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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일본

일본 오사카 : 상인들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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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가장 긴 상점가, 덴진바시 시장

오사카가 진정한 상업도시로서 가지는 면모는 ‘시장’에 가면 바로 볼 수 있다. 대형할인마트에 전통시장이 밀리는 건 오사카도 마찬가지. 그에 대한 갖가지 다양한 아이디어들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일본에서 가장 긴 상점가인 ‘덴진바시 시장’이다. 오오강에 연결된 덴진바시에서 시작하여 남북으로 2.6km. 걸을 수 없을 정도로 긴 것은 아니지만 걷고 나면 괜히 뿌듯할 만한 거리다. 그것을 장점으로 내세워 덴진바시에서 만든 제도가 바로 완보상장. 오사카 덴만구 사무소에서 증명서를 받아 완주 후 Aloyon 케이크점에 제출하면 완보상장으로 교환해준다. 물론 반대방향 완주도 가능하다. 이곳에 시장이 형성된 이유는 오사카 덴만구 때문이었다. 이곳에 참배하러 오는 사람들을 위해 열린 가게들이 모여 시장이 된 것이다. 시인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학문의 신으로 모시는 학문의 신사인 이곳은 947년에 세워졌다. 이곳에서 매년 열리는 마츠리도 유명하다. 일곱 개의 번지로 나누어진 상가는 제각각 다른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식료품, 잡화, 의료품, 찻집 등 600여 개의 점포가 자리 잡고 있는데, 이외에도 ‘덴산 오카게칸’이라 하여 프리마켓을 하거나 전시를 하거나 장사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공간을 따로 마련해두고 있다.

상업도시로 꽃 피다, 오사카성

오사카가 상업도시로 활발하게 꽃 피게 된 데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의 역할이 지대하다. 우리에게는 임진왜란의 주범으로 미움받는 인물이지만, 오사카에서는 거의 신으로 추앙받으며 사랑받고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당시 천황이 있는 교토로 집중되어있던 경제력을 오사카로 가지고 오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상인의 힘을 믿었고, 전국의 유명하다는 상인들을 모두 오사카로 불러들였다. 교토의 후시미 상인, 오우미 상인, 오사카의 히라노 상인, 사카이의 사카이 상인들은 도요토미가 마련해준 성 아래 동네, 현재의 추오구 혼마치도오리 지역으로 집단이주했다. 그곳을 ‘센바’라 칭했는데, 그 뜻은 ‘선착장’이다. 운하를 물류에 적절히 이용할 수 있는 지리적 조건 덕분에 상인들은 그곳에서 전국의 시장을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

오사카의 상징으로 일컬어지는 오사카성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지었다. 1583년, 히데요시는 혼간지 절터에 거대하고 호화로운 성을 축성하기 시작했다. 당시는 대단한 규모로 눈길을 끌었지만, 현재 이곳은 히데요시가 지었던 성의 5분의 1에 불과하다. 여러 차례의 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의 공습으로 부서지고 재건하기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이곳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망과 몰락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그는 오사카를 중심으로 하여 전국시대를 끝내고 일본을 통일했다. 그가 죽은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가문을 멸망시키는데, 오사카성은 마지막 남은 후손 히데요리가 끝까지 버텼던 곳이기도 하다.

1615년 오사카성을 함락시킨 ‘오사카 여름전투’는 현재 오사카 성에 미니어처로 재현되어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 후 오사카성을 고쳐 지었으나 원래의 호화로움을 재현할 생각은 없었다. 정권을 잡게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사카를 떠나 도쿄(당시 에도)를 거점으로 삼았다. 그 바람에, 일본의 정치, 경제의 중심은 도쿄로 옮겨가고 오사카는 그 위세 당당했던 지위를 잃게 되었다. 지금도 오사카의 상인들이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무척 싫어하는 것은 그 까닭이다.


오사카성의 전경.

상혼이 발명을 낳다, 겐로쿠 회전초밥

필요는 발명을 낳는다. 마찬가지로, 투철한 상혼도 발명을 낳는다. 저렴하게 스시를 즐길 수 있는 회전초밥집은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여기저기 볼 수 있지만, 처음 발명된 것은 1958년이었다.

겐로쿠 회전초밥의 전단지. 회전초밥은 스시의 대중화와 세계화에 큰 기여를 했다.


직접 컨베이어벨트에서 접시를 집어 먹는 회전초밥 시스템을 발명한 것은 오사카의 시라이시 요시아키. 공장지대인 동오사카에서 작은 스시집을 운영하던 그는 혼자서 여러 손님들을 대접하기가 어려운데다 사람을 고용하자니 인건비가 들어 스시 단가가 높아지는 것을 걱정하던 차에 우연히 아사히 맥주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를 보게 된다.


