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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중국

중국 허난성 : 척박한 도시에서… 청동기 문명을 마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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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허·카이펑

[중국 문화의 시원을 찾아서] (上) 은허·카이펑
황허를 100m 위에서 내려다보는 염제와 황제 얼굴 석상. 일부 관광객은 이 전설 속 제왕들의 인공 조형물 앞에도 향을 피우고 절했다. 시원(始原)에 대한 동경은 인간의 변함 없는 본성이다. / 신동흔 기자
중국 허난(河南)성 주요 도시의 거리와 건물은 흙먼지를 뒤집어쓴 듯 누리끼리한 회색이었다. 한때 중원(中原)으로 불렸던 이 지역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황허(黃河)가 스물일곱 번 크게 범람하며 춘추 전국 시대 이래 수많은 제후가 세운 국가와 도시를 집어삼켰다. 황허가 쓰촨, 네이멍구, 산시 등을 거치며 실어 온 고원지대의 흙을 토해 낼 때마다 황궁과 집터, 사람들이 사라졌다. 매년 관광객 수백만 명이 찾는 옛 도읍이자 TV 드라마 '판관 포청천'의 무대인 송나라 수도 카이펑(開封)의 황궁 역시 1990년 복원된 건물이었다. 가이드 왕단단(王丹丹)씨는 "실제 황궁은 8~10m 아래 땅속에 묻혀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아래엔 그보다 더 전에 살았던 사람과 왕조의 흔적이 묻혀 있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그 위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중국 문화가 시작된 곳을 찾아 허난성 일대를 찾은 지난달 말, 폭설(暴雪)이 녹아 만들어진 흙탕물이 차가운 바람에 설 얼면서 온 도시가 질척거렸다. 이 척박한 땅에 꽃피운 청동기 문명, 갑골문이 발견된 은허(殷墟)를 찾아 북쪽으로 내달렸다. 쌓인 눈이 곳곳에 얼어붙은 데다, 짙은 안개까지 낀 날이었다. 중국 당국은 16인승 이상 차량의 고속도로 진입을 금했지만, 7인승 밴을 모는 허난성 토박이 기사는 무림 고수처럼 눈 뭉치를 피해가며 안개 속을 시속 130㎞로 질주했다.

3300여 년 전 기원전 1300~1046년 상(商)나라 후기의 수도였던 은허는 허난성의 현재 성도(省都)인 정저우(鄭州)에서 북쪽으로 197㎞ 떨어진 안양(安陽)에 있다. 면적은 축구장 4000~5000개는 족히 들어갈 36㎢. 이곳에서 1899년 갑골문이 발견되면서, 중국의 역사 시대는 청동기 사회까지 훌쩍 뛰어오른다. 갑골문은 거북이의 배딱지(등딱지 유적은 드묾)나 소뼈에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거나, 제사를 지내거나, 길흉화복을 점친 결과를 기록한 문자가 지금의 간체자 한자까지 이어졌다. 황허에 살던 거북이는 아마 그때 멸종 위기를 겪었을지도 모른다.

[중국 문화의 시원을 찾아서] (上) 은허·카이펑
윗쪽 사진은 은허에서 갑골문이 무더기로 발견됐던 당시를 재현한 전시물(문자박물관). 아랫쪽 사진은 적장의 머리가 담긴 그대로 발견된 제사용 그릇(은허박물관). / 신동흔 기자

박물관에 전시된 'T'자 모양 하수도관은 이 청동기 문명인들의 생활수준을 보여준다. 여자들은 동물 뼈로 만든 비녀를 머리에 꽂았고, 표면을 울퉁불퉁하게 만든 납작한 토기를 손에 들고 몸의 때를 밀었다. 가이드 류싼(劉散)씨는 "당시 이곳은 지금의 윈난성과 비슷한 온화한 기후였다"고 했다. 황허도 그때는 맑았을지 모르겠다.

