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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메리카/미국

미국 알라스카 일루리사트 : 탐험대의 고달픈 신고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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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루리사트의 개 평원

기온이 하루가 다르게 오르고 있다. 길을 걸으면 여기저기 물 흐르는 소리가 점점 자주 들린다. 날씨가 따뜻해질수록 북극의 혹한에 길들여진 썰매개들은 아주 힘들어한다. 그래서 이런 날이면 개들은 차가운 눈밭 위에서 뒹굴거나 배를 깔고 엎드려 지낸다.


해안 마을의 언덕 위로 올라서자 축구장 다섯 개 정도의 평지가 눈에 들어왔다. 거기 썰매개 수백 마리가 개 줄에 묶인 채 넓게 퍼져 있다. 늑대처럼 크고 우람하고 잘생긴 북극 썰매개들이 하얀 눈밭에서 졸거나 뒹굴거나 울부짖는다. 정말 굉장한 ‘개판’이다.


잠시 후 개 주인이 나타나 대장 개를 풀어놓는다. 그럼 대장 녀석은 무리를 누비고 다니며 개들에게 뭐라고 수군거린다. 축구에서 교체 선수가 다른 선수들에게 감독의 지시사항을 전달하는 것처럼.

인구 5천 명의 일루리사트에는 약 3천 마리의 썰매개들이 함께 살고 있다.


영화를 통해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썰매개들은 주로 알래스카의 개들이다. 그린란드나 알래스카 모두 개썰매의 전통이 이어져 내려오지만 개들을 썰매에 묶는 방식에 있어 눈에 띄는 차이가 있다. 알래스카에서는 두 마리씩 종대로 묶여 썰매를 끄는 반면, 그린란드에서는 수천 년 전부터 부채꼴 모양으로 썰매를 끈다. 부채꼴 대형에서는 대장 개의 줄이 다른 개들보다 좀 더 길다. 왜 그럴까? 썰매개들의 혈관에는 늑대의 야성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본능적으로 리더의 자리를 노리는 썰매개들에게는 대장 개에 대한 질투와 시기심이 늘 깔려있다. 대장 개는 미칠 노릇이다. 홱 뒤돌아서서 호시탐탐 자기를 노리는 개들에게 반격하고 싶어도 주인이 휘두르는 채찍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시 앞을 향해 달릴 수밖에 없다. 뒤따르는 개들은 그런 대장 개를 끝없이 추격하고……, 그렇게 썰매는 빠르게 전진할 수밖에 없다.


다른 개들이 목줄에 묶인 상태에서 가슴 줄을 차는 것과 달리 대장은 목줄을 묶지 않아도 된다. 대장만의 특권이다. 가슴 줄이 다 채워지면 다시 대장부터 차례로 썰매 줄을 채운다. 이때 주인이 잠시 고개를 돌리는 찰나에 개들 사이에서 다툼이 벌어진다. 대장을 시기하는 녀석들이 일제히 공격을 감행하는 것이다. 결과는? 주인한테 두들겨 맞는다. 그래도 이 천하무적 썰매개들은 여간해선 기가 죽지 않는다. 이렇게 드센 개들을 우리 탐험대가 과연 컨트롤할 수 있을까? 앞이 깜깜하다.