컨베이어 시스템을 초밥집에 도입하겠다는 아이디어는 괜찮았지만, 좁은 초밥집에서 수월하게 돌아가는 컨베이어벨트를 만드는 것은 쉽지 않았다. 5년간 디자인과 초밥이 돌아가는 속도 등을 연구한 끝에 그는 1958년 오사카의 겐로쿠 스시에 처음 이 시스템을 도입하였다. 그에 따르면, 회전초밥이 돌아가는 이상적인 속도는 초속 8cm라 한다. 방향도 중요하다. 오른손에는 젓가락을 들고 있으니 접시를 잡는 손은 왼손일 수밖에. 그러므로 컨베이어벨트는 시계방향으로 돌아야 했다. 섬세한 관찰이 내린 결론이었다.


이 생경한 기계는 오사카 만국박람회에 선을 보인 뒤 1970년대에 대히트를 하게 된다. 첫 번째 초밥집을 낸 2년 뒤에 도톤보리에 2호점을 낸 그는 그 기세를 몰아 몇 년 후 일본 전국에 240여 개의 지점을 내는 기염을 토했다. 후에 시라이시 요시아키는 로봇이 스시를 서빙하는 시스템을 발명하기도 하였으나 아쉽게도 이는 상업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쌀창고들로 가득찬 섬, 나카노시마.

나카노시마는 오사카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는, 길이 약 3.5km, 면적 약 50ha의 섬이다. 오사카를 가로지르는 도우지마강(堂島川)과 도사보리강(土佐堀川) 사이에 나카노시마가 있다. 이 작은 섬은 현재 도심 속의 오아시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으나, 1600년, 에도시대에는 쌀시장으로 유명했다. 당시 이 섬은 각 지방의 다이묘(大名)가 지은 창고 딸린 저택인 구라야시키(倉屋敷)로 가득 차 있었다.

이곳에 쌀시장이 자리 잡은 것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만든 시스템 덕분이었다. 반란의 기미가 있는 번주들을 확실하게 휘어잡기 위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국의 쌀을 일단 한 곳에 모았다가 다시 분배했다. 식량을 통제하면 번주들도 통제되리라 믿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여 모인 쌀이 부려지는 곳이 바로 오사카와 도쿄였고, 오사카 중에서도 나카노시마였다.

지방의 번주들이 세금으로 내는 연공미들은 모두 이곳으로 모였다. 각 지방의 번이 이곳에 설치한 창고의 수는 한창 때인 19세기 전반에는 120개가 훌쩍 넘었다. 쌀 생산량이 적어 인구에 비해 돌아가는 쌀의 양이 부족하기는 했지만, 추수 때가 되면 이곳은 쌀이 넘쳐났다. 수용할 범위를 넘어서는 쌀들은 야외에 방치되었다가 썩기도 하였으므로 그때쯤에는 도매상과 생산자들은 흥정에 여념이 없었다. 그 때문에 생긴 독특한 시스템이 바로 깃발신호다. 적당한 간격으로 늘어선 깃발을 향해 빨리 오라거나 늦게 오라는 신호를 보내면, 깃발들은 봉화처럼 차례차례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 깃발을 보며 번주들은 배의 속도를 조절했다.


옛 나카노시마 풍경.

갈대가 우거져 있는 버려진 땅이었던 나카노시마에 제방을 쌓아 개발한 것은 바로 전설적인 상인 요도야 조안이었다. 목재상이었던 요도야 조안은 도쿠가와에게서 쌀시장의 독점권을 얻어 쌀시장을 일으킨 뒤, 그 노하우를 활용하여 오사카 각지에 다양한 상품 시장을 세웠다.

상인들이 세운 교육기관, 회덕당

중건 당시의 회덕당 모습.


오사카의 상인들은 눈앞의 이문에만 급급한 ‘장사치’가 아니었다. 그들은 1724년, 사재를 털어서 ‘회덕당’이라는 교육기관을 세우며 장기적으로 앞날을 내다보아야 한다는 신념을 구체화했다. 설립자는 다섯 명의 상인이었다. 미쓰보시야 타케에몬, 도묘지야 키치에몬, 후나바시야 시로우에몬, 비젠야 키치베에, 고노이케 마타시로. 그들은 작은 서당형태의 교육기관만이 있는 오사카에 상당한 규모의 교육기관을 세워 미래를 준비했다.


그들이 회덕당을 세우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에도로 올라가 다섯 달을 기다리며 허가를 얻은 그들은 오사카의 도묘지 절 자리에 가로 20m, 세로 36m 규모의 번듯한 학교를 세우는 데 성공한다.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입학이 가능했으며, 교실에서는 모두가 평등한 대우를 받았다. 신분제도가 엄격했던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학파와 학설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학풍을 바탕으로 합리적인 사고를 중요시하고 체계적이고 실증적인 교육에 집중한 회덕당은 이후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회덕당은 146년 뒤인 1869년에 문을 닫았다. 그러나 50년 후인 1916년 [재단법인 회덕당기념회]의 주도 하에 시민강좌의 형태로 다시 문을 열게 된다. 이 또한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파괴되었으나, 1931년 일본의 여섯 번째 제국대학으로 문을 연 오사카 대학의 기원이 된다. 1949년, 회덕당의 모든 서적과 자료는 오사카 대학에 기부되었다. 현재 오사카 대학 문학부에 ‘회덕당 센터’가 자리 잡고 있는데 현재에도 여러 기업들의 지원을 받아 다양한 주제로 연간 60회 정도의 세미나를 열고 있다. 오사카 상인의 전통은 이렇듯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사회로 환원하다, 산토리 미술관

오사카의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기업들에 견주어보면, 산토리는 내세울 게 별로 없을지 모른다. 1899년 창업했으니 백 년은 넘었지만 오사카에 백 년 넘은 기업이 한둘이던가. 하지만 산토리는 적극적인 사회환원으로 그 이름을 선명하게 남겼다. 지금도 일본 곳곳에는 ‘산토리’의 이름이 휘황하다.


