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우나스(Kaunas)는 인구 약 40만 명 정도가 거주하는 리투아니아 제2의 도시이다. 어느 나라나 그러하지만, 제2의 도시에 사는 시민들은 언제나 수도의 그늘에 가려 올바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불만이 그득하다. 카우나스 사람들은 특히 그러하다.

예수부활성당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카우나스 풍경 <사진: 카우나스 관광청>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카우나스가 정식으로 도시로 인정받게 된 것은 1408년으로, 600년이 넘은 오랜 역사를 간직한 도시이다. 리투아니아를 흐르는 양대 젖줄인 네무나스(Nemunas)강과 네리스(Neris) 강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카우나스는, 이런 입지적 조건으로 리투아니아 초기부터 사람들이 터전을 잡기 시작했다.

러시아, 폴란드, 독일 등 주요 거점 지역으로 통하고 있어 군사적, 경제적 중요성 역시 대단했다. 15세기 당시 독일기사단이 유럽 전체로의 팽창을 위해 동방진출을 꾀했을 때는 리투아니아의 고대 수도인 트라카이빌뉴스를 호위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리투아니아는 최초로 독립을 이루었으나 폴란드에게 수도 빌뉴스를 불법 점령당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1939년까지 카우나스가 리투아니아의 임시수도가 되어서 현대사의 서곡을 알리는 역사적 사명을 수행하기도 했다.

빌뉴스 이전 트라카이가 수도였을 당시 독일기사단들의 침공으로부터 수도를 보호하기 위해 건설한 카우나스성. 현재는 복원 사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사진: 카우나스 관광청>

현재 카우나스는 리투아니아는 물론이거니와, 전 유럽에서 감히 최강이라 불러 마지않을 리투아니아 국가대표 농구팀 잘기리스(Žalgiris)의 거점지역으로 유명하다. 몇 년 전부터는 아일랜드의 저가항공사인 라이언에어의 동유럽 허브로 지정되면서 유럽 전역에서 관광객들을 불러들여 카우나스의 위상을 높이는데 기여했지만, 그와 동시에 한때 유러피안 드림을 쫓아 유럽으로 떠났던 젊은이들이 눈물을 머금고 고국 땅을 밟게 되는 우울한 장소로 변화되기도 했다. 작지만 복잡 다난한 도시, 카우나스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숨어 있을까.

구시청사 위에서 바라보는 카우나스 풍경. (일반인의 출입은 제한되어 있다.) <사진: 카우나스 관광청>

자유와 혁명이 도시 카우나스

과거 소련 도시들에는 전부 하나같이 레닌대로, 스탈린대로, 가가린대로 같은 소련 영웅들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곤 했다. 하지만 그런 서슬 퍼렇던 시절에도 카우나스 한가운데 자리 잡은 중심거리의 이름은 바로 라이스볘스 알례야(Laisvės alėja), 우리말로 하자면 ‘자유로’였다. 한때 이 도시는 금연도로로 지정된 적이 있었지만, 현재는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사회 미덕을 해하는 행동이 아니라면 그 어떤 것도 공식적으로 금지된 것은 없는, 거의 완벽한 자유가 보장된 거리이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자유로는 언제나 거리의 악사들로 넘쳐난다. <사진: 카우나스 관광청>

카우나스에서 자유와 혁명의 분위기는 아주 유별나다. 1972년 5월 14일, 바로 이 자유로 한가운데에서 당시 20살이던 카우나스의 청년이 휘발유를 몸에 들이붓고 분신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가 분신한 곳 근처에는 “나의 죽음에 대한 죄를 물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정치체제 뿐이다”라는 유서가 한 장 남아 있었고, 그 이후 이틀 동안 카우나스는 소련의 붉은 군대도 경찰들도 통제할 수 없는 혁명의 도시로 변화하였다. 장기적 관점에서는 약 20년 후 소련 전체가 붕괴되는 시발점이 되어준 역사적인 사건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이전에도 소련의 지배를 반대하는 분신자살은 리투아니아의 다른 지역과 체코슬로바키아 등지에서 종종 있었던 일이지만 그 어떠한 것도 카우나스처럼 엄청난 파급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당시 소련에서는 금지되어 있었던 장발문화와 비틀즈(비틀스), 록음악도 카우나스에서는 아무 어려움 없이 감상할 수 있었으며, 그 결과 전 소련 내 히피문화의 메카로 부상하기도 했을 만큼 카우나스의 자유로는 구소련 내에 불고 있는 자유화에 대한 갈망 그 자체를 보여주었다. 이런 배경 덕에 리투아니아는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같은 인근 국가나 중앙아시아 등과 비교했을 때 소련화가 가장 적게 진행될 수 있었다.

