 따라 색다른 느낌의 아름다운 정취를 선사한다. 로맨틱 라인에서도 뤼데스하임과 장크트 고아르스하우젠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높이 134m의 암벽이 로렐라이 언덕이다. 특별한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찾아간 관광객에게는 실망감을 줄 수도 있는 평범한 바위 덩어리에 불과하지만 로렐라이의 진수는 로렐라이에서 내려다보는 라인강에 비친 푸른 하늘과 흰구름에 있다. 라인강을 따라 펼쳐진 목가적인 풍경과 고즈넉한 마을들, 끝없이 펼쳐진 포도밭은 마치 한 편의 수채화처럼 이방인의 가슴 속으로 들어온다. 강줄기를 따라 몸을 느리게 움직이는 유람선은 독일인 특유의 목가적이면서도 낭만적인 정취를 싣고 유유히 흘러간다. 6월의 햇살을 받으며 찾아간 로렐라이 언덕 위에는 연인들이 라인강을 내려다보며 로렐라이의 전설을 서로의 귓속에 속삭이고 있어 독일인의 사랑이 새삼 떠오른다.

로렐라이 언덕에서 라인강의 낭만과 사랑을 만났다면 언덕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은 작은 시골 마을, 뤼데스하임(Ruedesheim)에서 잠시 이방인의 여유를 즐겨볼 만하다. 한국 여행객에겐 잘 알려진 곳은 아니지만 유럽이나 미국에서 찾아온 이들에게는 '라인강의 낭만'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관광 명소로 입소문이 나 있다. '라인강의 진주'라는 별칭까지 갖고 있는 뤼데스하임은 마을 앞으로는 기찻길 너머로 맑고 푸른 라인강이 흐르고 마을 뒤로는 포도밭이 끝없이 펼쳐져 독일의 진면목을 경험할 수 있다.

뤼데스하임 최고의 명물은 이른바 '독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골목길'을 자처하는 드로셀 가세(일명 티티새 골목)라고 한다. 두 사람이 비켜가기 힘들 정도로 좁은 골목길 곳곳에는 아기자기한 기념품 가게와 노천 카페가 늘어서 있는데 마음에 드는 노천 카페에 들어가 맥주나 와인을 마시며 라인강의 향기를 코 속 깊숙이 들이 마셔도 좋다.

◇고전과 모던이 공존하는 도시, 쾰른=

라인강을 따라 북쪽으로 2시간 정도 올라가면 고풍스러운 멋과 현대적인 멋이 공존하는 도시 쾰른에 이르게 된다. 이 도시는 강을 따라 펼쳐진 중세의 성당과 고성, 크고 작은 탑을 보기 위해 찾아온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대표적인 관광 명소다. 하지만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면 쾰른은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만큼 독일인이 아닌 로마인에 의해 발전한 도시다. 쾰른이라는 이름도 '식민지'라는 뜻을 지닌 '콜로니아(Colonia)'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쾰른 구시가지에 있는 로마-게르만 박물관에 가면 '콜로니아'라는 옛 이름이 새겨진 고대 로마인들의 유물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대부분의 유럽 옛 도시들이 그렇듯 쾰른 역시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나뉘어져 있다. 그 사이에는 마치 경계선처럼 라인강이 흐르고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는 호엔촐레른 다리와 도이치 다리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특히 신시가지는 두 차례의 큰 전쟁, 즉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발전된 시가지로 라인강의 기적이 펼쳐진 현장을 한 눈에 만나볼 수 있다.

쾰른을 대표하는 관광지로는 뭐니뭐니해도 쾰른 대성당을 꼽을 수 있다. 유럽의 수많은 건축물 가운데 공사기간이 가장 길었던 건축물로도 유명하다. 공사기간만 무려 632년. 지난 1248년 건축가 게르하르트에 의해 공사가 시작된 이후 1880년에 이르러 157m 높이의 쌍둥이 첨탑이 완공되면서 이 위대한 건축물이 탄생하게 됐다. 쾰른 대성당의 첨탑은 울름 대성당에 이어 유럽에서 두 번째로 높다. 대성당은 유려한 역사와 웅장한 외관 못지 않게 내부의 화려한 장식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제단을 장식하는 훌륭한 그림과 기둥의 정교한 조각, 화려하면서도 오묘한 빛을 내는 스테인드글라스가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라인강변을 둘러보고 나니 라인강의 기적은 독일인의 근면성으로 이룩한 것이 아니라 신(神)이 라인강을 통해 인간에게 선사한 선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산티아고로 가는 길' 위에서 고민하라 - 산티아고 성당

빌바오는 '산티아고로 가는 길' 위에 서 있는 또 하나의 산티아고다. 도시를 휘감아 도는 네르비온(Nervion) 강의 동쪽에 산티아고 성당이 있다. 동쪽과 북쪽에서 흘러와 서쪽 갈리시아에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당을 향해 지친 발걸음을 옮겨가던 순례객들이 잠시 숨을 돌리던 장소다. 이곳이 작은 어촌 마을에 불과했을 때부터 교회는 기독교인들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어 왔다. 그 이름 때문에 성스러운 길의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착각에 빠지게도 했지만 말이다.

중세 때부터 바스크 민족의 중심 도시로 역사를 이어왔지만, 여행객들에게 빌바오는 그저 산티아고의 조개 표식을 따라 잠시 들르게 된 여관에 불과했다. 불과 20년 전까지만 해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산티아고를 둘러싼 구시가(Casco Viejo)는 좋게 말해 '중세의 고풍스러운 거리'였지, 냉정하게 보자면 그저 칙칙한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강변의 작은 구역에 불과했다. 그러나 어떤 결단이 이 도시를 변신시켰고, 이 '중세'는 진정 의미 있는 '현대'의 장식품이 되었다.

골칫덩이를 옮겨라 - 빌바오 항구

19세기의 산업혁명은 이 도시에 큰 영광을 가져다주었다. 인근에서 질 좋은 철광 광산이 발견되었고, 스페인 북부의 가장 큰 항구는 영국과 교역하는 데도 커다란 이점을 보였다. 빌바오는 철강 산업의 주요 운송 창구이자 선박 제조의 중심지로 각광을 받았고,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스페인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의 하나였다. 그러나 2차 대전 이후 철강 산업이 쇠퇴하면서 강을 둘러싼 항구와 공장들은 보기에도 끔찍한 공해 산업이자 고철덩이가 되어 버렸다. 바스크 분리주의자의 테러 활동까지 겹쳐져, 이 도시는 스페인의 더러운 콧구멍 취급을 받았다.

1990년대 초반, 시민들은 머리를 모았다. 항구와 산업 시설을 멀리 바다로 보내고 새롭고 아름다운 도시를 건설하자. 누군들 그런 꿈을 꾸지 않을까? 그러나 진지하고 엄격한 설계, 고된 노동을 마다하지 않는 시민들의 전통이 진짜 기적을 만들었다. 얼핏 구겐하임 미술관을 유치하게 된 것이 모든 마법의 원천으로 보이지만, 빌바오의 강변은 도시 자체를 진짜 예술의 공간으로 만들고자 하는 시민들의 의지로 가득하다.


새로운 항구를 만들기 위해 강변을 도크로 둘러싸는 작업은 환경운동가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꽃 강아지를 지켜라 - 구겐하임 미술관

[007 언리미티드]의 오프닝에서 피어스 브로스넌이 빌딩에서 탈출한 뒤 유유히 거리로 나설 때, 구겐하임의 꽃 강아지가 귀엽게 쳐다보는 장면이 나온다.


20세기 전후의 도시 건축계에서는 '빌바오 효과'라는 말이 마법의 주문처럼 돌아다녔다. 시커먼 공해 도시 빌바오가 미술계 최고의 브랜드인 구겐하임 미술관(Guggenheim Museum Bilbao)을 들여놓은 뒤 세계적인 관광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건물은 건축가 프랭크 게리의 걸작이며, 2010년 세계의 건축 전문가들에 의해 최근 30년간 세워진 것 중 가장 중요한 건축물로 뽑히기도 했다(World Architecture Survey). 온갖 잡지의 표지에 이 건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했고, 오직 그 모습을 보기 위해 이 도시를 찾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정작 빌바오가 놀라운 것은 그 구겐하임을 진짜 이 도시에 딱 어울리는 건물로 만들기 위해 스스로 변신했다는 사실이다.

