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록달록, 테트리스

모스크바를 대표하는 바실리 성당의 별명은 일명 ‘테트리스 성당’ 이다. 유명한 게임 테트리스의 첫 화면에 나오면서 수많은 사람의 인상에 선명하게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중독 시켜 “KGB의 음모다”라는 말까지 들었던 테트리스의 알록달록함은 이제 모스크바의 한 면을 이루고 있다. 바실리 성당의 이미지뿐 아니라, 힘차게 다리를 내뻗는 러시아 민요춤의 이미지도 테트리스의 고향이 모스크바임을 확연히 보여준다.


다양한 색의 도형, “테트로미노”의 향연인 테트리스도 처음 만들었을 때는 색깔도 소리도 없었다. 테트리스를 만든 알렉세이 파지노프는 소비에트 과학원에서 음석인식과 컴퓨터 디자인 프로그램을 개발하던 연구원으로 러시아의 퍼즐인 ‘펜토미노’에서 영감을 얻어 1984년에 처음 이 게임을 개발했다. 이후 동유럽, 헝가리를 거쳐 서방으로 넘어가면서 명실상부한 역대 최고의 게임으로 인정받았다. 1989년 미국 소프트웨어 배급협회에서 최초로 4개 부문을 석권하기도 한 이 게임은 아케이드 버전, 휴대용 게임, 콘솔 게임, 모바일 게임 등 무려 59개의 게임플랫폼에서 위용을 떨쳤다. 수많은 법정분쟁만큼이나 요란한 인기였다. 한 게임잡지는 이 게임에 대해 “믿지 못할 만큼 간단하고 방심할 수 없을 정도로 중독적이다”라고 논평했다.


당시 개인의 지적재산권을 인정하지 않던 소련에서 활동하였기 때문에 게임의 인기와 상관없이 돈을 벌지 못했던 알렉세이 파지노프는 이후 미국으로 넘어가 96년경부터 마이크로소프트와 테트리스 컴퍼니에서 일하면서 게임개발자들의 영웅으로 [해트리스], [클락웍스] 등의 게임을 만들며 계속 활동하고 있다.



붉은, 광장

붉은 광장”은 모스크바의 붉은 심장일 테다. 크렘린의 전면에 펼쳐진, 레닌의 묘가 있는 광장. 예전부터 차르의 선언, 판결, 포고가 내려지던 곳. 지금도 메이데이와 같은 행사나 사열식이 이루어지는 곳. 그러나 그 이름에도 불구하고 이 광장은 붉지 않다. 바닥에 깔려있는 포석은 다갈색이며, 규모도 그리 크지 않다. 가장 넓은 부분이라고 해봐야 겨우 너비 100m, 길이 500m 가량에 지나지 않는다.


붉은 광장이 현재의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 때는 17세기 말이다. 그 이전에는 상업광장, 화재광장 등으로 불렸다. “끄라스나야”는 고대 슬라브어로 ‘붉은’이라는 뜻이지만 동시에 ‘아름다운’ 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결혼식을 따르는 행렬을 ‘붉은 행렬’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아름다운 아가씨를 ‘붉은 아가씨’라 부르기도 한다.

붉은 광장에서는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났다.


붉은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건물들의 면면은 화려하다. 모스크바를 대표하는 이미지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예술품”으로 불리는 바실리 성당,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굼 백화점, 역사박물관과 크렘린 성벽을 배경으로 한 레닌묘, 스빠스까야 탑이 붉은 광장을 중심으로 한곳에 모여 있다.


세라믹 타일로 화려하게 장식된 바실리 성당에는 이 성당을 너무나 사랑한 이반 대제가 또다시 이토록 아름다운 건물이 지어질까 두려워 건축가 두 명의 눈을 뽑아버렸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이후 1919년 8월 KGB가 성당의 성직자를 총살시키고 1929년에는 역사박물관에 넘겨지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1936년에는 철거의 위기에 직면하기도 하였으나 간신히 위기를 넘겨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90년부터는 이 성당에서 예배가 다시 시작되었다.