리투아니아 군사력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군사박물관. 박물관 앞으로는 리투아니아 현대사를 이끌어간 위인들의 흉상들과 이름 없는 영웅들을 위해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이 위치한 통일광장이 위치해 있다. <사진: 카우나스 관광청>

카우나스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이야깃거리는 또 있다. 카우나스가 임시수도였을 당시 일본영사직을 맡아 일했던 스기하라 치우네(센포 스기하라, Chiune Sugihara)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서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살고 있던 유대인 6천 명을 구한 인물로 유명하다. 소련이 점령하고 있는 리투아니아가 독일의 손아귀로 넘어가는 것이 분명해지던 시기, 유대인들은 남미에 있는 섬들(네덜란드, 덴마크령)로 이주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하지만 그곳으로 이주하기 위해 통과해야하는 소련에서는 어이 없게도 일본의 통과허가를 받을 것을 요구했고, 수 천명의 유대인들은 일본 통과비자를 받기 위해 당시 스기하라가 일하던 일본 영사관 앞에 장사진을 이루었다. 독일과 돈독한 관계에 있던 일본 정부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서 유대인들의 통과비자 발급을 불허했으나, 스기하라는 정부의 불허방침에도 불구하고 자체적으로 통과비자를 발행해서 6천 명의 유대인들에게 새 생명의 길을 열어주게 되었다.

2차 대전 당시 수천 명의 유대인들을 구한 스기하라 영사가 근무한 일본영사관 건물, 현재는 스기하라 기념관과 아시아 지역연구소가 들어서 있다. <사진: 서진석>

과거 스기하라의 행적을 기념하는 ‘희망의 문, 생명의 비자’라는 문구가 리투아니아어와 일본어로 병기되어 있다. <사진: 서진석>

현재 그가 일하던 영사관은 카우나스 최대 대학교인 비타우타스 마그누스(Vytautas Magnus) 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소속의 아시아 지역연구소와 스기하라 박물관이 들어서 있고, 아시아 지역연구소에서는 몇 년 전 한국학 강의도 시작했다. 하지만 2013년경 이 건물 전체에 일본을 홍보하는 일본문화원이 들어설 계획이다.




아담하고 고풍스러운 구시가지

유럽은 일반적으로 구시가지가 그 도시의 행정중심지역인 경우가 많지만, 카우나스의 경우 자유로가 그 기능을 맡아서 하고 있고, 구시가지는 도시의 중심가에서 약간 벗어나 있다. 카우나스의 영원한 경쟁상대인 빌뉴스의 구시가지는 1997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복원과 홍보에 대한 엄청난 지원을 받고 있지만, 애석하게도 카우나스의 구시가지는 그런 호사를 누리지 못했다. 그래서 수도에 비해 개발이나 보존 상태가 열악하지만 빌뉴스의 구시가지와 견주어서도 손색이 없는 아름다운 곳으로서 일 년 내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1.7km의 자유로를 따라 쭉 걷다 보면 바로 이어지는 빌뉴스 거리(Vilniaus gatvė)가 바로 구시가지의 시작이다. 그 거리에 들어서면 나그네를 맞는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자갈길과 예스러운 모습의 공중전화가 카우나스의 역사를 실감하게 해준다.

구시가지의 입구인 빌뉴스 거리. 리투아니아의 도시들은 가장 번화한 대로를 수도의 이름을 따 ‘빌뉴스 거리’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사진: 카우나스 관광청>

마이로니스는 리투아니아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중 한 명이다. 카우나스 구시청사광장에 위치한 마이로니스 석상 주변 풍경 <사진: 카우나스 관광청>

카우나스 구시가지의 주요 볼거리들도 역시 성당이다. 빌뉴스처럼 대부분의 성당들은 소련 시절 다른 기능으로 변환되어 학교, 강당, 심지어 운동장, 사우나로 사용되기도 했다. 카우나스에 있는 성당 중 가장 훌륭한 곳은 빌뉴스 거리와 시청광장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베드로 바울 성당 (Šv. apaštalų Petro ir Povilo bažnyčia) 이다. 전쟁과 화재를 겪으면 수백 년 동안 끊임없이 확장 증축되어 리투아니아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 중 하나가 된 이 성당의 외부 벽에는 19세기 말 바로 이 성당에서 주교로 일하며 리투아니아 민족의식 부흥에 중심적인 위치에 서 있었던 신부이자 시인인 마이로니스(Maironis)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다.