프랭크 게리가 티타늄으로 만든 미술관 건물은 수많은 관광 지도에 '빌바오'라는 지명을 적어넣게 한 장본인이다. 그런데 빌바오 사람들은 그 건물보다도 그 앞에 있는 커다란 강아지를 더 사랑하는 것 같다. 설치 조각가 제프 쿤스가 만든 12.4m의 거대한 토피어리 꽃 강아지(Puppy)는 원래 구겐하임 개관을 기념한 한정 전시물이었는데, 시민들의 열화와 같은 사랑 때문에 영구 전시물이 되어 있다. 설치 당시 정원사로 위장한 ETA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폭탄 화분이 장착될 위기를 겪기도 했다.

새로운 강을 만들어라 - 주비주리 다리

빌바오를 새롭게 만드는 온갖 프로젝트들은 굽이굽이 흐르는 네르비온의 강을 따라 줄을 잇고 있다. 수많은 매력의 포인트들이 빌바오의 기적이 단지 구겐하임 때문만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노마 포스터의 획기적인 지하철 시스템, 잔디밭 위를 구르는 산뜻한 초록색 트램 라인, 페데리코 소리아나가 디자인한 유스칼두나 콘서트 홀 등 이 도시는 리노베이션 건축학의 견학 코스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중에서도 주비주리(Zubizuri)의 하얀 윤곽이 도드라진다.

바스크어로 '하얀 다리'라는 뜻을 지닌 주비주리는 발렌시아 출신의 건축가 겸 조각가인 산티아고 칼라트라바가 디자인했다. 우아한 곡선의 보도와 매력적인 디자인의 아치가 어우러져 강변의 풍경을 바꾸는 데 크게 일조했다. 하지만 유리로 된 바닥이 부서지거나 미끄러지는 등 지역 주민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 빌바오는 여전히 건설 중인 것이다.


주비주리는 바스크어로 '하얀 다리'라는 뜻이다.

베레모를 지켜라 - 바스크 모자 가게

베레모는 바스크의 목동들이 쓰던 모자로부터 유래했다.


빌바오의 변신은 오랫동안 그들을 지켜봐 온 주변인들에게 더욱 놀라운 현실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곳은 유럽에서도 가장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바스크인들의 본거지이기 때문이다. 스페인 북부와 프랑스 남부의 피레네 산맥 주변에 살고 있는 바스크인들은 주변과 완전히 고립된 언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인도 유럽어족에 둘러싸여 있지만, 그들과 아무런 친족 관계를 찾을 수 없다. 언어로부터 시작된 고립성은 이 지역 사람들의 고집스러운 독립 정신으로 이어져오기도 했다. 파블로 피카소의 그림으로 유명한 게르니카(Guernica)의 학살 사건도 빌바오 인근에서 벌어졌다.

바스크는 스스로를 고립시켰지만, 자신들의 개성을 세계에 퍼뜨리기도 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베레모. 피레네 산맥의 목동들이 비를 피하기 위해 크고 둥글게 만든 모자는 각국의 군복 디자인에 활용되면서 세계적인 패션 아이템이 되었다. 검은 베레로 유명한 체 게바라도 북스페인의 바스크 혈통을 이어받고 있다. 빌바오 구시가에는 1857년부터 대대로 바스크 전통의 모자(Txapelduns)를 만들고 있는 고로스타이가 가문의 모자 가게(Sombreros Y Boinas Gorostiaga)가 있다.

바스크 남자들의 힘을 보여주라 - 산 마메스 스타디움

유럽 축구리그에 관심이 많은 팬들은 빌바오를 또 다른 이유 때문에 또렷이 인식하고 있다. 다른 스페인의 대도시처럼 이곳에도 고유의 축구팀인 아틀레틱 빌바오가 존재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축구팀에는 오직 바스크 출신들만이 선수로 뛸 수 있다는 점이다. 레알 마드리드나 FC 바르셀로나 같은 팀이 전 세계의 슈퍼스타들을 모아 드림팀을 만들고, 인근 도시이자 역시 바스크 지역인 산 세바스티안이 이천수 등 외국 선수들을 영입해온 것을 보면 얼마나 특이한 전통인가를 실감하게 된다. 이런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아틀레틱 빌바오가 스페인 4대 명문 팀으로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바스크 남자들은 자신들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남자들이라고 주장한다. 그 증거로 내놓는 것은 축구가 아닌 바스크 전통의 스포츠 게임이다. 가끔 해외 토픽을 장식하는 바스크 전통의 민속 스포츠는 무거운 돌 들기, 통나무 빨리 썰기, 도끼로 나무 쪼개기 등 인간의 원초적인 힘, 노동과 직결되는 능력을 테스트한다. 아틀레틱 빌바오의 본거지인 산 마메스 스타디움에서, 우리는 이 도시가 가장 국제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원초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빌바오는 H18K라 불리는 18종의 바스크 전통 게임을 현대화하고 규격화하려는 노력을 벌이고 있다.

구시가와 신시가를, 바스크와 세계를 엮어라 - 빌바오 기차역

아반도의 기차역은 고풍스러운 스테인드글라스와 현대적인 교통 시스템이 어우러진 곳이다.


빌바오는 20년간 변신했지만, 여전히 극과 극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구겐하임을 중심으로 한 산뜻한 리노베이션 라인과 여전히 구태의연한 도심은 이질적인 채로 공존한다. 중세의 분위기를 풍기는 구시가와 바스크 고유의 음식점이 현대 도시의 차가움을 덜어주지만, 때론 강의 동쪽과 서쪽을 아예 다른 도시로 여겨지게 만들기도 한다. 다행히 그 모든 것을 이어주는 혈관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깔끔하고 매력적인 지하철도 좋지만, 도시 위를 느릿느릿 배추벌레처럼 기어가는 트램의 정겨움이 이 도시를 사랑스럽게 만든다.

아반도에는 이 도시의 안과 밖을 잇는 모든 교통의 중심이 되는 기차역(Bilbao-Concordia terminal station)이 있다. 이곳은 빌바오의 기적과 바스크의 전통을 스페인과 유럽 전역으로 수출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1965년에 시작된 FEVE 철도 라인은 이 기차역을 중심으로 왕성하게 혈관을 이어가고 있다.

 

카우나스(Kaunas)는 인구 약 40만 명 정도가 거주하는 리투아니아 제2의 도시이다. 어느 나라나 그러하지만, 제2의 도시에 사는 시민들은 언제나 수도의 그늘에 가려 올바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불만이 그득하다. 카우나스 사람들은 특히 그러하다.

예수부활성당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카우나스 풍경 <사진: 카우나스 관광청>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카우나스가 정식으로 도시로 인정받게 된 것은 1408년으로, 600년이 넘은 오랜 역사를 간직한 도시이다. 리투아니아를 흐르는 양대 젖줄인 네무나스(Nemunas)강과 네리스(Neris) 강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카우나스는, 이런 입지적 조건으로 리투아니아 초기부터 사람들이 터전을 잡기 시작했다.

러시아, 폴란드, 독일 등 주요 거점 지역으로 통하고 있어 군사적, 경제적 중요성 역시 대단했다. 15세기 당시 독일기사단이 유럽 전체로의 팽창을 위해 동방진출을 꾀했을 때는 리투아니아의 고대 수도인 트라카이빌뉴스를 호위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리투아니아는 최초로 독립을 이루었으나 폴란드에게 수도 빌뉴스를 불법 점령당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1939년까지 카우나스가 리투아니아의 임시수도가 되어서 현대사의 서곡을 알리는 역사적 사명을 수행하기도 했다.