잘 훈련된 썰매개들과 함께 사냥에서 돌아오고 있는 이누이트 사냥꾼



썰매개들의 생존 법칙

일루리사트의 썰매개들에게 한 끼의 식사란 처절한 생존의 문제이다.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먹고, 먹기 위해 살아남는다. 너무 커서 들기조차 버거운 넙치 한 마리를 공중으로 힘껏 던지면 땅에 닿기도 전에 해체되어 녀석들의 뱃속으로 들어간다. 들리는 거라곤 입안에서 우두둑우두둑, 넙치 뼈를 부서뜨리는 둔탁한 소리뿐이다. 먹이가 주어지는 건 겨울철 하루에 단 한 번뿐이며 여름철엔 2, 3일에 한 번일 때도 허다하다. 많은 개들의 사료 값도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지만, 또한 늘 허기진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먹이를 주는 주인의 말에 더욱 잘 복종하게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늘 굶주린 상태에서 우아하고 느긋한 식사란 없다. 먼저 먹어 치운 놈이 남은 먹이를 강탈하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빨리, 더 많이 먹어 치우는 것만이 생존의 지혜일 뿐 양보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 무자비한 생존 투쟁에서 동정이란 그저 허영이며 장애물에 지나지 않는다. 썰매개들의 세계에서는 먹는 자와 굶는 자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런 야생의 규칙은 인간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혹한의 설원 위에서 열댓 마리의 사나운 썰매개들을 상대해야 하는 이누이트 사냥꾼들은 결코 불필요한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자비란 나약함의 증거이고, 그것은 곧 개들에게 공격의 빌미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다른 개들의 공격을 받아 상처를 입고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썰매개

현지에서 탐험대를 도와준 이누이트 어부 앙아유(21, Angau).



앙아유를 만났다. 그는 썰매개 구입과 훈련을 도와주는 현지인 어부다. 2010년, 홍 대장이 답사 및 적응훈련을 위해 이곳에 왔을 때 앙아유로부터 썰매개 스무 마리를 구입했다는데 그 사이 두 마리는 도망가고 한 마리는 건강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한다. 실제 원정에 16마리가 투입되면 베이스캠프에는 최소한 두 마리를 후보로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데 한 마리밖에 없는 실정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현재 남은 개들의 건강 상태가 양호하다는 점이다. 앙아유가 자기 개처럼 정성껏 넙치를 잡아다 먹인 듯하다. 그린란드 사람들조차 가지 않는 내륙 빙하를 도대체 왜 종단하려는지 도무지 이해 못하는 눈치이긴 하지만, 그래도 저 멀리 한국에서 온 ‘비슷하게 생긴’ 우리 탐험대에 대한 관심과 애정만큼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생긴 것도 미남인데다 마음씨도 참 고운 친구다.


“이건 기생충 약이고, 이건 항생제……, 꼭 챙겨야 해요.” 앙아유는 개줄, 가슴 띠, 개 양말, 채찍 등 원정에 필요한 여러 장비들을 몇 번이고 꼼꼼하게 점검해주었다. 행여 개들이 다치거나 죽지 않을까, 그 먼 거리를 개썰매 초보자들이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이 한도 끝도 없다. 나보다 더 간절한 것 같다.



일루리사트의 개썰매 공장

일루리사트의 개썰매 공장에서는 아직도 전통 방식으로 개썰매를 만든다. 개썰매는 크게 두 종류, 즉 사냥용과 고기잡이용으로 나뉘며 제작 방식도 약간 차이가 있다. 고기잡이용 개썰매는 약간 비틀려져 유연함이 적은 반면에 아주 단단하다. 얼어붙은 빙판을 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사냥용이나 운반용은 비틀림이 크게 주어 유연성을 최대한 살린다. 평지보다는 산길을 더 많이 달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종류 모두 어디 한 군데라도 쇠못을 박지 않고 나무나 끈으로 자연스럽게 잇는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휘어질지언정 결코 부러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그린란드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개썰매를 만들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고등학교(대학교는 없다)에서 운영하는 직업훈련 프로그램에 개썰매와 카약을 만드는 6주 코스의 강좌가 있어 누구나 배울 수 있다.

“이게 탐험대가 탈 썰매요.” 개썰매 장인인 닉이 손가락으로 커다란 썰매 하나를 가리켰다. 이야, 잘 빠졌다! 정성스럽게 깎고 다듬은 썰매 앞쪽에 ‘HONG SUNG TAEK’이라고 이름까지 직접 새겨놓았다. 개썰매는 2인용이 일반적인데 홍 대장이 주문한 것은 4인용으로 조금 더 크다. 가격은 우리 돈으로 140만 원 가량 된다.


이제 열여섯 마리의 개들이 이 썰매를 끌고 2천 킬로미터가 넘는 북극의 설원을 행군하게 될 것이다. ‘과연 해낼 수 있을까?’ 흥분과 불안이 동시에 밀려온다.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고, 여기 사람들조차 가본 적이 없다는 해발 2,000미터의 얼어붙은 길을 무사히 완주할 수 있을까?

