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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스웨덴

에스토니아 타르투 : 북방의 아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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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르투(Tartu)는 규모나 인구적으로 에스토니아 제2의 도시로, 수도 탈린(Tallinn)과 함께 여러 가지 중요한 국가 기능을 함께 나누어 수행하고 있는 도시이다. 에스토니아는 물론이거니와 북유럽 전체에서도 최고(最古)의 대학교 중 하나인 타르투 대학교가 위치해 있는 데다가, 교육부, 최고법원, 국가기록원 등을 비롯해 에스토니아 과학단지 등 여러 가지 중요 기관들이 바로 이 도시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명성에 걸맞지 않게 인구수는 고작 10만 명에 불과한 타르투는, 여느 다른 유럽의 대도시들과 비교하면 한적한 시골 마을 같은 이미지를 풍긴다. 10만의 인구를 가진 대도시라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에스토니아 전체의 인구가 130만에 불과하고, 그 중 3분의 1인 40만 명이 수도 탈린에 거주한다는 것을 상기하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타르투 시청광장의 모습. <사진: 타르투 관광청>

타르투는 엄밀히 말해서 발트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에서도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로 손꼽힌다. 타르투라는 도시명칭이 등장한 최초의 기록이 1030년에 나타나기 때문인데, 이는 탈린보다 200년이나 앞선다. 이외에도 타르투는 탈린이 갖지 못한 독특한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다. 1583년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국에 의해 잠시 지배를 받았던 일과 1219년 덴마크가 탈린 건설을 시작했을 당시 타르투는 남쪽 라트비아와 함께 독일 지배 하에 있었다는 점이다. 1583년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국을 다스리고 있던 폴란드 국왕 스테판 바토리는 이 도시에 현재 타르투 대학교의 전신이 될 예수교 학교를 설립하고, 폴란드에서 국기로 사용되는 백적(白赤)기를 타르투 시에 공식으로 하사하게 된다. 폴란드의 지배는 17세기 초 스웨덴이 에스토니아를 차지하게 되면서 종식되어 불과 몇십 년 지속되지 못했으나, 폴란드 공화국의 국기가 여전히 타르투 시기(市旗)의 배경으로 사용될 만큼 그 영향은 대단하다.

타르투 대학교의 건설을 명한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 동상. <사진: 타르투 관광청>

타르투의 심장이자 에스토니아 문화, 역사의 중심지인 타르투 대학교의 겨울 야경. <사진: 타르투 관광청>

무엇보다 타르투가 자랑하는 것은 1632년 스웨덴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에 의해 건설된 타르투 대학교이다. 초기에는 인근 지역의 독일 귀족의 자제들만 수학할 수 있었으나, 19세기 제정 러시아에 의해 농노제도가 철회되고 에스토니아인들에게도 입학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면서 타르투 대학교는 에스토니아의 지성과 문화운동을 이끄는 중심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게다가 이웃 나라 리투아니아의 빌뉴스 대학교가 1832년부터 1919년까지 폐교된 이후, 발트 연안의 유일한 대학교가 되어 현재 발트3국의 문화적 역사적 기틀을 만든 이들을 많이 배출하면서 에스토니아를 넘어 발트3국 전체의 민족운동을 이끈 도시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래서 에스토니아 사람들은 이곳 타르투를 북방의 아테네라고 불러마지 않는다.


이런 배경에서 타르투에서는 에스토니아 최초의 근대식 대극장인 ‘바네무이네(Vanemuine ) 대극장’이 건설되었으며, 최초의 학술인 모임, 최초의 예술인 협회 등이 생겼다. 1869년에는 에스토니아의 대표적인 문화브랜드인 ‘노래대전’이 시작되어 발트3국 전체로 퍼져 나갔다.