빌뉴스 이전 트라카이가 수도였을 당시 독일기사단들의 침공으로부터 수도를 보호하기 위해 건설한 카우나스성. 현재는 복원 사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사진: 카우나스 관광청>

현재 카우나스는 리투아니아는 물론이거니와, 전 유럽에서 감히 최강이라 불러 마지않을 리투아니아 국가대표 농구팀 잘기리스(Žalgiris)의 거점지역으로 유명하다. 몇 년 전부터는 아일랜드의 저가항공사인 라이언에어의 동유럽 허브로 지정되면서 유럽 전역에서 관광객들을 불러들여 카우나스의 위상을 높이는데 기여했지만, 그와 동시에 한때 유러피안 드림을 쫓아 유럽으로 떠났던 젊은이들이 눈물을 머금고 고국 땅을 밟게 되는 우울한 장소로 변화되기도 했다. 작지만 복잡 다난한 도시, 카우나스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숨어 있을까.

구시청사 위에서 바라보는 카우나스 풍경. (일반인의 출입은 제한되어 있다.) <사진: 카우나스 관광청>

자유와 혁명이 도시 카우나스

과거 소련 도시들에는 전부 하나같이 레닌대로, 스탈린대로, 가가린대로 같은 소련 영웅들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곤 했다. 하지만 그런 서슬 퍼렇던 시절에도 카우나스 한가운데 자리 잡은 중심거리의 이름은 바로 라이스볘스 알례야(Laisvės alėja), 우리말로 하자면 ‘자유로’였다. 한때 이 도시는 금연도로로 지정된 적이 있었지만, 현재는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사회 미덕을 해하는 행동이 아니라면 그 어떤 것도 공식적으로 금지된 것은 없는, 거의 완벽한 자유가 보장된 거리이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자유로는 언제나 거리의 악사들로 넘쳐난다. <사진: 카우나스 관광청>

카우나스에서 자유와 혁명의 분위기는 아주 유별나다. 1972년 5월 14일, 바로 이 자유로 한가운데에서 당시 20살이던 카우나스의 청년이 휘발유를 몸에 들이붓고 분신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가 분신한 곳 근처에는 “나의 죽음에 대한 죄를 물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정치체제 뿐이다”라는 유서가 한 장 남아 있었고, 그 이후 이틀 동안 카우나스는 소련의 붉은 군대도 경찰들도 통제할 수 없는 혁명의 도시로 변화하였다. 장기적 관점에서는 약 20년 후 소련 전체가 붕괴되는 시발점이 되어준 역사적인 사건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이전에도 소련의 지배를 반대하는 분신자살은 리투아니아의 다른 지역과 체코슬로바키아 등지에서 종종 있었던 일이지만 그 어떠한 것도 카우나스처럼 엄청난 파급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당시 소련에서는 금지되어 있었던 장발문화와 비틀즈(비틀스), 록음악도 카우나스에서는 아무 어려움 없이 감상할 수 있었으며, 그 결과 전 소련 내 히피문화의 메카로 부상하기도 했을 만큼 카우나스의 자유로는 구소련 내에 불고 있는 자유화에 대한 갈망 그 자체를 보여주었다. 이런 배경 덕에 리투아니아는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같은 인근 국가나 중앙아시아 등과 비교했을 때 소련화가 가장 적게 진행될 수 있었다.

리투아니아 군사력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군사박물관. 박물관 앞으로는 리투아니아 현대사를 이끌어간 위인들의 흉상들과 이름 없는 영웅들을 위해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이 위치한 통일광장이 위치해 있다. <사진: 카우나스 관광청>

카우나스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이야깃거리는 또 있다. 카우나스가 임시수도였을 당시 일본영사직을 맡아 일했던 스기하라 치우네(센포 스기하라, Chiune Sugihara)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서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살고 있던 유대인 6천 명을 구한 인물로 유명하다. 소련이 점령하고 있는 리투아니아가 독일의 손아귀로 넘어가는 것이 분명해지던 시기, 유대인들은 남미에 있는 섬들(네덜란드, 덴마크령)로 이주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하지만 그곳으로 이주하기 위해 통과해야하는 소련에서는 어이 없게도 일본의 통과허가를 받을 것을 요구했고, 수 천명의 유대인들은 일본 통과비자를 받기 위해 당시 스기하라가 일하던 일본 영사관 앞에 장사진을 이루었다. 독일과 돈독한 관계에 있던 일본 정부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서 유대인들의 통과비자 발급을 불허했으나, 스기하라는 정부의 불허방침에도 불구하고 자체적으로 통과비자를 발행해서 6천 명의 유대인들에게 새 생명의 길을 열어주게 되었다.

2차 대전 당시 수천 명의 유대인들을 구한 스기하라 영사가 근무한 일본영사관 건물, 현재는 스기하라 기념관과 아시아 지역연구소가 들어서 있다. <사진: 서진석>

과거 스기하라의 행적을 기념하는 ‘희망의 문, 생명의 비자’라는 문구가 리투아니아어와 일본어로 병기되어 있다. <사진: 서진석>

현재 그가 일하던 영사관은 카우나스 최대 대학교인 비타우타스 마그누스(Vytautas Magnus) 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소속의 아시아 지역연구소와 스기하라 박물관이 들어서 있고, 아시아 지역연구소에서는 몇 년 전 한국학 강의도 시작했다. 하지만 2013년경 이 건물 전체에 일본을 홍보하는 일본문화원이 들어설 계획이다.




아담하고 고풍스러운 구시가지

유럽은 일반적으로 구시가지가 그 도시의 행정중심지역인 경우가 많지만, 카우나스의 경우 자유로가 그 기능을 맡아서 하고 있고, 구시가지는 도시의 중심가에서 약간 벗어나 있다. 카우나스의 영원한 경쟁상대인 빌뉴스의 구시가지는 1997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복원과 홍보에 대한 엄청난 지원을 받고 있지만, 애석하게도 카우나스의 구시가지는 그런 호사를 누리지 못했다. 그래서 수도에 비해 개발이나 보존 상태가 열악하지만 빌뉴스의 구시가지와 견주어서도 손색이 없는 아름다운 곳으로서 일 년 내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1.7km의 자유로를 따라 쭉 걷다 보면 바로 이어지는 빌뉴스 거리(Vilniaus gatvė)가 바로 구시가지의 시작이다. 그 거리에 들어서면 나그네를 맞는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자갈길과 예스러운 모습의 공중전화가 카우나스의 역사를 실감하게 해준다.

구시가지의 입구인 빌뉴스 거리. 리투아니아의 도시들은 가장 번화한 대로를 수도의 이름을 따 ‘빌뉴스 거리’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사진: 카우나스 관광청>

마이로니스는 리투아니아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중 한 명이다. 카우나스 구시청사광장에 위치한 마이로니스 석상 주변 풍경 <사진: 카우나스 관광청>

카우나스 구시가지의 주요 볼거리들도 역시 성당이다. 빌뉴스처럼 대부분의 성당들은 소련 시절 다른 기능으로 변환되어 학교, 강당, 심지어 운동장, 사우나로 사용되기도 했다. 카우나스에 있는 성당 중 가장 훌륭한 곳은 빌뉴스 거리와 시청광장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베드로 바울 성당 (Šv. apaštalų Petro ir Povilo bažnyčia) 이다. 전쟁과 화재를 겪으면 수백 년 동안 끊임없이 확장 증축되어 리투아니아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 중 하나가 된 이 성당의 외부 벽에는 19세기 말 바로 이 성당에서 주교로 일하며 리투아니아 민족의식 부흥에 중심적인 위치에 서 있었던 신부이자 시인인 마이로니스(Maironis)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다.

