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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필리핀

필리핀 바타네스 : 神의 섬에서 소년들의 바다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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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의 섬에서 소년들의 바다를 만나다

이응준 소설가
이응준 소설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어려서부터 자연이 어색하고 불편했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풍광과 경치 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받는다고들 하는데, 나는 산속과 바다 곁에서 마치 감옥 독방에 갇혀 있는 듯한 갑갑함과 고독에 힘겨워하곤 하였다. 나름대로 나는 전 세계를 꽤 누비고 다닌 만만찮은 여행자이건만, 이번에 새삼 곰곰 따져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간 내가 돌아다닌 곳이란 어느 나라의 어디든 거의 예외 없이 도시이거나 도시 부근이었음을 깨닫고는 남몰래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 씁쓸함은 나라는 괴짜에 대한 자괴이기도 하려니와, 한편으로는 도시의 빌딩 숲과 그 뒷골목에서 인간이라는 가장 복잡 미묘하고도 괴로운 자연을 여행하고 있는 모더니스트의 어두운 자부심이 아니었을까.

필리핀의 보석 같은 오지 바타네스(Batanes)는 내가 원시 대자연을 일부러, 전격적으로 대면한 첫 경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인천국제공항에서 저녁 8시경 출발한 나는 네 시간 반쯤 만에 마닐라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열대의 밤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고, 범죄 기운이 흐르는 도시는 매혹적이었다. 나는 호텔에서 새벽까지 쉬다가 마닐라 국내 항공선 터미널에서 경비행기로 옮겨 타고는 한 시간 반 정도를 더 날아간 아침에 바타네스 바스코 공항에 안착했다. 화산 폭발로 생긴 절벽 밑 바다를 향해 내려가는 계단이 155개 있는 차와 전망대에서는 바타네스의 서해안이 한꺼번에 환히 육박해 들어오는데, 수평선 위 휴화산에 아이스크림처럼 얹혀 있는 구름이 자아내는 아름다운 광경은 가히 초현실적이다.

필리핀 바타네스
원시의 화산섬에 낮게 걸린 구름들 사이로 신이 내려와 쉬고 있는 바닷가. 이러한 세계를 본다는 것은 이러한 세계를 영원히 잊을 수 없다는 뜻이다. /바타네스(필리핀)=이응준
바타네스의 자연경관은 굳이 이것저것 가릴 것이 없다. 어디서건 무엇으로건 그저 고개만 돌리면, 왜 필리핀 사람들조차 이곳을 천국의 섬이라 부르며 죽기 전에 한 번은 꼭 와 보고 싶어 하는지 금방 수긍할 수 있다. 바타네스는 가령 괌이나 태국처럼 관광지라는 인상을 주지 않는다. 사람들은 아무런 의도 없이 본모습 그대로 순수하고 친절하며 자연은 국가에도 이방인에게도 훼손되지 않은 채 태초의 빛을 형형히 간직하고 있는데, 산 카를로스 보로메오 성당을 비롯한 유서 깊고 그림 같은 천주교 유산이 그러한 경이에 경건함을 보탠다.

타이드 등대
타이드 등대 /필리핀 관광청 제공
마하타오 등대, 타이드 등대와 더불어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스코 등대는 나이디 언덕 위에 서 있어서, 나는 한밤 내내 그 아래서 술을 마시며 우주의 별자리가 내게로 마구 끝없이 무너져 내리는 착각에 이가 시렸다. 나는 화창한 날 바타네스의 한 평범한 해변에 홀로 나가 수영을 하였다. 사람이라고는 나밖에는 안 보이는 바다에 둥둥 떠서 천국의 거울 같은 하늘을 마주하는 것은 마치 신의 얼굴을 매만지는 기분이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차바얀 마을에서는 이바탄 원주민들의 문화를 고스란히 체험했다. 그것은 쇼가 아니라 진정한 날것의 전통이자 현재의 애틋한 생활이었다. 바타네스의 은은한 반전은, 아담한 호텔들과 정겨운 마을이 매우 깨끗하게 정돈돼 있어서 오히려 필리핀 본토보다 훨씬 집중력 있는 행정으로 관리되고 있다는 안정감과 평화로움일 것이다. 나는 갑자기 찾아든 태풍 때문에 예정보다 두 배나 되는 날들을 바타네스 안에 꼼짝없이 갇혀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어느 날은 우연히 만난 어부의 아이들과 웃옷을 벗고 열대우를 송두리째 맞으면서 한참 농구를 했다.

