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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베트남

베트남 호치민 - 사랑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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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유물박물관 - 응웬 반봉의 [사이공의 흰 옷]이 아직도 나풀거리는 곳

[사이공의 흰옷]의 배경은 1960년대의 베트남. 당시 호치민 시의 이름은 ‘사이공‘이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홍은 성공해서 식구들을 부양하는 것을 꿈꾸며 시골에서 사이공으로 올라와 학교에 다니다가 현실의 고통에 눈뜨게 된다. 그녀는 결국 학생운동가로 거듭나 지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자신의 신념과 사랑을 지킨다.


이 책이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이유는 이 소설이 실제 주인공을 모델로 하고 있다는 것과 작가 자신이 소설 속 주인공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1921년에 태어난 작가 응웬 반봉은 꽝남다낭 항전문화단과 제5구 항전문화연단의 집행위원으로 1945년 8월 혁명에 참가하기도 하고 월북하여 토지개혁운동에도 참가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해왔다. 이 소설의 실제 모델은 응우웬 티 짜우. 그녀는 결국 해방 후 혁명동지였던 레 홍 뜨와 결혼했다. 소설 속의 애틋한 사랑이 실제로 이루어진 것이다. 응우웬 티 짜우가 갇혀 있던 쯔오하 감옥은 지금 역사박물관이 되어 있으며, 그녀가 고문당하던 당시의 참혹한 고문실은 전쟁유물박물관에 재현되어 있다.


“한 다발의 삐라와 신문 감추어진 가방을 메고/행운의 빛을 전하는 새처럼 잠든 사이공을 날아다닌다/ 복습은 끝나지도 않고 평안한 밤도 오지 않았다/ 내일도 수업시간엔 잠이 오겠지 그러나 간다 내일도 내일도// 죽음 너머 뇌옥의 깊은 암흑의 벽에 흰 옷의 시를 쓴다/ 방울방울 흐르는 선혈 속에 이 흰 옷 언제까지나”

[사이공의 흰옷]을 보고 베트남의 시인 레 아인 수앙이 쓴 시 [흰옷]은 한때 우리나라에서 민중가요로 불리며 사랑받았다. 금서목록에도 올랐던 [사이공의 흰옷]은 현재 [하얀 아오자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번역되어 나와 있다.

메콩강 -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들이 만난 곳

열다섯 살 반의 백인 소녀. 가난한 그녀는 어머니가 물려주신 낡은 원피스를 입고 남자용의 두툼한 펠트모자를 쓰고 사덱(sadec)에서 출발하여 메콩강을 흘러 사이공으로 가는 통근용 페리에 오른다. 1929년 프랑스령 베트남에서의 일이다. 그곳에서 그녀는 검정 리무진을 탄 한 중국남자를 만난다. 그녀를 기숙사까지 데려다 준 그 남자는 결국 그녀의 연인이 된다. 서른둘의 부자 중국인과 열다섯 살 반의 가난한 백인 소녀의 기묘한 연애 이야기, [연인, L'amant]. 1914년 베트남에서 태어나 베트남 곳곳을 떠돌며 살았던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Marguerite Duras)의 이 작품은 공쿠르상을 수상했으며, 이후 장 자끄 아노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기도 했다. 제인 마치와 양가위가 연기했던 이들 연인의 모습은 프랑스 문단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많은 이들에게 메콩강과 사이공의 매력을 알리는 역할을 맡았다. 현재 그들이 만났던 메콩강의 그 코스 위로 [라망, L'amant], 즉 [연인]이라는 이름의 크루즈가 운행하고 있다.


영화[연인]의 포스터.

타오 당 공원(Tao Dan Park) - 젊은 베트남 연인들의 현재를 볼 수 있는 곳

프랑스가 지배하던 시절의 흔적들은 호치민 내에 역력하게 남아있다. 그중에서도 크고 작은 규모의 공원들은 현재의 베트남인들의 삶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 사람들은 공원에 모여 배드민턴을 치고 소일하며 더운 땀을 나무그늘에서 식힌다. 한창 더운 날씨를 피해 움직이는 베트남 사람들은 이른 새벽의 공원을 유용하게 이용한다. 타오 당 공원은 그중에서도 연인들에게 사랑받는 곳이다. 조경이 잘되어 있어 데이트 코스로 각광받는다.