21세기 우리가 쓰는 것과 별다를 바 없는 유물을 보다가 이들이 전쟁에 이기면 적의 머리를 잘라 '정(鼎)'이란 화로에 넣고 제사를 지냈던 고대인이란 사실을 깜빡 잊을 뻔했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정으로 상나라의 한 임금이 어머니 제사를 지낼 때 썼다는 무게 883㎏의 '사모무방정(司母戊方鼎)'이 이곳에서 출토됐다. 박물관에는 적장의 머리가 담긴 채 발견된 정, 청동 화살촉이 선명하게 꽂혀 있는 병사의 해골, 귀족의 무덤을 지키려 창과 방패를 들고 순장된 병사의 전신 유골 등 그 시대 삶의 흔적을 간직한 죽음들로 가득했다. 36세에 생을 마감한 여장군이자 왕비였던 푸하오(婦好)의 묘는 갑골문으로 주인이 확인됐다. 거울과 술잔, 칼에는 그녀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망자의 유골은 없고, 몸을 치장했던 염료가 스며 붉어진 흙만 남아 있었다. 그녀가 이름을 남긴 것은 전적으로 문자 덕분이었다.

기록이 없다고 덜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은허를 떠나 정저우로 들어오는 길 황허 변에는 106m 높이의 큰 바위 얼굴이 보인다. 염제(炎帝)·황제(黃帝)의 조각상이다. 바위산 아래 광장에는 대형 정 수십 개가 놓여 아예 제단을 만들어 놓았다. 그 옆에는 황제를 알현하는 모습의 신하상 수십 개가 도열했다. 일찍이 태평성대를 열었다고 하는 전설 속 황제들. 사마천은 전설이라고 하여 이들을 '사기(史記)'에서 다루지 않았다고 한다. 염제는 불을 잘 다스렸고, 황제는 농사를 가르쳤다. 중국인들은 지금도 스스로를 염황(炎黃)의 자손이라 여긴다. 이곳을 자주 찾는다는 한 관광객은 "올 때마다 염제·황제에게 인사하는 신하들의 조각상이 늘어나는 것 같다"고 했다. 인근 덩펑(登封)의 도교 사당 중악묘, 소림사 뒤편 쑹산(嵩山)의 삼황채에도 이들을 모신 사당이 번성하다. 이곳은 중국이 시작된 곳, 허난이다. 

[중국 문화의 시원을 찾아서] (上) 은허·카이펑

여행정보 

인천공항에서는 월~토요일에 정저우로 가는 직항 편이 있다. 대한항공과 남방항공 항공기가 번갈아가며 두 도시를 오간다. 대한항공은 주로 오전에 떠나 오후에 귀항객을 태우고 돌아온다.

허난(河南)에선 회면을 꼭 맛볼 것을 권한다. 이곳 사람들은 쌀밥을 먹으면 배가 쉬 꺼진다며 굳이 면 요리를 먹는다. 동행했던 한족 운전기사 역시 쌀밥은 꺼렸다. 그중에서도 가장 즐겨 먹는 것이 회면. 다양한 고기와 야채를 함께 끓인 국물이 일품인 면 요리다. 원래는 회족(중국인들이 이슬람 신자를 일컫는 말) 음식이다. 당 태종이 황제에 오르기 전 피란길에 인근 회족 농가에 머물렀는데, 당시 농가에서 기르던 귀한 사슴을 푹 고아 만든 면 요리를 맛봤다. 왕위에 오른 뒤 이 음식의 맛을 잊지 못해 조리법을 알아내 즐겨 먹었다고 한다. 처음엔 궁중 음식이다가 이후 민간으로 퍼져 나갔다. 요즘은 시내에서 회면 전문 대형 프랜차이즈를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대중적이다. 허난성 관광국 홈페이지(henan.co.kr)에서도 다양한 음식·여행·교통 정보를 한국어로 볼 수 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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