카우나스의 대표적인 성당인 베드로 바울 대성당의 모습. <사진: 카우나스 관광청>

시청광장 한가운데 서 있는 구시청사(Rotušė)는 그 도도한 백색 이미지 때문에 ‘흰 백조’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1542년 최초로 그 자리에 들어선 이래 성당, 감옥 등 여러 가지 기능으로 바뀌어 내려오다가 18세기 말에 현재의 모습으로 개조되었다. 현재는 아주 특별하게도 결혼식장으로 사용되고 있어, 주말에는 백색의 드레스와 턱시도를 입은 신혼부부들과 들러리들로 주변 광장이 가득 찬다. 건물 한쪽에는 도자기 박물관도 위치해 있다.

구시청사의 낮과 밤. 구시청사 광장은 주말이 되면 신혼부부들과 햇볕을 즐기는 젊은이들로 가득 찬다. <사진: 카우나스 관광청>

광장 서편 강 쪽으로 위치한 알렉소토(Aleksoto) 거리에 위치한 페르쿠나스의 집(Perkūno namas)은 카우나스에 남아 있는 얼마 안 되는 고딕 양식 건물 중 하나로서, 리투아니아 중세 건물의 진면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건물로 손꼽힌다. 초기에는 길드 연합회, 그 후 예수이트 성회의 예배당, 드라마 극장 등으로 사용되었는데, 1818년 보수 공사 도중 벽 안에서 리투아니아 전통신앙의 최고신으로 천둥을 관장하는 신인 페르쿠나스(Perkūnas)의 형상으로 추정되는 조각이 발견되어, 그 이름을 따 ‘페르쿠나스의 집’이라는 별칭이 붙게 되었다. 현재는 동유럽 최대의 문호 중 한 명인 폴란드 출신의 작가 아담 미츠키에비치(Adam Mickiewicz)의 행적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리투아니아 고딕 양식 건물의 진수를 보여주는 ‘페르쿠나스의 집’. <사진: 카우나스 관광청>

카우나스 시내 어디에서든 보이는 예수부활성당의 모습. 언덕 아래에서 교회 입구까지 푸니쿨러를 타고 올라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사진: 카우나스 관광청>

그 외 카우나스에는 독특하고 재미있는 박물관들이 많이 위치해 있다. 안타나스 즈무이지나비츄스(Antanas Žmuidzinavičius)라는 조각가가 평생에 걸려 리투아니아와 유럽 전역에서 수집한 악마형상들이 전시되어 있는 악마박물관, 20세기 초 음악과 회화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리투아니아 현대예술의 밑그림을 그려준 츄를료니스(Čiurlionis)의 작품이 전시된 국립츄를료니스 미술관, 입구에 서 있는 발가벗은 남자상으로 더 유명한 현대미술관인 질린스카스(Žilinskas) 예술관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악마박물관에 가면 죽어서 악마가 되어버린 스탈린히틀러를 만날 수 있다. 2층 한가운데, 죽음의 땅이 되어버린 리투아니아 위에서 춤을 추는 스탈린과 히틀러의 모습을 악마의 모습으로 형상화한 작품은, 가슴이 숙연해지게 한다. 악마박물관은 여전히 세계 여러 나라들의 '새로운 악마'들을 꾸준히 수집하고 있는데, 동남아, 중국, 일본 등 아시아 각국의 악마들은 전시장에 진열되어 있지만, 아직 한국은 이곳에서 열외이다.

카우나스 시내에서는 어디에서도 보이는 언덕 위의 하얀 교회인 예수부활성당(Kristaus prisikėlimo bažnyčia)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카우나스 구시가지의 모습은 환상적이다. 또한 교회 아래쪽에서 언덕 위로 올라가는 푸니쿨라(언덕을 따라 올라가는 케이블카의 한 종류)를 타고 오르는 재미도 쏠쏠하다.

2011년 5월 19일부터 22일까지는 중세 한자 무역동맹 시절의 문화와 생활상을 재현하는 중세문화축제인 '한자축제'가 카우나스에서 열린다. 한자축제는 과거 한자무역의 동맹도시가 모두 참여하는 유럽 최대의 축제 중 하나로 중세시절 유럽의 분위기를 맛볼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가는 길

카우나스 시내에서 약 17km 떨어진 카르멜라바(Karmėlava) 국제공항에 라이언에어의 저가항공이 많이 취항한다. 더블린, 파리, 런던, 프랑크푸르트, 밀라노, 오슬로, 탐페레, 바르셀로나 등 유럽 주요 도시에서 저가항공을 타고 편하고 저렴하게 입국을 할 수 있다.


수도 빌뉴스에서는 카우나스로 이동하는 버스와 기차가 수시로 출발하며 버스는 한 시간 40분, 급행열차의 경우 1시간 10분 정도 소요된다. 모스크바에서 기차로 들어오는 방법도 있으나, 현재 다른 서유럽 국가로 연결해주는 기차 노선은 전무하다. 유로라인이나 에코라인 같은 국제버스들을 통해서도 카우나스에 어렵지 않게 들어올 수 있다.

러시아 내륙에서 라트비아로 들어올 때 가장 먼저 만나는 다우가우필스(Daugavpils)는 라트비아 제2의 도시이다(‘다우가프필스’로 불리기도 하지만, v자가 자음 앞에 왔을 때 묵음이 되는 라트비아어의 특성상 ‘다우가우필스’로 부르는 것이 맞다). 러시아 국경에서의 복잡한 여권심사를 마치고 다우가우필스에 들어오면 사람들은 누구나 러시아를 벗어났다는 느낌을 받는다. 간판이나 표지판, 안내문들이 모두 러시아어와는 상당히 다른 라트비아어로 적혀 있어 국경을 넘어 새로운 문화권으로 들어왔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하지만 겉보기와는 달리 다우가우필스의 사람들은 대다수가 러시아어를 사용한다. 라트비아어 간판이 달린 서점에 들어가도 내부에 진열된 책들은 90% 이상이 러시아어로 된 책들이며, 라트비아어로 된 메뉴판을 가져다주는 식당에서도 종업원과 손님들은 모두 러시아어로 대화를 주고받는다. 심지어 영화관에 가도 최신 할리우드 영화가 러시아어로 더빙되어 상영될 정도다.

다우가우필스에서 가장 활력이 넘치는 보행자 전용거리인 리가 거리. <사진: 다우가우필스 관광청>

라트비아는 소련 시절 발트3국에서 가장 러시아화가 많이 진행된 지역이기도 하지만. 다우가우필스가 있는 동부 지역은 특히 더하다. 다우가우필스 주민들 중 60% 이상이 러시아인들로 구성되어 있는, 라트비아 안의 작은 러시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우가우필스는 한국인뿐 아니라 발트3국을 자주 다니는 외국인들에게조차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인구 규모 역시 10만여 명에 불과해 90만 명 정도가 사는 수도 리가와 비교해 봤을 때 그 차이가 엄청나다. 변변한 구시가지도 없고, 크게 내세울 만한 유적지도 없는 곳이라서 관광객도 많이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이 도시에 대해서는 명성에 비해 크게 볼 것이 없다는 선입견도 많다.

하지만 러시아인 이외에도 라트비아인, 폴란드인, 리투아니아인, 벨라루스인 등 다양한 민족들이 어우러져 만든, 발트3국의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어려운 색다른 풍경들도 많고, 과거 무역 거점으로서의 영화를 되찾기 위해 국제공항을 건설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다우가우필스 요새를 휘감고 있는 해자. <사진: 다우가우필스 관광청>

다우가바 강변에 위치한 다우가우필스

다우가우필스라는 이름에는 ‘다우가바 강변의 도시’라는 의미가 있을 만큼, 이 도시는 다우가바강(서드비나강)과 역사를 함께 하고 있다. 수심이 깊으면서도 물결이 잔잔해서 중세 시절부터 대표적인 무역로로 사용되어 왔고 스웨덴 고틀란드섬의 사람들이 다우가바강을 통해 그리스로 갈 수 있었다는 전설이 남아 있을 만큼 명성이 높다.

리가를 정복한 리보니아 기사단들(검우기사 수도회)이 이 지역에 성을 건설한 1275년을 도시 역사의 시작으로 삼고 있으며, 당시에는 뒤나부르그(Dünaburg)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때부터 무역 거점으로 발전했지만, 16세기 중엽부터 라트비아 동부의 라트갈레(Latgalė) 지역이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국의 지배를 받기 시작하면서 리투아니아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다.