젊은 베트남 연인들의 공원인 타오 당 공원.


저녁에는 공연이 펼쳐지기도 하며, 설 즈음에는 봄꽃 페스티벌이 열리는 등 꽃구경도 볼만하다. [어메이징 레이스] 베트남 편에 배경으로 등장하여 호치민을 대표하는 공원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이곳의 데이트 풍속도는 여행자들에게는 낯선 것이다. 보통 서양의 젊은이들이 차에서 데이트를 하듯이 그들은 모터사이클 위에 앉아 데이트를 한다.

차 안과는 달리 공개된 자리인데도, 그들은 애정표현에 거리낌이 없다. 한 여행자는 그들에 대해 “마치 부모님이 없을 때 거실 소파에서 하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고 비유하기도 한다. 그들을 눈여겨보는 것은 여행자들뿐이다. 현지의 사람들은 그들의 그런 애정행각을 모른척하고 지나간다. 이러한 문화의 한편에는 애정표현에 거리낌 없는 프랑스 문화의 영향이 남아있다고 분석하는 의견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구 미국 대사관 - [미스 사이공]의 피와 눈물이 서려있는 곳

열일곱 살의 고아소녀 킴은 술집 ‘드림랜드’의 ‘아가씨’다. 그녀는 전쟁의 의미를 찾지 못해 방황하던 미군 크리스를 만나 전쟁 중의 절박한 사랑을 꽃피운다. 그러나 사이공이 함락되던 날, 미군이 급박하게 철수하는 바람에 둘은 헤어지고 만다. 킴의 손에는 그가 남기고 간 권총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 슬픈 이야기는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을 각색한 것이기는 하지만, 실제의 모델이 있다. 1985년 한 잡지에 공항에서 이별하는 베트남 여인과 혼혈 소녀를 찍은 한 장의 사진이 실린다. 미군 파일럿과 사랑에 빠졌던 이 베트남 여인은 그와의 사이에 딸이 하나 있었지만 전쟁의 혼란 틈에 헤어지고 만다. 갖은 노력 끝에 다시 만나게 되지만, 이미 남자는 결혼한 몸. 결국 아이의 비자만이 허가가 났고, 공항에서 엄마와 딸은 가슴 찢어지는 이별을 해야만 했다. 작곡가 끌로드 미쉘 쉔베르와 작사가 알랑 부브릴은 이 사진을 보고 감동하여 [나비부인]에 이 사연을 담았다. 그것이 [미스 사이공]이었던 것.

뮤지컬 [미스 사이공]의 헬리콥터 탈출 장면은 유명하다. “실제 헬기가 나온다”는 소문이 돌 만큼 실감 나게 재현된 무대는 ‘잦은 바람(frequent wind)‘이라는 작전명으로 수행된 실제의 대규모 철수작전의 아수라장을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보여준다. 1975년 4월 30일 새벽 4시경 이루어진 이 철수작전은 미국에 협조했던 베트남 사람들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들은 어떻게든 헬기에 오르려했으나 저지당했고,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인 베트남인들의 필사적인 노력에 미군은 M16과 폭력과 최루탄으로 화답했다. 헬기들은 근처의 바다에 떠 있는 항공모함으로 사람들을 실어나른 뒤, 전부 바다에 수장되었다.


당시 헬기가 뜨던 미국대사관은 폭파되어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1999년 미국 영사관이 들어섰다. 현재 실내에 일반인은 들어갈 수 없다. 당시의 헬리콥터 모형은 통일궁에서 볼 수 있다.


미군이 전쟁에서 진 뒤 베트남에서 탈출한 사람들은 세계 곳곳에
'리틀 사이공'을 만들었다.

노트르담 성당(Notre Dame Cathedral) - 웨딩 사진 장소로 사랑받는 곳

노트르담 성당은 그 아름다움으로 유명하다.


