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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네팔

네팔 : 네팔 소년 로빈과의 일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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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 싶었지만 쓸데없는 연민 따위를 일으킬 생각은 없었다. 13세 소년이 20kg의 봇짐을 지고 해발 3000 미터 가까운 곳까지 올라가는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갈까 고민할 것도 없다. 생사가 달린 일이 아닌 이상 나는 삶의 모습, 자연의 얼굴 그대로를 담아내야 하는 다큐PD가 아닌가. 하지만 촬영 내내 짠한 마음을 떨칠 수는 없었다. 간혹 시야에 들어오는 성모마리아 같은 안나푸르나의 자태마저도 소년 포터 로빈 앞에서는 사치스러운 풍경일 뿐이었다.

13세 소년, 삶의 목표를 벌써 세워버리다

로빈, 몇 살이지?

“열 세살이야.”

학교에 갈 시간에 어딜 가는 거니?

“나는 소년 포터야. 이제 안나푸르나에 등짐을 지고 올라갈거야.”

등짐을 언제부터 지고 다녔지?

“한, 이 년 되었어.”

아무나 질 수 있는 일이니? 넌 아직 어리잖아.

“우리는 더 어렸을 때도 땔감을 주우러 등짐을 지었어. 우리 대장님이 나를 잘 봤기 대문에 내가 포터로 뽑힌 거야.”

왜 포터로 일하고 있지?

“아저씨 우리집 봤지?”

아까 봤어.

“우리집은 물레방앗간이야. 사람이 사는 집이 아니라고. 아버지가 돈이 없어서 마을 사람들이 그곳에 살도록 해 주었지. 그런데 바로 뒤가 산이고, 물길이고, 나무는 없어. 마을 사람들이 수군거려. 저러다 산사태라도 나면 다 죽는다고 말야. 나는 돈을 벌어서 번듯한 집을 지어 가족이 행복하게 살도록 할거야. 내 꿈은 그것이고, 그 돈을 모으기 위해 포터 일을 하는 거야.”

아버지도 있잖아. 형도 있고.

형과 함께한 로빈(오른쪽)

“아버지의 꿈은 포터가 아니야. 아버지 직업은 농사꾼이야. 농한기 때는 날품을 팔아서 돈을 벌지. 내가 포터를 해서 받는 돈의 90%는 아버지에게 드려. 우리 가족은 그 돈과 아버지, 엄마, 형이 버는 돈들을 모아서 집을 지을 거야. 형은 말을 잘 못해. 하지만 살아가는데 아무 문제가 없어. 형도 포터로 일하고 싶지만 어눌하다는 이유로 기회를 잡지 못했어. 그래서 개천의 모래를 큰 길까지 옮기는 일을 해서 돈을 벌고 있지. 한 포대 무게가 60kg이야. 그것도 젖은 모래라고. 엄마는 전통주를 만들어 파는데, 별로 돈이 되는 일은 아닌 것 같지만, 노느니 뭐하냐며 그 일을 계속 하고 계셔.”

왜 90%만 드리는 거지?

“학용품도 사야 하고, 포터 일을 마치고 하산 할 때의 경비라고 할 수 있지. 등산길에는 포터 대장이 먹여주고 재워주기만 하산길은 혼자 내려와야 하거든. 그때 자고 먹고… 아무튼 내가 혼자 쓸 일이 있는 거야.”

학교는 전혀 안 다니는 거야?

“학교를 왜 안 다녀? 포터 일정 끝나면 학교에 가. 형도 모래 운반 작업이 끝나면 학교에 가. 돈벌이 때문에 결석하는 걸 학교에서 뭐라고 하진 않아. 돈벌이 하고 나서 일주일만에 학교에 가도 선생님은 날 보고 밝게 웃어주시지. 나는 등산객이나 트레커들과 대화를 나누는 기회가 있어서 영어를 잘 하는 편이야. 그래서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좋아. 헤헤헤.”

학교 졸업하면 뭐 할거니.

“나는 아직 힘도 없고 어려서 등짐을 20kg 밖에 매지 못해. 어른이 되면 30kg까지 멜 수 있고, 포터 일도 더 많이 할 수 있어. 유능한 포터가 되고, 포터 대장(사다)이 되는 게 꿈이야. 그러면 돈도 많이 벌고 하고싶은 것도 맘대로 할 수 있어.”

안나푸르나 트레킹

호주에서 자매가 왔다. 일주일 동안 안나푸르나를 트레킹하는 게 여행의 목적이란다. 그녀들의 트레킹에는 포터들과 가이드가 동행한다. 목적지는 좀솜. 해발 2713m다. 로빈이 사는 담푸스의 해발이 1650m이니 로빈이 등짐을 지고 올라가야 할 높이는 약 1000m다. 20kg의 등짐을 지고 끈을 이마에 붙이고 흙길을 걷는다. 내가 그렇듯이 호주에서 온 자매도 로빈의 모습에 마음이 착잡해진 눈치다. 그러나 대장 포터가 네팔의 형편과 문화와 로빈의 꿈을 이야기하며 쓸데없는 연민으로 팁을 내 놓는 순간 아이의 장래를 망친다는 말을 하자 생각이 정돈되고 일말의 안심이 되는 얼굴로 바뀌었다. 그러나 로빈의 티없이 맑은 표정을 보면, 녀석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그런 소리 듣지 않아도 로빈이 소년 로빈이 아닌 부처로 보이게 되어 있다.