이로 인해 다우가우필스가 속한 라트갈레 지역은 독일 루터교의 영향이 비교적 컸던 다른 지역들과는 달리 로마 가톨릭이 번성했고 서부의 표준 라트비아어와 많이 다른, 리투아니아어와 라트비아어의 성격을 모두 보이는 라트갈레어라는 독특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러시아 정교회보다 로마 가톨릭 성당이 더 많은, 약간은 기이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리가 거리 한가운데 자리잡은 웅장한 로마 가톨릭 성당인 성 베드로 성당. 러시아 인구가 많은 다우가우필스이지만 로마 가톨릭 성당이 더 많다. <사진: 서진석>

1차대전 이후 라트비아가 최초로 독립했을 당시, 라트갈레 지역은 언어적으로 라트비아어에 조금 더 가깝다는 이유로 라트비아와 한배를 타게 되었다. 한때 라트갈레어는 라트비아어의 사투리로 취급되어 많은 관심을 얻지 못했지만, 최근에는 독립적인 언어로 인식되어 라트갈레의 중심도시인 레제크네를 중심으로 하여 라트갈레어 방송, 교육, 편찬사업 등 라트갈레어 부활사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다우가우필스는 2차 대전을 겪으면서 큰 손실을 입었으나, 교통과 무역의 요충지답게 철강, 섬유, 식품가공업, 경공업 등 소련 내부의 원자재를 가공하는 공업단지가 집중적으로 건설되면서 소련 내부의 고학력 노동자들이 대규모로 이주해왔다. 그 결과 한때 러시아인의 수가 이 도시 전체 인구 중 80%에 육박하기도 했다.

소련이 붕괴된 후, 러시아 내륙에서 생산되는 원자재에 의존하는 현지 공장들이 문을 닫게 되면서 실업률이 급격히 증가하고 러시아 유민들의 시민권 취득이나 교육 문제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 이후로 여러 주변 국가들의 투자가 늘어났고, 다우가우필스가 가진 다문화적 특성을 십분 활용한 축제와 문화행사들이 열려 외지인들의 방문이 늘어나자 과거에 가지고 있던 조금은 어두웠던 고정관념이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다.


다우가우필스가 자랑하는 볼거리, 다우가우필스 요새 (Daugavpils Cietoksnis)

다우가우필스 요새는 19세기 초 건설 당시 모습이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 있어 역사적, 건축학적 가치가 높은 건축물이다. 1577년 이반 대제의 명령에 의해서 성곽이 최초로 세워진 이후 여러 차례 증축을 거듭하였으나, 현재의 모습이 완성된 것은 나폴레옹 전쟁이 한창이던 19세기 초이다. 나폴레옹이 러시아 정벌 야욕에 불타오르던 1810년 알렉산데르 1세가 ‘러시아 제국의 서부 영토를 수호하기 위해 건설을 명한 요새는, 1812년 나폴레옹 군대가 다우가우필스를 실지로 장악하면서 나폴레옹 군대의 진격을 막고자 했던 초기의 계획을 완전히 실현시키지는 못했지만, 1833년 니콜라스 1세 시절에 완공되었다.

요새 내 텅빈 군사시설과 함께 서있는 아파트. <사진: 서진석>

한때 군사시설이었음을 말해주는 무기. 현재는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사진: 서진석>

해자, 요새 전체를 휘감는 성벽, 웅장한 모습의 성채, 소방서, 보루 등 당시의 군사시설물과 함께, 요새 안에 살았던 이들을 위한 주거건물, 공공건물들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어 러시아가 얼마나 큰 공을 들여 서유럽의 침공에 대항하고자 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1940년 소련 붉은군대가 다우가우필스를 점령했을 때, 상트 페테르부르크 예카테리나 궁전에 있던 호박실을 약탈한 독일군이 급하게 퇴각을 하면서 요새 어딘가에 그 보석들을 숨겨놓았다는 재미있는 전설도 남아 있다.

현재 요새는 다우가우필스 최고의 자랑거리로서 관광객들을 유치하기 위해 많은 홍보활동을 벌이고 있지만, 아직 대부분 지역이 방치되어 있거나 개발 중이다. 특히 소련 시절 밀려드는 노동자들을 수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내부에 아파트까지 건설되어 일반 시민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한때는 위용을 자랑했으나 주인이 사라진 텅 빈 요새 한가운데 서면 사라진 도시 안에서 길을 잃은 느낌마저 든다.

다우가우필스 시내 관광안내소에 미리 신청하면 가이드의 자세한 안내를 받아 관광할 수 있고, 요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것으로도 재밋거리를 찾아볼 수 있다. 2005년부터 대단위 복원공사를 진행하고 있으며 공사가 끝나면 라트비아 최대의 볼거리로 발전할 가능성이 충분히 보이는 지역이다. 시내에서 대략 3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전차나 버스를 타면 금방 도착한다.

19세기 후반의 운치있는 건물들이 가득한 다우가우필스 시가지

다우가우필스에는 특별히 구시가지라고 부를 만한 지역이 따로 없지만, 요새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시에톡스냐(Cietokša) 거리와 다우가우필스 중앙역 앞에서 이어지는 보행자 전용도로인 리가 거리(Rigas iela), 사울레스 거리(Saules iela) 등을 중심으로 한 시가지에서는 19세기 후반기에 건설된 운치 있는 건물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리가 거리 한가운데 광장에 자리 잡은 통일의 집(Vienibas nams)은 라트비아 공화국 1대 대통령 카를리스 울마니스가 1934년 이 도시를 방문했을 때 시민들의 요청에 화답하여 건설해 준 건물로 유명하다. 겉으로는 단순해 보이지만 기능주의와 네오-고전주의를 혼합한 양식의 이 건물에는 현재 대규모 공연장, 문화센터, 시립도서관, 관광안내소 등이 입주해 있다.

다우가우필스를 방문하는 이들이 놓치지 말아야 하는 곳은 다우가우필스 역사예술박물관이다. 1883년 아르누보 양식으로 건설된 건물에 1938년 입주한 이 박물관은, 라트갈레 전체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다운 박물관으로 손꼽힌다. 다우가우필스 도시의 역사와 함께 중세, 근대 시절 이 도시에 살았던 시민들의 생활상, 도시가 낳은 대표적인 예술가인 레오니드 바울린스(Leonids Baulin), 다우가우필스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건너가 추상화가로 활동한 마크 로스코의 작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라트비아 동부에서 가장 아름답고 규모가 큰 박물관으로 손꼽히는 다우가우필스 역사예술박물관 <사진: 서진석>

다우가우필스 역사예술박물관 내부 <사진: 서진석>

중앙역에서 시작되어 다우가바강에 이르는 대략 1km의 보행자 전용거리인 리가 거리는 다우가우필스에서 가장 활기차고 화려한 거리이다. 방문객들이 많은 여름이면 크고 작은 축제들이 열리며, 분위기 좋은 식당과 커피숍, 상점들이 즐비해 도시의 분위기를 즐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적당한 거리이다. 특히 보도블록 사이사이에 박힌 조명은 여름밤의 정취를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다우가우필스는 라트비아 전체에서 가장 녹지가 많은 곳으로도 손꼽힌다. 다우가우필스가 낳은 세계적인 예술가 마크 로스코, 한때는 사투리에 불과했던 라트갈레어의 위상을 높인 라트비아 최대의 문호 라이니스 , 라트비아 서사문학의 아버지 안드레이스 품푸르스 등 여러 위인들을 주제로 한 크고 작은 광장은 도시를 산책하는 이들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준다.