레닌묘가 있는 크렘린 성벽 아래는 일종의 공동묘지이다. 현재 230여 개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는데, 트로츠키, 스탈린, 흐루시초프, 막심 고리키 등의 흉상을 그들의 무덤 앞에서 볼 수 있다. 레닌묘는 현재 붉은 화강석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그 안에는 검은 양복을 입고 반듯하게 누워있는 레닌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다.



검은, 크렘린

냉전 시대, 널리 알려졌던 소련의 이미지는 ‘크렘린’과 ‘검은’을 찰떡처럼 붙여놓았다. 그들의 음험함,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함, 비열한 계산속 등을 몽땅 ‘검다’는 표현 속에 우겨 넣어 크렘린 위에 발라버린 것이다. 그러나 사실 크렘린은 검지 않다. 온갖 아름다운 성당과 건물들이 모여 있는 이곳은 현재 모스크바를 방문하는 이들에게 다채로운 색으로 다가간다. 원래 크렘린의 의미는 고대 러시아에서 쓰이던 보통명사로, ‘도시 내부의 요새, 성벽’이다.

러시아 내의 오래된 도시들은 다 크렘린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모스크바의 크렘린이 가장 유명하며, 러시아어 대문자로 시작할 경우 보통 모스크바의 크렘린을 말한다. 1156년 모스크바를 만들었다고 알려진 유리 돌고루키 공이 처음 만들었다고 하는 이곳은 러시아의 역사의 증언자다. 귀족들의 결혼식, 짜르의 대관식, 온갖 출정식 등의 공식 행사가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독특하게도, 크렘린 내부에는 성당이 많다. 3대 성당인 성모승천교회와 성수태고지교회, 대천사교회 이외에도 많은 교회당들이 자리 잡고 있다. 모스크바의 정중앙이라고 알려진 곳에 있는 높이 100m의 이반대제종탑은 한때 모스크바에서 제일 높은 건물이었다. 레닌이 기거하기도 했던 노란색의 화려한 대통령 궁에서는 지금도 대통령이 집무를 보고 있어 관광객의 출입을 막고 있다. 현대식 디자인의 크렘린 대극장도 어깨 겯고 있다. 이곳에서는 지구상에서 실전용으로 만든 것 중에는 가장 크다고 알려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거대한 포와 한번도 울리지 못한 거대한 종도 볼 수 있다. 너무 커서 종탑에 설치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전시용으로만 놓여 있다고 한다.


크렘린의 아름다운 건물들은 제각각의 매력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푸른 막대기가 숨겨진, 야스나야폴랴나

모스크바의 쿠르스카야 역에는 야스나야폴랴나로 가는 특급열차가 있다. [안나 카레리나]에서 브론스키는 전쟁터로 떠나기 위해 이 역에서 이별을 한다. 야스나야폴랴나는 톨스토이의 생가와 묘지가 있는 곳이다. 이곳에 가면 대문호 톨스토이가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검은 소파와 톨스토이의 무덤을 동시에 볼 수 있다. 이곳에는 푸른 막대기의 전설이 내려온다. 톨스토이의 맏형 니꼴라이는 “이 숲에는 푸른 막대기가 숨겨져 있는데, 그 막대기를 찾은 사람은 전 세계 인류를 이해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늘 말해왔다. 어린 톨스토이와 그의 형제들은 그 막대기를 찾아 영지의 숲 속을 돌아다니곤 했다고 한다. 나이 들어서도 그 막대기를 잊지 못하던 톨스토이는 가장 사랑하던 셋째 딸에게 바로 그 숲의 계곡에 무덤을 만들어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비석도 없이 조촐한 그의 무덤은 그 유언에 따른 것이다.

덜 알려진 사실이지만 톨스토이는 꽤 심각한 노름꾼이었는데, 한번은 노름 끝에 야스나야폴랴나 저택을 잃고 말았다. 그에게 있어 자기가 나고 자란 이곳을 잃는다는 것은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었다.