이런 이유들을 비추어 볼 때 타르투 시민들은 탈린에 대해 적지 않은 지역감정을 가지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을듯하다. 그동안 국제공항을 제외하고는 수도에 있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고 자랑하던 타르투 시민들은 타르투 공항에서 2009년부터 스웨덴 스톡홀름과 라트비아 리가로의 취항을 시작하자, 그 자괴감도 누그러뜨리고 진정한 국제도시로 거듭나기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타르투의 시가지 풍경. 에마 강의 아늑한 풍경은 많은 시인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주었다.
<사진: 타르투 관광청>

바로크와 로코코 양식이 혼합된 구시청사 건물은 현재까지도 공식 시청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사진: 타르투 관광청>

탈린과 비교하여 타르투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특성은 단지 문화적이나 역사적인 배경뿐 아니라, 도시 한가운데에 흐르고 있는 강이라고 할 수 있다. ‘어머니’라는 의미의 ‘에마 강’(에스토니아어로 Emajõgi, 에마외기 강)이라 불리는 이 물줄기는 에스토니아의 민족시인인 리디아 코이둘라(Lydia Koidula)의 시에 한 많은 에스토니아 민중의 가슴을 어루만지는 어머니 같은 존재로 자주 등장하는 소재가 되었다.



타르투의 볼거리

타르투는 한국인들이 그리 많이 찾는 여행지는 아니지만, 인근 지역에서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은 점차 늘어나고 있고 국제회의 등이 수시로 열려서 외국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 음식값이나 숙박비용은 탈린 못지않다.

타르투에서 관광객들의 눈길을 가장 끄는 것은 18세기에 지어진 타르투 시청과 시청광장이다. 전체적으로 바로크와 로코코 양식이 혼합된 이 건물은 현재도 공식 시청 건물로 사용되고 있으며, 자갈돌 사이사이로 알록달록한 빛깔의 조명이 설치되어 밤이 되면 환상적인 야경을 만들어내는 광장은 노천카페와 식당으로 즐비하다. 타르투 거주 인구 중 10분의 1이 대학생들로 구성되어 있는 만큼 타르투 노천광장은 젊음과 햇살을 즐기는 젊은이들로 가득하다.

이런 타르투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시청광장 한가운데 놓인 ‘키스하는 학생(Suudlevad tudengid)’동상이다. 1998년 제막되어 대학도시라는 강한 인상을 남겨주는 이 동상은 주변의 분수와 어우러져 가장 타르투다운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명소이다.

키스하는 학생상이 없는 타르투는 상상할 수조차
없다. <사진: 타르투 관광청>

타르투 대학교가 배출한 세계 최고의 석학 중 하나인 기호학자 유리 로트만 기념 분수. 타르투 대학교 도서관 앞에 설치되어있다. <사진: 타르투 관광청>

시청 뒤편에 자리 잡은 그리스파르테논 신전을 연상시키는 백색의 건물은 바로 타르투 대학교 본관이다. 강의가 열리는 강의동은 도시 전체에 흩어져 있으나 대학교의 가장 중요한 기관들은 바로 이곳에 집결되어 있다. 대학교를 보고 섰을 때 왼편에 보이는 건물 옆면에는 현재 타르투 대학교에서 활동하고 있는 에스토니아 대표 지성인들의 얼굴로 장식되어 있어 인상적이다.

에스토니아 문화의 대표인물들을 제외하고도 1909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빌헬름 오스트발트 (Wilhelm Ostwald), 천문학의 대가 슈트루베 (Struve), 기호학의 아버지 유리 로트만 (Yuri Lotman), 발생학의 아버지 카를 베어(Karl Ernst von Baer) 등 세계 인문학과 자연과학에 엄청난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 이 학교를 거쳐 갔다.

중세 대학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타르투 대학교 맨 꼭대기에는 과거 학생들의 생활을 보여주는 대학감옥이 위치해 있다. 화재 이후 상당 부분이 훼손되긴 했지만, 중세시절 여러 가지 이유로 수감(?)되었던 학생들이 남겨놓은 낙서들을 보는 재미가 상당하다. 대학감옥에 입장하려면 대학교 본관 내 정보센터에 문의하면 된다.