이윽고 아이들은 물방울 꽃이 파도 치는 바다를 천진한 웃음이 묻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리로 함께 뛰어들어 가 놀자고 너무도 태연하게 말했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녀석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젖은 운동화를 든 채 맨발로 걸어 숙소로 돌아가고는 있었지만, 바로 그 순간부터 그 소년들의 이야기가 내 남은 생의 화두가 되리란 걸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우리가 아름다운 풍경만을 보고자 원한다면, 차라리 그보다 더 아름다운 꿈을 꾸는 것이 한결 나으리라. 그러나 그토록 아름다운 꿈같은 풍경 속에서 감각의 촛불을 두 손 모아 들고 어두운 우리 자신의 영혼 속으로 떠날 수 있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여행이라면, 나는 바타네스에서 바로 그러한 여행을 하였다. 서울로 되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이제 더 이상은 자연을 버거워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천성 같은 상처와 한계는 때로 뜻하지 않은 사랑으로 치유되고 극복된다.

필리핀의 아름다운 섬 바타네스(Batanes)는 루손 해협과 대만 사이에 있는 섬 열개로 이루어진 작은 제도이다. 마닐라에서 약 860㎞ 떨어져 있으며, 바타네스의 수도인 바스코는 대만과의 거리가 불과 190㎞라서 맑은 날에는 대만이 육안으로도 보인다고 한다. 전체의 절반 이상이 언덕과 산으로 이루어진 바타네스는 바탄(35㎢), 잇바얏트(95㎢), 삽탕(41㎢), 이 세 섬 외에는 전부 무인도이다. 인천국제공항에서 출발해 4시간 30분쯤 뒤 마닐라 국제공항에서 내려 다시 PAL 항공이나 스카이제트 항공 등의 국내선을 이용해 바타네스 바스코 공항으로 이동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코스다. 76석 비행기에서 스튜어디스 단 한 명과 함께 약 1시간 45분 정도 여행하는 경험도 나름대로 특이한 재미다. 항공권은 13000페소(한화 약 30만원)부터 16000 페소(한화 약 37만원) 수준. 바타네스는 연중 좋은 날씨를 자랑하며 필리핀의 다른 지역들과 비교한다면 사계절이 제법 뚜렷한 편이다. 가장 더울 5월부터 9월 사이도 최고기온이 31도 정도밖에는 안 되고 평균기온이 26도에서 28도 사이로 온화하다. 3, 4월의 기온이 가장 쾌적하고 강수량도 가장 적기 때문에 이왕이면 이 시기에 방문할 것을 권장한다. 바타네스의 원주민들은 ‘이바탄’이라고 불린다. 이들은 수렵과 어획, 원예와 근채작물(감자, 무 등)을 기르며 작은 부족 사회를 이루고 살아왔다. 바타네스의 집들은 대개 석회암으로 지어져 지붕은 이엉으로 엮었는데 마치 그림엽서와도 같은 이미지를 자아낸다. 바타네스 주민의 93.94%는 이바탄어를 사용한다. 그런데 막상 돌아다녀 보면 정말 신기하게도 아주 작은 아이들까지 간단한 영어를 구사할 줄 알아서 의사소통에 큰 불편을 느낄 수 없다. 필리핀 관광청 한국사무소(www.7101.co.kr 문의 (02)318-0810)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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