톨스토이는 자신이 태어난 영지인 야스나야폴랴나를 특별히 사랑했다.


그는 일기에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야스나야폴랴나 저택-나는 더 이상 쓸 수가 없다. 나 자신에게 구역질이 나서, 나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싶을 정도이다.”라고 쓰며 괴로워했다.

그는 결국 백방으로 수소문하다 소설 한 편을 급히 써주기로 하고 계약금으로 영지를 되찾았다. 농노가 해방되고 지주들의 토지가 그들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며 꽤 넓은 토지를 농민들에게 나누어준 그였지만, 그가 이 땅에 가졌던 애착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가 이 에피소드를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지구의 정신적인 자오선은 야스나야폴랴나를 지나간다”고 한 러시아의 시인의 말은, 톨스토이에 대한 존경의 뜻이자 그가 뿌리를 내렸던 이 땅에 대한 경의의 뜻이라 봐야 할 것이다.


몇 차례 모스크바에서 야스나야폴랴나까지 도보여행을 하기도 했던 그는 결국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82세의 나이로 영지를 떠난 그는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아스타포보라는 작은 역의 역장 관사에서 눈을 감았다.



별빛 속을 날던 기억, 모스크바 우주박물관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사는 유리 가가린이다. 그는 1961년 4월 12일 우주선 바스똑-1호를 타고 1시간 29분 만에 지구 상공을 일주하고 귀환하였다. 냉전상황 속에서 미국과 우주를 향한 치열한 경쟁을 하던 소련에서 그는 일약 국가적 영웅이 되었다. 그는 아쉽게도 1968년 비행훈련 중 추락사하였는데, 그 뒤 유명한 혁명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크렘린 벽에 묻혔다. 모스크바 시내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별빛 속을 가르는 우주에의 꿈은 2차대전 이후의 소련에게 절박한 것이었다. 미국과의 자존심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총력을 다하던 그들은 1957년 세계 최초로 지구궤도에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발사했다.

스푸트니크 2호는 한발 더 나아가 최초로 생명체를 태운 우주선으로 계획되었고, 거리의 개인 ‘라이카’가 우주를 여행하는 최초의 지구생물체로 선발되었다. 라이카 덕분에 사람들은 무중력 상태에서도 지구 생물이 생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라이카는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애초에 돌아올 수 있도록 장치가 되어 있지 않은 우주선이기도 했지만 우주선의 문제로 발사 후 실내 온도가 급격히 올라가 다섯시간 만에 죽고 만 것이다. 그러나 소련은 "라이카가 독극물이 든 먹이를 먹고 편안하게 숨을 거두었다“고 주장했다.


현재 모스크바 우주박물관은 세계최초로 인공위성을 쏘아올린 ‘우주정복’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64년에 세운 100m 높이의 거대한 ‘스페이스 오벨리스크’ 하단부에 자리잡고 있다. 기념비의 정상에는 우주선 모형이 위풍당당하게 올라서 있다. 우주박물관에는 유리 가가린의 초상화와 인류 최초의 여자 우주비행사 발렌찌나 테레슈꼬바의 흉상, 최초의 자동월면차 루나호트-1호, 라이카를 기념하는 조형물, 우주선 모형 등이 전시되어 있다.


우주정복에 대한 소련의 집념은 인류최초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을 낳았다.



노랑 자켓의 사나이, 마야코프스키

마야코프스키는 아방가르드한 포스터 디자인으로도 유명하다.


