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캘리포니아 해안도로

17마일 드라이브의 해안 절벽에 앉아 있는 티베트 여승
17마일 드라이브의 해안 절벽에 앉아 있는 티베트 여승. 한참 있다가 바다를 배경으로 셀카를 찍었다./변희원 기자

"빅 서(Big Sur)는 사람들이 수년 전에 꿈꾼 캘리포니아이자 발보아(최초로 태평양을 본 유럽인)가 다리엔의 정상에서 바라본 태평양이고, 신이 처음에 만들려던 세상의 모습이다."

소설 '북회귀선'의 작가 헨리 밀러는 뉴욕뿐만 아니라 파리에서도 살았고, 기행 산문도 출간할 정도로 여행을 많이 다녔다. 그가 1944년, 50대에 들어서 정주한 곳이 바로 샌프란시스코 남쪽 태평양에 면한 작은 마을 빅 서였다. 구겨진 흑백사진 같은 글을 쓰는 작가가 상큼한 오렌지 같은 캘리포니아에 제 발로 찾아가 살다니.

샌프란시스코 바로 아래 있는 몬터레이가 빅 서로 향하는 바닷길의 시작이었다. 한때 정어리 어업과 생선 통조림 공장이 번성했던 어촌이었다. 존 스타인벡이 이 마을을 배경으로 소설을 쓰는 덕분에 이 마을은 본업이 망한 뒤에 관광업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일명 통조림 공장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는 '캐너리 로(Cannery Row)'는 레스토랑과 카페, 기념품 가게로 가득 찼고, 그 길 끝에 몬테레이만(灣) 수족관(http://www.mon tereybayaquarium.org)이 있다. 국내의 유명 수족관에 비해서도 규모는 작았지만, 수달이나 해파리 등으로 차별화를 한 곳이다. 정어리 떼가 반짝반짝 빛을 내며 지나가는 모습을 한참 바라보고 있자면, 고요한 수면 아래로 걸어 들어간 것 같은 기분이다. 예나 지금이나 한 마을을 먹여 살린 정어리가 퍽 대단하게 느껴진 순간이었다.

캘리포니아
(위)빅 서의 협곡을 잇는 빅스비 다리./ 데스밸리의 ‘자브리스키’. ‘죽음의 계곡’보다는 ‘외계의 분지’라는 이름이 더 잘 어울릴 것 같다. 팀 버튼의 ‘혹성탈출’(2001)을 이곳에서 촬영했다. /캘리포니아 관광청 제공, 변희원 기자

몬테레이에서 하루를 보낸 뒤 17마일 드라이브의 시작인 퍼시픽 그로브에 들어서자마자 밀러의 선택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해가 모습을 드러내기 직전, 어두컴컴한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도로 한가운데 차를 잠깐 세울 수밖에 없었다. 하늘이나 땅이나 바다나 모두 잿빛으로 뒤섞인 가운데, 그나마 파도 소리로 간신히 그 경계를 알 수 있었다. 소리의 간격과 크기는 제멋대로였다. 함부로 발을 내디뎠다간 파도에 휩쓸려 갈지도 모를 것 같았다. 안개와 파도가 뒤섞여서 공기가 축축했다.

10여 분 뒤 해가 걷히자 해무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도로를 한가운데 두고 바다 반대편으로 초록색 잔디가 드러났다. 골프를 치는 이들이라면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는 페블비치 골프장. 드라이브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17마일 드라이브의 심장이라는 론 사이프러스(Lone Cypress)에 다다랐다. 절벽 끝에 나무 한 그루 서 있는 그 모습이 동양의 산수화에서 많이 본 듯 익숙했다. 때마침 서부 해안 도로를 따라 여행을 하던 티베트 여승들이 절벽에 모여들어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바다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그들은 곧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주섬주섬 꺼내 들어 기자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17마일 드라이브가 끝나는 캐멀(Carmel)은 영화감독이자 배우인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시장을 지낸 도시로 잘 알려져 있다. 건물 높이와 모양, 간판 색까지 규제를 하는 바람에 동화 속 마을 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다. 획일화된 '시골스러움'에 질릴 무렵, 캐멀 비치가 눈에 들어왔다. 여벌의 옷만 있었다면 신발을 집어던지고 바다에 뛰어들어가고 싶었다. 수평선 위에 걸린 해에 바다가 반짝반짝 빛나고, 모래사장에서는 어린아이들과 개가 뛰어놀았다. 바닷물과 모래사장의 열기가 식을 무렵 아이들은 엄마 손에 이끌려 해변을 나왔다. 대신 손을 잡고 걷는 남녀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캐멀을 떠나면 바로 빅스비 다리를 건너게 된다. 빅서(Big Sur) 캐멀에서 샌시미언에 이르는 145㎞ 구간이다. 도로 왼쪽에는 깎아지를 듯한 산이 있고 오른쪽에는 하얀 포말을 일으키는 바다가 있는 길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구불구불하고 펼쳐져 있다. 17마일 드라이브가 한 폭의 동양화라면 이곳은 로드무비에 더 가깝다. 길과 바다, 하늘이 모두 역동적이다. 차 안에 앉아서도 손을 뻗으면 바다에 닿을 것만 같다. 해안도로를 달리는 자동차가 나오는 광고를 상상하면 그게 딱 이곳의 풍경이다.

해안도로 여행은 베이커스 필드에서 끝이 났다. 바닷길을 사흘 동안 내달린 끝에 다다른 곳은 라스베이거스로 이어지는 사막이 있는 데스밸리. 연 강수량이 50㎜밖에 안 돼서 '죽음의 계곡'이란다. 이날 데스밸리는 섭씨 40도를 넘나들었다. 차에서 내리자 땅의 열기가 뺨까지 닿았다. 가까이엔 이미 말라붙다 못해 곧 불이라도 붙을 것 같은 메스키트 나무가, 멀리서는 사구(砂丘)가 보였다. '스타워즈'나 '마션' 같은 영화에서 익히 봤던 외계 행성이나 '매드맥스'의 황폐해진 지구의 모습이 딱 이랬다. 도로에서 고온과 탈수를 주의하란 팻말을 보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가져온 물도 이미 온수가 됐다. 바다를 더 열심히 볼 걸 그랬나.

인간의 몸과 마음이란 게 요망하기가 한여름 날씨 같다. 비 올 것 같으면 해가 나고, 맑거니 싶으면 소나기가 내리는 것처럼. "숨도 못 쉬겠다"면서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차에서 나오려고 하지도 않다가 이내 사막의 공기를 "훈훈하다"고 표현할 정도로 적응이 됐다. 데스밸리의 절경 중 하나로 꼽히는 자브리스키에 도착했을 땐 비탈길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붉은 벨벳 천을 마음대로 구겨서 주름을 만들어놓은 것 같은 관능적인 풍광에 흥분이 됐다.

헨리 밀러는 결코 틀리지 않았다. 물의 길과 흙의 길이 맞닿은 이곳은 신이 처음에 만들려던 세상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성(聖)과 속(俗)이 뒤섞인 이 초현실적인 장소야말로 밀러에게 더할 나위 없이 어울렸다. 일상에서의 탈출을 꿈꾸는 모든 사람에게 그럴 것이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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