한때 발트3국 최대의 규모였으나 지금은 폐허로 남은 대성당. 한쪽 면에는 타르투 대학교 역사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다. <사진: 타르투 관광청>

7월에 열리는, 중세시절 생활을 재현하는 한자(Hansa)축제는 언제나 관광객들의 시선을 잡아끈다. <사진: 서진석>

탈린에 톰페아 언덕(Toompea Hill)이 있다면 타르투에는 토메매기(Toomemägi)라는 언덕이 도시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그 위에는 타르투 대학교와 관련된 여러 위인들의 동상과 기념비들이 조성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한때 발트3국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것으로 알려진 타르투 대성당(Tartu Cathedral) 건물이다. 12세기에 완성된 이래 수백 년에 걸친 전쟁의 결과로 끝내 폐허가 되어버린 이 대성당은 한쪽 부분만이 복원되어 현재 타르투 대학교 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천사의 다리 <사진: 서진석>

악마의 다리 <사진: 서진석>

타르투 대성당 주변으로는 인상적인 교각이 두 개 남아 있는데, ‘천사의 다리(Inglisild)’와 ‘악마의 다리(kuradisild)’라는 재미있는 이름이 붙어 있다. 천사의 다리는 주변 공원의 모습이 ‘영국식’이라는 의미로 ‘영국식 다리’로 이름이 붙여졌으나, 에스토니아어로 영국이라는 단어와 천사라는 단어의 음가(音價)가 비슷하여 자연스럽게 ‘천사의 다리(Inglisild)’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천사의 다리에 서서 대성당 쪽을 보았을 때 보이는 회색톤의 석조교각은 ‘악마의 다리’이다. 왜 이런 이름이 붙었는지는 정확히 남아 있는 기록이 없으나, 이 다리가 만들어질 당시 제정러시아의 지배가 시작되었다는 설, 다리를 설계한 독일인 성(姓)의 의미가 ‘악마’라는 설, 여러 가지가 있으나, 아무래도 마주 보고 서 있는 ‘천사의 다리’를 의식해서 만들었다는 설이 더 힘을 얻고 있다.

타르투 출신의 문학가 에두아르드 빌데(Eduard Wilde)와 아일랜드의 오스카 와일드(Oskar Wilde)의 동상. <사진: 타르투 관광청>

윌로 으운이 제작한 ‘아빠와 아들’ 동상. 작가와 아들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해냈다. 아빠와 키가 똑같은 아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사진: 서진석>

타르투 시내의 또 다른 볼거리는 거리 곳곳에 술래잡기하듯 숨어있는 다양한 조각상과 벽화들이다. 위에 설명한 ‘키스하는 학생상’도 유명하지만 윌로 으운(Ülo Õun)이 제작한 ‘아빠와 아들’, 그리고 타르투에서 가장 명성이 자자한 아일랜드 펍인 ‘빌데(Wilde) 펍’ 아래 만들어진 ‘에두아르드 빌데(Eduard Wilde)’와 ‘오스카 와일드(Oskar Wilde)'동상이다. 동시대에 활동한 이 두 작가는 한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단지 성의 철자가 같다는 이유로 이곳에 마주 앉아 있다. 이 동상은 오스카 와일드의 고향인 아일랜드 골웨이에도 조성되어 있다.

대학교 주변으로 펼쳐져 있는 아기자기한 가게와 갤러리들, 여름이면 매일 펼쳐지는 다양한 축제 등을 제대로 즐기려면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도시에 머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가는 길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스웨덴스톡홀름에서 직항로가 운영되고 있기는 하지만 서울에서 연결은 그다지 쉽지 않다. 수도 탈린에서 수시로 운행하는 버스를 타면 2시간 반이면 타르투에 도달한다. 그 외 유로라인( Euroline)이나 에코라인(Ecoline) 등 유럽 국제버스를 이용하면 유럽 대도시에서 연결이 아주 수월하며, 리가에서는 버스로 대략 4시간 반이 걸린다. 철도는 탈린과 몇몇 지방도시를 연결하는 노선이 있을 뿐, 국제노선은 전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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