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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아니아/오스트레일리아

호주 시드니 - 조금은 느슨한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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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오페라 하우스

"시드니 항구의 아름다움을 독자들에게 전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나는 포기했다." 영국의 소설가 앤서니 트롤럽은 이렇게 썼다. "이 만을 아름답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묘사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대영제국의 통치자들이 꼴 보기도 싫은 죄수들을 지상 낙원으로 보냈을 리는 만무하다. 1788년 그들이 이 해변에 깃발을 꽂았을 때, 물 한 톨 찾아보기 어려운 퍽퍽한 벌판에는 땅에 떨어져도 썩지 않는 독성의 식물들만이 시큰둥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유형수들과 군인들은 기근과 고통의 공감대 속에 이 도시의 터전을 만들었다. 이 항구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로 변모시킨 뒤, 그 아름다움의 정점에 오페라 하우스를 세웠다. 덴마크 출신의 건축가 외른 우트존(Jørn Utzon)의 설계안이 공모를 통해 당선되고, 1973년 완공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아직도 미스터리로 여겨질 정도로 파격이었다.


신대륙에 건설된 아름다운 고전 예술의 장. 그러나 자유분방한 시드니 시민들은 이곳을 고리타분한 장식물에 머무르게 하지 않았다. 2010년 3월 1일, 공공장소에서 대규모 누드 사진을 찍는 프로젝트로 유명한 스펜서 튜닉이 이 오페라 하우스 앞에 자원 참가자들을 불러 모았다. 유명한 동성애자 퍼레이드(Sydney Gay and Lesbian Mardi Gras) 행사의 일환으로 벌어진 이 프로젝트에 모여든 사람은 5,200명. 2001년 멜버른의 4,500명 기록을 깼다.  

 

 

우리는 록스를 부술 수 없다

오페라 하우스의 건설은 시드니 중심가의 대대적인 현대화 과정의 일환이었다. 더불어 항구 주변의 허름한 지역들을 정비하기 위한 공사 프로젝트들이 줄을 이었다. 그 와중에 커다란 논란거리가 등장했다. 록스(the Rocks) 지역은 시드니 정착의 역사를 보여주는 가장 오래된 동네. 곳곳에 남아 있는 역사적 유물들의 처리가 문제였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건설 노동자 조합의 지도자였던 잭 먼디가 반대하고 나섰다. 조합원과 지역 주민들이 주축이 된 '그린 밴스(green bans)'는 개발의 우선순위는 공공장소와 역사적 유산을 보존하는 것이지 대규모 상업 시설을 짓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교외에 있는 켈리스 부시(Kelly's Bush)를 보존하기 위해 시작된 '그린 밴스'는 왕립 식물 공원(Royal Botanic Gardens)을 오페라 하우스의 주차장으로 만들려는 계획과도 맞섰다. 개발업자와 지역 주민들의 다툼은 폭행, 납치, 심지어 살인으로까지 이어졌다. 시드니의 몽마르트르라고 불리는 빅토리아 스트리트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건설하려는 시도 속에, 지역 신문의 발행인이었던 후아니타 닐슨이 실종되었는데 그녀는 아마도 살해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시드니에서 가장 오래된 주거 건물인 록스의 캐드먼스 코티지(Cadmans Cottage). 건설 노동자들은 이 건물을 부수는 것을 거부했다.


 

 

뉴타운을 그래피티로 뒤덮자

뉴타운의 그래피티는 고전의 패러디, 팝스타에 대한 오마주, 정치적 발언 등 여러 형태를 띠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아웃백, 그리고 아웃도어의 나라다. 젊은이들은 언제나 반바지 차림으로 스케이트보드, 서핑 보드, 묘기 자전거를 타고 다닐 것만 같다. 그리고 그들의 손에는 당연하게도 스프레이가 들려있을 것 같지 않나?

 

1980년대부터 시드니 서남쪽의 '뉴타운' 지역에서 시작된 그래피티 열풍은 이 도시의 색다른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갖가지 주제와 스타일로 그려진 벽화들은 길거리 청년들의 거친 낙서가 아니라, 도시 자체를 캔버스로 삼은 집단 예술 프로젝트로 보인다. 작은 크레인을 이용해 킹 스트리트에 '아이 해브 어 드림'을 그린 앤드류 아이켄(Andrew Aiken)은 이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무의미함에 맞선 휴머니스트의 저항"이라고 주장한다.

 

 

살짝 맛이 가서 즐거운 놀이동산

멜 깁슨, 휴 잭맨, 니콜 키드먼…. 할리우드에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배우들의 이름을 하나씩 떠올리다 보면 마음이 짠해지는 순간을 만나게 된다. 바로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떠올라 [다크 나이트]의 조커로 피어나던 순간, 약물과다 복용으로 요절해버린 히스 레저. 그가 마약중독자로 등장해 마치 그 최후를 예견하는 듯한 슬픈 영화가 된 [캔디]. 거기에 시드니 시민들이 사랑하는 놀이동산 루나 파크(Luna Park)가 등장한다.