로빈은 출발과 동시에 하악하악 숨을 몰아 쉰다. 뜻이 좋다고 갑자기 기운이 펄펄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까마득한 계곡 위의 좁은 길을 걷고 있을 때 나귀 행렬을 만났다. 포터들은 일제히 산쪽에 바짝 붙어서서 지나는 나귀와 몰이꾼을 바라본다. 낭떠러지 방향에 서 있다가는 나귀의 등짐이나 궁뎅이에 밀려서 황천길로 가는 수가 있다. 때로는 외나무다리를 건너기도 한다. 보기엔 아무렇지 않지만 막상 다리 위를 걸으려면 정신이 아찔해지는 흔들 다리들이다. 로빈이 하루에 걸어야 할 거리는 8km이다. 저녁 무렵 일행은 롯지에 도착했다. 손님의 짐을 착착 내려놓는다. 어른들이 불을 지피고 코펠을 꺼내 식사를 준비한다. 메뉴는 매일 똑같다. 달밧. 달을 걸쭉하게 조려 만든 수프와 염소 고기, 닭고기를 넣은 카레, 야채절임 등을 밥과 함께 접시에 담아 오른손으로 먹는 음식이다. 로빈은 포터를 하면서 맛들인 달밧 때문에 집 음식이 점점 맛이 없어져서 고민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일주일을 걷고 또 걷다 보니 어느덧 좀솜에 도착했다. 마지막날 저녁 시간을 포터들과 호주 자매가 저녁도 같이 먹고 네팔 전통 악기 연주에 맞춰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며 논다. 자매가 가져온 디지털카메라로 기념사진도 찍고… 로빈도 멋들어진 노래 한 곡조를 뽑으며 그간의 고단함을 달래준다.

아침이 밝자 호주 자매는 비행기를 타고 내려가고 포터들은 품삯을 받은 뒤 각자 자기 집을 향해 하산한다. 로빈은 내려가는 길에 사과 몇 개를 샀다. 고산지대 사과는 평지에서 비싸게 팔 수 있는 특산물이다. 한 푼이라도 더 벌겠다는 13세 소년의 생각을… 그냥 기특하게만 여기기로 했다. 그러나 녀석은 사과를 비싸게 팔지 못했다. 하산길에 사과 일부가 썩어서 손해를 보며 팔아야 했다. 로빈이 신발가게로 들어갔다. 헤진 신발을 끌고 산길을 다녀왔더니 이제는 수선도 하지 못할 정도로 너덜너덜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신발 값이 생각 보다 비쌌다. 그냥 당분간 슬리퍼 신고 다니기로 한다. 네팔의 2대 도시이자 안나푸르나의 거점 도시인 포카라에서 주머니 속의 돈을 만지작만지작하던 로빈이 한 숨 한 번 쉬고 집으로 향한다.

집에 도착하자 부모님과 형이 반겨준다. 녀석은 엄마한테 큰 절을 하고, 또 아버지에게도 큰 절을 한다. 우리 어렸을 때도 저랬었는데… 인사를 받는 엄마의 눈이 이내 젖는다. 로빈이 벌어온 돈을 받는 아버지는 로빈과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로빈과 작별했다. 딱히 할 말이 없다.

내일은 학교 가니?

“그럼, 형이랑 같이 갈 거야. 왕복 세 시간 거리야. 오랜만에 친구들 만날 생각 하니 기분이 좋아.”

좋은 생각만 하며 살아라. 튼튼하게 크고….

“빠잇!!”

나의 꿈은 무엇이었지?

녀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들어가 버렸다. 이제야 안나푸르나, 포카라, 로빈이 사는 담푸스 마을, 네팔에서 가장 신성한 산으로 여긴다는 마차푸차레 산이 눈에 들어온다. 마차푸차레는 그런 이유로 아직 그 어떤 사람도 등반이 허락되지 않은 산이라고 한다.

이번 촬영은 포카라에서 시작되었다. 포카라는 네팔어 포카리 즉 ‘호수’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네팔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로 네팔 서쪽에서 히말라야 등반이나 트레킹을 시작하려면 꼭 이 도시를 들러야 한다. 나는 네팔의 몇 곳을 여행한 경험이 있지만 포카라를 가장 좋아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곳의 롯지 옥상에 올라가거나 전망좋은 호텔에 있으면 히말라야의 신성 같은 풍경이 한 눈에 잡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언제나 ‘여기 앉아서 보면 되지, 저 높은 곳을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결국 내려올 길을 땀흘리면서 올라가냐고’라는 농담을 날리곤 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 말을 꺼내지 못한다. 보름 남짓 함께 지냈지만 내 삶 한 곳에 각인될 게 확실한 로빈을 생각하면 차마 그 게으름뱅이스러운 멘트를 꺼낼 엄두가 나지 않은 것이다.

장비를 챙기고 숙소로 돌아가면서 생각해 본다. 내 나이 열 세 살 때 무슨 꿈을 꾸며 살았지? 번듯한 집을 생각하지 않았다. 가족과 다 함께 사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용돈을 주머니에 넣고 무언가를 살까말까 망설인 적도 없었다. 그렇다고 내 인생이 크게 잘못된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어쩐지 부끄럽다. 쬐끄만 녀석이 쓸데 없이 사람을 자격지심으로 인도해 버린다. 로빈의 포터 여행은 끝났지만 이제 한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안나푸르나와 마차푸차레산을 바라보며 내 살아갈 인생 여정이나 정돈해봐야겠다.

로빈이 그렇게 하라고 등을 떼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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