러시아의 혁명시인 마야코프스키는 모든 것이 강렬했다. 시가 강렬했고, 인상이 강렬했고, 사랑이 강렬했고, 혁명적 태도가 강렬했고, 서른여섯의 나이에 권총으로 마감된 죽음이 강렬했다. 미래파 운동을 주도하고 독특한 실험 시를 쉬지 않고 발표했던 그는 이미 열다섯 살에 노동당원이 되었고 어린 나이에 경찰에 체포되었다. 모스크바 미술학교에서 열 살 많은 친구인 미래파 화가 다비드 브를류크를 만난 그는 1912년 브를류크가 작성한 미래주의 선언문 <대중의 취향에 따귀를 때려라>에 서명하고 시를 발표하며 본격적인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1914년 그는 밝은 노란색 블라우스를 입고 등장했다. 주변의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 우크라이나 시인인 스테판 쿠즈바이트는 “마야코프스키의 노란색 셔츠”라는 시를 써 그 놀라움을 표현했다. 이는 미래주의 시운동을 위한 해프닝으로, 그의 동료는 뺨에 새 그림을 그리고 등장하기도 했다. 그 사건에 대해 마야코프스키는 말했다.

“나는 양복을 가져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꾀죄죄한 셔츠가 두벌 있었을 뿐이다. 경험에 비추어 넥타이로 가리면 좀 나을 것 같았다. 돈이 없었다. 누나한테 노란색 천을 얻어 몸에 감았다. 성공. 이는 즉, 인간에게서 가장 눈에 띄고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넥타이라는 뜻. 따라서 넥타이를 확대하면 성공도 확대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넥타이의 크기란 한정되어 있으므로 나는 꾀를 부렸다. 즉, 넥타이 같은 재킷, 혹은 재킷 같은 넥타이를 만들었다. 효과는 만점이었다.” 결국 그의 노란색 블라우스, 혹은 셔츠, 혹은 튜닉이라 기억된 그의 옷은 넥타이의 확대판이었던 셈이다. 시뿐 아니라 미술에까지 걸쳤던 그의 작품들은 마야코프스키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형형색색, 빅토르 최 골목

대학로나 명동에 비교되곤 하는 모스크바의 번화가 아르바트 거리에는 빅토르 최의 이름이 붙은 작은 골목이 있다. 그가 무명시절에 노래를 불렀다는 골목이다. 길이는 채 100m가 안 되지만 빅토르 최를 잃은 슬픔은 깊다. 매년 8월 15일은 그가 28세의 나이에 의문의 교통사고로 죽은 날로, 20년이 지난 지금도 이곳은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젊은이들로 늘 북적북적하다. 그를 추모하는 벽, 스찌나 쏘야는 그에게 바치는 낙서가 형형색색 아로새겨져 있다. 아직도 꽃다발이 바쳐지고, 아직도 담뱃불을 향처럼 피워놓는 곳. 그의 팬들은 관광객의 호기심에 찬 카메라를 거부한다.


빅토르 로베르토비치 최는 러시아의 전설적인 록그룹 키노의 리더로, 유명한 록가수다. 러시아 록 음악의 최고참인 유리 솁축도 “러시아 록 음악의 시초”라고 인정하는 이다. 소련 역사를 움직인 13명 중의 한 명으로 꼽히기도 한다.


빅토르 최는 러시아 록의 전설이자 영웅이다.

고려인 2세인 아버지와 우크라이나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우리에게도 친숙한 이미지인 그의 노래 몇 곡은 한대수, 윤도현 등에 의해 한국어로 번역되어 소개되기도 했다. 정치적인 메시지로 가득 찬 반항적인 가사의 곡으로 젊은이들을 흔들었던 그는 영화를 찍기도 했으며, 영화 홍보를 위해 미국에 다녀오기도 했다. 굉장한 인기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아파트 빌딩의 보일러실에서 화부로 일하며 살았는데, 그것은 그가 소련정부의 환영을 받지 못했던 데도 그 이유가 있다. 소련의 잡지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는 그의 사후 그에 대해서 “그를 믿지 않을 수 없다. 대중에게 보여지는 모습과 실제 삶의 모습이 다름없는 유일한 록커가 빅토르 최이다. 그는 그가 노래 부른 대로 살았다. 그는 록의 마지막 영웅이다."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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