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 루드르(Lourdes)
연간 600만명 순례행렬 이어져
마사비엘 동굴 '치유의 샘물'엔
기적 바라는 환자들 발길 '북적'

프랑스 서남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루르드(Lourdes)는 일반여행객의 기준으로 보면 벽촌이다.

프랑스 파리에서 TGV를 타고 5시간30분 정도 달려야 도착할 수 있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성모 마리아의 발현지인 만큼 건축물이나 성곽ㆍ문화재보다 순례에 의미를 둘 수 있는 여행지다.


딱히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도 괜찮다. 순례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여행 형태이기 때문이다. 곳곳에서 도적떼가 여행자들을 노렸고 때로는 무거운 통행세를 내야 했던 예전의 순례는 고행길이었다. 그래도 신의 음성을 듣고 선각자들의 흔적을 확인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그 길을 떠났다. 중세에는 성지 로마나 예루살렘으로 갔고 아일랜드 수도승들은 스페인의 성지 산티아고를 찾아 나섰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신탁을 받기 위해
델포이와 델로스를, 이슬람에서는 메카를 최고의 순례길로 친다.

루르드는 전세계에서 연간 600만명의 순례자들이 찾아온다. 작은 도시이지만 프랑스에서 호텔 숫자가 파리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것도 그런 배경 덕이다. 순례객들을 위해 각국에서 나온 자원봉사자가 8,000여명이고 유럽 가톨릭 국가에서는 자국민을 위한 전용 호텔까지 이곳에 두고 있다. 지난해 이곳을 찾은 한국인 순례객은 3만5,000여명으로 집계됐다.

루르드가 전세계인들로 북적거리는 순례지가 된 역사는 150여년 전인 185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2월11일 이곳 가베 강가의 마사비엘 동굴 앞에서 땔감을 줍던 14세 베르나데트라는 소녀 앞에 성모 마리아가 나타난다. 신분이 천하고 가난했던 베르나데트에게 성모는 "나는 무염시태(無染始胎ㆍImmaculate Conception)다"라며 "성당을 지으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소녀의 증언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하지만 성모의 발현은 18차례나 계속됐으며 소녀의 목격담도 생생했다. 마을은 소녀의 일관된 진술에 당황했고 급기야 교황청까지 사실조사에 나섰다.

성모가 말한 무염시태란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원죄가 있지만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처럼 그를 잉태한 성모 마리아에게도 원죄가 없다는 뜻이다. 가톨릭의 중요한 교리지만 벽촌의 시골소녀가 인지할 정도로 당시 널리 알려진 교리는 아니었다. 시골마을 사람들 역시 처음 듣는 소리였고 어린 소녀가 이런 어려운 말을 했다는 것 자체가 당시에는 신기했다. 다각적인 조사 결과 소녀의 말은 진실로 확인됐고 교황청은 4년 뒤인 1862년 이곳의 성모 발현을 공식으로 인정하게 된다. 베르나데트는 이후 종교에 투신해 수녀의 길을 걸었고 35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늘 감사하며 살았다. 1933년 교황청은 베르나데트를 성인(聖人)의 반열에 올렸다.

그렇다면 성모 마리아는 왜 하필 프랑스 작은 시골마을의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소녀 앞에 나타났을까. 올 3월부터 이곳에 머물며 한국인 순례자들에게 성지 안내를 하고 있는 예수성심수녀회의 이 마리스텔라 수녀는 "작은 것에도 감사하고 또 감사했던 한 가족에게 내려진 축복"이라고 설명했다. "베르나데트 가족은 너무 가난해서 감옥으로 쓰였던 곳에서 살기도 했지만 항상 감사했고 기도 소리가 담장 밖에 끊이지 않고 들렸다고 합니다."

베르나데트가 성모를 만났던 마사비엘 동굴의 샘물은 환자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이다. 성모 마리아가 베르나데트에게 "샘에 가서 그 물을 마시고 몸을 씻으라"고 했던 그 샘물을 마시고 몸을 담그는 사람들에게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작은 페트병을 구입해 물을 담아가는 여행객들도 눈에 많이 띄었고 동굴 샘물에 몸을 담그는 침수(浸水) 의식도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성모 발현을 기념해 지어진 성당 가운데 하나인 '무염시태 성당'은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사연은 이렇다. 한국인 최초의 사제 김대건ㆍ최양업ㆍ최방제 신부를 배출하는 데 일조했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1830년대까지 알지 못했던 나라인 조선에 선교사를 보내야 했다. 모두 자청했지만 그 길은 간단하지 않았다. 배를 타고 3년이나 걸리는 어려운 곳에 있었다. 2대 조선교구장(앵베르 주교)이 특히 많이 우려했지만 당시 선교사들은 한국에 무사히 도착했고 이를 감사하기 위해 1876년 무염시태 성당 축성 때 이를 기념하는 감사비를 봉헌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앵베르 주교는 1838년 성모 마리아를 조선 가톨릭 교회의 주보 성인(主保聖人)으로 정해달라고 교황청에 요청했고 1840년 마침내 승인을 받아내 성모 마리아는 현재 한국 가톨릭 교회의 주보성인이기도 하다.

루르드 시내 거리는 순례여행지답게 묵주와 성모상 기념품점 등 가톨릭 가게 일색이다. 관광객 수백만명이 오는 곳이면 일반 명품점도 둘 만한데 거리 간판들도 가톨릭과 연관돼 있다. 전세계에서 온 관광객들은 그 좁은 골呪堧?편안한 표정으로 걸어다닌다.

일반 관광지라고 할 만한 곳은 사방에서 보이는 언덕배기의 거대한 루르드 성이다. 원래 이 성은 9세기 중엽까지도 사라센 제국의 영향 아래 있었다. 샤를마뉴 대제가 이 성곽을 포위하고 공격했으나 난공불락이었다. 샤를마뉴는 투르핀 주교의 충고를 받아들여 "내게 항복하지 말고 하늘의 왕에게 항복하라"고 제의했고 사라센 성주는 결국 성을 포기했다고 한다. 성은 11세기 비고르 지역의 백작이 다스렸다가 1590년에는 앙리 4세의 영지가 됐다. 17~18세기 '피레네의 바스티유'로 불릴 정도로 악명 높은 감옥이었다가 19세기에는 군대 막사로 사용됐다.

순례는 구도의 길이고 자신을 온전히 바닥에 내려놓는 행위다. 메카에 모여 일제히 머리를 조아리는 이슬람교 신자나 삼보일배를 하며 차마고도를 오르내리는 티베트 승려의 모습이 경건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루르드의 성수기는 4월부터 10월까지라지만 묵묵히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목적이라면 오히려 사람들이 몰리는 성수기를 피해가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적과 축복의 땅 루르드에 들어서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매사에 감사하라'는 메시지가 들려올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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