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도 아픈 전쟁이 있었다. 크로아티아(Croatia) 스플리트(Split)는 외관으로는 아드리아해의 훈풍이 닿는 휴양도시다. 포구에는 한가롭게 배가 드나들고 헝가리에서 출발한 열차의 종착역이 되는 아득한 곳이다. 대리석으로 치장된 산책로에는 야자수들이 어깨를 늘어뜨리고, 밤이면 노천 바에 이방인들이 흥청대는 낭만의 항구다.

아드리아해와 접한 스플리트의 해 질 녘 풍경은 고즈넉하다.

푸른 바다를 드리운 발칸 반도의 휴양지는 긴 질곡의 세월을 겪었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이탈리아의 지배를 받았으며 1차 대전 후에는 문화, 언어가 다른 민족과 유고슬라비아라는 이름으로 통합됐다. 90년대 5년 동안이나 독립을 위해 싸웠던 전쟁과 그 상흔은 도시에 자욱하게 쌓여 있다.


스플리트가 여행자들의 사랑을 받는 것은 이런 생채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크로아티아의 제2도시로 달마티안 지방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인 이곳은 완연한 관광지인 두브로브니크와는 모습이 또 다르다. 보듬고 가려도 북적대는 도시의 뒷골목에는 슬픈 얼굴이 담겨 있다. 지중해의 짙은 바다가 더욱 푸르게 다가서는 것도 도시의 과거가 투영된 탓이다.

전쟁의 상흔을 걷어낸 구시가

황제가 행사를 주최했던 궁전 안뜰 주변의 건물들.

궁전 위에서 내려다보면 붉은색 지붕이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스플리트의 상흔을 붉고 단아하게 치장하는 것은 구시가 그라드 지역이다.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은퇴 후 노년을 보내기 위해 아드리아의 햇살 가득한 땅에 AD 300년경 궁전을 지었다. 그리스의 대리석과 이집트의 스핑크스를 가져다가 꾸밀 정도로 애정을 쏟았다. 궁전은 동서남북 200m 남짓의 아담한 규모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구시가는 궁전을 중심으로 미로처럼 뻗어 있다. 신하와 하인들이 거주하던 궁전 안 200여 개 집터는 그 잔재가 남아 상점, 카페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황제가 행사를 열었던 안뜰은 석회암 기둥이 가지런하게 도열된 채 여행자들의 쉼터와 이정표가 됐다.

크로아티아 제2의 도시인 스플리트는 구시가지 신시가지가 아득하게 펼쳐져 있다.

그라드 지역 어느 곳으로 나서든 발걸음을 주저할 필요는 없다. 동문은 재래시장과 연결되고 남문은 바다, 서문은 쇼핑가와 이어진다. 북문을 나서면 녹음이 우거진 공원이다. 궁이 지어질 때만 해도 남쪽 문과 담벼락이 바다와 접한 요새 같은 형국이었지만 성벽 밖을 메운 뒤 바닷가 산책로가 조성됐다.


좁고 구불구불한 구시가를 조망하려면 황제의 묘였던 성 도미니우스(돔니우스) 대성당에 오른다. 숨 가쁜 계단 꼭대기에 서면 구시가의 붉은 지붕과 아드리아해의 탁 트인 푸른 바다가 나란히 늘어선다. 궁전에 기대 사는 사람들의 분주한 모습도 이곳에서는 구식 슬라이드처럼 느리게 움직인다.

황제의 궁전과 서민의 삶터

서문 밖 ‘나로드니 트르그’ 거리는 궁전골목과는 달리 현대식 예술작품들과 다양한 럭셔리 숍들이 늘어서 있다. 치즈 빛으로 채색된 옛 거리와 도시의 미녀들이 활보하는 광장은 불과 5분 거리로 연결돼 있다. 이곳에서는 매년 7월이면 서머페스티벌이 열리고 9월이면 국제영화제의 막이 오른다.

크로아이타의 종교 지도자인 그레고리우스 닌의 동상.

구시가지의 골목들은 붉은색 지붕과 현대인의 삶이 조화를 이룬다.

구시가지 동문 초입에는 새벽이면 대규모 장터가 들어선다. 지중해의 해산물과 채소, 과일이 쏟아져 나온다. 소박한 물건들이 오가는 크로아티아의 장터 모습이 생생하다. ‘황금 문’으로 불리는 북문을 지나면 크로아티아 종교지도자였던 그레고리우스 닌의 동상을 만난다. 동상의 엄지발가락을 만지면 행운이 온다는 풍문 때문에 유독 엄지만 반질반질하다.


스플리트의 구시가가 낭만을 더하는 데는 해변 노천 바들이 빼곡히 들어선 오바라 히르바트스코그(Obala hrvatskog) 거리가 한몫을 한다. 자정이 넘도록 관광객들과 이곳 청춘들이 뒤엉켜 맥주를 마시거나 벤치에 앉아 항구와 바다를 바라보며 데이트를 즐긴다. 이 거리를 찾을 때만은 모두들 한껏 멋쟁이가 된다. 매끈한 스포츠카들이 주차장으로 밀려들며 굉음을 내는 모터사이클이 오가기도 한다. 파란 하늘, 창가의 흰 빨래, 파스텔톤의 담벼락이 어우러진 한낮의 구시가지 골목들과는 또 다른 단상이다.

구시가지 동문 초입에는 새벽이면 대규모 장터가 들어서 장관을 이룬다.

해변 노천 바들이 빼곡히 들어선 오바라 히르바트스코그 거리는 관광객들과 이곳 청춘들이 뒤엉켜 항상 흥청거린다.

스플리트는 항구, 기차역, 버스터미널이 한 곳에 어우러져 있다. 밤 열차를 타고 새벽녘에 도착한 이방인들과 새벽 일찍 낯선 곳으로 버스를 타고 떠나는 사람들의 포근한 정경이 터미널 앞 카페테리아에서 펼쳐진다. 헝가리에서 열차를 타고 스플리트에 닿는 여정은 이국적이며, 스플리트에서 두브로브니크로 이어지는 길도 해안 절벽과 지중해풍의 낯선 마을을 만나는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다. 스플리트에서의 만남과 이별은 모두 드라마틱하다.


스플리트의 해변 산책로는 마르얀 언덕으로 이어진다. 푸른 숲과 오래된 교회를 스쳐 지나면 항구와 바다와 구시가가 자맥질을 하며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크로아티아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조각가 메슈트로비치 역시 노년의 안식처로 이곳 스플리트를 선택했다. 그 편안한 도시에 기대 있으면 전쟁의 아픔은 아련한 추억으로 다소곳하게 모습을 감춘다.

가는 길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스플리트행 열차가 출발한다. 독일, 오스트리아에서 오는 장거리 버스도 스플리트를 경유한다. 이탈리아 안코나 에서 페리를 이용해 도착할 수도 있다. 스플리트는 다른 동유럽 국가와 달리 열차보다는 버스 교통이 발달한 편이다. 인근 두브로브니크로 가는 버스는 매시간 출발한다. 4시간 30분 소요. 열차 역 인포메이션 센터에서는 ‘sobe'로 불리는 민박집을 알선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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