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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러시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 유럽으로 활짝 열린 창, 상트페테르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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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를 일군 집념의 예술도시

여름 궁전
여름 궁전
표트르 대제, 유럽으로 향하는 창을 꿈꾸다

1703년, 스웨덴에서 되찾아온 습지 위에서 표트르 대제(Peter the Great, 1672~1725)는 장대한 계획을 시작했다. 네바 강 하구에 101개의 섬이 얼기설기 자리한 이 습지를  500여 개의 다리로 연결하고 물렁한 땅은 돌로 촘촘히 메워 도시를 만들겠다는 그야말로 거짓말 같은 계획이었다. 어찌나 무모한지 반대하는 세력이 만만치 않았고 심지어 아들까지 반대하고 나섰지만 표트르 대제의 뜻은 확고했다. 결국 아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계획을 밀고 나간 집념의 왕은 해수면보다 낮은 땅을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무려 15만명이 희생되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뼈 위에 세워진 도시라는 오명 속에서 성 베드로의 도시, 아니 표트르 대제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표트르 대제 청동 기마상
표트르 대제 청동 기마상
서유럽의 화려한 면모를 닮은 도시

청소년기를 서유럽에서 보낸 표트르 대제는 뒤처진 러시아의 위상에 열등감이 생겼다. 전통만 고수하는 러시아에 변화가 필요하다 여긴 그는 새 도시에서 서유럽의 문화를 빠르게 받아들이길 원했다. 특히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 매료된 그는 바다와 강, 운하의 능력이 얼마나 많은 이득을 생산하는지 알게 되었다. 러시아 최북서단의 네바 강이 바다로 흘러나가는 길목에 새 도시를 만들고 서유럽과 같은 문화를 심어나간 표트르 대제는 수도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겼다. 러시아 전통 복장을 금지하고 수염을 길게 기르는 습관마저 싹둑 잘라버린 그는 수염을 지키려는 사람들에게 수염세라는 세금까지 매겼다. 이렇게 철저하게 서유럽을 닮아간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화려한 서유럽풍의 웅장한 건축물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운하와 수많은 다리를 간직한 아름다운 외관이 갖춰지자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북방의 베네치아’로 불리게 되었다.

에르미타주 미술관 내부
에르미타주 미술관 내부

은둔자를 위한 겨울 궁전, 에르미타주 미술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서유럽화, 근대화가 남긴 유산 중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에르미타주 미술관(The State-Hermitage Museum)을 누구나 먼저 손꼽는다. 표트르 대제의 저택으로 지어져 왕가의 겨울 궁전으로 증축된 이 웅장한 왕궁에는 약 400만점의 예술품과 유물이 1,020개의 방에 전시되어 있다. 미처 내놓지 못한 작품도 상당하다는데, 소장하고 있는 모든 작품을 하나에 1분씩만 감상해도 무려 8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농담 같은 통계는 끝없이 이어지는 1,800여 개의 문과 120개의 계단, 총길이 27km의 압도적인 외관 앞에 서면 수긍하게 된다. ‘은둔자의 집’이라는 이름과 달리 이루 말할 수 없이 화려한 내부와 대대로 전해진 방대한 양의 유명 미술품은 루브르 미술관, 바티칸 박물관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명예를 안겨주었다.

'죄와 벌'을 가른 센나야 광장의 730걸음

벌레만도 못한 전당포 노파를 죽음으로 단죄하기 위해 좁다란 다락방에서 나와 무더운 초여름의 센나야 광장을 가로지른 라스콜리니코프는 노파의 집까지 총 730걸음을 꼼꼼하게 센다. 도스토옙스키의 대표작 <죄와 벌>에 등장하는 센나야 광장과 주변의 빈민가는 러시아의 대문호로 불리는 도스토옙스키가 직접 경험한 가난의 흔적을 그대로 품고 있다. 지금은 도스토옙스키 박물관(Dostoyevsky Literary Memorial Museum)으로 말끔하게 꾸며져 있는 그의 허름했던 하숙집은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담긴 도스토옙스키 작품의 진면목을 소개한다.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가 번민에 휩싸여 걸었던 730걸음 동안 펼쳐진 처참한 도시의 풍경은 그의 또 다른 작품 '백야' 속에 등장하는 더할 나위 없이 인위적인 도시의 몽상적인 이미지와 더불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깊이를 만든다. 그 깊이야말로 도스토옙스키의 언어로 승화된 진정한 찬사 아닐까.

