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긋하고 한적한 시골을 꿈꿨다… '그' 프로방스는 어디에?
내가 처음 프로방스를 알게 된 건, 교과서에 실린 알퐁스 도데의 '별' 때문이었다. 내가 프로방스에 가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건 '피터 메일'의 '나의 프로방스'를 읽은 후였다. 세상에서 가장 바쁜 직업인 광고회사 카피라이터 출신의 영국인 피터 메일이 조용하고 느린 문화를 가진 프로방스의 작은 시골에 내려오면서 시작되는 이 여행기가 어느 날, 야근이 밥 먹듯 이어지던 내 일상을 두들긴 것이다.
내게 프로방스는 또한 고양이 '노튼'의 도시이기도 하다. 역시 세상에서 가장 바쁜 도시에 사는 작가이자 출판인, 편집인인 뉴요커 '피터 게더스' 덕분인데 ('노튼'은 8년이나 키운 피터 게더스의 고양이다!) 두 저자의 이름이 우연히 '피터'라는 사실 이외에도 이들은 삶에 찌든 어느 날, 과감히 도심의 삶을 포기하고 한적한 프로방스에 살기로 결심한다는 또 다른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 ▲ ‘나의 프로방스’와 ‘프로방스에 간 낭만고양이’는 저자들이 과감히 도심의 삶을 포기하고 한적한 프로방스에 살기로 결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사진은 파인 라벤더(fine lavender)가 물결 치는 ‘알프 드 오트 프로방스’ 들판의 모습. / 송혜진
그러나 내가 정작 '프로방스'야말로 세계 각국에서 모인 은퇴자들의 천국이라는 걸 알게 된 건,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그림 같은 풍경 때문이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도심에 즐비한 '부동산' 때문이었다. 맙소사. 이렇게 부동산이 많은 유럽 마을을 내 평생 본 적이 있었던가! 해안 도시인 마르세유에서 기차를 타고 내린 나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셀 수 없이 많은 부동산과 마주쳤다. 월세 500유로에서 5000유로까지 참 다양한 형태의 집과 건물들이 매물로 나와 있었다. 살펴보니 파리보다는 아니지만 시골치고는 비싼 집값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좁은 골목과 골목이 혈관처럼 얽힌 작은 마을 엑상프로방스의 지형 덕분에 건물투어를 하는 부동산 업자와 몇 번씩 마주치기도 했다.
사람에 치이고, 일에 찍히고, 모든 게 엉망이 되어 버린 어느 날, 떠날 수 있는 영혼의 안식처에 대한 판타지는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다. 게다가 읽으면 당장 떠나고 싶게 만드는 이런 흔치 않은 책을 낸 작가들이 하나같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니, '서울'이란 세계에서 가장 바쁘게 돌아가는 곳에 사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 프로방스가 주는 판타지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나는 프로방스로 떠났다. 그것은 '나의 프로방스'에서 읽은 "예컨대 정육점 주인들은 단순히 고기를 파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어도, 고기를 어떻게 요리해야 하고 어떻게 식탁에 올려야 하는지 그리고 곁들여서 무엇을 먹고 마셔야 하는지를 장황하게 설명해준다" 같은 문장이나, "밖으로 나가자 뜨거운 햇살이 두개골을 때리는 것 같았다. 집에 돌아가는 길은 그야말로 긴 신기루였다. 눈부시게 하얀빛에 도로가 출렁대고 흐느적거렸다. 포도나무 잎들은 축 늘어져 있었고, 농장의 개마저 조용했다. 시골은 깊은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같은 문장들에 대한 향수 때문이기도 했다.
시간이 정지한 풍경들, 가령 100년이나 된 카페엔 시간에 씻겨 반들반들해진 낡은 의자들과 짙은 세월의 때가 묻어 캐러멜 색으로 착색된 벽들이 있고, 두 시간씩이나 느긋한 점심을 먹고, 죄책감 없이 하품을 하며 평화로운 자연풍경을 바라보는 사람들과 관련된 특유의 이미지들….
그러나 여행이 주는 판타지는 딱 거기까지였다. 엑상프로방스에는 내가 꿈꾸던 알퐁스 도데의 '별'에 나오는 목가적인 풍경은 없었다. 여행객을 위한 관광안내소를 거치며 나는 곧 화구를 든 세잔의 동상과 아침부터 산 바게트를 한 손에 들고 바쁘게 걸으며 커피를 마시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목격했다. 프로방스의 엽서 같은 풍경은 아마도 차를 타고 조금 더 들어간 어느 작은 시골 마을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본 엑상프로방스는 수없이 많은 부동산과 카페와 식당과 작은 대학들의 도시였다. 그곳에서 눈에 띄는 건 동유럽에서 온 무표정한 집시들과 친구처럼 개를 끌어안고 구걸을 하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그곳이 폴 세잔의 고향이었기 때문에 막연히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이 많을 것이란 내 예상도 가뿐히 빗겨갔다. 그렇다고 프랑스 남부의 이 소도시가 아름답지 않다는 건 아니다. 단지 우리가 '프로방스'라는 이름을 천천히 발음했을 때 밀려오는 것, 바로 그것이 있는 곳은 아니란 것이다.
호텔에 돌아와 나는 포털사이트에서 '프로방스'란 단어를 쳐 보았다. 파주에 있는 레스토랑들이 있는 마을이 화면을 채우고 있었다. 우리가 하와이를 그리며 와이키키 해변을 말할 때, 부곡 하와이라도 가고 싶은 마음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사실 프로방스는 도시의 이름이 아니라 마르세유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 남동부를 포함하는 거대한 지역이다.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고흐의 도시 '아를'과 세계 연극제로 유명한 '아비뇽'까지 모두 프로방스의 일부인 셈이다.
그렇다고 여행에서 피터 메일과 피터 게더스가 눈에 힘을 주고 묘사하던 프로방스의 목가적인 풍경을 보지 못한 건 아니었다. 나는 그것을 파리로 가는 테제베(TGV)의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듯 보았다. 내가 꿈꾸던 세상에서 가장 느리고 서정적인 풍경을,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포도밭과 나무들로 가득 차 오른 프로방스의 전경을 나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달리는 고속 열차를 타고 본 셈이었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이번 프로방스 여행의 가장 흥미로운 아이러니였다.
●프로방스에 간 낭만고양이: 시나리오 작가, 시트콤 작가, 출판인, 편집인 등 한꺼번에 네 가지 이상의 일을 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일 중독자 피터 게더스가 고양이 노튼, 애인 재니스와 함께 프로방스에 정착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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