가는 길

다우가우필스에는 국제공항이 없으므로 수도 리가를 통해서 들어오는 방법이 가장 편하다. 2011년 현재 하루 네 차례 기차가 운행하고 있으며, 기차에 따라 2시간 50분에서 4시간까지 걸린다. 버스로 이동할 경우 리가에서 거의 매시간 버스가 출발하고, 경유 도시에 따라 3시간 반에서 4시간 반 정도 소요된다. 러시아로 이동하는 국제철도노선은 없으나, 유로라인이나 에코라인 등의 버스를 이용하면 어렵지 않게 도착할 수 있다. 리투아니아의 빌뉴스카우나스에서는 기차나 버스를 통해서 이동할 수 있다.

타르투(Tartu)는 규모나 인구적으로 에스토니아 제2의 도시로, 수도 탈린(Tallinn)과 함께 여러 가지 중요한 국가 기능을 함께 나누어 수행하고 있는 도시이다. 에스토니아는 물론이거니와 북유럽 전체에서도 최고(最古)의 대학교 중 하나인 타르투 대학교가 위치해 있는 데다가, 교육부, 최고법원, 국가기록원 등을 비롯해 에스토니아 과학단지 등 여러 가지 중요 기관들이 바로 이 도시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명성에 걸맞지 않게 인구수는 고작 10만 명에 불과한 타르투는, 여느 다른 유럽의 대도시들과 비교하면 한적한 시골 마을 같은 이미지를 풍긴다. 10만의 인구를 가진 대도시라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에스토니아 전체의 인구가 130만에 불과하고, 그 중 3분의 1인 40만 명이 수도 탈린에 거주한다는 것을 상기하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타르투 시청광장의 모습. <사진: 타르투 관광청>

타르투는 엄밀히 말해서 발트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에서도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로 손꼽힌다. 타르투라는 도시명칭이 등장한 최초의 기록이 1030년에 나타나기 때문인데, 이는 탈린보다 200년이나 앞선다. 이외에도 타르투는 탈린이 갖지 못한 독특한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다. 1583년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국에 의해 잠시 지배를 받았던 일과 1219년 덴마크가 탈린 건설을 시작했을 당시 타르투는 남쪽 라트비아와 함께 독일 지배 하에 있었다는 점이다. 1583년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국을 다스리고 있던 폴란드 국왕 스테판 바토리는 이 도시에 현재 타르투 대학교의 전신이 될 예수교 학교를 설립하고, 폴란드에서 국기로 사용되는 백적(白赤)기를 타르투 시에 공식으로 하사하게 된다. 폴란드의 지배는 17세기 초 스웨덴이 에스토니아를 차지하게 되면서 종식되어 불과 몇십 년 지속되지 못했으나, 폴란드 공화국의 국기가 여전히 타르투 시기(市旗)의 배경으로 사용될 만큼 그 영향은 대단하다.

타르투 대학교의 건설을 명한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 동상. <사진: 타르투 관광청>

타르투의 심장이자 에스토니아 문화, 역사의 중심지인 타르투 대학교의 겨울 야경. <사진: 타르투 관광청>

무엇보다 타르투가 자랑하는 것은 1632년 스웨덴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에 의해 건설된 타르투 대학교이다. 초기에는 인근 지역의 독일 귀족의 자제들만 수학할 수 있었으나, 19세기 제정 러시아에 의해 농노제도가 철회되고 에스토니아인들에게도 입학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면서 타르투 대학교는 에스토니아의 지성과 문화운동을 이끄는 중심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게다가 이웃 나라 리투아니아의 빌뉴스 대학교가 1832년부터 1919년까지 폐교된 이후, 발트 연안의 유일한 대학교가 되어 현재 발트3국의 문화적 역사적 기틀을 만든 이들을 많이 배출하면서 에스토니아를 넘어 발트3국 전체의 민족운동을 이끈 도시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래서 에스토니아 사람들은 이곳 타르투를 북방의 아테네라고 불러마지 않는다.


이런 배경에서 타르투에서는 에스토니아 최초의 근대식 대극장인 ‘바네무이네(Vanemuine ) 대극장’이 건설되었으며, 최초의 학술인 모임, 최초의 예술인 협회 등이 생겼다. 1869년에는 에스토니아의 대표적인 문화브랜드인 ‘노래대전’이 시작되어 발트3국 전체로 퍼져 나갔다.

이런 이유들을 비추어 볼 때 타르투 시민들은 탈린에 대해 적지 않은 지역감정을 가지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을듯하다. 그동안 국제공항을 제외하고는 수도에 있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고 자랑하던 타르투 시민들은 타르투 공항에서 2009년부터 스웨덴 스톡홀름과 라트비아 리가로의 취항을 시작하자, 그 자괴감도 누그러뜨리고 진정한 국제도시로 거듭나기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타르투의 시가지 풍경. 에마 강의 아늑한 풍경은 많은 시인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주었다.
<사진: 타르투 관광청>

바로크와 로코코 양식이 혼합된 구시청사 건물은 현재까지도 공식 시청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사진: 타르투 관광청>

탈린과 비교하여 타르투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특성은 단지 문화적이나 역사적인 배경뿐 아니라, 도시 한가운데에 흐르고 있는 강이라고 할 수 있다. ‘어머니’라는 의미의 ‘에마 강’(에스토니아어로 Emajõgi, 에마외기 강)이라 불리는 이 물줄기는 에스토니아의 민족시인인 리디아 코이둘라(Lydia Koidula)의 시에 한 많은 에스토니아 민중의 가슴을 어루만지는 어머니 같은 존재로 자주 등장하는 소재가 되었다.



타르투의 볼거리

타르투는 한국인들이 그리 많이 찾는 여행지는 아니지만, 인근 지역에서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은 점차 늘어나고 있고 국제회의 등이 수시로 열려서 외국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 음식값이나 숙박비용은 탈린 못지않다.

타르투에서 관광객들의 눈길을 가장 끄는 것은 18세기에 지어진 타르투 시청과 시청광장이다. 전체적으로 바로크와 로코코 양식이 혼합된 이 건물은 현재도 공식 시청 건물로 사용되고 있으며, 자갈돌 사이사이로 알록달록한 빛깔의 조명이 설치되어 밤이 되면 환상적인 야경을 만들어내는 광장은 노천카페와 식당으로 즐비하다. 타르투 거주 인구 중 10분의 1이 대학생들로 구성되어 있는 만큼 타르투 노천광장은 젊음과 햇살을 즐기는 젊은이들로 가득하다.

이런 타르투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시청광장 한가운데 놓인 ‘키스하는 학생(Suudlevad tudengid)’동상이다. 1998년 제막되어 대학도시라는 강한 인상을 남겨주는 이 동상은 주변의 분수와 어우러져 가장 타르투다운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명소이다.

키스하는 학생상이 없는 타르투는 상상할 수조차
없다. <사진: 타르투 관광청>

타르투 대학교가 배출한 세계 최고의 석학 중 하나인 기호학자 유리 로트만 기념 분수. 타르투 대학교 도서관 앞에 설치되어있다. <사진: 타르투 관광청>

시청 뒤편에 자리 잡은 그리스파르테논 신전을 연상시키는 백색의 건물은 바로 타르투 대학교 본관이다. 강의가 열리는 강의동은 도시 전체에 흩어져 있으나 대학교의 가장 중요한 기관들은 바로 이곳에 집결되어 있다. 대학교를 보고 섰을 때 왼편에 보이는 건물 옆면에는 현재 타르투 대학교에서 활동하고 있는 에스토니아 대표 지성인들의 얼굴로 장식되어 있어 인상적이다.

에스토니아 문화의 대표인물들을 제외하고도 1909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빌헬름 오스트발트 (Wilhelm Ostwald), 천문학의 대가 슈트루베 (Struve), 기호학의 아버지 유리 로트만 (Yuri Lotman), 발생학의 아버지 카를 베어(Karl Ernst von Baer) 등 세계 인문학과 자연과학에 엄청난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 이 학교를 거쳐 갔다.