전통의 방식으로 썰매 날을 손질하는 이누이트

새로 제작된 개썰매를 시험하고 있는 탐험대



눈밭 위의 시트콤 – 원정대의 개썰매 훈련

드디어 개썰매 훈련에 돌입했다. 가장 선배인 정기화 대원과 홍성택 대장, 그리고 정동영, 배영록 대원 모두가 훈련에 참가했다. 앙아유가 빠진 상태에서 우리 대원들끼리만 수행하는 첫 훈련이라 내심 걱정도 되지만 결국 2천 킬로미터의 빙판을 행군해야 할 당사자들이니 이제부터는 발생 가능한 모든 상황에 스스로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첫째 날, 정기화 대원이 뭐라고 큰소리를 쳤는데 그 소리를 출발신호로 잘못 알아듣고 썰매개들이 일제히 내달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정기화 대원은 개 줄을 붙잡은 채 수십 미터를 끌려가고 말았다. 말이 끄는 힘을 마력(馬力)이라 한다면 견력(犬力)은 개가 끄는 힘이다. 북극 썰매개 열여섯 마리가 한꺼번에 발휘하는 ‘16 견력’을 어찌 감당하랴.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개들은 이미 뿔뿔이 흩어진 뒤였다. 길길이 날뛰는 개들을 일일이 잡아서 다시 묶는 데만 꼬박 하루가 걸렸다. 이날 우리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도망간 개들을 잡느라 분주한 탐험대원들


둘째 날, 썰매를 잡고 내리막길을 내려오던 홍 대장이 그만 미끄러지는 바람에 개들이 썰매만 끌고 멀리 달아나 버렸다. 비록 훈련 상황이긴 하지만 이건 정말 엄청난 사고다. 만일 원정 도중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모든 장비와 식량을 실은 채 개들이 사라져버린다면 그것은 곧 조난이고 죽음이다.


달려가서 보니 썰매는 부서지고 개들은 줄에 뒤엉킨 채 서로 으르렁대며 싸우고 있었다. 녀석들은 지구 반대편에서 온 이방인들에게 결코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지 않겠다는 듯 기세등등하게 울부짖었다. 홍 대장은 마치 빙산처럼 무너져 내리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번 원정의 성패는 개들에게 달렸다.” 맞는 말이었다. 이미 에베레스트와 북극, 남극 등 지구 3극점을 모두 정복한 홍 대장을 비롯하여 대원들 모두 고산 등반과 극지 원정의 베테랑들이었다. 그러나 이전의 그 어떤 탐험보다 이번 원정이 어려운 것은 바로 썰매개들 때문이었다. 헬기나 식량, 장비 따위는 (비록 엄청 비싸지만) 돈으로 해결 가능한 것들이다. 그러나 야성의 유전자를 지닌 그린란드 썰매개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그들로부터 신뢰와 복종을 얻어내는 것은 결코 돈으로 해결할 수가 없다. 끝없는 도전과 반복, 그리고 인내가 필요하다.

신호를 어기고 먼저 출발하는 썰매개들

앞장서서 썰매개들에게 방향을 지시하는 홍대장



셋째 날, 홍 대장이 제법 현지인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아직은 한참 어설픈 솜씨지만 그래도 썰매개들에게 ‘까(달려)!’, ‘우넹잇(정지)!’ 번갈아 외치며 30킬로미터가 넘는 길을 달렸다. 개들의 입에서 거친 숨소리와 거품이 나왔다. 행군이 거듭될수록 개들과 홍 대장은 서로의 존재를 조금씩 알아가는 듯했다. 채찍을 휘두르는 홍 대장과 대원들의 얼굴도 어느새 원주민처럼 검게 변해가고 있다. 탐험이란 낯선 곳을 알아가고 낯선 존재와 서로 익숙해지는 과정이다. ‘그런데 썰매개들도 우리에게 익숙해지고 있을까?’ 훈련 과정에서 우스꽝스럽게 펼쳐지는 ‘눈밭 위의 시트콤’이 앞으로의 본격적인 원정에서는 ‘설원의 드라마’로 완성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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