호치민에서 가장 큰 성당인 노트르담 성당이 지어지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 식민 지배하였다. 1877년부터 1883년까지 지어진 이 성당은 외부는 전형적인 네오-로마네스크 양식을, 내부는 고딕양식을 보여준다. 호치민 시의 프랑스 건물 중 가장 아름다운 건물로 손꼽히는 이 성당이 이국적인 모습인 것은 물론 건축양식 때문이지만, 지을 당시 모든 자재를 프랑스에서 들여왔던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붉은 벽돌로 정교하게 쌓아올린 이 성당의 정면에는 성모마리아 상이 자리 잡고 있다. 두 개의 첨탑은 높이가 40M이다. 최근 몇 차례 눈물을 흘린 것으로 유명한 이 성모마리아상에는 “REGINA PACIS ORA PRO NOBIS”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이 문장은 “평화의 모후여, 우리를 위하여 비소서”라는 의미이다. 수많은 관광객과 신도들이 이 성당 앞에서 사진찍기를 좋아하지만, 그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것은 결혼을 갓 마친 커플들이다. 이곳은 결혼사진을 찍는 장소로 사랑받고 있다.

구 주월한국군사령부 - [님은 먼곳에]를 써니가 노래한 곳

순이의 남편 상길은 군대에 있다. 둘 사이의 거리는 단지 물리적인 거리만은 아니다. 애인이 따로 있는 상길은 순이를 데면데면하게 대하고, 결국 그녀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베트남전에 자원해 떠나버린다. 떠밀리듯 사랑하지도 않는 남편을 찾아 베트남으로 떠나기로 결심한 순이는 무작정 위문공연단의 보컬로 합류하여 ‘써니’라는 새 이름을 가지고 사이공으로 향한다. 수많은 난관을 거쳐 남편을 찾아가는 순이. 그 과정에서 순이는 철없는 시골처녀의 껍질을 벗고 성장하게 된다. [님은 먼곳에]라는 영화의 제목은 주인공 순이가 ‘써니’의 이름으로 부른 노래 제목이기도 하다.


영화는 1970년대의 베트남 느낌을 살리기 위해 태국에서 촬영되었다. 70년대의 사이공, 미군들과 전쟁통에 주인 없이 흘러다니는 돈을 벌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당시의 대표적인 환락가를 재현하기 위해 선택된 곳은 태국의 한 마을 ‘타무앙’이다. 이곳에 약 6만 평방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오픈세트를 만들고, 온갖 조명과 간판으로 현란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월남전 당시 베트남을 방문했던 위문공연단이 주로 공연을 했던 곳은 주월한국군사령부였다. 사이공 중심가에서 차이나타운방향으로 가는 길에 자리잡고 있는 이곳에서 위문공연단은 때로는 위험에 노출되면서, 때로는 젊다못해 풋풋한 병사들의 열광에 감동하면서 공연을 했다. 현미, 김세레나, 패티김 등 당대 최고의 가수들의 경험담들이 영화 속 순이의 공연 속에 녹아있다.


영화 [님은 먼곳에]의 주인공 써니.

[호치민 뮤지엄] - 호아저씨에 대한 베트남인들의 사랑이 서린 곳

베트남이 사랑한 혁명가 호치민.


한 도시의 이름을 그에게 바치는 것만큼 큰 사랑의 표현이 있을까. ‘사이공’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던 이 아름다운 도시는 혁명가 호치민에게 헌정되었다. ‘호 아저씨’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호치민의 본명은 응우엔 탓 단. 호치민은 ‘성공할 사람’이라는 의미의 이 이름을 버리고 1942년부터 호치민, 즉 ‘깨우치는 자’라는 이름을 썼다. 현재 호치민 뮤지엄 앞길의 이름이 바로 ‘응우엔 탓 단 거리'이다.


1975년 베트남이 통일되자 베트남 통일정부는 호치민의 이름을 따서 이 도시의 이름을 ‘호치민’으로 명명했다. 호치민시 곳곳에서 동상과 기념관 등 호치민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호치민 박물관이 자리 잡은 곳은 의미가 깊다. 1911년, 당시 21세이던 호치민은 호치민 박물관 옆의 사이공 강 부두에서 프랑스 화물선 ‘아미랄 라투셰-트레빌 호’의 주방보조로 취직해 프랑스 마르세유로 떠났다. 이후 무려 30년간 타국을 돌며 혁명을 도모해, 명실상부한 통일 베트남을 이룩했던 것이다.


이곳에는 호치민이 살아있을 적 사용하던 안경, 지팡이, 타자기 등의 유물이 2,000여 점 가량 전시되어 있어, 살아있을 당시의 이 혁명가의 체취를 가까이서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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