중세 대학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타르투 대학교 맨 꼭대기에는 과거 학생들의 생활을 보여주는 대학감옥이 위치해 있다. 화재 이후 상당 부분이 훼손되긴 했지만, 중세시절 여러 가지 이유로 수감(?)되었던 학생들이 남겨놓은 낙서들을 보는 재미가 상당하다. 대학감옥에 입장하려면 대학교 본관 내 정보센터에 문의하면 된다.

한때 발트3국 최대의 규모였으나 지금은 폐허로 남은 대성당. 한쪽 면에는 타르투 대학교 역사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다. <사진: 타르투 관광청>

7월에 열리는, 중세시절 생활을 재현하는 한자(Hansa)축제는 언제나 관광객들의 시선을 잡아끈다. <사진: 서진석>

탈린에 톰페아 언덕(Toompea Hill)이 있다면 타르투에는 토메매기(Toomemägi)라는 언덕이 도시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그 위에는 타르투 대학교와 관련된 여러 위인들의 동상과 기념비들이 조성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한때 발트3국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것으로 알려진 타르투 대성당(Tartu Cathedral) 건물이다. 12세기에 완성된 이래 수백 년에 걸친 전쟁의 결과로 끝내 폐허가 되어버린 이 대성당은 한쪽 부분만이 복원되어 현재 타르투 대학교 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천사의 다리 <사진: 서진석>

악마의 다리 <사진: 서진석>

타르투 대성당 주변으로는 인상적인 교각이 두 개 남아 있는데, ‘천사의 다리(Inglisild)’와 ‘악마의 다리(kuradisild)’라는 재미있는 이름이 붙어 있다. 천사의 다리는 주변 공원의 모습이 ‘영국식’이라는 의미로 ‘영국식 다리’로 이름이 붙여졌으나, 에스토니아어로 영국이라는 단어와 천사라는 단어의 음가(音價)가 비슷하여 자연스럽게 ‘천사의 다리(Inglisild)’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천사의 다리에 서서 대성당 쪽을 보았을 때 보이는 회색톤의 석조교각은 ‘악마의 다리’이다. 왜 이런 이름이 붙었는지는 정확히 남아 있는 기록이 없으나, 이 다리가 만들어질 당시 제정러시아의 지배가 시작되었다는 설, 다리를 설계한 독일인 성(姓)의 의미가 ‘악마’라는 설, 여러 가지가 있으나, 아무래도 마주 보고 서 있는 ‘천사의 다리’를 의식해서 만들었다는 설이 더 힘을 얻고 있다.

타르투 출신의 문학가 에두아르드 빌데(Eduard Wilde)와 아일랜드의 오스카 와일드(Oskar Wilde)의 동상. <사진: 타르투 관광청>

윌로 으운이 제작한 ‘아빠와 아들’ 동상. 작가와 아들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해냈다. 아빠와 키가 똑같은 아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사진: 서진석>

타르투 시내의 또 다른 볼거리는 거리 곳곳에 술래잡기하듯 숨어있는 다양한 조각상과 벽화들이다. 위에 설명한 ‘키스하는 학생상’도 유명하지만 윌로 으운(Ülo Õun)이 제작한 ‘아빠와 아들’, 그리고 타르투에서 가장 명성이 자자한 아일랜드 펍인 ‘빌데(Wilde) 펍’ 아래 만들어진 ‘에두아르드 빌데(Eduard Wilde)’와 ‘오스카 와일드(Oskar Wilde)'동상이다. 동시대에 활동한 이 두 작가는 한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단지 성의 철자가 같다는 이유로 이곳에 마주 앉아 있다. 이 동상은 오스카 와일드의 고향인 아일랜드 골웨이에도 조성되어 있다.

대학교 주변으로 펼쳐져 있는 아기자기한 가게와 갤러리들, 여름이면 매일 펼쳐지는 다양한 축제 등을 제대로 즐기려면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도시에 머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가는 길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스웨덴스톡홀름에서 직항로가 운영되고 있기는 하지만 서울에서 연결은 그다지 쉽지 않다. 수도 탈린에서 수시로 운행하는 버스를 타면 2시간 반이면 타르투에 도달한다. 그 외 유로라인( Euroline)이나 에코라인(Ecoline) 등 유럽 국제버스를 이용하면 유럽 대도시에서 연결이 아주 수월하며, 리가에서는 버스로 대략 4시간 반이 걸린다. 철도는 탈린과 몇몇 지방도시를 연결하는 노선이 있을 뿐, 국제노선은 전무하다.

스톡홀름 카드와 지상에서 가장 긴 아트 갤러리

"스웨덴에서 가장 좋은 게 무엇이었나요?" 많은 여행자들이 이렇게 답한다. "스톡홀름 카드요." 지하철과 버스, 섬들을 오가는 페리, 자전거 투어는 물론 80군데 주요 관광지의 할인 혜택까지 하나의 카드로 해결할 수 있다. 물론 무척이나 경제적이고 실용적이다. 그러나 여행의 수단에 불과한 교통 카드를 '가장 좋았다'는 목적으로 탈바꿈시키다니. 그야말로 '스톡홀름답다'.


이 카드는 또한 '세계에서 가장 긴 아트 갤러리'를 무료로 관람할 수 있게 해준다. 스톡홀름에 있는 90개의 지하철 역사들 하나하나가 예술 작품처럼 치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벽과 천장 자체를 동굴처럼 불규칙하고 자연스럽게 마감한 뒤에 페인팅, 모자이크, 조명, 조각 기둥들을 덧붙여 놓았다. 대학(Universitetet) 역에는 생물 분류학으로 유명한 칼 폰 린네의 업적을 기리는 장식물을 새겨두는 등 지역적 특성도 잘 살리고 있다. 갤러리답게 중앙역(T-Centralen station)에서 출발하는 가이드 투어도 있다. 화요일은 블루, 목요일은 그린, 토요일은 레드라인을 따라간다.


스톡홀름 지하철 역사는 '세계에서 가장 긴 아트 갤러리'라 불린다.

항해사의 대 망신을 큰 자랑으로 만들다 - 바사 호 박물관

전함 바사 호, 17세기 선박의 원형을 가장 잘 유지하고 있다.


1625년 구스타프 2세 치하의 스웨덴 왕국은 해양 강국의 면모를 뽐내기 위해 전함 바사(Vasa) 호를 건조한다. 당대 최고의 과학과 예술의 집합체로 온 국민의 관심 속에 출항한 배, 그러나 처녀항해를 떠난 선박은 2Km도 못 가서 균형을 잃고 침몰하고 만다. 과시용으로 너무 많은 포를 실어 무게를 지탱하지 못해서라고도 하고, 구스타프 국왕이 정치적 이유로 너무 급히 배를 완성시키라고 지시한 때문이라고도 한다. 어쨌거나 세계 해양사에 길이 남을 대망신을 당한 셈이다.


그로부터 300년이 흘렀다. 해양 고고학자들은 1956년 스웨덴 항구 바로 바깥에서 바사 호를 발견해 5년에 걸친 작업 끝에 인양한다. 놀랍게도 선체는 17세기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스톡홀름 사람들은 선조들의 부끄러운 실패를 끌고 와 멋진 박물관으로 변모시켰다. 커다란 돛대를 달고 있는 해안의 박물관 안에는 바사호의 본 모습이 생생히 재현되고 있다.

거대한 선박의 본체, 아름다운 선미의 조각, 선원들의 옷가지와 물품 등과 더불어 당시 선박의 구조와 선원들의 활동을 볼 수 있는 미니어처까지 세심하게 진열되어 있다. '30년 전쟁' 때 발틱 해를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진 전함 바사 호는 당시에는 적들을 하나도 죽이지 못했지만, 수백 년 뒤에는 세계의 여행객들을 사로잡고 있다.

노벨상 시상식의 수상자는 어떤 기분일까 - 콘서트홀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써라.' 이 격언을 스웨덴 사람처럼 충실히 따르는 경우가 있을까? 냉전 시대 스웨덴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를 오가며 짭짤한 수익을 얻었다. 그래서 박쥐고 욕을 먹기도 했지만, '사회적 환원'이라는 가치를 앞장서 추구해 왔기에 결국 착한 박쥐로 사랑받을 수 있었다.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해 떼돈을 벌어들이고, 잘못 나온 부고 기사에서 '더러운 상인'이라 불린 노벨 의 변신 역시 그러했다. 그는 유산의 94%를 '노벨상' 설립에 남기고, 인류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들에게 영광의 메달을 건네주도록 했다.