9미터 높이의 거대한 사람의 입을 통과해 들어가야 하는 이 놀이동산은 1930년대에 세워져 오랫동안 시민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해왔다. 흥미로운 점은 입구의 얼굴이 낮에는 웃고 있는 것 같지만, 밤에는 기괴한 조명을 받아 공포 영화의 살인마처럼 변신한다는 사실. 그만큼 기괴한 유머 감각의 공간인 셈인데, 1979년에 '유령 열차 화재'로 여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시설 대부분이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알면 놀이기구가 좀 더 짜릿해질 것 같다.


루나 파크는 놀이기구를 이용하지 않으면 입장료는 무료다.

 

 

본다이 비치의 숨바꼭질

본다이 해변의 초창기 방문객들. 지금에 비하면 옷감의 사용량이 10배는 넘어 보인다.


 

시드니의 거주민과 방문자는 해양성 종족이다. 선원, 낚시꾼, 요트 여행객, 수영복 모델, 그리고 서퍼들은 곳곳에 널려 있는 항구와 모래사장을 즐겨 왔다. 그중에서도 가장 사랑받아온 해변은 본다이 비치(Bondi Beach). 보통의 해수욕장과는 다르게, 마치 공원을 찾아온 듯 느슨하면서도 활기찬 분위기가 적도 위쪽의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오랫동안 본다이에서는 조금이라도 적게 입으려는 시민들과 그걸 눈뜨고 못 봐주는 감시관 사이의 숨바꼭질이 이어졌다. 1950년대 비키니가 유행했을 때는 감시관들이 해변을 다니며 수영복의 길이를 재서 해변에서 쫓아내기도 했다고. 그러나 점점 규제에 대한 저항이 커지면서 1980년대 이후에는 토플리스 차림도 일반화되기에 이른다. 시드니 해변의 또 다른 즐거움은 다른 곳에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동물들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

 

서퍼들이 줄지어 뛰어노는 파도 너머로 돌고래와 고래가 노니는 걸 볼 수 있고, 아주 가끔이기는 하지만 남쪽에서 놀러 온 펭귄도 만날 수 다고 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영화 [죠스]의 한 장면을 만나기는 어려워 보인다. 물 아래로 튼튼한 상어 막이 그물이 가로막고 있다.

 

 

뮤리엘과 엘튼 존의 의심스러운 결혼식장

1988년 실직 상태의 영화감독 폴 제이 호건은 단골 카페에서 쓸쓸히 앉아 있었다. 연이은 실패로 절망감에 빠진 그는 길 건너 신부 의상실을 오고가는 여자들은 관찰하게 되었다. 그러고는 여자들이 가게 안으로 들어간 뒤 신부로 변신해서 나타나는 웨딩드레스의 마법에 감동하게 된다. 그러곤 생각한다. "누군가를 가짜 신부로 만들면 어떨까?" 그리하여 바닷가 마을에서 지루한 인생을 살아가던 평범녀 뮤리엘로 하여금 시드니로 와서 가짜 신부가 되게 만든다.

 
[뮤리엘의 웨딩]의 결혼식 장면이 펼쳐지는 곳은 달링 포인트의 세인트 막스 교회(St Marks Anglican Church). 그런데 뮤리엘 이전에 바로 이 교회에서 대단히 유명하면서도 의심스러운 결혼식이 벌어졌다. 팝 스타 엘튼 존은 1970년대에 자신이 양성애자라고 주장하고 다녔다. 적어도 여자도 좋아한다고. 그리고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1984년 발렌타인 데이에 이 교회에서 레나테 브라우엘과 결혼식을 올렸다. 올리비아 뉴튼 존 등 유명인사들이 이 결혼을 축하하러 왔는데, 결국 4년 여의 시간 뒤에 막을 내리고 말았다. 엘튼 존은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숨길 수 없었던 것이다.


바닷가 처녀 뮤리엘에게 시드니에서의 결혼식은 환상 그 자체.


 

 

빨간 약 먹을래, 파란 약 먹을래? - 마틴 플레이스

마틴 플레이스 1번지인 시드니 중앙 우체국. 현대식 비즈니스 건물 사이에서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더해준다.


 

아르데코와 현대적 건물이 조화를 이룬 시드니의 중앙 비즈니스 구역(central business district)은 영화와 드라마를 위한 이상적인 배경을 만들어준다. 마틴 플레이스는 국내 광고에도 즐겨 등장하는 명소이지만, 할리우드에서는 미래 영화의 배경으로 인기가 높다.


[매트릭스] 시리즈에서 네오가 빨간 옷을 입은 여자에게 혼란을 느끼는 장면에서 피트 스트리트의 분수가 등장하고, [매트릭스 레볼루션]에서 네오가 스미스 요원과 최종적인 결투를 벌이는 장면도 마틴 플레이스에서 촬영되었다. [슈퍼맨 리턴즈] 역시 대부분의 장면이 시드니 주변의 세트와 거리에서 촬영되었는데, 슈퍼맨의 도시 '메트로폴리스'가 바로 마틴 플레이스 주변의 비즈니스 거리인 셈이다. 슈퍼맨이 여주인공 키티를 자동차 사고로부터 구해내는 장면이 어디였을까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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