1888년 위스키 수입상으로 처음 문을 열었을 때의 이름은 ‘도리이 상점’이었다. 약품도매상이던 도리이 신지로는 한동안 위스키 수입을 병행하다가 1906년 고토부키야 양주점으로 상호를 변경하면서 포도주를 생산, 판매하기 시작한다. 포도주의 성공은 국산 위스키에 대한 꿈을 불러 일으켰다 1921년 큰 마음 먹고 위스키 증류소를 만들었으나 위스키의 자체생산은 쉽지만은 않았다. 지난한 과정을 거쳐 1937년에 ‘가쿠빙’을 출시, 인기를 모으면서 일본은 국내에서 생산된 위스키를 갖게 되었다. 현재 산토리는 위스키와 와인뿐 아니라 맥주, 소주, 식품, 의약, 외식산업 등 다양한 방면으로 사업을 펼쳐가고 있다.


산토리의 이름을 ‘위스키’보다 ‘미술관’으로 먼저 접한 이들도 있으리라. 창업 70주년을 기념하여 1969년 만든 산토리홀도 유명하지만, 건축가 안도 타다오가 설계한 바닷가의 미술관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산토리사는 관청을 설득하여 공공대지였던 오사카 남항의 뎀포잔을 시민공간으로 바꾸어냈다. 1994년에 완공된 이 미술관은 전시공간뿐 아니라 아이맥스 영화관과 스카이라운지 레스토랑으로 이루어져 복합문화공간의 역할을 자임한다. 이외에도 도리이 음악상, 산토리 학술상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를 육성하고 지원하려는 산토리의 활동은 계속되고 있다.


1922년에 나온 산토리의 아카다마 포트 와인 광고 포스터. 일본 최초의 누드 광고 포스터.

시텐노오지 절을 지은 가장 오래된 기업, 공고구미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은 어디에 있을까? 오사카에 있다. 서양에서 가장 오래된 회사는 이탈리아의 금세공회사인 토리니 피렌체. 1369년에 창업하여 약 7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공고구미’의 역사는 그보다 훨씬 더 장구하다. 얼마나 오래되었길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으로 이름을 떨치는 걸까? 무려 1400여 년 전, 586년에 창업했다. 창업자는 누구일까? 놀랍게도, 우리나라 사람이었다. 당시에는 백제사람. 쇼토쿠 태자의 초청으로 백제에서 건너온 장인이다.

20세기 초반 공고구미의 모습.


쇼토쿠 태자가 머나먼 백제에서 큰 절을 지을 수 있는 기술을 가진 장인을 초청하게 된 이유는 전설로 전해 내려온다. 당시 일본에서는 불교를 받아들일 것인가 배척할 것인가를 두고 대대적인 전쟁이 벌어졌다. 무려 48년에 걸친 오랜 ‘불교전쟁(538~586)’ 동안 불교의 편에 서서 싸운 쇼토쿠 태자는 그만 적들에게 포위되어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태자는 “저를 살려주시면 큰 절을 짓겠습니다”라고 부처에게 애절하게 기도를 올리는데, 놀랍게도 그가 기대 서 있던 고목이 반으로 쫙 갈라지면서 그를 감추어주었다. 전쟁은 곧 불교의 승리로 끝났고, 쇼토쿠 태자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큰 절을 지을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당시 일본에는 큰 절을 지을 수 있는 기술자가 없었다. 결국, 백제에서 네 명의 장인과 인부들이 건너오게 된 것이다.

그중 한 명인 유중광은 일본에 와서 쇼토쿠 태자에게 직접 ‘공고’라는 성을 하사받고 ‘공고 시게미쓰’가 되었다. 그는 오사카에서 가장 큰 절인 시텐노오지를 짓고, “앞으로 시텐노오지의 보수 관리는 유중광과 그의 후손들이 맡으라”는 쇼토쿠 태자의 명령에 따라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역할을 맡는 회사, ‘공고구미’를 설립했다.


그렇게 세워진 공고구미는 사찰전문 건축회사이다. 1995년 고베에서 있었던 심각한 대지진 때도 공고구미가 세운 절은 멀쩡했다며 대단히 신뢰받는 기업으로 오랜 세월 유지해왔으나, 지나친 확장노선으로 2006년 파산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기업은 해체위기를 면했지만, 실질적으로 공고구미의 전통은 끊긴 셈. 그러나 건설쪽 경영권과 종업원 대부분이 남아있으니, 백제인이 세운 공고구미의 역사는 오사카에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슬쩍 믿어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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