매년 12월 10일 스톡홀름의 콘서트홀에서는 노벨상 시상식이 벌어져 전 세계인의 시선을 한 군데로 모으는데, 그 밖에도 노벨상의 꿈을 대리 체험할 수 있는 장소가 도시 곳곳에 있다. 시상식이 끝난 뒤 전망 좋은 시청 건물에서 공식 연회가 벌어지는데, 평소에도 이곳 레스토랑(Stadshuskällaren)에서 노벨상 수상자들의 디너 메뉴를 맛볼 수 있다. 구시가에 있는 스웨덴 아카데미 소유의 레스토랑(Den Gyldene Freden)은 노벨상 수상자를 결정하는 장소로 유명하다. 노벨상의 실물을 보려면 구시가인 감라 스탄(Gamla Stan)에 있는 노벨 박물관을 찾아가면 된다.


1918년의 노벨상 증서. 노벨상에 쏟아진 초기의 관심은 유례를 찾기 어려운 상금액 때문이기도 했다.

말괄량이 삐삐의 친구가 되고 싶다면 - 주니바켄

[삐삐 롱스타킹]은 잉거 닐슨 주연의 TV 시리즈로 널리 알려져 있다.


노벨 할아버지가 세상에 유용한 사람을 뽑아 추켜세운다면, 세상에 절대 무용한 일들을 벌여놓고 으스대는 소녀가 있다. 바로 스웨덴이 낳은 세계적인 동화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Astrid Lindgren)이 1945년에 선보인 [삐삐 롱 스타킹]이다.

항상 괴상한 패션에 장난기로 가득 차 있는 소녀, 엄청난 괴력을 가지고 있지만 친구들에게는 한없이 다정한 소녀. 삐삐는 어쩌면 "인내가 제일 쉬웠어요"라고 말하는 스톡홀름 인들의 마음속에 감추어진 광기를 대변하고 있는 게 아닐까?


스톡홀름에서 삐삐를 만나려면 듀르가르덴(Djurgarden) 섬으로 달려가면 된다. 여기에 있는 어린이 박물관 주니바켄(Junibacken)은 우리를 [보물섬] [정글북]과 같은 동화 속의 세계로 안내한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린드그렌의 작품 세계가 재현되고 있다. 건물 바깥에는 린드그렌의 동상이 서 있고, 그녀를 기념하는 영구 전시물이 갤러리에 가득하다. 아이들은 이야기책 기차를 타고 린드그렌 월드를 탐험해 볼 수 있다.

아바와 스웨디시 팝의 향연 - 그뢰나 룬트

듀르가르덴 섬은 마치 보물섬처럼 곳곳에 신나는 재미를 감춰두고 있다. 놀이공원인 티볼리 그뢰나 룬트(Tivoli Gröna Lund) 역시 빼놓을 수 없는데, 작은 규모에도 불구하고 스톡홀름의 상징으로 오랜 역사를 이어왔다. 1883년에 세워진 이 공원은 특이하게도 당시의 거주지와 상업 건축물들을 부수지 않고 그것을 감싸 안은 채 여러 놀이기구들을 채워 넣었다. 19세기에 손으로 만든 회전 돼지가 아직도 아이들을 태운 채 돌고 있는데, 스톡홀름 사람들의 알뜰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이 놀이공원은 여름철의 콘서트로도 유명하다. 밥 말리, 비비 킹, 지미 헨드릭스에서부터 최근의 레이디 가가까지 멋진 리스트가 이어져왔다. 그중에서도 공원의 공식 홈페이지가 가장 위에 올려놓은 역사적 공연은 무엇일까? 바로 이 도시가 낳은 세계적인 팝 그룹 '아바(ABBA)'의 1975년 콘서트다. 아바는 1974년 유러비전 송 콘테스트를 통해 큰 주목을 받았지만, 곧바로 이어진 유럽 투어에서는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절치부심 끝에 시작한 이듬해의 스웨덴-핀란드 투어에서 본격적인 성공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는데, 이곳 그뢰나 룬트의 공연에서 정점을 찍었다.


아바가 그뢰나 룬트에서 공연했던 1975년의 앨범 [ABBA]. 팬들은 '리무진 앨범'이라고도 부른다.

아바, 에이스 오브 베이스, 카디건스 등 세계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스웨덴 팝 밴드는 하나둘이 아니다. 그 성공의 원인은 뭘까? 귀에 쏙 들어오는 멜로디, 흥겹고도 단순한 리듬, 복고풍의 아기자기한 정서 등 여러 이유를 들 수 있지만, 그들이 영어로 노래한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그것도 매우 쉬운 영어로. 이것 역시 스웨덴식 실용주의라 할 수 있는데, 덕분에 미국과 영국을 제외하고는 최대의 팝 수출국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 최근 뮤지컬 [맘마미아] 등을 통해 아바가 새롭게 사랑을 받고 있는데, 이곳 공원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아바 더 뮤지엄(ABBA the Museum)'이 건설되고 있다고 한다.

북유럽 디자인의 작은 보물들을 만난다 - 갤러리 파스칼

전후 스웨덴 디자인의 대표자인 스티그 린드버그(Stig Lindberg, 오른쪽). 세라믹, 유리, 텍스타일 등에서 탁월한 제품들을 만들어냈다.


꾸미지 않은 듯 꾸민다. 생활 속에서 아름다움을 보고 만지게 한다.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식을 줄을 모른다. 이 도시는 스톡홀름 퍼니처 페어(가구), 노던 라이트 페어(조명), 스톡홀름 패션 위크(패션) 등은 북유럽 디자인의 현재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들을 꾸준히 제공한다. '디자인하우스 스톡홀름', '이케아' 등 스웨덴 산 디자인 제품을 구경할 수 있는 숍들도 곳곳에 있다.


갤러리 파스칼(gallerypascale.com)은 스웨덴-프랑스 혈통의 여성인 파스칼 코타드-올슨(Pascal Cottard-Olsson)의 콜렉션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작은 갤러리 겸 숍이다. 가구, 패션, 조명, 일러스트레이션 등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의 현주소를 볼 수 있는 전시들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초록색이 가장 강하다 - 로얄 내셔널 시티 파크

디자인을 사랑하는 시민들인 만큼 도시는 온갖 색들로 반짝인다. 그렇다면 이 도시에서 가장 빛나는 색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린. 최근 유로연합은 도시 환경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키고자 매년 한 도시씩 유럽의 녹색 수도(European Green Capital)로 선정하기 시작했는데, 2010년 그 첫 번째 우승자가 바로 스톡홀름이다. 과감한 교통 정책으로 출근자의 80%가 대중교통을 이용하게 되었고, 지난 10년간 자전거 이용자는 130%나 증가했다고 한다. 특히나 획기적인 쓰레기 배출 프로세스 등을 통해 탄소 배출을 급속히 줄이고 있는데, 2050년에는 탄소 배출을 완전히 없앤다는 계획이다.


거주민의 95%가 300미터 이내에 '진짜' 녹지를 가지고 있는 것도 큰 자랑이다. 듀르가르덴의 동쪽 녹지대를 포함한 로열 내셔널 시티 파크(Royal National City Park)는 시 공원으로는 세계 최초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시 구역 안에 7개의 자연보호구역이 있고, 시내에서 30분만 나가면 무스와 순록을 볼 수 있는 사파리 투어 코스가 마련되어 있다. 감라 스탄(Gamla Stan) 지구의 '건물 지붕 트레킹 투어' 등 도심 속에서 야생을 즐기고자 하는 상상력도 기발하다.


스톡홀름은 2010년 유로피언 그린 캐피털의 첫 번째 도시로 선정되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