푸시킨 동상 / 넵스키 거리
넵스키 대로를 바라보던 푸시킨의 짧은 삶

웅장하고 화려한 건축물들은 도심을 가로지르는 넵스키 대로(Nevsky Avenue)를 따라 늘어서 있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표 이미지는 이 대로에서 포착된다. 그 덩치 큰 이미지들의 사이 좁은 골목에 숨은 예술가의 단골집이 있다. ‘문학 카페’로 불리는 유서 깊은 이 찻집에는 러시아 국민들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푸시킨의 자리가 지금도 남아 있다. 푸시킨은 자신의 아내에게 구애를 하며 명예를 더럽히는 일행을 향해 결투를 신청하고는 안타깝게 결투에 져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허망하게도 결투의 총성 아래 서른여덟의 짧은 생을 마치고 만 것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여워 말라던 자신의 작품을 마지막 순간에 떠올렸다면 죽음의 결투를 불러들인 노여움을 잠재울 수 있었을 텐데…. 죽음을 불사하며 지키고자 했던 아내와 자신의 명예는 지켜진 것인지.

어둠 속에서 불을 밝힌 예술의 혼

마린스키 극장
마린스키 극장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러시아를 집어 삼키려는 히틀러의 야욕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시작되었다. 러시아의 서대문 같은 이 도시를 무너뜨릴 소모전 대신 철통처럼 포위해 아사(餓死)시킬 계획을 세운 나치는 내부로의 식량과 연료 공급로를 끊어버렸다. 한겨울 혹한과 허기라면 손쉬운 항복을 얻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 나치의 예상과 달리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민들은 무려 900일 동안 버텼다. 기아와 질병으로 주민의 3분의 1이 사망하는 끔찍한 결과를 낳았지만 함락되지 않았던 덕분에 모스크바도 살아남았다. ‘영웅의 도시’라는 명예로운 별명을 안겨준 이 역사 이전에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기근이 종종 찾아왔었다. 놀라운 사실은 굶주린 때일수록 예술극장의 무대가 더 활발히 불을 밝혔다는 것이다. 정통 발레의 산실로 불리는 마린스키 극장(Mariinsky Theatre)도 나치의 포위망 아래서 더 열심히 불을 밝혔다. 그 이전인 1920년대에 찾아온 기근 당시에도 마린스키 극장은 불을 밝혔고 마린스키 극장이 배출한 우아한 백조, 발레리나 안나 파블로바가 보내준 식량 원조 덕분에 수많은 무용수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재탄생한 클래식 음악

계속된 서유럽을 향한 모방은 19세기에 이르러 예술가들의 정체성 혼란을 야기했다. 나아가 러시아의 특색이 담긴 예술이 서서히 주목받기 시작했다. 특히 음악가들에게서 러시아만의 개성이 가득한 작품이 속속 탄생했다. 그 결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전문 음악원이 설립되었다. 설립 초기에 차이콥스키가 교육을 받아 작곡가로 데뷔했으나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암암리에 퍼져 힘든 상황 아래 놓였다. 주옥같은 작품 덕분에 명성을 얻었지만 그의 작품은 서유럽풍이다.

반면에 음악원 교수로 활동하며 러시아 색채를 꾸준히 담아낸 림스키 코르사코프도 동시대 인물이다. '왕벌의 비행'으로 유명한 그의 작품은 지극히 러시아적인 소재 아래 탄생했다. 오랫동안 음악원을 이끌며 세계적인 수준의 교육기관으로 키워 놓은 그의 능력 덕분에 지금도 그 명성이 대단하다. 전세계에서 러시아 연주자들이 선보이는 놀라운 테크닉과 굵직한 음악성은 시공간을 초월한다. 초절정의 기교를 선보이는 현 클래식계의 인기 절정 피아니스트 아르카디 볼로도스의 화려한 피아니즘도 이곳 국립 상트페테르부르크 림스키 코르사코프 음악원에서 만들어졌다. 서유럽에 대한 모방으로 만들어진 도시에 유럽 문화의 정수인 클래식 음악의 세계적인 산실이 있다는 아이러니, 바로 이런 개성 강한 역사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참모습 아닐까.  

에르미타주 미술관과 네바 강
에르미타주 미술관과 네바 강

· 글ㆍ사진 : 곽정란(여행작가)
'슬림 유럽 데이', '비엔나 칸타빌레', '자신만만세계여행-유럽, 캐나다, 중국' 저자
前 KBS '클래식 오디세이', '찾아가는 음악회' 음악 코디
· 기사 제공 : 대한항공 스카이뉴스(www.skynews.co.kr)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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