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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일본

일본 도쿄 메지로 : 낡은 고요함만이 그득했다 오백살도 더 먹은 골목길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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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메지로'

[노은주·임형남의 골목 발견] 도쿄 '메지로'
메지로 골목 안 가게의 단정한 외벽 모습.
나는 우리와 너무나도 비슷하며 너무나도 다른 일본에 비교적 자주 간다. 일 때문에 갈 때도 물론 있지만, 주로 계획을 세우지 않고 대충 묵을 곳을 한 곳 정하고 그냥 그 동네를 며칠 배회하는 게 여행의 목적이다. 여행이라기보다는 '목적 없는 임시 체류'라 하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관광객이 뜸한 그런 골목을 다니는 가장 큰 이점은 무엇보다도 속도를 내지 않고 천천히 다니게 된다는 것, 그리고 동네 사람들이 약간 당황해 하면서도 대부분 친절하게 대해주어 편안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어떤 여행 안내서에도 없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직접 캐내는 즐거움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기도 하다.

일본에 가본 사람이라면, 번화가부터 동네 골목길까지 예외 없이 구석구석 먼지 한 점 없이 깨끗한 모습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오래전 처음으로 도쿄에 갔을 때, 호텔에 짐을 풀고 근처 동네를 보러 나갔다가 그 연유를 알게 되었다. 열 시가 넘은 늦은 밤이었고, 호텔 주변 동네는 평범한 일본 서민들이 사는 동네였다. 어두운 골목에 사람들이 별로 없었고, 서울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풍경이었다.

그런데 어느 집 앞을 지날 때, 그 집 주부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앞치마를 곱게 두르고 빗자루와 쓰레받기로 대문 앞을 정성스레 쓰는 모습과 마주쳤다. 청소하는 것이 뭐 그리 놀랄 일은 아니고 무슨 사정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 늦은 시간에도 나와서 마치 안방을 청소하듯 꼼꼼하게 집 앞을 청소하는 모습은 무척 생소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은 일요일 아침이었다. 아침 일찍 다시 동네를 산보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어떤 집 앞에 모여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궁금해 다가가서 보니 그 집 2층에서 어떤 사람이 뛰어내리겠다고 소리치고 있었고, 밑에서 사람들이 달래는 상황이었다. 결벽증을 가진 사람의 책상처럼 깔끔하게 정돈된 주택가 골목과, 2층 베란다에서 소리 지르는 사람 사이의 아주 묘한 대조가 인상적이었다.

마치 화창한 날 피어난 벚꽃의 화려함과 일본 열도에 그득한 습기를 동시에 만나는 듯, 두 개의 모순된 사실이 같은 프레임 안에 공존하는 느낌, 그것이 일본을 궁금하게 하고 찾아가게 만드는 것 같다.

여행을 통해 나는 도쿄에 검은 눈과 흰 눈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실제 사람이나 동물의 눈이 아니라 동네 이름인데, 하나는 메구로(目黑)이고 하나는 메지로(目白)라는 동네다. 몇 년 전 신주쿠나 하라주쿠 같은 번화가에 무척 가까우면서 조용한 주택가를 끼고 있는 메구로에 마침 적당한 호텔이 있어서 묵다가, 문득 "왜 동네 이름을 '검은 눈'이라는 의미로 지었을까?" 하는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누구의 눈이 검다는 이야기일까. 그런 궁금증은 거기서 전철로 몇 정거장 떨어진 곳에는 메지로, 즉 '흰 눈'이라는 동네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며 더욱 증폭됐다. 왠지 시적이기도 하고 많은 상징을 포함하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메지로 골목 안 오래된 집 스케치.
메지로 골목 안 오래된 집 스케치.
그래서 전철을 타고 무작정 메지로역으로 향했다. 역에서 내려 잠시 둘러보니, 아주 한적하고 평범하기 그지없는 동네였다. 황족이 주로 다녔다는 학습원 대학이 있는 것이 조금 특별하다면 특별할까, 폭이 좁은 도로로 작은 차들이 천천히 지나다니고 있었고, 길가에는 여느 주택가와 마찬가지로 문방구, 옷 가게, 신발 가게, 반찬 가게, 도시락 가게 등이 늘어서 있었다. 오랜 시간이 반질반질하게 코팅된 채 침착하게 가라앉은 색을 몸에 두르고 앉아 있는 그 가게들 사이를 지나,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 봤다.

그리고 마치 땅을 썰어놓았을 때 그 단면이 보이는 것처럼, 무척 오래된 집들과 많은 시간이 있었다. 동네가 존속했던 세월만큼이나 다양한 시대의 건물들이 모여 있었는데, 약간의 파열음도 없이 사이좋게 골목을 채우고 있었다. 비싼 재료를 썼다든가. 최신 유행에 따르는 형태의 건물들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성실한 가장과 부지런한 주부가 시간을 들여 잘 정리해놓은, 낡았지만 편안하고 깔끔한 집에 갔을 때와 같은 느낌을 받았다. 대체 생활의 어수선함을 모두 어디에 감춰놓은 것일까. 일본의 골목을 걸을 때마다 그 점이 너무 신기했다.

조금 더 들어갔더니 점점 집들이 커지더니 푯말이 하나 눈에 띄었다. '도쿠가와 빌리지.' 도쿠가와, 무척 익숙한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집의 문패를 보니 한문으로 '덕천(德川)'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럼 우리가 아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1543~1616)와 정말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알아보니 역시나 그 동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좁고 긴 형태와 아담한 크기의 일반적인 일본식 주택들과 달리, 마치 무사의 갑옷처럼 어깨가 넓은 그 동네의 집들은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크고 깊은 눈으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은 눈, 흰 눈…. 그 동네들 이름의 근원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천하를 통일하고 에도막부를 세우면서 시작된다. 그때 도쿠가와의 핵심 측근인 덴카이(天海·1536~1643) 선사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막부의 안녕과 국가 태평을 위해 도쿄에 5개의 절(흑·백·적·청·황)을 지었는데, 다섯 군데 중 지금은 흑과 백만 남게 된 것이다.

소설가 김영하는 도쿄 번화가를 '볼륨을 줄인 대형 텔레비전' 같다고 했다. 사람이 많고 도시는 크고 넓고 또한 복잡하다. 그러나 그 안은 고요하다. 일본에 가면 문득 그 고요함이 익숙하지 않으며 때론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화창한 일요일 오후 하라주쿠 큰 길가 인도를 걸어보면 알게 된다. 대표적인 번화가인 그곳은 일요일을 즐기기 위해 나온 사람들로 그득하지만, 꽤 긴 거리를 걷는 동안 내 가방을 치는 사람도 없고 내 어깨에 부딪히는 다른 어깨도 없다. 마치 극성이 같은 자석처럼 사람들 사이에는 언제나 적당한 거리가 유지된다.

번화가가 소리를 줄인 대형 텔레비전 같다면 일본의 골목은 그 반대다. 나는 영상은 사라지고 소리만 남은 메지로 골목에서 오백 년도 훨씬 더 된 옛날이야기를 오랫동안 듣고 있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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