카우나스의 대표적인 성당인 베드로 바울 대성당의 모습. <사진: 카우나스 관광청>

시청광장 한가운데 서 있는 구시청사(Rotušė)는 그 도도한 백색 이미지 때문에 ‘흰 백조’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1542년 최초로 그 자리에 들어선 이래 성당, 감옥 등 여러 가지 기능으로 바뀌어 내려오다가 18세기 말에 현재의 모습으로 개조되었다. 현재는 아주 특별하게도 결혼식장으로 사용되고 있어, 주말에는 백색의 드레스와 턱시도를 입은 신혼부부들과 들러리들로 주변 광장이 가득 찬다. 건물 한쪽에는 도자기 박물관도 위치해 있다.

구시청사의 낮과 밤. 구시청사 광장은 주말이 되면 신혼부부들과 햇볕을 즐기는 젊은이들로 가득 찬다. <사진: 카우나스 관광청>

광장 서편 강 쪽으로 위치한 알렉소토(Aleksoto) 거리에 위치한 페르쿠나스의 집(Perkūno namas)은 카우나스에 남아 있는 얼마 안 되는 고딕 양식 건물 중 하나로서, 리투아니아 중세 건물의 진면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건물로 손꼽힌다. 초기에는 길드 연합회, 그 후 예수이트 성회의 예배당, 드라마 극장 등으로 사용되었는데, 1818년 보수 공사 도중 벽 안에서 리투아니아 전통신앙의 최고신으로 천둥을 관장하는 신인 페르쿠나스(Perkūnas)의 형상으로 추정되는 조각이 발견되어, 그 이름을 따 ‘페르쿠나스의 집’이라는 별칭이 붙게 되었다. 현재는 동유럽 최대의 문호 중 한 명인 폴란드 출신의 작가 아담 미츠키에비치(Adam Mickiewicz)의 행적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리투아니아 고딕 양식 건물의 진수를 보여주는 ‘페르쿠나스의 집’. <사진: 카우나스 관광청>

카우나스 시내 어디에서든 보이는 예수부활성당의 모습. 언덕 아래에서 교회 입구까지 푸니쿨러를 타고 올라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사진: 카우나스 관광청>

그 외 카우나스에는 독특하고 재미있는 박물관들이 많이 위치해 있다. 안타나스 즈무이지나비츄스(Antanas Žmuidzinavičius)라는 조각가가 평생에 걸려 리투아니아와 유럽 전역에서 수집한 악마형상들이 전시되어 있는 악마박물관, 20세기 초 음악과 회화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리투아니아 현대예술의 밑그림을 그려준 츄를료니스(Čiurlionis)의 작품이 전시된 국립츄를료니스 미술관, 입구에 서 있는 발가벗은 남자상으로 더 유명한 현대미술관인 질린스카스(Žilinskas) 예술관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악마박물관에 가면 죽어서 악마가 되어버린 스탈린히틀러를 만날 수 있다. 2층 한가운데, 죽음의 땅이 되어버린 리투아니아 위에서 춤을 추는 스탈린과 히틀러의 모습을 악마의 모습으로 형상화한 작품은, 가슴이 숙연해지게 한다. 악마박물관은 여전히 세계 여러 나라들의 '새로운 악마'들을 꾸준히 수집하고 있는데, 동남아, 중국, 일본 등 아시아 각국의 악마들은 전시장에 진열되어 있지만, 아직 한국은 이곳에서 열외이다.

카우나스 시내에서는 어디에서도 보이는 언덕 위의 하얀 교회인 예수부활성당(Kristaus prisikėlimo bažnyčia)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카우나스 구시가지의 모습은 환상적이다. 또한 교회 아래쪽에서 언덕 위로 올라가는 푸니쿨라(언덕을 따라 올라가는 케이블카의 한 종류)를 타고 오르는 재미도 쏠쏠하다.

2011년 5월 19일부터 22일까지는 중세 한자 무역동맹 시절의 문화와 생활상을 재현하는 중세문화축제인 '한자축제'가 카우나스에서 열린다. 한자축제는 과거 한자무역의 동맹도시가 모두 참여하는 유럽 최대의 축제 중 하나로 중세시절 유럽의 분위기를 맛볼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가는 길

카우나스 시내에서 약 17km 떨어진 카르멜라바(Karmėlava) 국제공항에 라이언에어의 저가항공이 많이 취항한다. 더블린, 파리, 런던, 프랑크푸르트, 밀라노, 오슬로, 탐페레, 바르셀로나 등 유럽 주요 도시에서 저가항공을 타고 편하고 저렴하게 입국을 할 수 있다.


수도 빌뉴스에서는 카우나스로 이동하는 버스와 기차가 수시로 출발하며 버스는 한 시간 40분, 급행열차의 경우 1시간 10분 정도 소요된다. 모스크바에서 기차로 들어오는 방법도 있으나, 현재 다른 서유럽 국가로 연결해주는 기차 노선은 전무하다. 유로라인이나 에코라인 같은 국제버스들을 통해서도 카우나스에 어렵지 않게 들어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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